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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가수 이용복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본문

요즘 사람들이 기억할 만한 가수로‘아이 져스트 콜 투세이 아이러브유(I JUST CALL TO SAY, I LOVE YO)’를 불렀던 스티비 원더라는 시각장애우 가수를 기억할 것이다. 까만 썬글라스를 끼고 몇 갈래로 딴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온몸을 흔들며 열창하던 가수였다. 피아노 앞에 앉아 제 흥에 겨워 심하게 몸을 흔드는 데도 그의 손가락에 닿는 건반들은 신기할 만큼 딱딱 들어맞았다. 거기다 천진난만해 보일 정도로 밝게 웃으며 노래부르는 모습은 보는 이들까지 즐겁게 만들곤 했다. 한참 스티비 원더의 노래가 인기 있을 무렵, 그의 노래는 ‘즐겁게 듣는 노래’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시각장애우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팝스타로 성장할 수 있는 외국의 상황을 부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장애우를 만나기도 힘든데 하물며 TV에서 보는 연애인 중에 장애우가 있다는 건 우리에겐 너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스티비 원더가 나올 때마다 장애우들은 즐거움과 부러움을 함께 느끼곤 했다
잠깐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생각해본다. 우리에게는 스티비 원더 같은 가수가 없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요즘 TV에 나오는 연애인 중에는 없다. 그러나 30대 중반을 넘긴 사람이면 어렴풋이라도 기억하는 노래가 있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쫒던 어린 시절∼’ 지금 이 순간, ‘아! 그 노래’하고 외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70년대 TV를 주름잡았던 가수 이용복(52)의 대표곡이 바로 ‘어린시절’이다. 지금과는 달리 연애인들도 썬그라스를 끼고 TV에 나오는 일이 흔하지 않던 시절에 가수 이용복의 상징은 새까만 썬그라스였다. 연애인이 멋 내려고 쓴 게 아니라 가수 이용복은 시각장애우였기 때문에 썬그라스를 썼다.

오기로 뛰다가 전봇대에 앞니가 부러지기도
이용복씨는 후천성 시각장애우다. 3살 때 마루에서 떨어지면서 어딜 어떻게 부딪혔는지 왼쪽 눈에 시력을 잃어버렸고, 8살 때 썰매를 지치던 꼬챙이에 찔려 오른쪽 시력마저 잃어버렸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라 그런지 이용복씨는 그때의 느낌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이용복씨 앞에서 뻐기는 친구들에게 얼토당토않은 오기를 부렸던 기억이 있을 뿐이다. 친구더러 잡아보라고 소리치고는 무조건 뛰는 것이다. 그러다 넘어지거나 전봇대에 부딪혀 앞니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에야 스스로 생각해도 오기가 지나쳤다고 말하지만 한참 뛰어 놀 나이에 앞을 볼 수 없다는 답답함을 어린 나이엔 그렇게 풀지 않나 싶다. 친구들이 앞못본다고 따돌리면 앞 뒤 안가리고, 위험한 줄도 모르고 달리기 시합을 하는 오기를 부리면서 말이다.
또 하나 이용복씨가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면 애뜻하게 떠올리는 것이 있다.  따돌림당해 외톨이가 되면 그가 찾아가곤 했던 친구, 바로 라디오다. 라디오가 있었기에 그는 어린 시절이 그렇게 불행하지만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어린 이용복에게 라디오는 노래하자고 부르는 친구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한 번 들은 노래는 신기하게도 기억하고 따라 부를 수 있었고, 그래서 라디오를 듣고 있다보면 기억해야 할 노래, 따라 부를 노래들로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하도 노래를 잘 따라 부르니까 아버님이 여기저기 자랑을 하셨어요. 천재라구요. 정말 곧잘 따라 부른곤 해서 어른들이 신동이라고 그랬는데... 한번은 아는 누나가 나한테 팝송을 들려주더니 따라 해보라는 거예요. 그건 못하겠더라구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때 그 누나가 들려줬던 노래가 ‘러브 미 텐더’였다고 기억하는 걸 보면 이용복씨가 음악에 대해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건 사실인 것 같다.

