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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집 나간 아내를 기다립니다.

지체장애우 김관옥씨

본문

[특집]

 

"집 나간 아내를 기다립니다."
- 지체장애우 김관옥씨 -

 

아내가 집을 나간 지 삼 년이 됐기 때문에 증인만 두 명 세우면 돼, 아내와의 이혼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렇지만 그는 주저하고 있다. 그를 주저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말한다. "지금도 집사람 생각이 많이 나요. 어디서 뭘 하며 사는지 궁금하고, 아무래도 첫사랑이다 보니 그런가 봐요. 지금이라도 아내가 돌아오면 아무 조건 없이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김관옥씨는 애타게 아내를 찾고 있다.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에 있는 안산방앗간에서 그를 만났다. 방앗간 주인인 김관옥씨. 올해 서른여섯 살인 그는 하반신마비라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심한 장애를 가지고 그는 방앗간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
오 년 전 불의의 사고로 장애를 가지기 전 그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지금 살고 있는 해리면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잘 했다. 그 덕분에 초등학교 사학년 때 학교 육상대표 선수로 선발됐고, 뛰어난 입상기록은 없지만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는 인천공고에 스카우트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하대에 진학한 그는 대학 일학년을 마치고 영장이 나와 군에 간다.
삼 년 간의 군대생활을 마치고 그가 정착한 곳은 대전이었다. 바로 위 형이 대전에서 신우기계라는 방앗간 기계를 판매하는 대리점을 열고 있어서 그는 그곳에서 차에 기계를 싣고 배달해 주는 일을 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대리점에 경리로 들어온 그보다 여섯 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인 박영선(가명)씨를 만나게 됐다. 서로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곧바로 동거에 들어갔다.
얼마 안가 아들 재연이가 태어났고, 안정된 생활이 필요하게 된 그는 고향에 있는 아버지에게 "방앗간을 차려 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방앗간은 대전에서 하는 것보다 시골에서 하는 게 더 잘 된다"며 낙향할 것을 권유했다. 그래서 그는 팔십칠년 봄 고향인 고창군 해리면에 내려와 안산방앗간을 차리게 됐다.
근처에 이미 다섯 곳의 방앗간이 있어 또 한 군데의 방앗간을 차린다는 건 위험부담이 컸지만 그는 타고난 성실함으로 위험부담을 극복했다. 단돈 천 원짜리 떡도 배달해 주고, 손님들에게 막걸리도 대접하고, 밤을 새워서라도 손님이 맡긴 일감은 처리해서 배달까지 해주는 그의 근면함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방앗간 일만 아니라 동네일에도 발 벗고 나섰다. 동네 주민들의 경조사를 일일이 챙기며, 동네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며 뛰어다녔다.
이런 노력 덕분에 그가 운영하는 안산방앗간은 얼마 안가 확실히 자리를 잡게 된다. 근처에서 제일 잘 되는 방앗간으로 소문이 나고, 그는 소망하던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랬는데 사고가 일어났다. 그 날, 일천구백구십일 년 삼 월 십 일. 그는 고창에서 친구 결혼식에 참가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침 토요일이어서 방앗간 일거리가 많아, 마음이 급해 과속을 한 게 실수였다. 그의 차 봉고에 일곱 명의 친구들을 태우고 홍덕 검문소를 지나 급커브 길을 돌던 그는 차가 논바닥에 처박히는 순간 차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그러고 나서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고, 그는 하반신을 움직일 수 없었다. 척추를 다친 것이다. 같이 차를 탔던 친구들의 목격에 따르면 그가 뛰어내린 뒤 곧바로 차의 몸체가 엎어져 있는 그를 덮쳤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크게 다친 것과는 달리 나머지 친구들은 별다른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사고로 하반신마비 장애우가 된 그는 꼬박 삼 개월을 병원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런 다음 나아질 가망이 없다는 선고를 받고 퇴원을 했다. 다시 방앗간으로 돌아온 그에겐 또 다른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하게 이때부터 그의 고난의 시절이 시작된다. 우선 병원에서는 진통제로 장애의 고통을 이길 수 있었다. 그랬는데 집에서는 진통제를 맞을 수 없었기 때문에 수시로 찾아오는 척추의 아픔 때문에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잠 한숨 못 자고 뜬눈으로 날을 지새우는 날들이 많아졌다. 이런 고통을 당하다 보니 그는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침대에 누워 끙끙 앓으며 지내는 그. 그런 그에게 아내의 존재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아마 아내가 없었다면 그는 자신의 장애 상태를 안 순간 삶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아내를 믿고 있었다. 그랬는데 아내는 그를 외면했다. 아내의 가출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지금 "아내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현재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이다. 그렇지만 아내의 가출로 인해 그는 심한 심적 괴로움을 맛보고 있다. 그 괴로움은 장애의 고통보다 더 심하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가정이 파괴됐는데. 이보다 더한 고통은 그에게 없다.
