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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이 일이 제 천직입니다"

시각장애우 전화교환원 김종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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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이 일이 제 천직입니다"

-시각장애우 전화교환원 김종율-
 

▲시각장애우전화교환원김종율씨

 

올해 56세인 김종율 씨, 그는 두 눈을 실명한 시각장애우에다 한쪽 팔이 없는 중증의 장애를 가지고 있다. 볼 수 없고, 어떤 일 이라도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팔마저 없고, 학력도 변변하지 못하니 겉으로 보기에 그가 가질 수 있는 직업은 아무것도 없다.
그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가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건 사람들에게 동정을 구하는 일에 한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이런 상식을 멋지게 뒤집었다.
그는 자기 일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는 많은 고생을 했다.
그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시각장애우의 직업 하면 사람들은 안마사나 침술사를 떠올린다. 그리고 드물게는 복채를 받고 미래를 예견해 주는 점술가를 떠올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직종은 시각장애우가 직업을 가졌을 경우에 한한 것이고, 많은 사람들은 전철안이나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구걸하는 시각장애우들의 모습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이런 현실은 우리나라 실정에서 그만큼 시각장애우들이 다양한 직업을 갖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시각장애우들이 가능한 직업이 몇 천 가지에 이른다는데, 유독 우리나라는 시각장애우가 가능한 직업이 눈 씻고 찾아봐도 많지 않다. 하다못해 시각장애우가 충분히 가능한, 일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 전화교환원도 시각장애우가 일하고 있는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전화교환원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요즘 회사나 단체들이 선호하고 있는 전화 자동응답기는 전화를 거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람의 육성 대신 기계가 들려주는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도 기분 나쁘지만 조금만 굼뜨면 번호를 놓치기가 일쑤여서 다시 전화를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그래서 제안하는데 자동응답기 대신 시각장애우를 전화교환원으로 채용하는 것이 어떨는지, 우선 장애우 고용에 모범을 보여야 할 장애우 단체만이라도 전화교환원으로 시각장애우를 채용할 것을 권하고 싶다.
 서두가 길어졌다. 하지만 이번 달에 우리가 만날 시각장애우 김 종율 씨를 만나고 나면 누구나 기자처럼 제안을 하고 싶어질 것이다.
 고용주가 배려를 한다면 시각장애우들이야말로 전화 교환 업무를 잘 해 낼 수 있다. 무려 25년을 한 직장에서 전화교환원으로 근무한 김 종율 씨가 생생한 사례이다.
 안과로 유명한, 서울 종로에 있는 공안과에 전화를 걸면, 자동응답기 대신, 낭랑한 여성 목소리 대신, 투박한 남자 목소리가 전화를 받는다. 모르는 사람들은 공안 과에는 전화교환원이 없구나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몇 번 전화를 걸어도 같은 목소리가 전화를 받는다. 그럴 수밖에, 전화를 받는 남자가 바로 전화교환원이니까.
 올해 56세인 김 종율 씨, 그는 두 눈을 실명한 시각장애우에다 한쪽 팔이 없는 중증의 장애를 가지고 있다. 볼 수 없고, 어떤 일 이라도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팔마저 없고, 학력도 변변하지 못하니 겉으로 보기에 그가 가질 수 있는 직업은 아무것도 없다.
그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가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건 사람들에게 동정을 구하는 일에 한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이런 상식을 멋지게 뒤집었다. 그는 자기 일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직장에 근무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공안과에 전화교환원으로 들어간 것은 지난 1972년이다. 그로부터 25년, 참 오랜 세월이다. 그래서인지 과거를 회상하는 그의 얼굴은 감회에 푹 젖어 있다.
"내 나이 13살 때 폭발물 사고로 장애를 가지게 됐지요. 당시 내가 살던 곳은 경북 문경군 영순면 김영리 라는 마을이었는데, 마을 앞에 내가 있었어요. 그때는 6.25사변 이후여서 터지지 않은 포탄이 지천에 널려 있었어요. 고기를 잡기 위해서 포탄을 분해하다가 포탄이 터져 쥐고 있던 한쪽 손이 날아갔고, 두 눈을 못 보게 됐지요. 그 이후로 제가 볼 수 있는 세상은 암흑뿐이었습니다."
