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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난사람]문정현신부

“사람에 대한 애정, 이게 시작이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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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0년에 폭로된 보안사 사찰대상 디스켓 169번 문정현 신부 파일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전북지역 대표적 문제인물. 외고집에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 신도로부터 존경받고 금전에 관심 없는 곧은 성격. 저돌적 성격으로“깡패신부”라 불리움’ 이런 문 신부는 근래 노근리사건, 매향리 미공군기 폭탄투하 사건, 미군 술집여종업원 살해사건, 효순이 미순이 사건 등 불평등한 한 미 관계를 개선하는데 앞장서고 있어 운동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고 있다. 그런 문 신부가 38명의 중증정신지체장애아동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전북 익산시의 한 농촌 마을에‘작은자매의 집’이라는 보금자리를 꾸미고 정신지체장애우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문정현 신부를 만났다.

▲문정현신부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라고 해도 싸워야죠>
― 신부님은 하도 욕을 잘해서 깡패신부라는 별명을 얻으셨죠?
“그렇게 쌍욕은 안하죠.(웃음) 그렇지만 거대한 장벽에 부딪치는 느낌이 들 때 그대로 주저앉지는 않아요. 몸으로 말하지. 저들은 신부님이 그런다고 정권이 물러날 것 같습니까?”라고 말하지요. 그러면 난 더 강하게 저항해요.”
― 어쩌면 신부님이 싸우고 있는 대상은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 문제가 몸으로 부딪쳐서 해결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내가 미련한 거죠. 제 몸만 다치고. 예를 들면, 경찰이 가로막고 나를 강제로 차에 태워 대구, 경주, 포항, 울진 설악산 끌고 다닌 적이 있어요. 정부 규탄하는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격리시키려고. 그럴 때 난 한번도 순수하게 응한 적이 없어요. 비록 끌려갈지라도 차  안에서도 저항하는 거죠. 백밀러 뜯고, 유리창 부수고, 시트도 다 뜯고. 내가 할 수 있는 몸의 저항은 다 하는 거죠. 경찰이 탄압해도 상관없어요. 그러면 그 친구들 1시간도 못 버티더라구요. 반대로 내가 주도하는 거지. 날 그냥 내버려두라고 소리질러요. 안기부, 보안대에서 회유책을 쓴 적도 있었지만, 난 한 번도 수용을 하지 않았어요. 내가 용납할 수 없어요. 물러서고 싶지 않아요. 차라리 날 밟고 가라고 소리쳐요”
― 불평등한 한 미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늘 집회를 갖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집회 때 있었던 일들을 몇 가지 말씀해주세요.
“지난 화요일이었죠. 미국 대사관 앞에서 집회가 있는 날인데(매월 둘째주 화요일 오후 2시) 경찰이 대사관 둘러싸고, 그 수가 몇 명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죠. 숨도 못 쉴 정도였어요. 저항해도 소용없었어요. 그래서 사복 경찰 한 명을 골라서 멱살 잡고“너희들이 무슨 권리로 우리를 가둬, 놔! 내가 소포냐! 니들이 보내고 싶으면 풀고 보내는 소포냐!”라고 고함쳤죠. 전 정권과 타협하고 싶지 않아요. 그걸 보고 깡패신부라고 한 거겠지만, 그렇지만 요즘은 나에게 심리적 변화가 조금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때려부수고 저항하는 게 사실은 쉬운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하루, 이틀, 일주일 버티는 게, 비, 눈와도 버티는  이런 저항이 더 어려운 방법인 것 같아요. 경찰에 연행되면 48시간은 버텨야 해요. 5박 6일 동안 미8군 정문 앞에서 그런 적이 있었죠. 비 오고 옷 속으로 빗물이 다 스며들어도 버텼죠. 그렇게 상대 불의를 보고 저항할 때 지구력을 갖고 버티는 것이 때려부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든 거죠. 이게 저의 최근의 심경이에요.”
― 신부님이 불의에 저항해서 나선 싸움의 시작은 언제부터였나요? 제 기억에는 74년, 약 20년 전부터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그렇죠. 시작은 74년 지학순 주교님 사건 이후였죠. 97년부터는 군산 미군부대 앞에서 매주 화요일 오후 2시 집회를 하고 있는데 전 매주 꼭 갑니다. 벌써 5년째로 268회죠. 그리고 매월 둘째주 화요일 오후 2시에 서울 미대사관 앞에서 벌이는 시위가 벌써 48회고. 불평등한 SOPA개정 국민행동 활동을 본격적으로 한 건 이제 만 3년 됐어요.
생각해보세요. 끊이지 않는 주한미군범죄, 매향리 사건, 미8군 기름유출 사건, 스토리 사격장 문제, 파주 전농록씨 고압선 사망사건, 효순이 미선이 사건, 서해교전, 정말 많죠. 다 미군과 관련된 사건들이에요. 전 직접 그 곳에 가서 싸워요. 하지만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그렇지만 해야죠. 문제는 이렇게 끊임없이 생기니까.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라고 해도 싸워야죠.”

