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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희정이 엄마 박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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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복씨가 이 몹쓸 장애로 인해 시달린 시기는 장장 십여 년을 헤아리는데 그 십여 년을 회고하는 그이의 말을 들어보면 과연 사람의 삶이 이럴 수 있을까라는 한탄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충격적이고 안타깝고 그래서 가슴이 아프다.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지만 그의 삶은 한마디로 한국판 기구한 "여자의 일생"에 다름 아니다.

  말단비대증(末端肥大症)이라는 희귀한 장애가 있다.
  의학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이 장애는 뇌종양이 주된 원인으로 뇌하수체의 성장 호르몬이 성인이 되고 나서도 과잉 분비되어 몸의 첨단부분 즉 턱·손·발·코 등이 비정상적으로 커지는 장애를 말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의사의 보충설명을 덧붙이면 이 장애에는 보통당뇨병, 고혈압 등의 지병이 수반되는 게 일반적인 양상이고 심할 경우 말을 하지 못하고, 걷지 못하며 여성은 점차 남성화되는 매우 심각한 장애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장애를 가지고 있는 널리 알려진 사람으로는 국내여자농구 최장신 선수였던 김영희(이십 구세, 한국화장품 소속)씨를 꼽을 수 있다.
  공포의 키다리 센터, 코끼리, 점보라는 별명을 가능하게 했고, 한 게임 최다 득점기록 등 몇 개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는데 견인차역할을 했던 그이의 이미터 오센 치라는 큰 키는 바로 말단비대증이라는 장애에서 비롯된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그이는 뒤늦게 이십여 년 이상 자라온 뇌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지만 완치가 안 돼 결국 눈물을 머금고 코트를 떠나야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올해 서른 여섯 살인 희정이 엄마 박정복씨도 김영희씨와 마찬가지로 개인이 감내하기엔 너무도 힘든 고통 그 자체인 이 말단비대중이라는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이가 이 몹쓸 장애로 인해 시달린 시기는 장장 십여 년을 헤아리는데 그 십여 년을 회고하는 그이의 말을 들어보면 과연 사람의 삶이 이럴 수 있을까! 라는 한탄이 저절로 나을 정도로 충격적이고 안타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지만 그의 삶은 한마디로 한국판 기구한 "여자의 일생"에 다름 아니다.
  이제 그이의 삶을 되짚어 그이가 장애를 가지기 전인 먼 옛날의 과거로부터 차근차근 그이의 삶의 궤적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한다. 그 끝에서 맞닥뜨리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처연한 슬픔뿐인데 그럼에도 이 글을 써야 하는 데에 필자의 비극이 있다.
  박정복, 그이의 생은 일천구백오십칠 년 일월 이십일일 충남 성환읍 성환리에서 시작된다. 아버지 박종용(현재 예순 세살)씨와 어머니 김진순(현재 예순 살)씨 사이에서 그이는 장녀로 세상에 나왔다. 그이가 태어날 당시 그이 아버지 직업은 보물 일호인 동대문을 관리하는 하급 공무원이었다. 때문에 집안형편은 무척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부모는 그이가 태어난 후 그이 밑으로 연달아 사내 세 명과 계집애 두 명을 더 낳았다. 그리고 눈에 띄게 남아를 선호했다.
  수제비가 별미일 정도로 처참한 가난, 가난에서 비롯된 잦은 부모의 다툼, 어린 동생들한테 당하는 시달림 등은 그이 유년기억하기도 싫은 악몽으로 각인시켜 놓았다.
  그이는 성환에서 성신국민학교를 졸업했다. 그 무렵 어머니의 의붓증이 도져 그이는 동생들과 함께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생활을 거리에서 하고 잠은 여인숙에서 자는 고단한 나날이 몇 달간 이어졌다. 겨우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어머니가 행상으로 나서 그나마 약간의 목돈을 마련한 덕분에 방 칸을 마련할 수 있었는데 그 방이라는 것이 창신동 꼭대기 허름한 아파트 지하실이었다. 