 다소 장황하지만 장애를 가지고 난 후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그가 틈틈이 기록해 둔, 자신의 삶을 회고한 문건으로 대체하기로 한다. 그의 회고는 그가 그의 삶의 은인이라고 표현하는 공 평우 박사를 만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내가 장애를 가지고 난후 집안은 점점 더 가난해 졌고, 가족들은 병신자식 둔 것만이 남부끄럽고, 창피한 일로 여겨서 깊이 숨기고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그런 실정이었다. 이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만나는 사람들은 점쟁이가 되는 법을 배워서 살아가면 될 것이 아니냐고 하였지마는 그것마저 배울 재력이 없었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야 할 지경에 처하게 되자 나는 참으로 막막하였다.
 친구들이 읽어 주는 신문이나 잡지를 통하여 미국의 헬렌켈러 여사 이야기도 들었고, 시각장애우들이 다니는 맹학교라는 것이 있어서 그런 학교를 나오면 자기 직업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나는 그런 곳은 엄청 돈이 많이 있어야 다닐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당시 친구가 읽어준 아리랑이라는 대중 잡지에 실린 공병우 박사님에 관한 기사를 듣게 되었다. 공박사님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타자기를 발명하신 분으로서 권위 있는 안과 박사시며 명사인데 시각장애우를 위하여 타자를 가르쳐 주며 새끼를 꼬는 일이라든가 벽돌을 찍는 일을 가르쳐 주는 맹인 부흥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기사였다. 그러나 나는 팔까지 없으니 거기 간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설령 부딪쳐 보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공박사님이 나와 같이 무용지물의 인간을 받아줄 것인가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자 모든 것을 자포자기하고 수없이 죽으려고 해 보았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미국 같은데서는 시각장애우 여성들이 전화교환원도 되고, 회사비서직도 맡아서 일을 한다는데, 뿐만 아니라 상담원으로도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으면서 차라리 시각장애우가 되더라도 그런 나라에서 되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 집 실정은 시각장애우가 있다는 것이 크나큰 수치로 여겨지는 실정이었고, 이제는 집을 나가든지 죽든지 양단간 결정을 해야 될 입장에 처하게 됐다. 결국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고 집을 떠나니 어디로 갈 것인가.
이 천지 간에 나 홀로 버려진 듯 한 그 느낌, 그 날따라 뒷동산에 뻐꾸기는 왜 그러게 구슬프게 울어대는지, 사람소리, 차소리, 물소리, 그런 소리들이 나와는 관계없는 딴 세상 소리로 느껴졌다.
 발걸음은 휘청휘청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으로 내 몸을 내던지는 심정인데, 그때 아는 마을 동생이 형 어디가느냐? 고 묻기에 너 나와 함께 서울 가지 않을래, 서울 가면 내가 너 좋은 곳에 취직도 시켜주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겠다고 꼬드기자 그 동생이 따라 나섰다. 이때 내 나이 스물 두 살이었다.  그 동생을 의지해서 밤 열차로 고향을 떠나 서울에 도착하였으나 서울 땅에는 아는 사람 하나 없었고, 수중에 돈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공병우 박사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분 주소도 모를뿐더러 설령 찾을 수 있다고 해도 나를 받아 줄 거라고 자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공병우 박사가 운영하는 맹인 부흥원이 아니면 갈 곳이 없는 처지였다. 공병우 박사가 거부하면 죽으리라,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무조건 길가 파출소에 들어가서 안과의사 선생님이시며, 타자기도 발명하시고 불쌍한 시각장애우들을 도와주고 계시는 공 박사 댁이 어디냐고 물어보자 순경들이 수소문하여 당시 청진동에 있던 공병우 타자기 회사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겨우 공병우 박사를 만나기는 했는데…….
 때로는 사람의 일생이 인연에 의해 좌우되기도 한다. 그는 "내가 공병우 박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가 공병우 박사를 만난 후의 이야기는 그의 육성으로 듣기로 한다.
