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이 사람들] 인생살이가 그래, 지내고 나면 우습기도 하고.. > 세상, 한 걸음


[이 땅의 이 사람들] 인생살이가 그래, 지내고 나면 우습기도 하고..

본문


인생살이가 그래
지내고 보면 우스운 일도 쌨고

구술/최우지

내가 살아온 얘기를 어째 다 해? 사연이 많지 뭐.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85년도였을 거야. 내 딸하고 같이 잠자다가 연탄 가스중독을 만났어. 시방 생각해도 아찔해. 방바닥에 등어리가 다 타도록 몰랐으니께. 죽지 않고 살아난 게 희한하지. 그때 내 눈이 간 거야. 그 몇 년 전에 녹내장으로 한쪽 눈을 잃은 상태에서 나머지 한쪽 눈마저 그때 가뿌렀지 뭐.

  내가 내 딸하고 여기 온 것은 지난 89년도 3월이야. 그러니께 올해가 4년째지.
  내가 살아온 얘기를 어째 다 해? 사연이 많지 뭐.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86년도였을 거야. 내 딸하고 같이 잠자다가 연탄가스 중독을 만났어, 시방 생각해도 아찔해. 방바닥에 등어리가 다 타도록 몰랐으니께. 죽지 않고 살아난 게 희한하지. 그때 내 눈이 간 거야. 그 몇 년 전에 녹내장으로 한쪽 눈을 잃은 상태에서 나머지 한쪽 눈마저 그때 가뿌럿지 뭐.
  한쪽 눈을 잃을 때도 녹내장이 뭣인지 백내장이 뭣인지도 몰랐는데, 하도 눈이 아파 약방 가서 눈이 아파서 그러니께 약 좀 달라고 했지. 하이구 근데 약사가 "할무이 그러지 말고 병원에 가 보세요. 그러다 실명하는 수도 있어요" 이러는 거야. 겁이 나서 얼른 병원에 달려갔지. 갔더니 벌써 한쪽 눈이 가망이 없다 그래. 조금만 일찍 왔어도 약으로 다스릴 수 있었을 긴데 실명됐다고 그러드만.
  녹내장이라고 알기 전에는 눈병이 아니라 심장이 잘못되어 그런지 알았어. 자판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도 침침하고 그렇대 처음엔. 아로나민이 처음 나을 땐데 약방에서 그걸 주길래 먹었어. 그랬더니 한1년은 거뜬하대. 근데 또다시 가슴이 띵하고(찡하고) 눈이 잘 안 보이고, 그렇게 눈병을 앓았어.
  한쪽 눈만 갖고도 그럭저럭 살았는데 가스중독으로 내 한쪽 눈하고 재까지 저렇게 가뻐렸어. 중독사고 이후 재는 영 못 보네.  내 딸은 이중 장애인 셈이야. 정신이 올찮아서(온전치 않아서) 정신병원에도 다니고 그랬어. 지금도 계속 약으로 버텨.
  영감도 없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은 무능하고, 시집간 딸한테 얹혀 살 수도 없고‥‥‥ 근근이 지내고 있는데 라디오에 "루디아의 집"이 생긴다는 방송이 나오대. 우리 같은 시각장애자 노인들 돌봐주는데가 있다고. 이웃 사람들이 자꾸 연락해 보라고도 카고, 시집 간 큰딸이 루디아의 집을 운영하는 선교회를 찾아가서 사정 얘기를 해서 오게 된 거야.
  50세 이상만 받아준다 캤는데 재가 서른아홉 살이지만 우리 사정얘기를 듣더니 딱하다고 오라 그러대. 그래서 왔지 뭐. 내가 없으면 저게 아무 것도 못 해. 그러이 내가 눈을 감고 있어도 데리고 있어야 되지 뭐.