안마사의 길이 싫어서 음악의 길 선택
이용복 씨가 음악을 자신의 인생과 함께 진지하게 생각한 건 ‘서울맹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초등학교라고 들어갔는데 동급생의 나이가 또래부터 20대, 30대까지 천차만별이었다.
“당시만 해도 가족 중에 시각장애우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는 집이 많았어요. 그래서 집안에만 데리고 있다가 20살이 넘어서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는 경우가 많았죠. 같은 반에 20살 먹은 사람도 있고, 그게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몰라요”그런데 그가 받은 충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지금도 시각장애우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다양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그때는 오죽했겠어요. 학교에서는 모두 안마와 지압, 침술 같은 걸 배웠는데, 전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더군요. 졸업을 앞둔 나이 많은 선배들이 진로문제로 고민하고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 걸 보면서 저도 어린 나이지만 고민 하게됐죠. 안마사는 적성에 안 맞는 것 같고, 비전도 없는 것 같았으니까요. 결국 좋아하던 음악을 전문적으로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당시에 출판사를 하던 아버지께 기타를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한 것이 초등학교 5학년 때다.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하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다. 물론 집에서는 앞도 못 보는 놈이 음악을 한다고 하니까 어이없어 하면서 기타를 사주지 않았다.
문제는 장비만이 아니었다. 막상 음악인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을 하긴 했지만 음악을 배우고 연습할 만한 마땅한 시설도, 기회도 부족했다. 학교에 피아노가 있긴 했지만 따로 돈을 지불한 사람들에게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피아노 값을 낼 수 없었던 이용복씨는 피아노가 비는 시간만 기다렸다가 잽싸게 달려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언제 나타났는지 생활부장이나 음악부장이 와서 뚜껑을 닫아버리기가 일수였다.
음악시간에 받았던 충격도 만만치 않았다. 평소 주위 사람들로부터 ‘정신이 좋아서 한번만 들어도 기억한다’는 소리를 곧잘 들었기 때문에 이용복씨는 자신이 음악을 잘하는 줄 알았단다. 그런데 학교에 가니까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음악인이 많더라는 것이다.
“한번은 음악시간에 선생님이 ‘나귀타고’라는 노래를 계명으로 해 볼 사람, 손들어보라는 거에요 전 계명이 뭔 줄도 몰랐거든요. 그런데 여기저기서 손드는 학생이 많았고 여자아이 하나가 일어나서 평생 처음 들어본 소리로 ‘도미솔도..’하면서 계명으로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정말 충격이었어요. 내가 하는 건 음악도 아니구나 싶더라구요”
그래서 그날로 ‘나귀타고’를 계명으로 연습했다. 아버지가 출장 다녀오시면서 사다 준 하모니카로 음의 높낮이를 익혀가면서 하루를 꼬박 연습하고 났더니 겨우 계명이 뭔지 알게됐다고 한다. 하모니카로 불고 귀로 들으면서 혼자서 계명을 익힌 것이다.
“그렇게 몇 곡을 더하고 나니까 비로소 자신감이 생기더라구요.”

