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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도배사 김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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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지와 풀통 속에서 "시"를 끄집어내 말없이 회색의 벽에 발라버리고는 어두컴컴한 굴을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 도배 사 길상만.
 잊혀진 동네 광명시 철산동 산 일번지 어둑한 골방에서 바깥세계와 또 다른 교신을 시도하고 있는 청각장애우 길상만의 희미한 어제와 오늘의 삶의 조각들.

동네 입구로 들어서는 음침한 터널을 벗어나자 그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 정경을 가리키며 빠르게 말했다.
  "동네가 수용소 군도 같죠?"
  스산한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다. 적색기와를 머리에 얹은 낡고 초라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둥지를 틀고 키 재기를 하고 있는 동네를 더러운 물이 고여 있는 하천이 감싸고 있었다.
  그 하천을 가로질러 수위를 조절하는 작은 댐이 눈에 띄었고 하천에 둘러싸여 흡사 고립되어 있는 하나의 섬같이 비쳐지는 동네는, 그 하천너머 지척으로 일직선을 그으며 길게 뻗어 있는 레일 위를 달리는 전철이 오가며 굉음을 토해낼 때마다 무기력하게 경기를 앓고 있었다.
  그에게 손바닥을 펴 동네의 공식지명을 물었다. 그는 광명시 철산 일동 산일번지 일대라고 대답했다. 외양은 낙후된 지역으로 전쟁 영화에서 흔히 보는 포로수용소를 연상시키지만 실제로는 정이 많은 서민들이 모여 사는 따뜻한 동네라고 덧붙이며 그는 웃었다.
  껑충한 키의 그를 앞장세우고 구불구불 이어진 좁은 골목길을 걸었다.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동네 내력을 이어가고 있었다. 손짓을 곁들인 그의 빠른 말은 그가 청력을 상실한데서 기인한 특유의 습관인 듯했다.
  "비만 오면 동네가 물에 잠겨요 다른 데가 물에 잡기지 않았어도 여기는 침수됐다고 보면 맞아요. 이년 전에도 큰비가 내려 애지중지하던 물건을 다 버려야 했어요. 그렇지만 물에 잠기는 것만 제외하면 참 살기 좋은 동네예요. 방값도 아주 싸요. 일을 같이 하던 아줌마 소개로 삼 년 전에 들어와 살게 됐어요. 조금 있으면 재개발도 되고 딱지도 나온대요."
  그의 말이 중단되자 침묵이 흘렀다. 진작 수화를 배워 두었으면 대화를 쉽게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잠시 때늦은 후회를 해야 했다.
 "누추하죠?"
  그가 공동 화장실이 늘어서 있는 지점을 지나게 되자 계면쩍어 하며 말했다. 황급히 고개를 저어 아니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의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자 어떤 말이라도 해야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손바닥을 펴 "오늘 일 안나가도 돼요?"라고 적었다.
  "지금은 풀이 얼어서 일을 못해요. 십이월 달부터 신도림역 부근 우성 아파트로 일하러 나갔었어요. 날이 풀리면 또 일 나갈 거예요"
  "일 하는데 어려움은 없어요?"
  그의 빠른 말에 맞추다 보니 어느새 손바닥 위의 글씨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같은 장애우라도 청각장애우는 비장애우들과 대화가 쉽지 않아 서로 간에 오해가 많이 생겨요, 비장애우들이 저를 무시하는 경향도 있고, 제가 수화를 하는 까닭에 이상한 생각을 갖는 것까진 좋지만 무지한 줄 알고 이용이나 하려하고 농락하는 경우가 많아 참을 수 없어요. 정말 유감이에요. 이 문제만 아니면 일 하는데 어려움은 없어요."
 
  "지금 기술자죠?"
  "기술자 대우를 받아요. 일당으로 육만 원을 받죠. 지금처럼 되기까지 고생 많이 해야 했어요. 천덕꾸러기가 되기 싫어서죽어 라고 일만 했으니까요."
  그의 표정에서 어쩔 수 없이 한점 그늘을 목격해야 했다.
