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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이야기]장애시민행동 대표 이동석 씨

“모든 여건이 충족돼서 자립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본문

그이는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이동권과 관련해서 할 말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자신이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이는 이천일년 칠월 십팔일 서울 지하철 영등포구청역 리프트에서 떨어져서 중상을 입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동안 교통사고를 당 한 것만도 스무 번이 넘는다고 한다.
“스쿠터를 타고 거리를 지나가다가 차에 부딪쳐서 교통사고를 많이 당했어요. 머리도 깨지고 다리도 부러지고 성한 데가 없어요. 그래서 생사를 넘나드는 큰 수술도 네 번이나 하고, 장애우 이동권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지를 몸으로 체험한 거죠.”
그래서 그이가 이끄는 장애시민행동이 장애우 이동권 문제 해결에 집착하나보다.

▲장애시민행동대표-이동석씨

<스물한살 때 독립적인 생활 시작>
장애시민행동 대표인 이동석 씨를 만났다. 그이는 뇌성마비 일급의 중증장애를 가지고 있고 올해 서른일곱살이다.
그이가 이끌고 있는 장애시민행동은 지난 이천년 오월에 만들어진 단체다. 한벗회에서 문학강좌를 수강했던 중증장애우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인데, 현재 스무명 가량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취지는 중증장애우들도 당당하게 세금을 내고 있으니까, 그에 합당한 권리를 주장해서 찾자는 것이란다.
주로 지하철 편의시설 설치문제를 해결하는데 애쓰고 있고,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장애우에 대한 인식을 개선시키는 일 등을 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 효창공원 근처에 있는 한벗회 회관에서 만난 이동석 씨의 얼굴에는 지난한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그이도 다른 중증장애우들과 마찬가지로 장애 때문에 순탄한 삶을 살아오지 못한 것이다.
중증장애우가 이 땅에서 산다는 건 말 그대로 고단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다행히 그이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그래서 가족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다른 장애우들 보다는 형편이 나았지만, 결국 가족들이 장애를 대신해주지는 못했다.
그러면 이동석 그이는 중증장애우로서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한 중증장애우의 삶의 궤적을 더듬어보자.
그이의 고향은 포항이다. 포항시 외곽 성곡리라고 불리는 시골마을에서 조그만 사과 과수원을 운영하는 부모님의 오남 삼녀 중 일곱째로 세상에 나왔다. 부모님에 따르면 그이는 어머니 뱃속에서 아홉 달을 채우지 못하고 일곱 달 만에 세상에 나왔고, 조산이 장애의 원인이 됐다.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꿈틀거렸다는 것이 부모님 말이다.
그이는 스무살 무렵까지 고향에서 살았다. 학교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열 다섯 살 때까지는 앉지도 못하고 식물인간처럼 누워서만 지내야 했다.
“겨우 열 다섯 살 때 앉기 시작했는데, 부모님이 일을 나가시고 형제들이 학교 가고 나면 집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그러면 혼자서 방문 문고리를 잡고, 어떻게든 앉아 보려고 애를 썼어요.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고 또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는 동작을 끊임없이 되풀이했죠. 그러다보니 땀으로 목욕을 하다시피 했는데, 그렇게 애쓰다 보니 어느 날 앉게 되고, 또 설 수 있게 됐어요. 그전에는 부모님이 밥을 먹여줬지만 내 손으로 밥을 떠먹게도 되고 또 지팡이를 짚고 조금씩 걷게도 됐죠. 그렇게 해서 은둔을 벗어나서 세상에 나왔어요.”
