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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희정이 엄마 박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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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호에 이어서 남편의 학대는 멈추지 않고 이어져 번번이 끝없는 절망의 나락에 빠져 신음해야 했다. 남편은 오주가 넘어져 무릎을 다치기라고 하면 "아이를 잘못 본다"고 그이를 무지막지하게 구타했고 와이셔츠를 입다가 단추가 하나 떨어지면 난리를 치며 그 자리에서 옷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이는 남편이 집에 없는 한낮, 오주를 약간의 돈을 주고 이웃집 할머니에게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치장을 하고 을지로로 나갔다. 그 당시 을지로 유명극장 주변에는 신종 매춘이 성행하고 있었다.
  극장 앞에서 서서 사람을 기다리는 척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서 있으면 말쑥하게 차려 입은 중년 남자들이 다가와 치근덕거렸다. 따라오라고 눈짓을 보내는 남자를 못이기는 척 따라가면 고급 여관에서 한낮의 정사를 벌이게 되는 것이다.
  남자들은 일이 끝나면 그이가 요구하지 않아도 차비 하라며 몇 만원씩 손에 쥐어 주었다. 혹 가다 재미를 본 남자가 돈을 주지 않으면 그이는 그 남자를 못나가게 막고 돈을 타내는 억척을 부리기도 했다. 돈도 돈이지만 무엇보다 매일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할 수 있어서 그이는 그 일이 마음에 들었다.
  그이는 그렇게 두 달 여를 몸을 팔았다. 어떤 날은 양쪽에서 남자들이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내 이쪽 저쪽 눈치를 보다가 모두 놓쳐버려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나가자마자 터주대감 창녀들에게 걸려 묵사발이 되도록 몰매를 맞기도 했지만 빚을 갚아야 했기에 그이는 모든 어려움을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이의 발버둥이 헛되지 않아 그이는 두 달 후 동생에게 약간의 돈을 빌려 보태 간신히 그동안 진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빚을 갚고 나자 그이는 더 이상 을지로로 발걸음을 향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이는 한동안 집에서 오주를 키우는 데에만 정성을 쏟으며 지냈다. 그러다가 그이는 새로운 직업으로 일일 학습지를 배달하는 일을 시작했다. 오주를 새마을 유아원에 맡겨 놓고 그이는 부지런히 창신동 산꼭대기를 누비고 다녔다.
  처음에는 본사에서 백 부를 배당 받아 한 부당 일천오백원의 수당을 받으며 시작한 일이 점차 두배 세배로 늘어나 배달 건수가 많아지면서 그이는 꽤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그 수입 덕분에 생활은 가까스로 찌들림을 면했다. 모두가 그이가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몸부림친 결과였다.
  그런데 남편의 학대는 멈추지 않고 이어져 그이는 번번이 끝없는 절망의 나락에 빠져 신음해야 했다. 남편은 오주가 넘어져 무릎을 다치기라도 하면 "아이를 잘못 본다"고 그이를 무지막지하게 구타했고 와이셔츠를 입다가 단추가 하나 떨어지면 난리를 치며 그 자리에서 옷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결벽증까지 생겨 그이가 밥상을 들고 가다 접시에 담긴 김이 한 장 흩어지기라도 하면 밥상을 뒤엎어 버리기 일쑤였고 신발장에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있지 않다고 애써 장만한 살림을 집어 던지곤 했다.
  그때마다 그이는 집을 뛰쳐 나가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다. 하지만 오주 때문에 그이는 차마 가출을 결행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이는 자신에게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해 들려주며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지내야 했다.