  햇볕도 안 드는 좁은 방에서 여덟 식구가 부대끼며 그이는 일년 가까이를 밥 짓고 빨래하며 어린 동생들을 돌보는 집안 살림을 도맡아했다.
  서울생활 일년이 지난 후 "먹고살기도 힘든데 딸자식을 뭐 하러 공부시키려고 하느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이를 고등공민학교에 진학시킨 건 어머니였다. 그래서 그이는 서대문에 있는 피어선 고등공민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입학만 시켜주었지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지는 않았다. 그이는 삼 년여를 내내 봉투를 붙여 팔아 학용품을 마련해야 했다. 이 시기 교복을 마련하지 못해 쩔쩔매야 했고, 공납금을 제때 내지 못해 학교에서 꾸지람을 들어야 했으며 늘 굶주려야 했던, 그래서 그이가 느낄 수밖에 없었던 진한 서글픔은 어린 정복으로 하여금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지. 내가 돈을 많이 벌어 사는 것이 모두에게 앙갚음을 하는 것이다"라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그이는 순전히 집을 떠나고 싶어 그이의 나이 열일곱 살, 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돈벌이에 나섰다. 부모도 말리기는커녕 한 푼이라도 벌어 오라고 그이를 내몰았다.
  거리에 서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그이가 손쉽게 직장을 구할 수 있는 매개는 신문 잡지에 난 구인광고였다. 그이는 공중전화를 붙잡고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다이얼을 돌려댔다.
  "여보세요. 침식이 가능한가요?"  "그건 좀 어려워요."  "네 그럼 안 되겠네요." "여보세요 잡지에 난  광고를 보고 전화하는 건데요"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요?"  "네 열일곱 살이에요."  "남자 경험은 있나요?"  "없는데요"  "그럼 좀 곤란해 요"  "여보세요 사람을 구하나요?"  "지금 몇 살이에요?" "제 나이요‥‥  ‥‥ 열아홉 살이에요"  "남자 경험은 있어요?"  "네‥‥‥ 있어요"  "그래요, 그럼 내일 두시쯤 을지로에 있는 꽃 다방으로 나와요. 옷은 뭘 입었죠?" ‥‥‥‥
  그이에게 "침식제공, 월수입 오십만 원 이상 보장"이라는 현란한 광고 문안은 그이에게 구원 그 자 체였다. 취직만 할 수 있다면 그까짓 나이를 속이고 남자 경험이 있다고 대답하는 것쯤은 아무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다음날 그이는 기쁜 마음으로 다방 문을 밀고 들어섰다. 그 다방에서 어느 뚱뚱한 아주머니를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그이는 그 아주머니가 이끄는 대로 다방을 나와 택시를 타고 어디론지 가 다른 다방에서 중년 남자를 만났고 인계된 그이가 그 남자를 따라 간 곳은 변두리 초라한 여관방이었다.
  여관방에 마주 앉아 "정말 남자경험이 있느냐?" "술집 생활을 하겠느냐"며 추근대던 남자는 얼마 안 있어 본색을 드러내며 그이를 덮쳤다. 그이는 생전 처음 몸이 찢어지는 듯 심한 아픔을 느꼈고 천장이 노랗게 파랗게 변하는 것을 보며 정신을 잃었다.

  그이가 팔려간 곳은 의정부 변두리 군부대가 밀집해 있는 산속 허름한 잡부 집이었다. 때는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이었는데 그이는 팔려온 첫날부터 군인들을 상대로 술을 끌고 몸을 팔아야 했다. 많을 때는 하루에 열명 이상의 군인들과 잠자리를 같이 한 적도 있었다.
  손님이 없으면 그이는 식모처럼 설거지를 하고 가게를 치우고 주인집 아이의 똥 기저귀를 개울에 나가 꽁꽁 언 얼음을 깨고 빨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주인은 월급을 기대했던 그이에게 불쑥 누런 장부책을 들이밀었다. 그이의 옷값, 밥값이 고스란히 빛으로 기재되어있었다. 주인은 "많은 돈을 지불하고 너를 샀다"며 "용돈밖에 줄 수 없다"고 통고했다.