그런데 어렵게 세상에 나왔지만 막상 할 일이 없었단다.
“집에 혼자 있으니까 주로 라디오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거든요. 지금도 방송되고 있는 장애우 대상 방송인 내일은 푸른하늘을 빼놓지 않고 들었어요. 그 방송을 들으면서 다른 장애우들처럼 나도 공부도 하고 기술도 배워 자립하고 싶었는데 시골에서는 그게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대처로 나가고 싶었어요.”
그이가 대처로 나가야지 라고 굳게 마음먹게 된 아픈 기억 하나,
“집에 손님이 오면은 창피하다면서 부모님이 저를 사랑방에 숨겼어요. 또 저를 또래 동네 아이들과 비교하면서 누구는 집안 일을 도와주는데 너는 쓸모 없는 아이라고 하실 때마다 죽고 싶었지요.”
그렇지만 대처로 나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부모님은“너는 집을 나가면 바로 죽는다.”며 그이가 도시에 나가는 것을 극구 만류했다. 그래서 그이는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아침에 과수원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며 지내야 했다. 과수원 원두막에 우두커니 앉아 라디오를 들으며 누가 사과를 훔쳐가지 못하게 지키는 일을 했다. 그이가 이런 생활을 견딜 수 없어 하자 부모님은 집 사랑방을 개조해서 조그만 구멍가게를 열었다. 그러면서 가게 운영을 그이에게 맡겼는데, 생각만큼 돈벌이도 되지 않고, 동네아이들이 와서 과자도 훔쳐가고 돈도 훔쳐가서 일 년 만에 가게문을 닫았다.
- 그래서 어떻게 부모님의 반대를 극복하고 집을 벗어날 수 있었나요?
“주머니에 돈만 생기면, 그때 큰누나가 직장을 다녀서 용돈을 줬거든요. 돈만 있으면 무조건 택시를 타고 버스터미널로 달려갔어요. 고속버스를 타고 전국을 다 돌아다녔죠. 그러다가 돈이 떨어지면 집에 들어가고, 그렇게 부모님의 속을 썩였는데도,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중에는 한 달간 단식투쟁을 했어요. 도시에 있는 재활원에 보내달라고 떼를 썼죠”"
- 왜 재활원에 가고 싶었나요?
“라디오를 듣다가 펜팔을 하게 된 친구가 재활원에 있었는데, 그 친구가 재활원에 오면 공부도 할 수 있고 기술도 배울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무조건 재활원에 보내달라고 한 거죠. 거기 가야 기술을 배울 수 있었으니까, 컴퓨터도 배우고 싶었고, 목공예 기술도 배우고 싶었어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그이가 떼를 쓰자 결국 부모님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래서 그이는 전국에 있는 비교적 규모가 큰 재활원 연락처를 수소문해서 입소를 원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랬는데, 그이는 이제 드디어 재활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됐구나 라며 좋아했지만 돌아온 답장은 모두 실망스러운 내용뿐이었다. 그이의 장애가 너무 심해서 입소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이때 그이는 처음 수동휠체어를 타게 된다. 서울에 사는 둘째 형님이 사준 것이었다. 그이는 이 휠체어를 타고 무작정 서울에 갔다. 직접 재활원을 찾아가서 부딪쳐 보기로 한 것이다.
그이가 서울에 와서 찾아간 재활원은 당시 광명시에 있던 명희원이었다. 그런데 명희원에서도 그이의 장애가 심하고, 또 나이가 너무 많다며 입소를 거절했다. 그렇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그이는 원장 수녀를 붙잡고 "기술을 안 가르쳐 주고 공부를 할 수 없어도 상관없으니까 제발 받아만 달라."고 매달렸다. 그런 그이가 안쓰러웠는지 원장 수녀는 그이
의 단기 입소를 허락했다.