  그 즈음 남편이 잦은 외박을 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새벽녘에 나가서 다음날 새벽에 들어오는 날이 많았고 걸핏하면 "상갓집에 다녀왔다" "친구를 만나 밤새 술상대를 해줬다"는 등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남편에게 뭔가 심상치 않은 변화가 생긴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이는 애써 이를 모른 척 했다. 꼬치꼬치 캐물으면 남편은 분명 폭력을 휘두를 터였다. 그리고 그이의 몸에 또다시 아이가 생겨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그이는 가정이 깨질까 봐 겁이 났다. 그이는 어떻게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남편의 외도가 드러나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결코 원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이는 남편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전혀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일찍 웬 낯선 여자가 집으로 찾아왔다. 그 여자는 문 밖에서 "정씨 있어요?" 그이의 남편을 찾았다. 남편은 "에이 저 여자 또 왔네." 싫은 기색 없이 그 여자를 따라나섰다. 그 날 저녁 그이는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여자 누구예요?" "응, 내가 거래하는 고물장수 마누라야." 남편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여자는 남편보다 열한 살이나 위인 연상의 여자로 무척 사치스럽고 짙은 향수 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바람난 여자였다. 얼마 안가 그 여자와 남편이 정을 통하는 사이라는 소문이 온 동네에 꼬리를 물고 퍼져갔다.
  그 소문을 입증이라도 하듯 어느 날 그 여자의 남편이라는 늙수그레한 남자가 그이를 찾아왔다. 남자는 상기된 표정으로 "애기 엄마, 댁의 남편과 내 마누라와의 관계를 알고 있수?" 그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남자는 " 두 사람을 고소해야겠으니 나를 도와 증인을 서주구려." 애원했다. 그이는 "그건 곤란해요. 아저씨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아저씨가 알아서 하세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남자가 힘없이 돌아섰다. 걸어가는 뒷모습이 무척 측은해 보였다. 며칠 후 남자가 홧김에 농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이는 한순간 심한 죄의식을 느꼈다.
  그 여자와 그이 남편은 장애물이 없어지자 때를 만난 든 본격적으로 드러내놓고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남편은 아예 며칠씩 그 여자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둘이 오토바이를 타고 놀러 다니는 걸 봤다느니, 둘이 시장도 같이 보러 다니는데 꼭 부부 같더라는 동네 아낙네들의 수군거림이 그이의 인내심을 자극했다.
  그이는 그 여자를 찾아갔다. "아주머니,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아주머니 남편은 자살까지 했는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세요? 이럴 수는 없는 일 아니에요. 망가진 제 인생을 보상하세요." "흥.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네년이 오죽 못났으면 사내가 바람을 피워!" "뭐라구요?" 말싸움이 감정 싸움으로 번지고 나중에는 서로 할키고 물어뜯는 육박전이 벌어졌다. 힘에서 밀려 나동그라진 그이는 너무 억울해 긴 시간 한서린 통곡을 꺼이꺼이 토해냈다.

  그이는 탈진해 기진맥진한 상태로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서는 조산의 가능성이 있다며 응급치료만 해주고는 산부인과에 가라고 했다. 동네 산부인과에 입원한 그이는 임신 팔 개월만에 아기를 낳았다. 그 아기가 바로 희정이다.
  그러나 이기가 태어난 기쁨도 잠시. 그이는 이어진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절망해야 했다. 그이는 남편을 붙잡고 "제발 그 여자와 관계를 끊으세요." 눈물로 애원했지만 남편은 "네가 뭔데 참견이야!" 번번이 그이의 애원을 묵살했다.
  그이는 별 수 없이 마침내 칼을 빼들었다. 고발 외에 다른 대책이 없었다. 그이는 남편과 그 여자를 묶어 간통죄로 경찰에 고발했다. 상황이 그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남편은 전혀 반성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뒷바라지를 위해 경찰서를 찾아간 그이에게 "빨리 내보내 달라"고 고래고래 고함만 칠 뿐이었다.
  그이는 결국 한달 여만에 고소를 취하했다. 경찰서를 나온 남편은 대뜸 "네가 나를 경찰서에 넣을 수 있느냐.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 두고 봐라, 내가 복수를 할 것이다……"이를 갈며 그이에게 손찌검을 했다. 그이는 흡사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려야 했다.
