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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이야기] "전화주세요.무료로 모십니다"

장애우들의 외출에 도움주는 중복중증장애우 김종현 씨

본문

 

 

 

  사람들은 흔히 외모를 보고 그 사람의 능력을 평가한다. 이렇게 외무를 중요하게 여기는 평가 기준은 장애우들에게 여러 가지 불이익을 안겨주기 일쑤이다. 특히 장애우들이 일자리를 같은데 있어서 겉으로 드러난 장애는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취업 뿐만이 아니라 비장애우들은 장애우들이 중증 장애를 가졌을 경우 쉽게 아무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예단하고 있다. 예컨대 정신지체 장애우들과 중증 뇌성마비 장애우, 그리고 절단 장애우들은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비장애우들에 의해서 아무 능력이 없는 동정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외모를 기준으로 한 평가 기준이 틀렸고, 속히 사회에서 사라져야 할 대표적인 구악이라는 건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즉 아무리 중증 장애를 가졌어도 장애우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별 때문에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외모를 기준으로 장애우를 평가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다.
  이 점은 양하지 장애와 절단 장애라는 중복 중증 장애를 가지고 있는 김종현 씨의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김정현 씨의 겉으로 드러난 장애만을 가지고 판단한다면 그는 두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고 거기에다 한쪽 팔이 없기 때문에 사회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장애우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현재 남아 있는 한 쪽손으로 운전을 해서 차를 몰고 다닌다. 그는 이 능력으로 외출하기 힘든 중증장애우들의 외출을 도와주는 등 이웃을 위해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그가 이 일을 시작한 지는 올해로 이 년째다. 전국적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살고 있는 동두천에서 외출하는데 도움이 필요한 장애우가 그를 호출하면 그는 만사 제쳐놓고 언제든지 달려가고 있다.
  이렇게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삶을 살고 있는 장애우 김종현 씨는 올해 마흔 네 살인데, 여기서 그의 나이가 새삼 관심을 끄는 것은 다름 아닌 이런 그의 나이는 그가 장애우 일세대라는 것을 보여 주고있기 때문이다.
  오십년대에 태어나 그 때 당시 가장 많았던 장애인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몸으로 장애우에 대한 사회적인 배려가 거의 없었던 시대, 소외의 그늘 속에서 고난의 세월들을 홀로 헤쳐 나와야 했던 그는 전형적인 장애우 일세대다. 때문에 그가 살아온 한 평생은, 의미를 부여하자면 장애우의 작은 역사라고 볼 수도 있다.
  먼저 요즘 많이 얘기되고 있는 편의시설 문제를 보자. 과거에는 어땠을까?
  김종현 씨는 중학교 중퇴의 학력을 가지고 있다. 그가 학교를 다니다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편의시설 부족 때문이다.
  그는 양하지 장애우로 목발을 짚고 학교를 다녔다.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배정받은 학교는 서울역 뒤 후암동 산꼭대기에 있는 숭실 중학교였는데, 집에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가서 내린 다음 다시 경사가 심한 언덕길을 한참 올라가야 닿을 수 있는 학교였다.
  더욱이 교실이 건물 삼 층에 있어서 그는 화장실 한 번 다녀오는 덕을 마치 전쟁 치르듯 해야  했다. 당시 쉬는 시간이 십 분이었는데 목발을 짚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건물 바깥에 있는 화장실에 다녀오기 위해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면 십 분이 금방 지나갔고, 그가 헉헉대며 뒤늦게 교실문을 열고 들어서면 내막을 모르는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늦는다고 야단을 쳤다.
  그러다가 그가 중학교 이 학년에 올라갔을 때 마침 문교부가 장애우 학생에게 집 가까운 곳으로 학교를 배정해 주는 정책을 내놨다. 그래서 그는 집 가까운 것에 위치한 강문 중학교에 다니게 됐다. 그런데 집만 가까워졌지 불편은 더 심해졌다. 배정 받은 교실이 건물 오층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선생님의 꾸중이 두려워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옷에 오줌을 쌀 때도 있었다. 여기에다 체육시간에 혼자 남아 교실을 지키고 있어야 했는데 교실에서 도난 사고가 일어나면 아이들은 애꿎게 그를 의심했다.
