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민경섭 > 세상, 한 걸음


[사람사는 이야기] 민경섭

본문

[사람사는 이야기]

 

민경섭 

 

하루종일 누워서만 지내는 장애우 민경섭 씨를 특정짓는 것은 지나치게 여윈 몸무게이다. 그는 이십삼 킬로그램밖에 나가지 않는 작은 몸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올해 마흔 한 살인데, 마흔 한 살 성인의 몸이 이 정도니 그가 꽤나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고생하고 있다. 그가 이 장애를 가지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 전이고, 한창 나이인 스무 살 무렵에 그를 덮친 장애는 그의 남은 생을 망가뜨렸다.
장애가 심해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그는 당연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살 수 없어 생을 포기하고 싶어도 그에겐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 무력감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긴 세월 이십여 년을 마치 식물인간처럼 누워서, 그렇지만 의식은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에 매순간 삶의 무게에 짓눌려 지내야 했다. 그래서 더욱 고통 속에 몸부림치던 그가 최근 자신의 삶을 고백한 "부서진 꿈, 다시 찾은 행복"이라는 제목의 수기집을 냈다.
이 수기집은 그의 삶의 비망록이다. 알몸뚱이 그의 삶이 생생하게 녹아 있다. 그렇다고 짐작처럼 자신의 장애와 삶에 대한 원망이 들어 있는 책은 절대 아니다. 그는 이 수기집에서 의연하게 장애를 받아들이는 한 장애우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보통사람처럼 살고, 보통사람처럼 사랑하고, 보통사람처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는 그의 삶은, 그래서 수기집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다 보면 무척 아름다워 보인다.
이제부터 그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참고로 한 마디 언급하면, 기자는 분명히 그를 만났다. 하지만 그를 만나서 들은 얘기는 사족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어떤 이야기도 당사자의 육성만큼 절절하게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수기집을 내지 않았으면 모르되 수기집을 낸 이상 그의 육성을 듣는 것이 도리이다.
민경섭, 그가 류마티스 관절염이라는 장애를 가지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 전이라고 했다. 정확하게 칠십육년도에 그는 목이 뻣뻣해 오고, 어깨에 통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때 그는 금은세공 일을 그만두고 서울 월곡동에 있는 조광피혁이라는 가죽점퍼를 만드는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피혁공장은 유난히 노동강도가 심하다. 그는 하루 열네 시간씩 일해야 했고, 일 때문에 밤을 꼬박 지새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그래서인지 그를 괴롭히던 증세는 나아지지 않고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목에서 시작된 통증이 팔에도 찾아왔다. 그리고 팔뚝이 붓기 시작했다. 그는 왜 장애를 가지게 되었을까?
"나를 아는 친척들은 내 장애가 직업병이라고 한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열네 살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금은세공을 배우기 위해 그 길로 들어선 것이다. 어린 나이에 하루 열세 시간씩 일을 한다는 것은 무척 힘들고 고단한 나날이었다. 그렇게 일하기를 사 년, 그동안 초산 염산의 약품을 다루며 독한 냄새를 맡았다.
그래서 그만두고 며칠을 쉰 후 이웃 아주머니의 소개로 피혁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도 하루 열네 시간씩 일하는 직장이었다. 야간일을 할 때면 밤을 꼬박 새는 날이 자주 있었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본드냄새와 가죽냄새였다. 거기다가 피로가 쌓여 풀지 못하고 누적되니 나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다.
월곡동에 있는 조광피혁 공장에 다닌 지 삼년쯤 되었을 때 목이 아프고 무릎과 손목이 부어 오르면서 늘 피곤했지만, 너무 무리해서 그러는 줄 알았다. 얼마 후에 병은 더욱 악화되었고 그것이 나의 마지막 직장생활이었다."
몸이 붓기 시작했을 그때 그는 병원을 찾아야 했다. 그랬다면 그의 장애는 멈추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병원비가 없었던 그는 병원을 찾을 수 없었다.
"진료를 받아야 하는데 문제는 돈이었다. 병원에서는 검사만 하는 데 십만 원이 든다는 것이었다. 작은 돈이 아니었다. 그 당시 내 형편이 십만 원을 벌려면 일 년 반 동안 먹지도 않고, 쓰지도 않고 열심히 일을 해야 마련할 수 있는 돈이었다. 나는 병원을 등진 채 고모님과 함께 무거운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서 병원과 나는 멀어진 사이가 되고 말았다. 단돈 십만 원 때문에 나의 병은 점점 악화되고 무슨 장애를 갖게 되었는지조차 모르는 채 지내야 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어느 날, 장애가 더 진행되어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고모의 소개로 찾은 한의원에서 나는 나의 장애명을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진단받았다."