<갈 곳 없어 선택한 장사>
그이의 나이 스물한살이었다. 비로소 그이는 소원했던 대로 태어나서 처음 가정을 떠나 독립적인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집안에 장애우가 있으면, 대부분 과잉보호를 하거나 아니면 학대하거나 둘 중 하나다. 물론 그이는 전자의 경우다. 그렇지만 과잉보호가 당사자인 장애우에게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 다른 가족들은 알지 못한다. 그이가 독립적인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이 부담에서 벗어났다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그이는 좋아했다.
“재활원 측에서 학교는 다닐 수 없고, 일 년 동안 기술 배우면서 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준비하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낮으로는 전자부품 조립 기술을 배우고, 밤에는 검정고시에 대비해서 공부를 했어요.”
- 무슨 기술을 배웠는데요?
“납땜질이요. 사실 기술이랄 것도 없었죠. 손을 제대로 사용 못하니까 전자부품을 조립하면서 입으로 납을 물고 인두로 땜질을 했어요.”
- 납 연기를 다 들이마셨겠네요?
“그랬어요. 환풍기가 있었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했어요. 지금 건강이 안 좋은데 그때 마신 납 연기 영향도 있는 것 같아요.”
납땜이 무슨 기술인가? 이런 의문을 제기해 봄직도 하다. 하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 재활원에서는 다른 일거리가 없으니까 전자부품 조립 하청을 받아 장애우들에게 일을 시켰고, 그게 장애우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기술로 포장되기도 했던 것이다.
어쨌든 납 연기를 마셔야 해서 몸은 고단했지만 그이는 이 일을 한 덕분에 집에 가지 않고 대처에 남을 수 있었다.
“명희원에서 약속한 일 년이 지나서 재활원을 나와야 했어요. 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에 합격했지만 문제는 갈 곳이 없었다는 거였어요. 집에 내려가기는 싫었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재활원 선생님이 에덴하우스를 소개해 줬어요. 그 곳 작업장에서도 전자부품 조립 일을 하고 있다며 그 곳에 가서 일을 해보라고 해서 망설이지 않고 갔어요. 에덴하우스에서 한 달에 오만원을 받고 일을 했죠. 입으로 납을 물고 땜질하는 그 일이 정말 힘들었지만 다른 길이 없었으니까 참고 일 했어요.”
그랬는데, 그이의 삶에 긍정적인 의미에서 작은 기적 하나가 일어난다. 어느 날 명희원에서 알고 지내던 수녀 선생님 한 분이 갑자기 그이를 찾아온 것이다. 수녀 교사는 그이에게 “여기서 고생하지 말고 재활원에서 공부를 더 해보는 게 어떻겠니?.”라고 물었다. 그이는 망설이지 않고“저도 공부를 더 하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그이는 지옥같은 납 땜 일을 벗어났다. 다시 명희원에 가서 중학교 과정에 들어갔고,  삼 년을 다녀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런데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니까 또 다시 갈 곳이 없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 이유가돼 고등학교 과정 진학이 좌절됐기 때문이다.
새롭게 그이 앞에 놓인 장벽을 그이는 어떻게 극복했을까?
“수소문해서 나이 제한이 없는 주몽학교에 진학했어요. 거기서 삼 년 동안 꼬박 공부만 했죠. 그때는 공부가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제 꿈이 사회복지사였거든요. 사회복지사가 되려면 공부를 계속 해야 했으니까 열심히 공부한 거죠.”
그랬는데, 그이는 한순간에 다시 원점에 서게 된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특수학교에 다니고 있는 장애우들의 경우 고등학교 과정을 졸업하면 더 이상 진학할 곳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는 장애우가 태반이다. 말하자면 특수학교는 고등학교 과정까지 십 이년 동안 장애우를 온실에서 품어주지만 그 이후에는 아무런 대책 없이 장애우를 벌판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이런 가혹한 현실은 그이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주몽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게 되자 그이는 정말 갈 곳이 없었다. 그때는 대학 특례입학 제도도 없었다. 물론 모든 걸 포기하고 집에 내려가는 길이 있었지만 그건 어렵게 공부한 것이 물거품이 되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그이에겐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 그래서 어떤 길을 선택했나요?
“시장에서 장사하는 길을 선택했어요. 알고 지내던 장애우가 소개해줘서 서울 상일동에 있는 실로암선교회라는 장애우 공동체에 들어갔죠. 그 곳은 장애우를 데려다가 재래시장에서 장사를 시키는 곳이었어요.”
- 무슨 장사였는데요?
“수세미 장사라고, 시장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바닥을 기며 수세미 등 생필품을 파는 장사였어요. 솔직히 말하면 사람들의 동정에 기대 물건을 파는 장사였죠.”
- 부모님이 반대하지 않았나요?
“부모님한테는 서울에서 직장을 구했다고 속였어요.”
그이는 서울에 있는 유명한 도매시장인 가락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창피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그 일 밖에 없다고 마음먹으니까 창피한 게 곧 사라졌다는 게 그이 말이다.
“장사를 나가 하루 잘 될 때는 십 만원 벌고, 안 될 때는 오 만원을 벌었어요. 그 돈을 공동체와 분배했는데, 저를 실어다준 봉고차 차비 명목으로 한 달에 이십오만원을 주고 물건값 으로 매출의 삼십 프로를 또 줬어요. 이렇게 주고 난 뒤 제 손에 남는 게 약 팔십만원 이었는데 그때는 큰 돈이었죠. 금방 부자가 될 거 같았어요.”
한 달에 이십오일을 장사를 나가, 아침 아홉시 부터 저녁 일곱시까지 꼬박 장사를 해야 했지만 돈 버는 재미에 힘드는 줄 몰랐다는 게 그이 말이다.