  내 나이가 쉰둘이었을 때 영감임이 돌아가셨어. 70년도였을 거야. 그때 까정은 우리 다섯 식구 그냥저냥 영감님이 버는 돈으로 살았는데 뇌졸중으로 영감님이 죽고 나자 갑자기 막막해진 거지.
  원체 생활력이 없지, 나서서 리할 수 있는 게 있어야제. 시집 간 큰 딸이 좀 보태주고 동사무에서도  보태주고 교회 다닌께 교회서도 보래주고 했제.
  아무래도 재는 고등학교 다닐 제 쇼크를 받았나 봐. 서울여상을 나왔는데 졸업하자마자 저렇게 됐뿠어. 앞날이 창창한 젊은 게 정신이 오락가락한께 어떻게든 고쳐 본다고 별 짓을 다 했제.
  지 아버지 산소를 잘 못 써서 그렇다는 얘기도 있어 고향 산소 앞에 가서 굿도 하고 별 짓을 다 했제. 너무 당황해서 국립정신병원에서 좋다는 약을 지어다 먹였제. 약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저렇게 살이 막 쪘어.
  약도 먹고 해서 중도에 괜찮겠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야. 독한 약을 먹어서인지 눈이 안 좋았는데 설상가상 가스중독을 만난 거야. 눈도 안 보이고 정신도 오락가락하고, 지금도 저렇게 멀쩡해 보이지만 정신이 없어.
  재가 저렇게 된 게 따지고 보면 집안 때문인거 같애, 서울여상 시절 졸업하기 전에 취업이 되어 첫 직장엘 나가게 됐어, 담임선생님이 추천을 해주어서 갔는데 그곳에 미리 고등학교 2학년짜리 아이가급사 노릇을 하고 있더래. 지는 고3이고 걔는 고 2니까 한께 일하기가 좀 그랬나 봐. 근데 개가 먼저 왔다고 그랬는지 얘를 무시하고 헐뜯고 그랬나 봐. 그래서 결국 배겨나지 못하고 나오고 말았어. 그 일이 얘한테는 충격이 됐나 봐. 첫 직장인데가 마음도 여리고, 안 그래도 지나치게 내성적이고 친구 사귀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아인데 그 일을 혼자 삭히기엔 너무 버거웠겠지.
  집안 사정은 어렵고, 빨리 취직을 해야 되는데 자리는 안 생기고,

처음에 눈이 안 보였을 땐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제. 시방도 답답해. 그 답답함을 다 말할 수 없제. 이제 가고 싶어도 갈 수도 없고, 가고 싶은 데도 없어.
앞으로 무슨 소원이 있겄어. 우리 루디아의 집 잘 되고, 죽어 하늘나라 가는게 소원이지.

다른 아이들은 졸업 전에 다 취직돼서 나가는데‥‥‥ 이런 와중에 어느 날 얘가 학교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괜히 웃는 거 있잖아. 이유도 없이 막 웃더라고. 재 언니하고 나하고 재가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얼마나 당황을 했는지 몰라. 그때부터 얘가 잠도 안자고 지금까지 약을 먹었어.
  그때의 일이 속에 깊이 박혀 있는 거 같애 내 생각은. 애가 워낙 얌전코, 말도 없고, 묻는 말에나 대답하고 하는 성격이었어. 겉으로 내뱉지 못한 게 병이 된 거지, 지는 아버지도 안 계시니께 취직해서 어려운 가정에 어쨌든 보탬을 줄라 캤는데 그 희망이 깨지니께 그게 속상했나봐. 용인병원에 20개월 있기도 했어.
  여기 와서도 이러구 들어앉아 있으니께 우울중이 더 심해지나 봐. 엉뚱한 소리도 자꾸 많이 해. 지도 갑갑하니께, 그래두 여기밖에 있을 데가 있어야지.
  인생살이가 그래. 지내고 보면 우스운 일도 쌨고. 살다보면 그런 거지.
  내가 태어난 곳은 시 방은 충무라고 하는 통영이야. 오빠 셋 언니 둘 모두 6남매였는데 내가 막내였지. 내가 어렸을 제 우리 집은 잘살았제. 삼천포에서 큰 상점을 했는데 그만하면 부자라고들 했지.    왜정시대고 해서 나라가 어려웠는데 난 부유한 가정에서 넘(남)부럽지 않게 살았제.
  지금도 옛날 생각이 많이 나.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 삼천포 보통학교 시절 십리를 걸어서 동무 집에 가 놀던 기억도 나고, 학교 파하고 집에 가다가 물가에서 장난치고 놀던 일, 바닷가에 가서 해수욕도 하고 조개비도 줍어 가지고 바꿈 살던(소꿉놀이 하던) 일, 그런거 생각나지.
  내 이름이 최우지인데 또우(又)자에 당연지(只)자야. 어렸을 젠 동네 동무들이 또지라고 불렀어, 그래서 그게 별명이 된 거야.
  열여덟에 결혼을 해서 고생도 많이 했제. 왜정시대에는 영감님이 철도 경찰이어서 안동으로 목포로다시 서울로 이사도 많이 댕겼제. 아들 하나 딸 둘 남아서 키웠는데 영감이 쉰여섯 살에 돌아가시니 께 남겨놓은 유산도 없고, 살기가 어려워겼제. 6·25 이후에는 양장점을 했는데 영감이 돌아가신 이후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제. 내가 할 줄을 알아야제. 그때의 고생을 우째 다 말로 해. 넘사스런 이야기야, 그저 그러구러 세월이 간 거야.
  내 나이가 일혼 둘이니까 부모님도 다 돌아가시고, 형제들도 다 돌아가셨제. 지금 삼천포에 언니만 살고 있어. 살아 있어도 못 본지 오래야.
  큰 딸이 시집가서 성남에 살아. 미용기술을 새로 배와 가지고 미장원하면서 도와주제. 지금도 가끔 찾아 와. 지도 시집가서 셋방살이 하는데 엄마와 동생은 이러고 있지, 하나 밖에 없는 오빠도 무능력자로 있지, 지도 애가 터지제. 내가 모르는 게 아니야. 걔 짐을 들어주어 야제.