  충격을 받은 그이는 며칠 후 밤도주를 했다.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은 그이는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신세가 서러워 내내 울었다.
  그이는 다시 돼지우리 같은 창동 방으로 돌아왔다. 며칠 후 생각지 않던 몸의 변화를 감지하고 그이는 깜짝 놀라야 했다. 무절제한 관계를 한 후유증으로 성병이 생것이다. 보건소를 찾아간 그이에게 의사는 매독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이는 한동안을 독한 페니실린 주사를 맞으러 보건소를 들락날락거려야 했다. 그이의 고통은 여서 그치지 않았다. 그이는 자신이 누구 아기인지도 모를 아기를 뱄다는 사실을 알고 무서움에 진저리쳐야 했다.
  시일이 지나면서 성병은 완치됐지만 아기를 낳는 것이 커다란 문제로 다가왔다. 그이는 식구들이 자신을 죽일 것만 같아 집안 식구 누구에게도 자신의 뱃속에 아기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혼자 끙끙대며 고민만 거듭해야 했다.

  그러다가 아기를 낳았다. 조산이었다.
  그 날 그이는 둘째 남동생과 심게 다퉜다. 남동생이 그이를 구타하고 방을 나간 후 그이는 곧바로 진통을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그이는 이를 악물고 혼자 아기를 낳았다. 계집애였다. 탯줄을 이빨로 물어 자르고 처치도 혼자 했다. 아픔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서둘러 아기를 숨겨야 했다. 그이큰 아기를 부엌 구석진 곳에 숨겼다. 때마침 어머니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모르긴 몰라도 아기는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었을 것이다.
  기가 막힌 듯 망연히 서있던 어머니는 한차례 통곡을 토해낸 후 그이와 아기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모녀가 찾아든 곳은 동대문 근처에 있는 어느 여인숙 방이었는데 어머니는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보자"고 말은 했지만 뚜렷한 대책이 세워질리 만무였다.
  그이는 하루하루를 아기에게 퉁퉁 불은 젖을 물리며 지냈다. 자신도 모르게 아기에 대한 정은 깊어만 갔고 그럴수록 어떠한 시련이 와도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간절한 모정이 싹텄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이의 이러한 심정을 외면하고 열흘이 지날 무렵 아기를 데리고 나가더니 빈손으로 돌아왔다. 모르는 남에게 양딸로 주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이는 눈물만 흘렸을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안 있어 그이는 막내 여동생 현주의 담임선생님 집으로 식모살이를 갔다. 거기서 다섯 달 있으면서 뼈 빠지게 일했는데 월급은 받지 못했다.
  애당초 많은 월급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동생들에게 용돈을 주고 학용품을 사줄 수 있을 정도의 대가를 요구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주인은 "나이도 어린 게 밥이나 먹고 있으면 됐지 월급은 무슨 월급이야"하며 그이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는 것이었다.
  그이는 미련 없이 식모살이를 그만뒀다. 이웃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그이가 다시 취직한 곳은 옷을 만드는 제품공장이었다. 거기서 한 달 여를 실밥을 뜯는 시다로 일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앉아서 일하다 보니 신발을 못 신을 정도로 다리가 퉁퉁 붓고 온 몸이 쑤시고 아파서 이번에는 자의로 제품 공장을 그만뒀다.
  집에서 쉬면서 그이가 괜찮은 직장으로 꼽은 것은 버스 차장이었다. 그이는 일단 마음의 결정이 서자 부지런히 버스회사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쉽게 직장이 구해지지는 않았다.
  그 즈음 어느 날의 일이었다. 그이는 그 날도 버스회사를 찾아갔지만 취직이 안 돼 크게 낙담해 있었다.