  "그래도 김상만씨는 말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가 웃었다. 그의 발걸음은 이제 좁고 긴 골목 끄트머리에 다다르고 있었다.
  "여기가 제가 세 들어 사는 집이에요. 누추하죠?"
  그가 밝은 나무 대문 앞에 멈춰 섰다. 김상만 세 글자가 회색 벽에 박혀 있는 집 대문을 넘어 서며 그가 편지함을 뒤졌다. 편지함에는 신문 한 부만이 꽃 혀 있었다. 신문을 손에 들고 그가 마당을 가로질러 건물 뒤쪽으로 걸어갔다. 알고 보니 그가 사는 전세 육백 만원짜리 셋방은 햇볕 이 차단된 구석진 골방이었다.  방문 앞에 서서 그가 벨을 눌렀다.
  "벨을 누르면 방안에 빨간 불이 켜져요. 그러면 밖에 누가 왔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죠"
  방문이 열리고 그의 어머니가 저편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 불청객을 맞았다. 네 평 남짓한 그의 방안엔 침대가 있고, 책장이 있고, 텔레비전이 있고, 팩스가 있었다. 창문이 없어 오히려 아늑함을 한층 더 느끼게 해주는 그만의 공간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꾸며 논게 여자 같아요."
  "제 취미예요."
  둘은 웃었다. 웃음 끝에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노트를 펼쳐 들었다. 이 시간 이후 특별한 상황이 생기지 않는다면 횐 여백 빼곡이 그의 과거, 현재, 미래가 담길 것이었다. 가능하면 그의 꿈까지도. 시계를 곁눈질했다. 그리고 천천히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김상만씨 언제 어디서 태어났어요? 장애는 언제 가지게 됐죠?"
  김상만 그는 일천구백육십삼년 전라북도 부안군 동중리 이구 삼백육십칠번지에서 어머니 한점례(일흔 살) 아버지 김삼봉(작고, 살아 계신다면 여든두살)씨의 육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 집안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일제에 의해 징용에 끌려갔다 돌아온 경력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가 일손을 놓고 한량으로 떠돌았기 때문에 어머니가 품일을 나가고 손바닥만한 밭농사에 매달렸지만 세끼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다.
  때문에 형님과 누나들이 일찍부터 돈을 벌러 객지로 나갔고, 그 자신도 삼남중학교 이학년 과정을 마치자마자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돈을 벌기 위해 전주로 가출했다.
  전주시내 농기계 수리점에 취직해 일년 가량 일을 배우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몸이 아파 오기 시작해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자리에 누운 그에게 의사는 과로로 인한 신장염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어머니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복수에 물이 차서 주사기로 빼내야 할 정도로 그의 병증세는 나날이 심해져만 갔다. 병원에 입원하길 몇 차례, 심지어는 어제 저녁에 죽었다는 사망선고를 받기까지 했다.
  확실히 그가 살아난 건 의사 의 말대로 기적이었다. 사 년여를 병마에 시달리고 그가 어느 정도 기운을 차렸을 때 그의 건강했던 몸은 수숫대기같이 살이 빠져 차마 눈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병이 완전히 나은 것도 아니어서 그는 전주형님 집과 부안 집을 오가며 투병생활을 계속했다. 그의 병 치료에 가산이 거의 탕진되다 시피 했기 때문에 그 무렵엔 병원에 가는 것도 주저해야 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병원에서 처방해준 황산가나마이신 이라는 주사약을 전주 시내 약국에서 사다가 동네의 예전에 보건소에 다닌 전력을 가지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부탁해 집에서 맞으면서 치료를 대신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불현듯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우선 즐겨 듣던 라디오의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건전지가 다 닳은 줄 알고 갈아 끼워 봤지만 들리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라디오뿐만이 아니었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밥 먹으라는 고함소리도 놓쳤다.