<미국과 한국은 서로 함께 사는 관계가 되어야>
― 얼마 전 화제가 촛불시위였는데 촛불시위를 보시고 느끼신 점이 있다면 어떤 건가요?
“촛불시위에서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을 거예요. 정부, 미대사관, 경찰, 미당국, 심지어는 부시까지 모두, 월드컵 경기가 한창일 때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 터졌죠. 그 당시 축구 때문에 장례 같은 거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져버렸죠. 그래도 효순이 미선이 살리자는 움직임은 계속 있었어요. 계속 집회도 조직했고. 저는 이렇게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죽음이 축구 때문에 잊혀버리고, 또 대선에 완전히 가려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로 12월 18일 그 두 미군인이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죠. 그 날도 미군들이 얼른 발표를 안하더라고요. 그리고 경찰은 평소보다 우리를 더 강압적으로 막고. 그래서 이상하다라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무죄로 발표된 거예요. 그 때 있던 사람들 모두 분노해서 강하게 항의했고, 그 과정에서 12명이 부상을 당했어요. 그 때 아이들이 다시 살아난 거나 마찬가지예요.
제가 알아보니까 처음 촛불시위를 제안한 사람이 실은 함세웅 신부 보좌신부, 제 동기동창이더라고요. 그렇지만 결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런 계기를 만든 것이 말이죠. 저는 아무것도 아니죠. 모래밭에 수많은 모래들 중의 하나일 뿐이고, 그 모래들이 함께 모여서 가능한 거 아니겠어요. 하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뭔가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기운들 같은 것이...”
― 촛불시위를 반미라고 언론에서 말하고 있는데, 신부님은 이런 규정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으신가요?
“불평등한 것을 고치지 않으니까 나쁘다라고 한 것인데. 그게 어떻게 반미입니까?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가 자기네 입맛에 맞추어 반미라고 표현해버리고 있는 거지. 누가 처음부터 반미라고 했나? 주장을 정확히 알고 얘기 해야죠. 우리는 불평등한 것 고쳐달라고 주장했을 뿐이에요. 효순이 미선이 죽여놓고 무죄다? 친구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우리 집회에도 미국인들이 참여하는데, 참 좋은 친구들이에요. 한 형제자매지. 그런 친구관계를 먼저 깨뜨린 것 미국과 부시예요. 미국과 한국은 서로 함께 사는 관계가 되어야죠. 평등하고 호혜적인. 그게 아닐 때는 바로 잡아야 하고. 설사 그것을 사람들이 반미라고 말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바로잡아야지. 장애문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무관심이 제일 나쁜 거예요.”
― 이번 정찰기 사건에서 보면 알지만, 미국이 바로 사과를 하는 걸 보면, 미국의 태도가 조금 달라지긴 한 것 같습니다.
“사실 얻은 것은 별로 없죠. 그래도 한가지 꼽으라면 사람들이 변화한 것이지. 국민 의식이 바뀌었다는 것을 꼽을 수는 있겠죠.”
― 사제서품 받으면 대부분 교회 안에서 살지 않나요? 신부님은 75년 인혁당 사건과 유신초반 부터 사회운동을 시작하셨는데, 왜 밖으로 나오셨나요?
“교회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성당중심이죠. 말도 행동도 부드럽게 해야하고. 그게 일반적인 교회생활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성서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와 신자들 중에 그런 사람이 많아요. 예를 들면, 국가보안법과 성서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나요?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국보법은 네 이웃을 미워하고 증오하라고 하쟎아요. 빨갱이를 보면 일러바쳐야 하고, 잡아다가 때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죠. 우리들의 적이라고, 이게 교회와 맞나요? 아니죠. 해방이후 교회는, 교회의 이념과 맞는지 안 맞는지 생각도 안하고 앞장서서 단죄를 많이 했었죠. 반공이데올로기를 통해서 말예요.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구조를 먼저 봐야죠. 우리 사회에서 사람이 맞아죽고 의문사 당하고 공포에 질리고 말도 못하는 상황이 있는데도 교회가 침묵하고 있으면 안 되는 거죠.
― 신부님은 불평등한 한 미 관계를 개선하는 운동과 더불어 통일에 관한 활동도 하고 계신데, 계기가 있으신가요?