  남편의 횡포는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남편은 시도 때도 없이 돈을 내놓으라며 그이를 구타했다. 나중엔 화냥년이라느니, 남편 잡아먹을 년이라느니 입에 담기 힘든 욕까지 퍼부어 대며 방안의 전깃줄을 모조리 끊어대는 광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냉장고를 비롯한 값나가는 전자 제품을 몽땅 다 팔아먹고, 그것도 모자라 방에 불까지 지르려 했다.
  겁이 난 그이는 이혼을 요구했다. 도저히 같이 살 자신이 없었다. 남편은 그이가 전세금 오백 만원을 빼주겠다고 하자 돈이 욕심이 나서인지 순순히 이혼에 응했다. 헤어지면서 남편은 오주는 자신이 키우겠다고 우겼다. 그이는 마음이 몹시 아팠지만 별 수 없이 남편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이는 희정이만 데리고 빈 몸으로 남편과 갈라섰다. 그때가 희정이가 막 백일이 될 무렵이었다.
  딱히 갈 곳이 없었던 그이는 성남시 태평동 아파트에 사는 동생 현주씨를 찾아갔다. 당시 현주씨는 호스테스 일을 하면서 큰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동생의 아파트에 거처를 정한 그이는 다음날부터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고 일을 했다.

  파출부를 나가기도 했고, 보험회사 외판사원, 삼성전자 부녀사원으로 거리를 헤매기도 했다. 나중에는 빌딩 유리창을 닦는 청소부로 나서기도 했다. 안 해본 것이 없이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한 후 그이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직업은 아이를 돌보는 탁아모였다.
  그이는 동생의 아파트에서 맞벌이 부부의 아이 십여명을 대신 맡아 돌봐주고 대가로 양육비를 받았다. 그이는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으므로 열의를 가지고 아이들을 돌봤다.
  그런데 그 즈음 그이의 몸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손마디가 굵어지고, 코가 커지고, 턱이 네모낳게 각이 지고, 이마가 넓어져서 얼굴 전체가 보기 흉하게 일그러지는 것이었다. 그이는 거울을 쳐다보며 이 이상한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찌들어서 그러려니, 그이는 몸의 변화를 고생 탓으로 여기고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이가 자신의 장애를 확인한 것은 그때로부터 이년 후인 팔팔년 오월이다. 어느 날 그이는 당시 어머니와 이혼을 하고 부천 올케 집에 얹혀 살고 있던 아버지 박종용씨가 계모와 따로 살림을 난다고 해서 이삿짐을 날라주러 부천에 갔다.
  이삿짐을 나르고 난 후 그이는 자꾸 몸이 말라서 끝없이 물을 들이켜야 했다. 배가 고파서 그런가보다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밥을 먹고 나서도 갈증은 그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며칠 후 그이는 아버지 보약도 지을 겸 자신의 증상에 대해서도 알아볼 겸 동네 한의원을 찾았다. 한의사에게 증상을 얘기하자 한의사는 "당뇨병인 것 같다"며 큰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라고 일러주었다. 다음날 그이는 미심쩍어 동네 병원을 찾았다. 그이를 진찰한 의사는 한 술 더 떠 "당뇨병에 뇌종양이 겹쳤을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하며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 보라고 진단서를 떼줬다.

  그이는 전문지식은 없었지만 뇌종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느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이는 하늘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 같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제발 오진이길 빌고 또 빌며 그이는 국립의료원 신경외과를 찾아갔다. 거기서 검사비 삼십만원을 들여 컴퓨터 촬영을 했다. 결과는 우려했던 대로 악성뇌종양이었다.
  그이는 뇌종양 제거 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담당 의사는 그이의 당뇨병이 심해 수치가 내려가야 수술을 할 수 있다며 한 달이 넘게 수술을 미뤘다. 없는 살림에 하루에 몇 만원씩 지불해야 하는 입원비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이는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받게 해달라고 의사를 졸랐다.