  그는 이런 상태가 계속되자 더 이상 학교에 적응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아침에 어머니가 도시락 싸주며 학교 가라는 소리가 지옥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착각될 정도였다. 그는 결국 학교 가는 척 하면서 밖에서 시간을 때우다 집에 들어갔다. 나중에 그 사실이 어머니에게 발각됐을 대 그는 "나 학교 다니기 싫다. 공부 대신 기술을 배우겠다. 공부해서 뭐하냐, 대학도 못갈텐데(그 당시만 해도 장애우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라고 절규했고, 그후 학교는 영영 그에게서 멀어졌다.
  중학교 다니는 것을 그만둔 후 그는 당연히 집에 쳐박혀 지내야 했다. 당시 장애우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취업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랬는데 집에서 논 지 삼 년째 접어들던 해 그는 운좋게도 이웃의 소개로 서울 종로 와이엠씨에이 건물 뒤쪽에 있는 이층 건물에 막 문을 연, 영친왕 부인인 이방자 여사가 세운 곳이기도 한 명휘원에 목공예 기술을 배우러 다니게 됐다.
  여기서 잠시, 고용촉진법도 없었던 시절 장애우 취업 환경이 전혀 조성되어 있지 않았던 칠십년대 장애우는 어떻게 먹고 살았나를 알아보자. 그때 장애우는 무슨 일을 하며 미래를 대비했을까?
  분명한 건 칠십년대의 장애우들은 먹고 살기 위해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애우 중 남자들은 시계수리, 도장 새기기, 목공예 등의 기술을 많이 배웠고 여자들은 편물과 자수 놓는 것을 기술이라고 배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금 나이 사십이 넘어 중년기에 접어든 장애우들은 큰 낭패를 보고 있다. 젊었을 때 생계수단이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죽어라고 배운 기술이 지금은 전혀 쓸모 없는 기술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지금 시계수리와 인장업으로 먹고 사는 장애우는 거의 없다.
  아무튼 이야기가 잠시 빗나갔지만 김종현 그도 그때는 목공예 기술을 배우면 미래에 먹고사는 것은 보장될 줄 알았다. 그래서 칠십일 년 명휘원에 다니게 되면서 그는 열심히 기술을 배웠다. 그 후 사년간 꼬박 나무를 조각하고 다듬는 한 가지 일에만 매달려 마침내 목공예 기술자가 되자 그는 가구 공장에 취직하는 형태로 사회에 진출했다.
  "어느 인생이든지 좋았던 한 때는 있는 법이다." 라는 말이 설득력이 있다면, 회고해 보면 가구공장에서 목공예 기술자 대접을 받으며 살던 이 때가 그에게는 좋았던 때였다. 당시 일반 회사 과장 월급이 오륙 만원이었는데 그는 삼만원 정도를 월급으로 받았다. 여기에다 회사를 옮기면 몇 십만 원을 선금으로 받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몇 년을 기술자 생활을 하면서 그는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가 그에게서 좋았던 시절이 될 수 있었던 또 한가지 이유는 그가 한 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렸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여자를 만나 가정을 가진 것이 꼭 좋았던 일은 아니었지만 그 때는 어쨌든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는 팔십 년,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때 비장애우인 한 여자를 만났다. 그는 당시 휘경동에 있는 가구 공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출근 시간에 골목에서 꼭 마주치게 되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여자에게 반해 어느 날 만나 달라고 제의했고, 여자도 그가 싫지 않았는지 그의 제의를 받아 들여 두 사람은 만나 사귀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얼마 안가 바로 동거 생활에 들어갔다.
  그런데 장애우와 비장애우의 결혼에는 꼭 등장하는 대목이 있다 바로 비장애우 집안 부모들의 결사 적인 결혼 반대가 뒤따른 다는 것이다. 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무척 심했다. 여자 부모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여자를 데려가려 했고, 여자가 말은 듣지 않자 살림을 부수는 행패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와 여자가 도저히 못살겠어서 도망을 간다며 인천 부평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여자 부모는 어떻게 알았는지 거기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이번에는 아예 집 앞 여인숙에 거처를 정하고 거의 매일 찾아와 "이렇게 사느게 어디 사는거냐"며 여자 머리채를 잡아 끌었다. 여자 부모 행패가 어찌나 심했던지 그는 결국 여자에게 "너의 부모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고 나도 동네 창피해서 못살겠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 하겠니? 한마디로 자존심 상하니까 이제 그만 가라"고 설득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여자는 "당신 혼자 두고 어떻게 가느냐"며 완강하게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 한 번 여자가 부모에게 붙들려 간 일도 벌어졌는데 며칠 만에 여자는 다시 돌아왔다.