<장애 때문에 삶의 고비 때마다 선택의 폭이 좁은 게 문제>
그러다가 그이는 또 사고를 친다. 그이 내면에 잠자고 있던, 한 곳에 머무르기를 거부하는 독립의지가 또 다시 꿈틀댔던 것이다.
“공동체에서 독립하고 싶었어요. 거기 있으면 아무리 장사를 잘해도 떼 주는 돈이 많으니까 이익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돈을 벌어볼 욕심으로 무작정 영등포로 갔죠.”
- 영등포에 누가 있었나요?
“아뇨.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 그러면 고생을 많이 했겠네요.
“그랬죠. 처음 며칠 동안은 숙소도 없어서 낮에는 장사하고 밤에는 육교 밑에서 자고 그랬어요. 그때는 장애우라고 여관에서 방도 안 주던 시절이었어요. 할 수 없이 수레는 성당에 맡겨놓고, 밤에는 육교 밑에서 잤죠. 그러다가 성당에서 알게된 분이 시장 근처 여인숙에 방을 하나 얻어줘서 거기서 잤죠. 한 달에 이십만원을 주고 십 개월 동안 여인숙 생활을 하다가 월세방을 하나 얻었어요. 보증금 삼 백만원에 월세 십 만원 짜리 방이었죠. 끼니는 거의 라면으로 때웠어요.”
- 그래서 돈은 많이 벌었나요?
“독립하니까 돈은 많이 벌게 됐죠. 많을 때는 하루 십오만원을 벌기도 했어요. 정말 열심히 일했죠. 한 달 수입이 백오십만원 쯤 됐으니까요.”
그이는 생필품을 팔다가 성이 차지 않아서 카세트 테이프도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장사를 작년까지 십 년쯤 했다. 그러다보니 이제 영등포시장에서 그이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그이는 시장에서 누구나 아는 유명인사가 됐다.
그렇게 해서 그이는 목표했던 대로 돈은 벌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렇듯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심적으로는 사람대접을 못 받는 게 제일 속상해요. 밥 먹으로 식당 갔는데 거지 취급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동전을 던져줄 때, 마음속으로는 극복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런 일을 당하고 보면 세상 살기가 싫어져요.”
그이가 기특한 것은 장사를 해서 버는 수입을 자신만을 위해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이는 오래전부터 이름 없는 후원자로 활동해 왔다. 꽃동네를 비롯한 장애우 단체, 아름다운 재단, 남북한 걷기운동 본부 등 열 군데가 넘는 시민사회단체에 한 달에 만 원씩 꼬박꼬박 후원금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그이는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이동권과 관련해서 할 말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자신이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이는 이천일년 칠월 십팔일 서울 지하철 영등포구청역 리프트에서 떨어져서 중상을 입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동안 교통사고를 당 한 것만도 스무 번이 넘는다고 한다.
“스쿠터를 타고 거리를 지나가다가 차에 부딪쳐서 교통사고를 많이 당했어요. 머리도 깨지고 다리도 부러지고 성한 데가 없어요. 그래서 생사를 넘나드는 큰 수술도 네 번이나 하고, 장애우 이동권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지를 몸으로 체험한 거죠.”
그래서 그이가 이끄는 장애시민행동이 장애우 이동권 문제 해결에 집착하나보다.
그이는 지금 서울 방화동에 있는 영구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산다. 봄이 오면 다시 장사를 시작할 것이라고 말한 그이는 꿈을 물어보자 “돈을 조금 더 벌어서 노점이 아니라 점포를 얻어서 장사를 하고 싶어요. 음반을 파는 가게를 하고 싶은데 그럴려면 결혼을 먼저 해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웃는다.
그이가 속한 단체인 장애시민행동은 한벗회관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한벗회관은 중증장애우의 자립생활을 위해 설립된 곳이다. 그래서 내친김에 그이가 생각하는 자립생활은 어떤  지 물어봤다.
“진정한 자립생활은 아무런 도움 안 받고 자기 스스로 모든 걸 해결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지금 혼자 사니까 자립생활을 하고 있는 셈인데, 어려움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에요. 빨리 모든 여건이 충족돼서 저 같은 중증장애우가 자립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보면 그의 서른여섯해 삶은 큰 굴곡 없는 평탄한 삶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가 한 고생은 그다지 새로울 게 없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삶이 비장애우들과 다른 것은 장애 때문에 삶의 고비 때마다 선택의 폭이 좁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중증장애우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 이게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이처럼 창피를 무릅쓰고 시장에서 바닥을 기며 장사를 할 수 있는 장애우가 몇 명이나 될 것인가? 결국 장애우가 그 일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가혹한 현실이 아닐까?
어쨌든 날 풀리는 봄이 오면, 서울 영등포 시장에 가게되면 이동석 그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아는 체라도 해보면 어떨까? 고단한 그이 삶에 작은 위로가 될 것이다.


글 이태곤 사진 박광규 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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