처음 아내의 가출이 시작된 것은 그가 병원에서 돌아와 방에 누워 있은 지 이 개월쯤 되던 때였다. 그전까지 아내는 그를 대신해 방앗간 일에 열심이었다. 그러던 아내가 어느 날 미장원에 갔다 오겠다며 나간 후 이틀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이런 아내의 처음 가출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가 답답하니까 스트레스 풀려고 돌아다니겠거니, 생각했다. 그랬는데 그게 아니었다. 집에 돌아온 아내는 며칠 후 다시 집을 나갔다. 이번에는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는 것이 가출 이유였다. 그렇게 나간 아내가 삼 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그는 비로소 아내의 신상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 후로도 아내의 가출은 수시로 이어졌다. 가정주부가 집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밤을 보낸다. 더욱이 아내의 친정에서는 소재를 모른다고 하고, 그는 아내의 가출이 무엇을 의미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비로소 장애를 실감하게 된 그는 장애로 인해 남자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그는 아내가 집에 없는 밤 깡술을 들이키며 자신의 운명을 저주해야 했다.
그런 밤이 지나고 수척해진 몰골로 정작 집에 돌아온 아내를 대할 때면 그는 목에 걸리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삼켜야 했다. 생각 같아서는 "어디서 무슨 일을 했냐?"고 아내의 머리채라도 휘어잡고 따지고 싶었지만 아내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워서 그는 생가슴을 앓아야 했다.
아내의 가출로 인해 방앗간은 쇠락하고, 그 즈음에는 동네에도 나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어떻게 여자가 자식을 놔두고 바람을 피울 수 있느냐."고 동네 사람들이 손가락질했지만 아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출이 빈번하게 이어지면서 아내는 그 몰래 집에서 돈도 가져갔다. 한 번은 삼백칠십만원, 두 번째는 이백칠십만원이라는 거금을 들고 나갔다.
참다못해 그는 어느 날 아내를 붙잡고 "얘기 좀 하자."고 말을 꺼냈다. 아내는 묵묵히 방만 치우고 있었다. 그는 "어디 갔다 왔냐?"고 물었다. 아내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친구 만나러 갔다 왔다."고 대답했다. 그는 그런 아내의 태도에 화가 나 "집에 전화 한 번도 못하냐?"고 언성을 높였다. 그제야 아내의 입에서 "미안해요."라는 말이 나왔다. 그는 "다시 또 집 나갈래?"라고 물었다. 아내는 순순히 "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아내를 붙잡고 사정했다. "제발 나 좀 살려줘라. 남편이 몇 년 외국 갔다고 생각하고 살아줄 수 없겠니? 내가 몸은 다쳤지만 정신은 너하고 똑같다. 바보가 안 된 이상 네가 그러고 다니는 걸 어떻게 두고 볼 수 있겠니. 정말 미치겠다. 제발 나 좀 도와줘라." 그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내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알았어요."라고 대답했다.
이쯤에서 아내의 가출이 중단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아내는 그의 간절한 바람을 외면하고 다시 집을 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출 기간도 길어졌다. 그러더니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어느 날 그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동네 주민의 전화였다. "영암 월출산에 놀러 갔는데 월출산 근처 술집에서 당신 아내가 작부로 일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부랴부랴 차를 몰아 영암으로 갔다. 거기 술집에 아내가 있었다. 그는 울며불며 사정해 아내를 집으로 데려왔다. 그랬는데 그 며칠 후 아내는 또 집을 나갔다. 수소문 끝에 아내가 광주에 있다는 것을 안 그는 광주로 가서 다시 아내를 데려왔다.
이렇게 가출을 밥먹듯이 하던 아내가 아주 집을 나간 것은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이다. 그는 여기저기 수소문해 봤지만 아내의 거처를 알 수 없었다. 답답해서 아내의 친정에 전화를 걸면 친정어머니는 "김 서방 미안해. 그년이 미친년이야. 기다려봐. 재연이 데리고 잘 있어봐. 그년이 제 풀에 지쳐서 돌아올 거야."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는 아내의 가출로 인해 절망에 빠졌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죽음 밖에 없었다. 그는 한 날 "죽겠다."고 마음먹고 방안에 연탄불을 피워놓고 잠을 잤다. 그랬는데 새벽에 고추를 빻으러 온 주민이 그런 그를 발견해 사망 일보 직전에서 살아났다.