비로소 장애명을 알게 된 그, 그때부터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애써 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는 무기력하게 쓰러져야 했다. 장애가 심해지면서 누워서 지낼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세월이 흘러갔다. 그는 당시 암울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벌써 걸어다녀본 지도 1년이나 지났다. 나는 어떻게든 걸어보려고 방안에서 안간힘을 쓰다가는 결국 주저앉아 우두커니 밖을 내다 볼 뿐이었다. 여름이라 그런지 무덥고 짜증스러워 하루가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무료함을 견디다 못해 어머니하고 화투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아침부터 일어나 화투를 치면 왜 그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이것이 나의 하루 생활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것도 몇 달 하다 보니 싫증이 나고 하기 싫어졌다. 무엇보다 사람이 그리웠다.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불러서 나의 답답한 마음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대문이 굳게 닫힌 집을 누가 찾아 주겠는가? 지나가는 장사꾼이라도 잠시 들렸다 갔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침묵 속의 흐름만 있을 뿐이었다."
그는 절망 속에서 몸부림쳤다. 마지막으로 "단 며칠만이라도, 아니 단 하루만이라도 걷게 돼서 어디든지 마음껏 달려가 보고 싶다"는 소망을 키웠지만 그 소망이 이루어질 리 없었다. 걷게 되기는커녕 장애에 수반되는 통증 때문에 그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며 지내야 했다.
"나는 반듯이 누워 바라보며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내 머리카락 한 가닥도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나는 사람이 옆에만 지나가도 온몸이 돌로 쪼아내는 것 같은 통증으로 소리를 지를 정도로 아팠다. 나는 속옷 하나 제대로 걸칠 수 없는 통증으로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홑이불 껍데기 하나 걸쳐놓은 상태로 지내야 했다. 이불은 무거워서 덮지도 못하고 그나마 걸친 것도 왜 그렇게 무거운지, 잠을 제대로 자지 못 자고 꼬박 밤을 새곤 했다. 어쩌다 설잠이 들면 오 분 정도 자고, 그러다 깨는, 그런 나날이 계속되었다. 이때가 팔십년, 내 나이 이십오 세 되었을 무렵이다."
비단 통증 뿐만이 아니었다. 장애를 고치기 위해 약을 오래 복용하다보니 약으로 인한 부작용도 찾아 왔다. 그야말로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그는 약의 과다복용으로 생긴 요도결석에 시달려야 했고, 콩팥이 망가져서 신장염을 앓아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누워서 지내다보니 욕창이 생겼고, 변비 때문에 관장을 해 변을 봐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여기에다 위장병, 습진 등등 말 그대로 성한 곳이 없었다.
그는 숨을 쉬고는 있었지만 살아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그를 옆에서 지켜봐야만 하는 가족의 고통은 어땠을까? 특히 어머니 서석중 씨의 아픔이 심했을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어머니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결코 웃을 수 없는 행동을 연출하기까지 한다.
"어느 날인가는 어머니께서 외출했다 오시더니 부엌에서 바가지와 커다란 식칼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셨다. 나는 무척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미쳤나, 아니면 귀신이 들려서 그러시나, 나를 죽일 생각인가, 나는 무섭고 두려워서 몸서리 쳤다. 어머니는 내가 행여 귀신이라도 들려서 아픈 것이 아닌가 하고 귀신을 쫓아낸다고 칼을 내 머리에 갖다 대며 휘둘렀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하지만 그때 답답한 어머니의 심정으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장애와 합병증으로 인한 고통 외에도 그는 원수 같은 가난 때문에 또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 즈음 그의 집은 몰락해 가고 있었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병을 앓다 돌아가셨고, 가진 게 없었던 그의 집은 제대로 된 방 한 칸 얻을 수 없는 지경에 내몰려 있었다. 지하방을 전전하면서 물난리를 겪고, 전기세 때문에 늘 어두움 속에서 지내야 했던 그 당시를 그는 지옥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한때 삶을 포기하려고 동생을 시켜 수면제를 사 모으기로 했지만 혼자서는 약도 먹을 수 없어 그는 죽는 것조차 포기해야 했다. 때문에 그에게 그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느냐고 묻지 말자. 그건 너무 잔인한 질문이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늘 고통만 당해야 했을까, 결론을 말하면 그렇지는 않다. 힘들고 견딜 수 없을지라도 삶을 버텨내면 희망이 싹은 생기는 법이다. 그의 삶의 한줄기 빛은 주거안정으로부터 찾아 왔다. 지하방을 전전하던 그는 팔십구 년 지금 살고 있는 중계동 시영아파트 십칠 평에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서울시가 장애우에게 특별 분양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입주였다.