  이렇기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진행된 동거생활에서 여자 부모의 반대가 수그러들 수 있었던 것은 여자가 임신을 하게 되면서였다. 애를 낳으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주위사람들 부추김에 따라 부부는 애를 낳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여자 부모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일단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모아논 돈으로 직접 목공예 하정 공장을 차리고 사장이 된다. 그러나 얼마 안가 돈을 다까먹고 빈털털이가 되는데 그렇게 된 것은 경험도 없었지만 기술자들이 속을 썩여 제 때 납품 기일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다시 원점에 선 그가 두 번째 택한 직업은 시계수리업이었다. 그는 우연히 명휘원에서 사귄 같은 처지의 장애우 동료가 시계점을 하고 있는 곳에 놀러 갔다가 어깨 너머로 시계고치는 기술을 배웠다, 당시에는 기계가 귀한 대접을 받던 시절이라 시계 수리가 돈 벌이가 됐다. 그때는 쌀 한 가마니가 만오천원 하던 시절이었는데 시계 분해 소지 한 번 해 주고 받는 돈이 오천원이었다. 더구나 분해 소지는 오 분이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는 "이 일이야 말로 내 평생직업이 될 수 있있겠다"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기술을 배운 다음 빚을 얻어 시흥 대로변에 시계점을 차렸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시계점은 그에게 안정적인 생활을 가져다 줬다. 이 시기 둘째 애도 낳았다.
  그런데 불행은 엉뚱한 곳에서 찾아 왔다. 시계점을 연 지 삼 년째에 접어 들었을 때 어느 날  텔레비전 추적 육십분 프로그램에서 시중에 가짜 시계가 판친다는 보드를 한 것이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손님이 끊겼다. 그는 장사가 안돼 전전긍긍해야 했다.
  그때 한 사람이 시계점을 찾아 왔다. 단곡손님이었던 그 남자는 그의 처지를 동정하며 "동두천에 가면 미군들이 많은데 미군들 상대로 장사를 하면 괜찮을 것"이라며 동두천에서 가계 얻는 것을 도와 주겠다고 제의했다. 솔깃해진 그는 남자를 따라 동두천에 가봤다. 그랬더니 정말 남자 말대로 미군들이 많았다. 그는 장사가 되겠다 싶어 앞뒤 가리지 않고 미군 이사단 정문 앞에 있는 조그만 가게를 얻기로 하고 계약을 체결했다. 가게를 얻는 데는 전 재산 칠백만원이 들었다. 사는 방은 보증금 없는 월세방으로 얻고 그는 팔십사년 식구들을 이끌고 동두천에 갔다. 그랬는데 결론적으로 그는 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가게를 소개해 준 남자만 믿고 계약을 맡겠는데 그 남가가 그의 전 재산을 가지고 사라져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임대 계약서도 건물 주인이 다른 가짜 계약서였다.
  땅이 무너지는 절망감 속에서 이제 동두천에서 오갈 데가 없어진 그의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날린 후 사개월이 지난 어느 날 이번에는 아내가 사라져 버렸다. 아내는 이십만원이 저금돼 있는 통장을 갖고 행방불명 됐는데 그는 직감적으로 아내가 누군가에 의해 납치 됐다는 판단을 했다. 실제로 아내가 없어진지 이틀이 지난 후 주인집에 아내의 전화가 걸려 왔다. 아내는 다급한 목소리로 "나 납치됐다. 아이 아빠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전화를 근거로 의정부 경찰서에 가출 신고를 했다. 처음에는 납치 신고를 했는데 경찰서에서는 노골적으로 "네가 장애우고 생활이 어려워지니까 여자가 도망간 거 아니냐"며 납치 신고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가출신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경찰서에 신고한 다음 그는 아내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녔다.