  그러자 큰 소동이 벌어졌다. 아버지는 며칠을 그의 귀에다 대고 "상만아, 상만아" 목청껏 불러댔고, 어머니는 마치 아들이 죽기나 하듯 그를 붙잡고 몸부림을 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태가 그 지경이 되자 그제야 주사약의 포장지 안에 들어있던 설명서 내용 중 "장기 투여시 청력검사를 꼭 할 것"이라는 주의사항을 발견해낸 그는 어쩔 수 없이 대성통곡을 해야 했다.
  이때부터 소리의 세계는 그와 담을 쌓았다. 처음에는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어 술을 마시고 부엌칼을 들고 자신에게 주사를 놔 준 문제의 아주머니에게 달려가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는 그로 하여금 체념에 빠지도록 했다.
  그 가을 이후 그는 자신의 장애를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동안을 자학하며 지내다가 고향집의 아픈 상처를 피해 전주 형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그의 나이는 성년인 스무 살이었다.
  하는 일 없이 거리를 헤매다가 전북농아복지회를 찾아냈다. 그곳에는 청각장애우들이 손으로 허공을 부수는 언어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는 쉽게 수화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재미있기도 하고 필요할 것도 같아 열심히 배웠다.
  고향집이 있는 부안에도 수화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와 부안 에바다 농아교회를 다니며 그곳 전도사에게서 아침저녁으로 수화를 배우기도 했다.
  그가 표현하는 수화가 일정수준의 경지에 다다르자 그의 소꿉친구들은 그에게서 멀어져갔다. 대신 같은 처지의 청각장애우 친구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는 일년 육개월을 에바다 농아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하며 전도사를 도와 교역자생활을 하기도 하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스물 세 살이 됐을 때 그는 전북농아복지회 소개로 이리시 공단에 있는 한 모피회사에 취직했다. 그는 이 회사에서 판장 작업을 했다. 그가 한 판장작업은 밍크가죽을 물을 축여 늘리는 작업이었다.
  그는 일을 한 대가로 월급 삽십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힘이 좋고, 무엇보다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얼마안가회사에서 일을 잘한다고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 생활도 잠시, 다니던 회사가 부도가 나 그는 한동안을 쉬어야 했다. 회사에서는 기다리라고 했지 만 도저히 회생할 가능성이 없어 그는 같이 근무하던 비장애우 동료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고 무시하는 것 같아 과시용으로 보란 듯이 틈틈이 소설을 써 신춘문예에 투고하기도 했지만 뒤에서 소곤소곤 거리는 동료들의 말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느껴서인지 자신이 청각장애우라는 사실이 실감이 됐다.

  독산동에 있는 제이씨 모피회사에 취직해서 사개월을 지냈다. 그때는 이미 판장작업 분야의 기술자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월급 사십만 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 회사도 부도가 나 문을 닫고 갈 곳이 없어진 그는 다시 이리모피공장에 있을 때 알게 된 조주임이라는 사람이 세운 길음동 모피 하청공장에 들어갔다.
  이십 여명이 근무한 그 공장에서 그는 주임을 맡았다. 거기서 다섯 달을 근무하는 동안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사장이 아는 사람이다 보니 연이은 야간작업을 거부할 수 없었다. 대우도 썩 안 좋은 상태에서 차별은 없었지만 동료들이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 것도 참기 어려웠다.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고 무시하는 것 같아 과시용으로 보란 듯이 틈틈이 소설을 써 신춘문예에 투고하기도 했지만 뒤에서 소곤소곤 거리는 동료들의 말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느껴서인지 자신이 청각장애우라는 사실이 실감이 됐다.
  정보에서 뒤질 수밖에 없고 전달 사항을 지시 받는데도 어려움이 많아 어린 공원들에게서 지시 사항을 전해 듣는 것이 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다.  그리고 더 이상 승진할 수도 없다는 막막함, 그는 미련 없이 모피 일에서 손을 떼기로 마음먹었다.
  모피회사를 그만두고 서대문구 영천동에 있는 누나 집에 칩거하고 있던 그는 어느 날 신문을 펼쳐들고 전율했다. 그 신문하단에는 상계동 사회복지관에서 기술훈련생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나 있었다. 나열된 여러 공과 중에 그의 눈은 도배기술공과생 모집부분에 붙박였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성격에는 도배 일이 맞는다는 생각을 했다.