 "공병우 박사를 만나 내 사정 얘기를 했죠. 그런데 공 박사가 난색을 표명했어요. 사정은 이해하고 내가 시각장애우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긴 한데 당신 같이 눈도 못 보고 손도 없는 사람을 도저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난다. 다른 기관을 찾아보라는 거였어요. 그렇지만 나는 다른 기관을 알지도 못하고 이분한테 거절되면 죽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몇 차례에 걸쳐 다시 찾아가서 제발 나를 거두어 달라고 사정했죠. 그렇지만 그때마다 공 박사는 내가 당신 얘기를 듣고 밤새워 연구를 해봤지만 방법이 없다 내가 시각장애들에게 타자를 가르치고 생활 훈련을 시켜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긴 하지만 손까지 없는 경우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거절을 하시는 거였어요. 다급해진 나는 마지막으로 사정을 했어요. 박사님 타자기라는 게 어떤 겁니까, 나 좀 보여 주십시오. 그러자 공 박사가 타자기를 내 손에 쥐어주며 이게 타자기인데 눈은 못 봐도 되지만 두 손은 가져야 쓸 수 있는 기계다. 라고 강조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아 그렇습니까, 나는 한 손으로 해보겠습니다. 배워보겠습니다. 라고 의지를 표명했죠. 그러자 공 박사님이 감동했는지 그럼 한 번 해 봐라 라고 허락을 하시더군요. 그렇게 해서 겨우 맹인 부흥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잠시 설명을 덧붙이자면 당시 서울 성내동에 있던 맹인 부흥원은 지금은 세상에 없는 공병우 박사가 60년대 초에 사재를 털어 설립한 시각장애우 재활기관이었다. 김종율 씨에 따르면 당시 그곳에는 15명 가량의 시각장애우들이 안마나 침술업 대신 타자를 배우고, 벽돌을 찍고, 밭을 매고, 물을 길어 올리는 생활훈련을 주로 받고 있었다.
 김 종율 씨가 공 박사가 운영하는 맹인 부흥원에 들어간 것은 정확하게 1962년이다. 어렵게 들어가서 그가 처음 한 일은 타자를 배우는 일이었다. 공 박사와 약속한 것도 있고 해서 그는 숱한 밤을 새우며 타자기를 두드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한쪽 손으로 어떻게 타자를 칠 수 있을까?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타자기를 배우지 못하면 죽는 길밖에 없다는 절박함으로 타자기에 매달렸다. 그리기를 일 년, 그러자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두 손을 사용하는 동료들은 따라갈 수 없었지만 한 손으로도 웬만큼은 타자를 칠 수 있는 단계에 다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타자를 칠 수 있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빛을 만난다.
 "당시 라이온스클럽에서 타자경기대회를 일 년에 한 번씩 열었는데, 내가 거기 참가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어요. 그뿐만 아니라 공박사가 기분이 좋아가지고 한 손으로 타자를 치는 건 한국뿐이 아니라 세계에도 없는 거다. 라고 칭찬을 해 주기도 했지요."
 그의 말은 사실이다 그가 말끝에 보여준 낡은 신문 조각에는 "의지로 이긴 실명"이라는 제목아래 "일분에 오십 자 치지만 가슴 뿌듯"이라며 그를 화제의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시각장애우 한글 타자 경연대회에 참가한 것을 다룬 또 다른 신문기사도 있는데 그를 소개한 부분은 이렇다. "일반부로 출전, 장려상을 받은 김종율 씨는 보고 치기 경기에서 다른 선수들은 한손은 점자에 한 손은 타자기에 놓고 계속 타자기를 두드렸는데, 김씨는 한 손만으로 점자를 읽고 다시 그 손으로 타자를 치고도 일분에 사십자를 치는 묘기를 보여 우뢰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타자를 칠 수 있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빛을 만난다. 여기서 그가 빛을 만났다는 것은 그가 타자를 칠 수 있게 된 것을 계기로 평생을 함께 할 아내 고유남 씨를 만났다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그는 타자를 칠 수 있게 되면서 공병우 박사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게 됐는데, 그 신임은 당시 맹인 부흥원이 운영하고 있던, 성내동에 하나밖에 없는 공중목욕탕 운영을 그에게 맡기는 것으로 나타났고, 그 목욕탕에서 일을 하던 그가 손님으로 목욕탕을 드나들던 스무살의 꽃다운 처녀 고유남씨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목욕탕에서 일하며 서류를 정리할 때 점자로 찍었어요. 그걸 공 박사한테 보여주려면 한글로 옮겨야 했는데 그 일을 집사람이 해준거죠. 하루 이틀 그렇게 도와주다가 내가 일 하는게 너무 답답하게 보였나봐요. 말하자면 동정이 사랑으로 발전하거죠."
 이 부분은 그의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그의 아내에게 "그가 어디가 맘에 들어 결혼하게 되었냐?"고 물어보았다.