상급생과 함께 ‘캑터스’라는 밴드를 만들어서 본격적으로 활동
“평상시에는 기타가 없었으니까 상자에 고무줄을 걸쳐서 기타처럼 연습했어요. 취침시간 이후에는 상급생의 기타를 몰래 가져다가 벽장 속에 들어가서 치다가 혼나기도 많이 혼났구요.”
이용복씨는 중3이 되면서 상급생과 함께 선인장이라는 의미의 ‘캑터스’ 밴드를 결성했다. 이용복씨가 맡았던 악기는 일렉트로닉 기타로, 외형이 엉망인 것을 3천원에 구입해서 정식 밴드의 멤버가 된 것이다. 기타 3개와 드럼 1개로, 이렇게 4명이 모여 밴드를 결성하고 처음 데뷔 무대를 가진 것이 고등학교 1학년때다  건설회관에서 열린 ‘장애인의 날’행사에서 였는데 반응이 좋았다. 덕분에 밤마다 연습한다고 구박하시던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음악활동을 계기로 아르바이트를 뛰기도 했다. 주로 생음악을 연주하던 업소들이었는데 장애우이라면 일단 꺼려하는 곳이 많았다. 그래서 비장애우 친구가 일자리를 알아보고 노래나 연주같은 실직적인 일은 이용복씨가 도맡아서 했다. 다행히 처음 일을 시작한 업소에서는 꽤 좋은 반응을 얻었다. 주인이 이용복씨를 불러 500원 주던 출연료를 700원으로 올려주겠다며 계속 일하라고 했지만, 그것도 한달이 고작이었다.
“당시에는 업소에서 노래를 하려면 연애인 협회에 소속이 돼 있어야 했는데 출연료가 오르고 나서 바로 연애분과에서 조사를 나온 거에요. 학생인데다 협회등록도 안되어 있으니 당연히 업소를 관둬야 했죠”
그 뒤에도 이용복씨는 여기저기 업소를 알아보러 다녔다. 일자리를 얻고 첫무대를 선 다음날 불이 나, 또다시 일할 업소를 찾아야 한 적도 있고 학교에서 알게 돼 관둔 적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시각장애우라고 꺼려하는 업주들도 많아 혼자서 일자리를 알아본다는 건 엄두가 나질 않았다. 실제 일은 이용복씨가 거의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장애우와 이익을 나눠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가게 된 곳이 서울 광교에 있는 태평양 다방이었다. 아르바이트도 관두고 ‘이제 음악활동은 끝이구나’ 싶어서 의기소침해 있는 이용복씨를 친구들이 억지로 무대위로 올려보낸 것이다. 일단 무대에 서면 이용복씨는 프로였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 사람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고 뜻밖에 행운도 함께 다가왔다. 다방에서 이용복씨의 노래를 듣고 있던 작곡가가 이용복씨를 만나자며 연락처를 건 낸 것이다. 이 작곡가와의 만남을 계기로 이용복씨는 본격적인 프로음악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장애인이라 올해의 가수대상에서 제외되기도
작곡가는 이용복씨를 데리고 처음 간 곳이 스튜디오였다. 노래 2곡을 부르게 하더니 녹음을 한 후 그 날부터 스폰서를 잡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녔다. 스폰서를 잡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일이 쉽게 풀리려고 그러나보다 했는데...문제는 사진촬영이었다. 유명한 가수의 앨범도 아니고 대부분이 번안가요들을 녹음해 만드는 음반이라서 업소에서 촬영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어찌됐든 음반에 들어갈 타이틀 사진이라 배경이 중요했는데 무대가 갖춰진 마땅한 장소가 나타나질 않았다. 이용복씨가 시각장애우라 업주들이 장소 대여를 꺼려했던 것이다.
“당시 ‘위백’이라는 중국집에 무대가 있어서 타이틀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제가 장애인이라고 안된다는 거에요. 음식점이라 장애우는 꺼려진다는 거죠. 어디 한 두번 당하는 일인가요. 결국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업소를 찾을 수 없어서 처음 작곡가를 만났던 태평양 다방에서 부탁해서 겨우 사진을 찍었죠”
이용복씨의 히트곡 중에는 번안가요들이 많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노래 중에는 세계적으로 이름이 나 있던 ‘동경가요제’나 ‘산레모 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곡들도 있다. ‘3월 4일생’ ‘달맞이꽃’ ‘친구’ ‘진달래 꽃’ 등이 대표적인 곡들이다. 특히 ‘진달래 꽃’은 이용복씨의 대표작으로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용복씨가 정식 가수로 데뷔한 건 그의 나이 18살 때이다. 이제부터 가수로써의 이용복씨의 인생은 새로 시작된 것이다. 무려 20개가 넘는 음반을 내는 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히트곡도 많고 여기저기서 대상과 신인가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처음 가수로써 대상을 받은 건 1971년에 기성가수를 대상으로 열렸던 ‘플레이보이 컵’이라는 대회였다.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용복씨가 신인가수라는 이유로 부담스럽다며 재투표까지 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들리는 말로 이날 대회에 왔던 유명가수 중에는 신인이 대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분 나빠, 가방을 싸 돌아간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용복씨에게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1974년에 ‘올해의 가수대상’을 뽑을 때 일이다. 대상으로 이용복씨가 뽑혔는데 방송사 측에서 일방적으로 결과를 엎어버린 것이다. 당시 칼라 텔레비젼이 나오면서 가수들이 노래 프로그램 외에도 각종 프로그램에  나가는 일이 많아졌는데 시각장애우가 올해의 가수대상에 뽑히면 곤란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음해에 가수대상을 받은 사람이 나가야 할 프로그램에 이용복씨는 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가수가 오락프로나 게임프로에 출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아무리 노래를 잘해도 장애우를 뽑으면 장사가 안된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결국 올해의 가수대상을 못받고 말았다. 하지만 1978년까지 이용복씨는 잘 나가는 가수였다. 74년에 다른 방송사에서 신인가수상과 10대 가수상을 받았고, ‘어린시절’이라는 노래를 주제가로 해서 영화에도 직접 출현했다. 가수 이용복의 전성시대였던 것이다.
“제가 무명인이었을 때는 사진촬영하기도 힘들었잖아요. 다들 장애우라고 꺼려했으니까요. 그런데 웃긴 건, 제가 유명해지고 나니까 다들 저를 무대에 세우고 싶어했다는 거에요. 그래서 무명인 시절엔 들어가 볼 엄두도 못 내던 극장에 다른 가수들보다 제가 더 많이 섰고 공연도 제일 많이 했어요”