  떠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고 무엇보다 대화가 많이 필요하지 않아 자존심에 상처를 받지 않아도 되고 답답하지도 않으며 보수도 괜찮은 도배 사라는 직업, 그는 주저하지 않고 상계동 사회복지관을 찾아가 등록을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도배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때가 팔십오년 시월이었다.
  
도배공과는 삼개월 코스로 이론 교육과 실기로 짜여져 있었다. 그는 열심히 배우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배우기 시작한 첫날부터 그는 심한 자괴감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강사의 강의가 들리지 않아 고개만 숙이고 앉아 있어야했던 것이다. 강사가 다른 수강생에게는 주지 않는 강의록까지 주며 그에게 신경을 써 주었지만 진도를 맞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 달을 동료 수강생 노트를 빌려서 공부했다. 두 달째 접어드는 어느 날, 그 날도 그는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쳤다. 고개를 들어보니 낮선 여자가 수화로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깜짝 놀랐다. 황급히 "누구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알고 보니 그 여자는 강사가 그의 수강을 도와주기 위해 농아복지회에 연락해서 파견되어온 자원봉사여대생이었다. 그 여대생의 수화통역으로 그는 나머지 두 달을 쉽게 수강할 수 있었다. 그는 석달 후 마침내 도배공과를 마칠 수 있었다.
  강사가 공과 일기 선배를 소개시켜 줘서 팔십육년 이월부터 그는 현장에서 도배견습공 생활을 시작했다.
  견습공 생활은 처음부터 말이 견습공이지 실제로는 잡부였다. 아침 여덟시에 일을 시작해서 저녁 일곱 시 삼십 분까지 엘리베이터가 채 설치되어 있지 않은 고층아파트를 쌀 두말 무게의 벽지와 풀 통을 들고 오르내려야 했고, 일이 끝나면 공구 챙기고 장갑을 빠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거기다 도시락까지 싸들고 다니면서 그는 일당으로 고작 칠천 원을 받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가 하는 일에 비해 보수가 너무 작아 또 한 차례 심각한 갈등을 겪어야 했다. 이때의 심정을 그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지금도 관악 석수 아파트 십 오층에 산다/내가 먼저 살다 떠나면/공리 공생의 아이러니여! 마님이 입주하고/나는 또 도봉구 상계동 십 오층 아파트에서/하루는 일동 하루는 이동하는 식으로 무허가인 나는/옮겨 살아야 한다/일당 칠천 원에 저기 전라도 부안땅 사시는/아버지께/다달이 십만 원을 보내고 나면/내 집 마련 저축도 못 들어/서울역 지하도에서 산 복권만이 이자처럼 불어났다/이제 여기도 끝나 가느니/맘씨고운 복부인이 하나라도 와서/막걸리 동이나 사줬으면/미련 없겠다/상계동 도배현장에서는/일당이나 한 푼 더 받았으면/타향살이 내 삶도 안 서럽겠다/개 값된 소팔고 사는/전라도 부안땅 아버지 삶도/안 서럽겠다.
  그는 견습공으로 꼬박 일년 육개월을 채워야했다. 그 기간을 그는 이왕 시작한 일 끝장을 보자는 오기하나로 버텼다.
 
그가 마침내 준 기술자로 인정을 받아 처음 공사를 맡아 한곳은 상계동 대한조선공사 아파트였다. 일당도 껑충 뛰어 일만 오천 원을 받았다. 최고 기술자일당 삼만 오천 원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지만 기술자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그는 기술자가 되고 난 뒤 봄에서 가을까지 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부지런히 공사현장을 쫓아 다녔다. 지방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구, 전주, 설악산‥‥‥ 지방 일은 일당을 약간 더 받을 수 있고 돈 쓸 일이 별로 없어 그는 지방 일을 선호했다.