  그이의 독촉이 주효해서 그이는 병원에 입원한지 한 달 보름만에 뇌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수술을 실패였다. 의사는 생명의 위험 때문에 종양을 반밖에 제거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이는 열흘을 더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지내야 했을 뿐 심각한 후유증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이는 성남 동생 아파트에서 여덟살 희정이의 간호를 받으며 동네 주민들의 도움으로 한동안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려했던 증상이 나타났다. 우선 말문이 막혀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이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방바닥을 기어야 했다. 그이는 그런 증상이 며칠째 계속 되자 어쩔 수 없이 생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무렵 동생도 나가달라고 독촉을 해댔기 때문에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이는 희정이를 시켜 한 알 두알 수면제를 사 모았다. 막상 죽음을 눈앞에 두자 생각지 않던 갖가지 회환이 그이를 엄습했다. 그이는 시도 때도 없이 서러움에 겨워서 눈물을 쏟아냈다.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너무도 억울해서 그이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살려 주세요. 이대고 죽기에는 너무 억울해요. 누가 나 좀 살려 주세요." 그것은 처절한 비명이었다.
  때는 추석 전날 저녁이었다. 갑자기 그이가 누워 있는 방문을 박차고 건장한 남자 두명이 뛰어들었다. 두 남자는 그이가 영문을 몰라 허둥대는 사이 다가와 양쪽에서 그이의 팔을 붙들었다. 그런 다음 그이를 강제로 끌어내 앰뷸런스에 태웠다. 그이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하지만 완강한 완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이가 끌려간 곳은 용인 정신병원이었다. 병원에 도착해서야 그이는 자신이 정신병원에 끌려온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동생이 그이가 심한 발작을 일으키고, 희정이를 때리며. 손버릇이 나쁘다는 등 몇 가지 증상을 들어 그이가 미쳤다고 신고했다는 것이다.
  그이는 의사에게 "나는 미치지 않았다"고 얘기하고 "나가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그런 장애로 인해 말이 어중해 그이의 의사가 의사에게 정확하게 전달 될 수는 없었다. 그이는 식음을 전폐하고 울면서 희정이만 목놓아 불러댔다. 정신병원에서는 그런 그이를 정신병자로 단정하고 딴 짓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명분 하에 그이의 팔다리를 끈으로 묶었다. 옴짝달싹 못하게 된 그이는 더욱더 세차게 울면서 몸부림쳤다. 그러자 약이 강제로 입속으로 들어오고 심지어는 매를 맞기도 했다.
  얼마후 그이는 여섯평 공간에 치매증에 걸린 십여명의 할머니들이 수용되어 있는 방으로 보내졌다. 그 방에서 그이는 할머니들이 배설 해 놓은 똥오줌이 그때그때 치워지지 않고 방치되어 있어 악취가 진동해 오물을 치워 달라고 우는 게 일인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즈음 아버지와 헤어져 서울에서 식당살이를 하고 있던 어머니 김진순씨가 한 달에 한 번 그이를 찾아왔다. 모녀는 면회실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다 돌아서곤 했는데 그나마 어머니의 방문이 그이에겐 큰 위로가 되곤 했다.
  정신병원에 수용된 지 일년여만인 팔구년 가을 어느 날, 그이는 어머니가 책임을 진다는 전제 하에 정신병원을 나올 수 있었다. 어머니는 수원 시내에 월세방을 얻어 그이를 데려다 놓고 "나는 일해야 되니까 며칠 후에 오겠다. 생활비는 염려말고 여기서 밥 해먹고 지내거라."그이를 남겨놓고 훌쩍 떠났다.