  공원의자에 앉아 고민에 빠져 있는데 대학생 가방을 든 웬 남자가 다가와 그이 곁에 앉았다. 그이는 그 남자에게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고 잠시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집요하게 뒤쫓아 오는 것이었다. 그이는 만사가 귀찮았으므로 그 남자를 상대로 말을 건네기가 싫었다. 그래서 추격을 피해볼 요령으로 낯선 길로 접어들었는데 어느새 그 남자가 길을 앞질러 그이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런 그 남자 모습이 어찌나 우스워 보였던지 그이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웃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다방에서 마주 앉았다. 그 남자는 자신을 대학생이라고 소개했다. 그 남자는 무슨 말끝엔가 그이 동생들 책가방을 좋은 것으로 새로 사주겠다고 했고, 또 재미있는 장편소설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그이는 아무 의심 없이 그 남자를 따라 나섰다. 미아리 고개 부근에 그 남자 자취방이 있었고 거기까지 따라간 그이는 그 남자와 몸을 섞으며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그 남자는 애초의 약속은 지킬 생각도 않고 그이더러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이는 단호하게"싫다"고 거절했다. 어차피 버린 몸 갈 곳도 마땅치 않은데 이 남자한테 매달려 봐야지‥‥‥그이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이가 쉽사리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 남자는 그렇다면 집이라도 알아두자며 그이를 앞세웠다. 두 사람은 자취방을 나와 창신동에 있는 그이 집으로 향했다. 지하실 계단을 내려서려 하자 그이 아버지가 맨발로 쫓아 나왔다. 그이아버지는 "화냥년이 어딜 들어오려고 하느냐"고 대뜸 욕을 퍼붓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결국 집에 한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하고 쫓기듯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날 밤부터 그이는 그 남자에게 매를 맞았다. 구타가 심해 기절까지 할 지경에 처하면서도 그이는 그 남자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오개월이 흘렀고 그이는 마침내 시골 사람인 남자의 부모를 대면할 수 있었다. 남자 부모는 "어디서 이렇게 탐스런 색시를 얻었노"라며 매우 흐뭇해했다. 남자 부모가 서둘러 그이는 그 남자와 동거 육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이의 나이 열아홉 살, 남자 나이 서른한 살이 되던 해 겨울의 일이었다. 남자는 물론 대학생이 아니었고 직업도 없었다. 전적으로 그이가 살림을 책임져야 했다.
  다행히 시부모가 어렵사리 돈 백만 원을 융통해줘서 그이는 그 돈으로 자취방 부근에 분식 집을 열고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이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히고 진물이 흐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음식을 만들어 팔았다. 그이의 이런 노력이 헛되지 않아 분식 집은 몰려드는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뤘고 장사는 그런 대로 잘 줬다.

  그런데 남편이 문제였다. 그이남편은 지나고 보니 성격 이상자였다. 남편은 술은 입에도 못 댔지만 소유욕이 강해 매사에 낭비가 심했다. 오토바이를 산다고 돈을 내놓으라고 했고, 비싼 옷을 사 입고 싶다고 그이를 다그쳤다. 그이가 돈이 없다고 하면 살림을 집어던지며 무지막지하게 그이를 구타했다. 언제나 요구는 친정에 가서 돈을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그이는 할 수 없이 결혼식 때 받은 닷돈 짜리 금목걸이를 팔았다. 액세서리 가게에서 비슷한 가짜 목걸이를 구입해 차고 돈을 남편에게 갖다 줬다. 그러자 남편은 만족했다. 돈이 수중에 있으면 잠잠했다. 그러나 돈이 떨어지면 또다시 그이에게 온갖 상스런 욕을 퍼부으며 주먹을 휘둘러 대는 것이었다.    그이는 눈물을 머금고 반지를 팔고 시부모가 몰래 쥐어준 돈도 내놓고 심지어는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 돈을 마련해 건네주었다. 그렇지만 남편의 심한 낭비벽을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그이는 결국 분식 집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분식 집을 처분하고 그이는 김밥, 찐 계란을 파는 행상으로 나섰다. 그이가 밖으로 나돌게 되자 남편은 이번에는 사사건건 그이의 남자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의처증이 생긴 것이다.