“ 89년 동생 문규현 방북 사건때, 아하 분단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분단 상황에서는 인권도 민주화도 없고 독재정권만 남는다는 생각이 든 거죠. 그렇게 생각하니까 자연스럽게 통일문제에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명절만 되면 마음이 찢어져 〉
― 요즘 신부님 건강이 안 좋다는 얘기가 들리던데, 건강을 돌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 망가진 것 같아요. 무릎 수술을 10년에 세 차례나 했는데, 인공관절을 끼워야 할지도 모른다고 그러네요. 겁주려고 하는지는 몰라도 의사가 더 심한 장애를 가질 수도 있다고 했어요. ”
 - 신부님의 정신지체인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인가요?
“86년도 전두환 정권 소파동 때였어요. 그때 소 값이 개 값(50만원)이었죠. 농민들은 다 농협 빚으로 사서 키운 건데, 카톨릭 농민회를 조직해서 보상 운동을 했죠. 그러면서 농촌을 돌아다녔는데 우연히 정신지제장애우를 만났어요. 마침 농번기라 사람들이 모두 다 밭에서 일하고 있었죠. 그래서 마을 안은 굉장히 조용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목소리를 따라가 봤더니, 한 아이를 감나무에 묶어놨더라고요. 밥그릇은 뒤집어져 있고. 얼굴에 반찬이 뒤범벅되어 있고, 한 아이가 개처럼 묶여 있었는데, 알고 보니 정신지체장애우였어요. 그때 저는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 아이를 데려다가 몸담고 있는 성당 창고를 개조해서 같이 살기 시작했어요. 그때 학대받는 정신지체 장애우를 데려다가 내가 먹는 밥 같이 먹고 씻겨주면 안될까 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사회복지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에요. 난 전문가도 아니고. 그냥 상식차원에서 함께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뿐이죠. 사람에 대한 애정, 그게 시작이 아닐까 싶어요. 어쩌다보니, 장애우가 한 사람에서 열세사람으로 늘어나 버렸어요.”
― 신부님이 받으신 충격 저도 이해가 됩니다. 농촌에 사는 장애우들 문제가 심각한 것 같습니다. 신부님은 평생 이 일을 계속 하시겠지요?
“이미 시작한 일이잖아요. 보금자리를 만든 이상 제가 대학원이라도 가서 전문성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한가지 아쉬운 점은 카톨릭이라는 종교 안에서 운동과 사회복지운동이 서로 벽을 쌓고 있다는 거예요. 왜 서로 크게 떠들기만 하고 갇혀 있으려고 할까요. 이해가 안가요. 사람에 대한 애정이 시작인데, 왜 서로 이해를 못할까하는 회의가 들어요. 이건 아직 풀지 못한 숙제인 것 같아요.”
― 작은 자매의 집은 현재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요?
“현재 40명이 같이 살고 있어요. 우리는 50명이 정원이에요. 우리는 아주 천천히 살아갈 겁니다. 요즘은 그룹홈도 생각하고 있죠, 지금 구정이 다가오잖아요. 명절만 되면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먼저 집에 간 아이들은 좋아서 펄쩍 뛰고, 늦게 가는 애들은 혹시 못가나 해서 울고불고. 정말 속 많이 상하죠. 아예 집에 못 가거나 집이 없는 아이들도 있고. 그 아이들이 얼마나 가정을 그리워하는데. 돌아갈 집이 없으니까, 그에 준하는 그룹홈을 만들어서 함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에요”.
― 최근 꽃동네 문제가 보도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시설이 커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틀린 것이라고 생각해요. 꽃동네 문제는 카톨릭 사회복지계에서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 문제로 외국 주교님들에게 서신을 보낸 적도 있는데,  대부분 꽃동네의 현안에 대해서“안된다”는 대답을 들었고. 저도 청주교구에서 오웅진 신부를 만나 이야기 한 적이 있어요."
― 마지막으로 지금 나라가  북핵문제로 시끄러운데 북핵 문제에 대한 신부님의 입장을 듣고 싶습니다.
“북핵문제는 우선 자주가 해결되어야 해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얼마나 국민이 자주의식을 갖고 갈망하는가가 관건이죠. 대통령이 여기에 함께 해야하는데, 지금까지 그런 대통형 하나 만나지 못했어요. 생각해보면 한용운 스님이 그런 분이셨어요. 3·.1 운동 의미도 그래서 더욱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 지도자가 있어야 해요.”

대담 김정열 편집주간 정리 여준민 사진

 

작성자여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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