  내무부도 찾아가고 청와대도 찾아가 진정서를 접수시켰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납치가 아니라 가출의 혐의가 짙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아내가 납치됐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더욱이 그 때는 사회적으로 부녀자를 납치해서 윤락가에 팔아먹는 일이 잦아 문제가 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아내는 살면서 그에게 쏟은 정이 지극했던 여자였다. 아무리 살기 어렵지만 그를 버리고 가출할 여자가 결코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아내가 납치돼서 윤락가에 넘겨지자 자포자기하며 지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경찰서에서는 아내를 찾아 줄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직접 자신이 아내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라진 아내를 찾아 장장 이 년 동안 전국의 윤락가를 헤매고 다녔다. 다섯 살과 세 살인 아이들을 방안에 가둬 놓고 헤매고 다니다 저녁 늦게 들어가면 아이들은 지쳐서 잠들어 있고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이 옆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날이 이어졌다. 그는 전단을 만들어 돌려보기도 하고, 월세는 내지 못했지만 수중에 돈만 생기면 아내를 찾아 전국을 유랑했다.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시에서 방세 내라고 융자해준 돈 오십만원도 모두 아내 찾는 경비로 사용했다. 그렇게 꼬박 이년 동안을 이 잡듯이 헤매고 다녔지만 그는 아내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나중에 그는 윤락가의 특성상 여자가 돈벌이 수단이기 때문에 소재를 알아도 안 가르쳐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아내 찾는 일을 포기할 수에 없었다.
  그렇게 두 해를 넘긴 팔십칠년 어느 날 친구가 그를 찾아 왔다. 친구는 "만약 네 처가 납치됐다면 언젠가는 돌아온다. 그러니 너 그렇게 헤매고 다니지 말고 일 좀 같이 하자"고 제의했다. 수중에 돈 한 푼 없었던 그는 선뜻 친구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서울 퇴계로에 있는 공방에 생산부장으로 나가게 됐는데 거기서 지금의 아내 이순애 씨를 만나게 됐다. 그 보다 여덟 살이 아래 인 이순애 씨는 그의 직장인 공방 근처에서 악세사리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심성이 착했던 이순애 씨는 목발을 짚고 다니는 그가 안돼 보여서였을까, 가슴이 허했던 그가 만나서 차 한 잔 하자고 제의하자 쉽게 만나 주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사귀는 관계로 발전했는데 그 만남도 그가 다니던 공방이 부도가 나면서 끝이 났다.
  그러면 두 사람은 어떻게 다시 만나서 같이 살게 됐을까?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공방이 부도나면서 그는 동두천에서 가구공장에 다니게 됐다. 공장에 들어가면서 그는 구십 년 당시 선금으로 육십만원을 받았는데 이게 화근이었다. 공장에 나간 지 이틀만에 그는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전화는 사라진 아내가 강원도 횡성 다방에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횡성으로 달려갔다. 그렇지만 물어물어 찾아간 다방에는 아내를 닮은 여자가 있었을 뿐 아내는 없었다. 다급해진 그는 삼 일을 내리 횡성에 머물면서 아내를 찾아 나섰다. 낮에는 횡성에 있는 다방을 모두 뒤지고 저녁에는 다방 근처에서 드나드는 여자들을 관찰했다. 그렇지만 결국 아내를 찾지 못하고 그는 동두천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동두천 집에 오자마자 바로 경찰서에 붙잡혀가 구속됐다. 그가 횡성으로 아내를 찾으러간 사이 가구공장 주인이 그가 선금을 떼먹고 도망쳤다며 경찰서에 신고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실 얘기를 하고 이해를 구하면 풀려날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허탈해서 만사가 귀찮았던 것이다. 그래서 "마음대로 하라"고 하자 경찰은 그를 사기죄로 구속한 후 구치소로 넘겨 버렸다. 그는 삼개월을 꼬박 구치소 생활을 했다. 그 와중에 어떻게 알았는지 지금 아내 이순애 씨가 자주 면회를 왔다. 그는 주위 사람들이 써준 탄원서 덕분에 감옥을 나왔고 곧바로 방을 얻어 이순애 씨와 같이 살게 됐다. 이순애 씨는 그때까지 그가 한 번 결혼했고 아이가 둘 이나 딸린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동거 생활에 들어가면서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됐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되자 당연히 이순애 씨는 그에게 헤어질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가 "당신이 너무 좋아서 미처 얘기를 못했다. 이해하고 용서해 달라"고 빌며 매달리자 그를 받아 들였다.