  도배 일은 보통 세 명이 한 조를 이뤄 작업을 하는데 그는 몇 해 전부터 벽지를 벽에 붙이는 작업만 하고 있다. 도배 기능공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현재 아파트 방만 하루 열다섯 개를 붙일 수 있는 숙련된 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일당은 앞에서 그가 얘기한데로 육만 원이라는 고임금이다.  여기까지가 그의 과거와 현재이다. 이제 그에게서 들을 수 있는 남은 얘기는 그의 미래이다. 그는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그가 말문을 열기에 앞서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그가 끊임없이 습작에 매달려왔다는 것이다.  그는 왜 시를 쓰고 소설을 끄적일까?
  "귀가 안 들리고 나서부터 고립감을 맛보기 시작했어요. 외롭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자연히 독서할 기회가 많았어요. 습관처럼 일기를 쓰다보니 발전해서 남의 작품을 모방하게 됐어요. 만해 한용운 선생님의 시 참 많이 좋아했어요. 이청준 선생님의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작품도 비장애우가 장애우를 바라보는 시각을 보여주는 것 같아 좋아했고요. 좋아하는 작품들을 모방하다 보니 글 솜씨가 조금 늘은 것 같아요."
  "문학이 자신에게 뭐라고 생각해요? 작가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나 보죠?"
  "글을 쓰겠다고 앉아있다 보 면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많아요. 애타는 심정 겪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예요. 그럴 때면 술도 취해보고 외출도 해보고 여행도 가보지만 참담함을 느끼기는 마찬가지 에요. 그래도 주제넘지만 시는 내게 있어서 생명이고 자존심이고 그리고 구원이에요. 시가 없으면 못살 것 같아요. 그렇다고 시인이 목표는 아니에요. 그냥 쓸 뿐이죠. 제가 노력해서 잘 쓰게 되면 누가 시인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겠죠. 그걸로 만족해요."
  그는 누구보다 문화생활에 드는 비용을 많이 지출한다고 말했다. 책을 사보고 비디오테이프도 많이 빌려보고 최근에는 팩스도 구입했다. 팩스로 그는 외부세계와 끊임없이 교신을 한다고 했다.
 
밤새 글을 끄적이다 막히면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이 그리워 팩스 번호를 두드리고 혹이나 저편에서 답신이 오면 만족해서 웃는 삶, 이게 그가 말한 구십이 년 겨울 그의 자화상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장래 계획을 물었다. 그는 "돈을 모아 지물포를 내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의례적인 질문으로 결혼을 안 할 거냐고 재차 물었다."기반 잡히는 대로 할 생각"이라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노트에 "사귀는 여자친구는 있어요?"라고 묻자 있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기가 발동해 "예뻐요?" 묻자 "주근깨가 많아서 탈이지만 모나리자를 연상하면 틀림없어요."라고 대답하며 파안대소를 터트린다.
  같이 따라 웃었다. 하지만 애초에 가졌던 선입견 때문일까? 웃으면서도 왠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무슨 이유일까? 그가 웃음을 멈추고 방문객이 말을 잇지 않아 또 다시 침묵이 찾아 왔을 때 방문객은 비로소 그 허전함의 한 가닥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한사람의 기능공으로 서기까지 극복의 과정을 담담하게 털어놨다. 그런데 지나치게 살아온 세월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본의 아니게 그가 가지고 있는 아픔이 간과되어버렸던 것이다.
  듣지 못한다는 것, 이보다 더한 고통은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아픔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누나와 나는 필 담을 해야 합니다. /시골에 잘 다녀왔니?‥‥‥‥‥/안녕들 하셔 어떻게 사셔‥‥‥어떻게?/오빠네 갔다 왔어?‥‥‥‥‥/또 변산바다 갔었니?‥‥‥안 갈 수가 없었어! /잊을 때도 됐잖아 ‥‥‥바다가 아니면 소리를?/술 마셨구나 또 ‥‥‥‥‥/도배 일은 잘 되니‥‥‥귀 먹은 노가다가?/보청기는 왜 안 쓰니 ‥‥‥보청기 보청기 그만해!/‥‥‥‥‥?‥‥‥‥‥ ! /‥‥‥‥‥ ! ‥‥‥‥‥?/누나와 나는 침묵으로도 얘길 합니다.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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