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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삶] 생업의 위기(?!) 속에 맛보는 생활의 넉넉함

자원활동가 최영석

본문

[더불어 사는 삶]

 

생업의 위기(?!) 속에 맛보는 생활의 넉넉함
자원활동자 최영석

 

간호사 누나의 따뜻했던 손길 기억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가시는 곳이 멀다고요? 괜찮습니다. 손님이 원하시면 대한민국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첫째도 둘째도 친절, 절대 승차거부 안하기 라는 소박한 직업관 속에 오늘도 변함 없이 소중하게 영업용 택시 핸들을 잡고 콘크리트 빌딩 숲 틈새를 향해 힘차게 내달리는 운전기사 최영석씨.
그에게는 일상의 습관처럼 배인 말투, 손놀림이지만 보는 이에게 언제나 새로움과 흐뭇한 즐거움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돈, 명예, 학벌 등 소위 세간의 성공이라는 잣대와는 거리가 먼 사람. 젊음을 재산으로 양심을 밑천 삼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하여 노력하는 자의 여유로움, 그 특유의 넉넉한 미소가 비결이라면 비결이 아닐는지.
영업용 택시를 운전하는 최영석씨. 그는 1968년 시월의 한가운데 어느 날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2남 2녀 중 막내로 자란 그는 같은 또래의 친구들보다 더 훨씬 어렵고 추운, 삼시 제때 끼니도 때우기 힘들었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견디기 버거웠던 어린 날, 오른팔이 부러져 보건소에 다닌 적이 있었어요. 한 달 정도 다녔는데, 힘든 집안 형편을 눈치 챈 간호사 누나가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는 씻겨주고 때도 밀어주고 맛있는 음식도 양껏 먹게 해주던 기억, 커서도 잊혀지지 않아요. 그 누나의 포근했던 손길, 사람의 정이…."
어린 날 추억 한 토막을 회상하며 그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말간 눈을 붉히는 최영석씨.
그가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자원 활동 모임은 "늘사랑해회"였다. 20대 초반에 벼룩시장 광고를 보고 찾아가 알게 되었는데, 뜻 맞는 30명 정도의 젊은이들과 어울려 여러 형태 장애우들의 손발이 되어주고 어린 나이에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아이들을 보살펴주는 일이었다.
"이름은 김미수, 중학생이었어요. 결손가정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한 달에 4만 원 정도를 보내주고 가끔 만나 고민도 서로 털어놓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랬어요. 한창 예민할 나이에 무엇보다도 그 학생을 이해해주고 대화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한 2년 정도를 그렇게 했지요." 대수롭지 않게 말꼬리를 흐리는 최영석씨.
"늘 사랑해" 회원으로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모임도 갖고 자원 활동에 열심이던 그는 뜻밖의 사정으로 모임의 해체를 맞음과 동시에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시험할 겸 직장을 두세 군데 옮기게 됐다. 그런 와중인 1993년 10월, 등산이 인연이 되어 만난 아내와 백년가약을 맺었고 이듬해 아들을 낳았다.

 

황금 같은 택시 영업시간에 자원 활동 나서
"택시운전", 어엿한 한 집안의 가장이 된 그는 경제적인 이유와 함께 많은 사람을 만나 사는 이야기도 나누고 다른 이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게 커다란 매력인 택시 운전기사로 전업하게 되었다.
"경희궁 정문 앞이었습니다. 그때 사실 나는 피곤에 지쳐 있었어요. 순간 차창 너머로 꿈속 같은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아름답고 감동적인 손짓, 몸짓으로 밀어를 속삭이던 선희학교 두여학생, 그녀들의 표정 하나하나. 아, 그래 바로 저거야!"
최영석씨는 무릎을 쳤다고 했다. 삶에 찌들어 있는 자신의 모습이 유리거울 속에 비춰지고 있을 때 현상에서 들리는 음성은 아니었지만 영혼에서 울리는 진정한 소리 "수화", 수화를 말하는 사람들, 그들의 모습은 그에게 실로 오뉴월 뙤약볕 가운데 만난 폭포수 바로 그것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택시 운전하는 틈틈이 수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찾아다녔다.
수화강좌가 개설되어 있는 곳이 장소가 너무 멀어 여의치 않다가 재작년 가을, 드디어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복지관의 수화반 개설 소식을 듣고 수화를 배우게 되었다.
사실 영업용 택시를 운전하는 그로서 일주일에 두 번, 그것도 황금 같은 저녁 7시에서 9시까지 시간을 내기란 보통맘 갖고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었다. 특히나 갓 태어난 핏줄과 칠순을 훨씬 넘긴 아버지, 아내라는 식솔을 책임져야 할 가장으로서.
그러나 그는 3개월의 기초반 과정을 그것도 반장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무리 없이 소화해냈고, 그 후로는 수화를 매개로 만난 뜻있는 사람들이 만든 "미명회"라는 모임에 참여하여 계속해서 자원 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의 주특기인 운전으로 재가노인들을 모셔오는 일에서부터 재활원 방문, 청각장애우들과 어울리기 위한 프로그램 준비 등 젊음과 열정으로 시간은 곧 돈으로 연결되는 운전기사의 바쁜 촌음을 아껴가며 그는 땀 흘리고 있다.
"부인한테 바가지 꽤나 긁히겠어요. 개인택시도 아니잖아요? 회사에서도 좋은 시선으로만 바라보지는 않을 텐데, 생업의 위기(?!) 상황 아닌가요."
아닌 게 아니라 이러한 질문을 그는 곧잘 받는단다. 그럴 때마다 그는 싱긋이 웃는다. 그리고 한 마디. "괜찮아요. 그 대신 일하는 시간에 게으름 피우지 않고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그뿐이다.
"자원 활동하면서 속상한 기억도 많아요. 형뻘 되는 청각장애우가 능력만큼 직장에서 대우를 받지 못하다가 결국 지금은 집에서 쉬고 있어요. 장래 문제로 술 마시고 고민을 토로하는 그를 보면 가슴이 아파요. 처음 수화를 배우게 된 동기는 다분히 수화에 대한 환상도 끼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화를 배우면서 수화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며 청각장애우들의 절실한 언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물론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는 확신에는 아직도 변함없지만"
이렇게 말하는 최영석씨의 표정은 몹시도 상기되어 있다.
"얼마 전이었습니다. 북한산 등산을 마치고 불광동으로 가는 세 명의 시각장애우를 태운 적이 있어요. 별로 더운 날씨도 아닌데 금방 산을 내려온 탓인지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서로 말들을 주고받더군요. 가만히 들어보니 자신들의 어려운 형편에 대한 푸념인 것 같아서 택시비를 받지 않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그 사람들 화를 내면서 우리도 돈을 낼 수 있다. 당신은 일을 하는 것이고 우리는 승객으로 탔을 뿐이다. 그렇잖아요. 그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반성도 했고요. 단순한 감정으로, 안돼 보인다는 생각만으로 그들을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꼭 물질이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의 지적처럼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배려, 그 사람의 사정을 고려치 않는 자원 활동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제가 하는 일 아무것도 아닙니다. 단지 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마음이 가는 데로 눈을 돌릴 뿐입니다."
조용하게 말문을 닫는 최영석씨.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사귀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한 시인의 고백이 전설이 되어 가는 요즘에도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말없이 보이지 않게 다른 이들의 삶을 돌아볼 줄 아는 택시운전기사 최영석씨. 그와 같은 이들이 있기에 세상은 진정 살만한 곳이 아닐까.

 

글/ 조옥 기자

작성자조옥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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