 "그때는 내 나이가 어렸어요. 나이는 어렸지만 이런 일을 도와주면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은 했어요. 그렇게 도와주다 보니까 정도 들고 그러다보니 내가 이 사람의 손발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거죠. 그때는 이 사람은 나 아니면 누가 돌봐 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만이 들었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라는 그런 계산은 할 줄 몰랐어요. 단지 이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는 그 생각 외에는 아무 생각도 안했고, 그 생각으로 결혼을 밀고 나간 거죠."
두 사람은 만나고 나서 5년이라는 연애 기간을 가졌다. 사귀는 기간이 이렇게 길었던 것은 물론 고유남 씨 가족의 반대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제가 칠남매 중의 여섯째에요. 당시에 아버님은 안 계셨고, 어머니와 오빠들이 있었는데 전주 집에다 나를 가둬 놓고 머리를 깎고 이 사람이 있는 서울에 못 올라가게 막는데 정말 힘들었죠."
 짧게 함축된 말이지만 그 상황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사귄 기간이 오래였던 게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녜요. 내가 보기에 장애우들이 제대로 결혼하려면 서로 대화를 충분히 나누고 나중에는 그 사람의 불편함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이루어지는 바람직한 결혼이라고 봅니다." 옆에서 그가 거든다.
 극심한 반대를 이기고 결혼에 성공한 두 사람, 그러나 그들 앞에는 장밋빛 나날들 보다는 고생의 가시발길이 열려 있었다.
 "남들은 결혼할 때 방을 얻어 가지고 시작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다 보니까 처음에는 공 박사님 빌려준 창고 비슷한데서 살아야 했죠. 거기서 살면서 나도 직장생활을 하고, 그렇게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 사글세방을 얻고, 정말 어렵게 살았어요." 당시를 회상하는 아내 고유남 씨의 말이다.
 "그렇습니다. 집사람이 고생을 많이 했죠. 나야 직장생활을 했으니까 별로 고생을 안 했지만 집사람은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집사람이 머리에 광주리이고 다니면서 고생해 이 집도 산거예요." 그의 가족은 지금 서울 명일동에 있는 삼익 아파트에 산다. 슬하에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하나 있고, 그 딸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다.
그의 아내에게 그와 결혼한 걸 후회해 본적이 없냐? 고 물어보았다.
"저도 사람인데 그런 때가 없진 않죠. 하지만 힘든 건 순간이에요. 힘들면 괜히 결혼 했구나 라는 후회가 생기다가도 이 사람 얼굴만 보면 금방 없어져요. 저는 주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천생연분이라고 자랑해요. 그러면 사람들이 자기 입으로 천생연분이라고 그러면 그건 진짜 천생연분이다. 라고 그러더군요." 말끝에 그녀가 웃는다. 그 웃음은 정말 가식 없는 웃음이다.
 다시 그의 얘기로 돌아가자. 그가 가정을 꾸밀 무렵 맹아 부흥원에서 운영하던 목욕탕이 문을 닫게 된다. 성내동이 개발되면서 여기저기 목욕탕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목욕탕을 그만둔 그는 공병우 박사가 운영하고 있던 타자기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타자기 회사도 얼마 안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되고 그가 정착한 곳이 바로 공 안과였다. 이때가 70년인데, 그는 공병우 박사의 배려로 공안과에 전화교환원으로 취직했다. 그로부터 22년, 그는 별다른 굴곡 없이 전화교환원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그 22년 동안 공안과 원장은 공병우 박사에서 그의 아들 공영태 박사로 바뀌었지만 그의 자리는 변함없다.
 그는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공 박사 부자의 배려를 강조했는데, 다음의 그의 말을 들어보면 수긍이 가는 면이 없지 않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래요. 왜 공안과에서는 무뚝뚝한 남자가 전화를 받느냐고 항의하는데 그러면 공영태 박사는 친절하게 전화를 잘 받아주는데 뭐가 어떻습니까. 라고 일축해요. 심지어 직원들까지 우리도 이제 자동교환대를 설치하자고 할 때도 있었는데 그때 공영태 박사가 이 사람이 있는 한 그런 소리를 하지 말라고 막았어요. 전화에 대해서는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한 거죠." 몸이 허락할 때까지는 계속 이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그, 또 다른 그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글 / 이태곤 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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