어떤 날은 대병 술을 마시고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도 세상을 하직할 수 없자, 만취상태에서 정신없이 차를 몰고 길에 나가 과속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질긴 게 사람 목숨이었는지 그의 자살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그는 황폐해진 모습으로 고통에 찬 날들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집을 나간 아내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전화를 걸어왔다. 안양에 있다고도 하고, 대전에 있다고도 하면서, "잘 있느냐?"고 안부를 물어오곤 했다. 그러던 아내가 그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육 개월 전이다. 아내가 아들을 보고 싶다고 해서 그는 재연이를 데리고 고창으로 나갔다. 그런데 그 앞에 나타난 아내는 예전의 아내가 아니었다. 머리는 노랗게 염색을 하고, 입술은 새파랗게 칠하고,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게 되자 그는 기가 질렸다. 재연이도 "우리 엄마가 아니야."라며 차 뒤로 몸을 숨겼다.
그는 반가움이 사라져서, 화가 난 목소리로 대뜸 아내에게 소리쳤다. "짐승도 아니고 얼굴이 그게 뭐냐? 밥맛 떨어진다. 나한테 그런 모습 보이려면 오지도 마!" 아내는 그의 고함에 묵묵부답이었다. 차 뒤로 몸을 숨은 재연이를 보면서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침묵의 시간이 흐른 뒤 아내가 "식사를 하러 가자."고 했지만 그는 냉정히 거절했다. 그렇지만 아내와 헤어져 돌아오는 차 속에서 그도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제 그의 곁에 아내는 없다. 아들과 단 둘이 남겨진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는 아내가 없어 겪게 되는 가장 큰 어려움으로 아들 재연이에게 밥을 제때 못해주는 것을 꼽는다. 처음에는 그도 시간 맞춰 밥을 했다. 전기밥솥에서 모락모락 김이 솟는 것을 보며 흐뭇해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싫증이 났다. 특히 설거지를 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서 그는 밥을 시켜먹는 날들이 많아졌다.
이런 황폐해진 날들 속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제 아홉 살이 된 재연이가 빗나가지 않고 그의 말을 잘 따른다는 것이다. 재연이는 그에게 큰 위로가 되고 있다. 그의 아들 자랑 한 토막 들어보자. "재연이는 내가 아프다고 그러면 새벽 두 시, 세 시에도 나가 약방 문 두드리면서 우리 아빠 죽는다고 약 달라고 하고, 그래서 진통제를 사오는 아이예요. 정말 대단한 아이죠."
그가 다시 살아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것도 전적으로 재연이 때문이다. 아들을 먹여 살려야 되겠다는 단 한 가지 생각이 지금의 그를 지탱해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혼자 있는 밤술을 먹고 억울한 생각이 들 때는 집을 나간 아내를 떠올리며 "아디 두고 보자. 너보다는 내가 잘 살 테니……."라는 각오를 되새겼다.
그의 말을 빌리면, 아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과 아내에 대한 오기로 작년 재작년 열심히 일을 했다. 비록 남의 손을 빌려서 일을 하다 보니 수중에 떨어지는 것은 별로 없었지만 방앗간 주인으로서 방앗간을 살리기 위해 있는 힘을 다했다. 그 덕분에 방앗간은 차츰 안정을 찾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안산방앗간에는 지금 청각장애우 두 명이 고용돼 있다. 청각장애우를 직원으로 채용한 것을 계기로 그의 요즘 관심은 온통 청각장애우들에게 쏠려 있다. 그는 자신이 청각장애우와 함께 일하는 데 멈추지 않고 동네에 있는 다른 청각장애우들의 일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그가 살고 있는 해리면만 해도 성인 청각장애우들이 칠십여 명이나 살고 있다. 그들은 충분히 일을 할 수 있는데 비장애우들의 편견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동네 토박이라는 점을 활용해 친구들과 어른들에게 가능하면 밭일과 건축 일에 청각장애우들을 써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그 자신도 청각장애우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시간 날 때마다 수화책을 들여다보며 수화를 배우고 있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그의 방앗간에는 청각장애우들이 자주 찾아온다. 방앗간이 어느새 청각장애우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많은 청각장애우들을 만났다. 그 중에서 건설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청각장애우 김동기씨는 그와 나이도 비슷할뿐더러 부인이 가출한 것도 그와 똑같아서 특히 친하게 지내고 있기도 하다.
얼마 전에는 방앗간에 드나드는 청각장애우 아주머니의 소개로 청각장애우 아가씨 두 명과 차례로 선을 보기도 했다. 두 명의 아가씨 중에서 그가 맘에 들어한 아가씨는 김제에 사는 스물여섯 살 난 아가씨였다. 그 아가씨와는 몇 차례 더 만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재혼은 아직 자신이 없다. 아내가 집을 나간 지 삼 년이 됐기 때문에 증인만 두 명 세우면 된다. 아내와의 이혼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렇지만 그는 주저하고 있다. 그를 주저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말한다. "지금도 집사람 생각이 많이 나요. 어디서 뭘 하며 사는지 궁금하고, 아무래도 첫사랑이다 보니 그런가 봐요. 지금이라도 아내가 돌아오면 아무 조건 없이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의 이어진 말에 따르면 그는 당분간은 재혼에 신경 쓰지 않고 열심히 방앗간 일만 하겠다고 한다. 조만간 방앗간 한 켠에 조그마한 공간을 마련해 청각장애우들이 이용할 수 있는 사무실을 차릴 것이라는 계획을 들려주면서 그는 환하게 웃었다. "방앗간 일을 하면서 사는 날까지 청각장애우들과 함께 할겁니다." 그런 각오를 다지는 그의 얼굴에는 이제 시름은 없었다.

 

글/ 이태곤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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