  그날 밤 그이는 자살을 시도했다. 그이는 먼저 끈으로 자신의 목을 졸랐다. 그러나 질식사는 힘이 모자라 역부족이었다. 그이는 독한 결심을 했다. 불에 타 죽기고 한 것이다. 그이는 가방에서 옷가지들을 꺼내 놓고 천천히 성냥을 그었다. 잠시후 빨간 불꽃이 벽지를 타고 방 안으로 번져갔다. 그이는 "이젠 죽는구나"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이가 깨어난 곳은 병원이었다. 그이는 눈을 뜨자마자 질긴 목숨이 서러워 한바탕 통곡을 토해냈다. 연락을 받고 아버지가 달려왔다. 아버지는 그이를 다시 용인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그이에게 있어서 두 번째 정신병원 생활은 처음보다 훨씬 더 참혹한 것이었다.  정서불안정을 이유로 면회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그이는 어머니를 대면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정문에서 먹을 것만 들여보내 주고 힘없이 돌아서곤 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묶인 양다리에 종양이 생겨 그이는 내내 아픔 때문에 신음해야 했다. 그이는 수차래 치료를 요청했지만 병원에서는 붕대만 감아줬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외면했다. 그이는 결국 속수무책으로 기어다닐 수조차 없는 최악의 상태에 다다르고 말았다.
  그이가 다시 정신병원에 수용된 지 일년여 후인 구십년 시월 어느 날 뜻밖에도 동생들이 찾아왔다. "꿈자리가 이상해 찾아왔다"고 운을 뗀 동생들은 그이가 고통을 호소하자 " 일단 병원에서 호르몬 주사를 맞아보자"며 그 자리에서 퇴원 수속을 밝았다. 그래서 그이는 정신병원을 나와 성남 인하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서 두달 여를 다리 치료를 받으면서 비로소 그이는 그이의 장애가 말단비대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전율했다. 지속적인 치료덕분에 다리에 난 종양이 없어지자 그이는 퇴원했다. 퇴원한 그이는 성남 동생 집에서 한달 여를 기거하다가 작년 일월 아버지와 계모가 살고 있는 성환읍 성환리 삼구 사사구에 사삼번지, 그이가 태어난 옛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그이는 현재 영세민으로 지정돼 동사무소에서 주는 한 달 사만 여원의 생활비로 국민학교 사학년에 다니는 딸 희정이와 함께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와 계모가 한 집에 같이 살고 있기는 하지만 따로 사는 것과 마찬가지인 전혀 별개의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밥도 따로 해 먹고 빨래도 희정이가 한다.
  작년 초 장애를 가진 채 집에 돌아온 그이를 아버지는 드러내놓고 구박했다.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면 아버지는 " 내 눈앞에서 없어져라!"며 그이를 짓밟아댔다. 그것도 모자라 닥치는 대로 살림살이를 집어던져 그이의 유일한 재산인 라디오가 이때 박살나기도 했다. 이무렵 아버지는 전기세 나간다고 방안의 전기선을 모두 끊어 놓기도 해 그이는 한동안 암흑 속에서 밤을 지새야 했다.
  아버지는 "네가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이렇게 나를 괴롭히느냐"며 그이를 몰아세웠다. 그이는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어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계모도 그이를 구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계모는 "내가 저년 꼴을 어떻게 보고 사느냐"며 대놓고 그이에게 면박을 줬고, 그이의 눈앞에서 "나는 도저히 같이 못산다"라며 아버지를 다그쳤다. 참다 못한 그이가 뭐라고 흰소리를 하면 말대꾸한다고 계모는 그이에게 손찌검을 해대곤 했다. 그야말로 하루라도 맘 편할 날이 없는 악몽의 연속을 그이는 헤쳐 나와야 했다.

  그이는 작년 여름 엉뚱한 짓을 하기도 해 아버지의 미움을 더 받게 됐다. 막내동생이 찾아와 약값에 쓰라고 준 돈 오십 만원을 선뜻 수재민 돕기 성금으로 기탁한 것이다. 그이가 수재의연금을 냈다는 소문이 지역 사회에 퍼지면서 국회의원, 도지사, 군수 등이 직접 찾아오거나 혹은 서신을 보내왔다.