  남편은 그이가 행상을 나가기 위해 이른 아침 방밖에서 머리를 벗으면 "야 이년아 누굴 꼬시려고 아침부터 머리를 벗어!" 욕을 하며 살림을 집어던졌고 행상에서 돌아오면 "누굴 만나 무슨 짓을 했는지대라"며 그이를 다그치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주먹으로 때리는 것도 모자라 남편은 쇠파이프까지 휘둘러댔다.
  남편의 구타가 어찌나 심했는지 그이는 삼개월된 뱃속의 아기를 유산시켜야 했다. 입원비가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하고 하혈로 아기를 쏟아내던 날, 그이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런 충격적인 일이 있고 난 뒤에도 남편의 구타는 그치지 않았다. 나중에는 그이 얼굴에 시퍼런 멍자국이 가득해 남보기 창피해 행상마저 제대로 나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생계가 막연해진 그이는 궁여지책으로 셋방을 줄여 그이의 집에 있는 창신동 꼭대기 동네로 이사를 하고 손수레를 마련해 튀김 장사를 시작했다. 코흘리개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떡볶이도 팔고 잡채도 팔며 그이는 고통스런 나날을 이어갔다.

  결혼한 지 이년이 지나자 그이 속도 모르고 시부모가 아기를 독촉했다. 시부모는 임신에 특효가 있다는 한약을 사서 보내주고 베개에 넣으라며 부적도 보냈다. 남편은 한술 더 떴다. "결혼 전에 몹쓸 병을 앓았던 것이 아니냐"며 그이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고 "아기가 안 생기는 것이 이상하다"며 구박을 주었다. 그이는 남편의 성화를 보며 아이라도 하나 있으면 남편이 정신을 차리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게 됐다.
  그래서 남편과 시부모에게 임신을 했다고 속이고 시내 산부인과병원을 찾아다녔다. 풍문으로 병원에는 아기를 낳고 도망치는 미혼모들이 많다는 소문을 접해서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개월 수가 맞고 혈액형이 비슷한 아기는 쉽게 구해지지가 않았다. 그이는 초조했다. 급기야 구로공단 부촌의 병원까지 뒤져 그이는 겨우 한 미혼모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 미혼모는 태어날 아기가 비형의 혈액형을 가졌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비형은 남편의 혈액형이었다. 그이는 미혼모에게 약간의 입양 비를 주고 한 달 후 아기를 건네 받았다. 사내아이였다. 아기가 생기자 그이는 남편에게 친정할머니집에서 아기를 낳겠다고 속이고 성환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실제로 아기를 낳은 것처럼 할머니 집 대문에 고추를 엮은 새끼줄을 내걸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은 그이 기대 이상으로 아이를 귀여워했다. 남편은 다섯 오, 두루 주, 오주라고 아이 이름을 짓고 아이가 땅에 떨어질세라 품에 안고 다니며 이웃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아들 자랑을 하고 다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편은 이제 마음잡고 살겠다며 평생 갖지 않던 직업을 갖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남편이 직업으로 선택한 일은 오토바이를 타고 고물상을 드나들며 중고 전자제품을 사고 파는 중개업이었다. 직업은 가졌지만 남편은 단 한 푼도 집에 들여놓지 않았다. 고작 반찬거리만을 사올 뿐이었다.
  여전히 생계를 꾸려 가는 것은 그이 몫이었다. 오주가 팔 개월이 되자 양육비가 만만치 않게 들어갔다. 설상가상으로 그이 뱃속에는 또다시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 그이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아기를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 난폭한 남편, 문란한 자신의 성생활, 둘 사이에서 과연 제대로 된 아기가 태어날 것인가. 그이는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이는 달라빛을 얻어 쉽게 아이를 지워버렸다. 오주는 커가고 그에 비례해 그이가 진 빛은 산더미처럼 늘어만 갔다. 그이는 온전한 직업으론 도저히 빚진 돈을 갚을 길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이가 생각 끝에 착안해 낸 손쉬운 돈벌이는 다름 아닌 몸을 파는 것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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