칼라 텔레비젼에 밀려, 사업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해
이용복씨의 마지막 앨범은 78년에 나왔던 <아낙>이라는 앨범이다. 칼라 텔레비젼이 나오고도 1978년까지는 이용복씨의 인기는 여전했다. 그러나 그 영향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출연의뢰도 줄기 시작했고 이용복씨 자신도 무대를 멀리하게 된 것이다. 때마침 조심스레 시작한 스튜디오 사업이 호황기에 접어들어 이용복씨는 1984년부터 본격적인 스튜디오 사업을 시작했다.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을 계기로 스튜디오 사업이 자기 자리를 잡았고 이용복씨가 운영하던 ‘강남 스튜디오’에서 많은 가수들이 음반을 녹음했다. 벗님들, 김수철, 부활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음악인들이 이용복씨의 스튜디오를 거쳐간 것이다.
“스튜디오 운영만이 아니라, 제가 직접 세션으로 참여해서 녹음작업도 했어요. 정말 재밌더라구요. 하지만 노래를 잊은 건 아니었어요. 방송출현은 하지 않았지만, 85년도는 미국 18개 주를 이동하면서 순회공연도 했는걸요. 가스펠 테잎도 냈거니와 라이브 무대에도 꾸준하게 섰거든요. 간혹 ‘이용복이 은퇴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방송에 안나갔을 뿐 계속 음악활동은 했는걸요”
지금 이용복씨는 양평에 있는 ‘비행기 카페’를 인수해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아직도 음악을 잊은 것은 아니다. 매일 카페를 찾는 손님들을 위해 노래도 하고 카페 밑에 마련한 개인 스튜디오에서 음반제작을 위한 작업도 진행중이다. 4월경에는 아내가 작사하고 자신이 작곡한 ‘아이야’라는 타이틀곡으로 음반도 낼 예정이다.
“전 18년 전부터 선배님을 알았는데요 정말 대단한 분이에요 제가 기억하는 건 12줄 기타를 메고 노래하시던 모습인데, 보통 6줄기타를 쓰거든요. 12줄은 음폭이 넓어서 쉽게 사용하는 악기는 아닌데도 선배님은 독학으로 악기를 다 배우셨거든요. 피아노, 섹스폰, 기타, 녹음장비까지....앞을 못보시니까 다 소리로 듣고 외우시더라구요. 노래를 할 때도 점자악보를 만들어서 이용하기도 하지만 모든 음을 귀로 듣고 암기를 하세요”
이용복씨의 카페에서 노래하는 후배 가수 김시용(38)씨의 말이다.