  "생활보호 대상자로 병마와 싸우면서 본인의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더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는 마음으로 생활비를 수재의연금으로 기탁하신 귀하의 선행에 대하여 감사 드립니다." 그이는 생전 처음으로 좋은 일을 한 것 같아 가슴이 뿌듯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이가 "주제파악을 못한다"며 "나가 죽어라!" 그이를 구타하는 것이었다.
  그이는 집에 있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어떻게든 집을 떠날 궁리를 하며 하루 하루를 지냈다. 올해 초 어느날 마침 동사무소 직원이 찾아와 음성 꽃동네에 들어가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해왔다. 그이는 선뜻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희정이는 안되고 그이 혼자만 들어갈 수 있다는 조건이 뒤따라다. 그이는 죽으면 죽었지 희정이와 떨어져 살 수는 없었다. 그이는 눈물을 머금고 그 제의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이는 얼마전 병원에 다녀왔다. 병원에서는 씨티촬영 결과 그이의 뇌종양이 다시 자라고 있다며 "생명을 연장하려면 시급히 수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이는 돈이 없어 수술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그이는 자신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으며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두려움에 어쩔 수 없이 떨고 있지만 그이의 능력으로는 죽음으로 가는 열차를 정지시킬 수 없어 깊은 체념에 빠져 있다.
  그이는 요즘 두 모녀를 받아 줄 곳을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있다. 앉아 있는 것도 점점 힘들어 누워서만 지낸다는 그이. 손발이 저려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그이는 상심한 표정으로 "언제까지 살지는 몰라도 내가 살아있는 그 날까지 희정이와 떨어지지 않고 같이 사는 게 유일한 소망이에요." 담담하게 말했다.

  이쯤에서 희정이 이야기를 하자. 희정이는 최근 일기장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일기를 쓴적이 있다.
  "나는 방학동안 청개구리 이야기를 엄마한테 들었다. 엄마는 아픈 뒤로 걸음도 못 걷고 말도 못하신다. 그래서 글씨로 종이에 써서 나에게 주곤 한다. 항상 설거지 등 갖은 심부름도 내가 해야만 된다. 그래서 엄마는 청개구리 이야기도 글로 써서 나한테 읽어보라고 주셨다. 나는 재미있게 마당에서 고무줄하며 놀고 있었다. 엄마가 갑자기 부르길래 무슨 심부름이나 시키겠지하며 귀찮게 생각하며 엄마한테 가 보았다. 엄마는 글로 쓴 청개구리 이야기를 쓴 종이를 나한테 읽어보라며 주셨다.
  엄마는 내가 이야기를 다 읽고 난 뒤에 너도 아기청개구리 같다고 말씀 하셨다. 나는 마당으로 돌아와 다시 하던 고무줄 놀이를 하며 생각해 보았다. 사실 나는 말썽만 피우고 엄마의 심부름도 잘 안했다.
  우리 엄마는 지금 많이 아프시다. 나는 병든 엄마를 괴롭혀 드리고 심부름도 안했다. 나도 이제부터는 엄마 말도 잘 듣고 심부름도 잘 해드려야겠다. 그래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이의 설명에 의하면 희정이는 학교를 갖다 오면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이를 대신해 죽도록 일만 한다는 것이다. 빨래도 하고 심부름도 도맡아 하며 계모가 시키는 집안 청소까지 희정이는 해야한다.
  그렇게 시달리면서도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해 희정이는 늘 굶주린 상태로 지내고 있다. 오죽했으면 보다 못한 구멍가게 주인이 "아이가 너무 불쌍하다"고 쪽지를 다 보냈을 정도이다.
  "희정이를 붙잡을 수도, 그렇다고 보낼 수도 없어 괴롭다"며 그이는 울먹였다. 그이가 마당에 서 있는 희정이를 불렀다. "희정아!" "응, 엄마" 희정이가 다가와 그이 품에 안겼다. "엄마 밉지?" "아니." 모녀는 한참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아냈다.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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