  루디아의 집에 있는 우리 식구들은 다 할무이들이야. 여기서는 50대를 "젊은 언니"라고 부르고 60대70대 할무이들을 그냥 "할머니"라고 불러.
  다 모르는 사람들이 모였제. 전라도서도 오고 경상도서도 오고, 또 서울에 살던 사람도 있고 여러 곳에서 모였어. 열 식구가 있고, 봉사해 주시는 권사님이 한 분 있어.
  우리 식구들이 모여 앉으면 별얘기를 다 해. 살아온 것도 참 기구해.
  내하고 한방에 있는 올해 칠십 아홉 된 큰 할무이는 자손이 없어. 영감님 돌아가시고 시누 댁에 가서 살다가 그 시누조차 돌아가시자 그 며느리가 돌봐주었는데 결국은 이리로 왔제. 눈은 조금 보여도 당뇨가 심하고 걸음도 잘 못 걸어서 옆에서 다 돌봐 줘야 해.
  또 한 할무이는 육십 구센데 제주도 근처에 있는 무슨 섬에서 왔어. 그 할무이는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쳤어. 늘 머 리가 아프다 그래.
  또 육십 팔세 된 한 할무이는 우리 방에 같이 있는데 고혈압으로 쓰러졌어. 그래서 실명했는데 처음엔 말도 못 하더이 지금은 말은 잘해. 말은 그럭저럭 하는데 손으로 움직이는 걸 아주 못해. 또 분별력이 없어서 수건을 주면 수건인가양말인가 구분을 못해. 웃도록 입혀줘야 하고, 찾아줘야 하구 내가일일이 약도 먹여주고 그래. 한방에 있은께 내밖에 할 사람이 없어.
  나는 보이지는 않지만 손으로 더듬거려서 웬만한 건 다 할 수 있어.내 딸하고 모두 네 명이 이 방에 있는데 내가 다 돌봐줘야 돼. 나도 내가 할 일이니께 하지 정신이 없을 때가 많아. 나이가 많으니께.
  옆방에 있는 젊은 언니들은 지팽이 짚고 제법 다니기도 해. 우리 할무이들 심부람(심부름)도 해 주구 선교회에 나가 점자도 배우고 그래. 기억력도 있고 영리하니까.
  아주 어렸을 적부터 보지 못했던 식구가 세 사람이야. 시집도 안 가고 그렇게 살고, 할무이들은 다 중도실명이라 가족도 있고 결혼도 했던 할무이들이야. 이제 여기서 여생을 보낼 수밖에 없제.

  처음에 눈이 안 보였을 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제. 시방도 답답해. 그 답답함을 다 말할 수 없제. 이제 가고 싶어도 갈 수도 없고, 가고 싶은 데도 없어.
  앞으로 무슨 소원이 있쳤어. 우리 루디아의 집 잘 되고, 죽어 하늘나라 가는게 소원이지. 

최우지 할머니는 시각장애인노인들이 기거하는 "루이다의 집"에 살고 있다. 비록 두 눈이 보이지 않고, 사랑하는 딸마저 시력장애와 정신장애를 겪고 있지만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일흔의 나이에 최우지 할머니가 간직한 낙천성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정 리·고은경/본지기자>

작성자고은경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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