시각장애 학생을 위해 음악교수도 소개해 줘
97년 서울맹학교 졸업한 장유경양이 서울예전 실용음악과에 입학하려다 어려움을 겪은 일이 있었다. 전국 맹학교 성가경연대회에서 참가팀을 1등으로 이끌 만큼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입학을 거절당한 것이다. 시각장애우가 다니기에 계단이 너무 많고, 악보 보는 것이 힘들어 실기수업에 지장이 있다고 꺼려했다. 그 일로 이용복씨는 맹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장양이 음악을 하고 싶어하는데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용복씨는 아는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장유경양을 소개시켜 줬다고 한다. 그는 누구에게나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장양의 이야기를 듣고 선뜻 연락을 취한 것이다.
“그 여학생을 만난 적은 없어요. 전화로 노래하는 걸 들려줘서 들은 적은 있는데, 잘 하더라구요 그래서 아는 교수한테 연락을 해서 소개시켜줬죠. 인생을 사는데 어떻게 해서든 도전하면서 살자고 생각해왔거든요. ‘내가 노력해야 남들도 도와준다.’ ‘자리만 되면 나머진 내가 하겠다.’ ‘장애우들도 계기를 마련해 주면 스스로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으면서 살아왔고. 나 역시 그렇게 살아왔거든요. ”
장유경양의 이름을 떠올리며 지금은 졸업해서 어느 회사엔가 들어갔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장양이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장애인 가수 이용복처럼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는 음악인이 돼, 내 인생을 개척하고 싶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하자 이용복씨는 무척 흐뭇해  하는 듯 했다. 자신이 만들어준 계기를 통해 한 장애우 학생이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갔고, 이용복이라는 이름도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뿌듯하게 했을 것이다.

솔직하고, 있는 그대도 살고싶다
가족 관계를 묻자 이용복씨는 부인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용복씨가 부인 김연희(50)씨를 만난 건 73년도다. 가수 활동이 한창이던 시절, 국제전화를 자주 하다가 만난 사이란다. 80년에 결혼한 둘 사이에는 주원, 효원 쌍둥이 아들이 있다.
“아직도 집사람 손을 잡고 누워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느새 새벽 6시가 넘어버려요. 맨날 얼굴보고 사는데도 어쩜 그렇게 할 이야기도 많은지.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면 재밌어요.....요즘은 낮은데서 같이 살자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내가 ‘복지재단이라도 하나 만들까’ 하면 ‘우리 그냥 낮은데서 살자’그래요. 살다보면 만나게 되는 어려운 사람들이나 도우면서 티내지 말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살고 싶다는 마음뿐이에요”
나이에 맞지 않게 순진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그의 표정만큼이나 그의 꿈은 순진해 보인다. 살면서 어려웠던 일이 뭐였냐고 묻는 질문에,
“글쎄요 누구나 다 조금씩은 어렵고...전 별로 어렵게 살지 않았어요. 그냥 노력하면서 살았을 뿐이죠. 인생에 뭔가 크라이막스가 없어서 기사 쓰기 힘들겠죠?”
하며 되려 미안해한다.
이용복씨는 어린시절 시각장애우가 됐고, 차별이나 편견이 지금보다 더 심했을 시절을 살아 온 사람이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의 인생이 결코 쉽지 만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80년대 실력자의 부인이 "저 사람 나오면 보기가 싫다"는 말을 해서 그의 출현이 힘들어 졌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런 시절을 잊은 듯 평안해 보이기만 한다.
“음반에 실린 곡들의 가사는 집사람이 썼어요. 부부싸움하고 나서 쓴 글도 있고, 아이들을 보면서 쓴 글도 있고...., 좋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음반을 낼 생각을 하게 된거지 다시 인기가수가 되려고 시작한 건 아니에요. 이제 나이도 들어서 방송 무리하게 하지 않고 거절도 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집사람 손잡고 여행이나 다니면서 그렇게 살고 싶어요”

글/서현주 객원기자
사진/ 윤정은 사진기자

작성자서현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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