  어렵게 만난 두 사람이니 별 탈 없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불행은 또 다시 그를 덮쳤다. 구십삼년 칠월삼일 막내인 다섯 살 먹은 남자 아이가  물놀이를 갔다가 물에 빠져 죽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한 달만인 팔월 사일 이어진 불행으로 그는 한쪽 팔이 절단되는 큰 사고를 당하게 된다.
  그 날은 아이가 죽은 후 그가 우울해 하자 식구들이 기분전환을 할 겸 강릉 경포대로 바람이나 쐬러 가지고 해서 부모님과 아내를 태우고 차를 운전해 경포대에 갔다가 오는 길이었다. 그는 날씨가 너무 더워 한쪽 팔을 차창 밖으로 내놓고 운전하고 있었다. 피곤해서 깜빡 졸았는데 그가 운전하는 승용차가 어느새 중앙선을 넘어 버렸다. 그때 마주 달려오던 고속버스가 스치듯 그의 팔을 건드리고 지나갔고, 그 자리에서 왼쪽 팔이 절단돼 버렸다. 그가 "어 내 팔, 내 팔!" 하는 사이 팔은 고속도로에 나 뒹굴었고, 바로 뒷 차가 짓밟고 지나가 버렸다. 그는 차를 멈췄지만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급히 병원으로 이송된 그, 응급조치를 마쳐 생명은 구했지만 절단된 왼팔을 이식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제 그는 양하지로 두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는 장애에다 한쪽 팔마저 없는 중증 중복 장애를 가지게 됐다. 어떻게 이런 잇따른 불행이 가능한 지, 비단 그 뿐만 아니라 타인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미루어 짐작하겠지만, 그런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당한 후 그의 삶은 한동안 엉망진창이 됐다. 그는 많은 사람들 중에 왜 나만 이렇게 많은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절규하며 가스통을 방안에 들여놓고 자살 소동도 벌이고, 아내 이순애 씨에게는 "내 인생 이제 다 끝났으니 가버려"라며 술을 먹고 행패를 부려댔다.
  그가 이 시기 절망에 몸부림치며 벌였던 극단적인 행동을 더 이상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떻게 이런 극도의 절망을 극복했는가인데, 그가 절망을 극복하고 지금의 삶을 살게 되기까지는 그와 아내 사이에  태어난 막내 별이의 존재가 큰 역할을 했다. 별스럽게 태어났다고 해서 이름을 별이라고 지은 막내 딸이 태어나면서 그는 절망을 극복할 수 있었다. "못 산다면서 매일 아내에게 행패를 부리던 와중에 덜커덕 별이가 태어난 거예요. 내나이 서른 여덟에 뒤늦게 아이를 얻게 되자 너무 기쁘고 살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겼어요. 별이에게는 두 번 다시 부모없는 고통을 주지 말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런 별이가 어느새 다섯 살이 되면서 놀이방에 다니게 되자 그는 무의미하게 집에서 시간을 보낼 게 아니라 이웃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자고 마음 먹는다. 그래서 지역 생활정보지에 "장애우나 노약자 여러분 차량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무료로 어디든 모십니다"라는 광고를 냈다. 그렇게 해서 그가 지금 정기적으로 외출을 도와주는 장애우는 일곱 명에 이른다.
  그는 지금 아내가 미군부대내 스낵코너 계산원으로 일을 나가 벌어 오는 월 사십만원 수입에 기대 살고 있다. 그의 하루는 이렇다. 장애가 심해 도저히 혼자 움직일 수 없는 그는 아내 등에 업혀 아내가 일을 나갈 때 같이 집을 나온다. 차를 몰아 아내를 직장에 내려주고 아내가 직장에서 근무할 동안 그는 장애우들의 외출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 아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부대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아내를 태우고 집에 돌아오는 것이다. 그는 현재 남은 한 쪽 팔로 운전할 수 있고, 그 능력으로 이웃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끼며 살고 있다. 그래서 외출에 차량이 필요한, 동두천에 살고 있는 장애우는 언제든지 동두천 868-1532로 전화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장애우들이 집에만 있지 말고 바깥으로 나와야 해요. 그러는데 제가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됐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그는 홀짝 웃는다. 그런 그의 표정에서는 과거 극심했던 고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글/ 이태곤 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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