그는 형제들의 도움과 은행융자를 받아, 작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을 마련했다. 그렇게 되면서 그의 삶은 달라졌다. 집을 마련한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그의 신앙은 더욱 돈독해졌다. 남은 생을 신앙에 기대기로 마음먹은 그는 그동안 복용하던 약을 끊었고, 그러자 합병증은 모두 사라졌다. 누워있는 것과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만 불편했지 아픈 데는 없었다.
그리고 아파트에서 살게 되면서 그에게 생긴 변화 중 가장 큰 변화는 그가 외출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등받이가 달린 휠체어를 구입해 밖으로 나갔다. 지난 세월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외출했다. 그에게 외출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바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 얼마나 그리운 대상이었던가. 그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신날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그는 예상하기 않았던 아픔을 맛보아야 했다. 바로 사랑의 고통이다. 어느 날인가부터 그는 사랑의 열병을 앓는다. 이건 무척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도 한 사람의 남자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 좋아하는 감정을 느끼는 데에는 장애가 걸림돌로 작용할 수 없다.
그가 처음 사랑의 감정을 느낀 여자는 재화라는 여성이었다. 그 부분을 그는 수기 집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내가 재화 씨를 만난 것은 옆 동에 이사 온 같은 류마티스 관절염 장애우를 알게 되면서이다. 나는 일상이 답답해서 옆 동에 이사 온 그 누님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웬 아가씨가 전화를 받기에 누구냐고 물었더니 누님을 돌봐주는 봉사자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 아가씨에게 옆 동에 사는 사람인데 놀러오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오히려 나보고 놀러오라는 것이었다. 내 사정 얘기를 했더니 그럼 데리러 오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재화 씨를 만났다. 그날 이후 재화 씨는 날마다 놀러오게 되었고, 어느새 누님을 돌봐주러 와 있는지 나를 돌봐주러 온 건지 착각할 정도였다. 그만큼 나하고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나는 재화와 함께 있고 싶어 어머니보고 놀러 가시라고 내쫓곤 했다.
재화는 나한테 무척이나 헌신적이었다. 재화는 내 발가락에 난 상처 딱지를 다 떼고 말끔히 씻겨 주기까지 했다. 소독을 해가면서 재화는 인상 한 번 안 찡그렸다. 얼마동안 치료하면서 발가락은 완전히 나았지만 재화를 만나면 언제나 마음이 조마조마하며 불안했다. 이러다가 떠나 버리면 어떡하나, 나는 정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하루하루 재화를 만나면서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재화를 좋아하게 되었고, 재화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선 재화였지만 나는 그렇지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함께 있는 날들이 늘어나면서 이성의 감정도 있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무심코 가까이 다가왔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재화는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녀는 나중에 내가 육신이 병들고 나약해져 있기 때문에 아무 감정이나 육체의 느낌 없이 모든 것을 초월하며 포기하고 살아가는 줄 알았다고 얘기했다.“
그의 사랑이 이루어졌으며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는 이 아가씨와 헤어져야 했다. 부담을 느낀 그녀가 그의 곁을 떠난 것이다.
"어느 날 저녁 재화가 찾아왔다. 텔레비전을 보고 집으로 돌아갈 무렵 재화는 내일 떠나겠다고 한다.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가려고 했는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이야기하고 가기로 했다고 한다. 나는 내일 가기 전에 집에 들렀다가 가라고 했다.
아침이 되어 재화가 찾아왔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갈 곳은 정했다고 한다. 그곳에 가서도 잘 지내라고 하면서 나는 장롱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주려고 십팔 케이 목걸이를 하나 장만해 놓았던 것을 꺼내주었다.
재화는 목걸이를 받아 들고 고맙다고 하면서 서로 손을 마주잡은 채 바라보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재화가 떠난 뒤 나는 며칠을 단식을 했다. 창문 밖을 내다보며 정말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 후 가끔 재화는 전화를 했고, 나는 그런 재화에게 전화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그 후로 지금까지 나는 재화의 소식을 모른다."
그가 두 번째 사랑의 감정을 느낀 여성은 순옥이라는 여성이었다. 그는 관광공사에서 실시한 장애우 무료관광 행사에서 자원봉사자인 그 여성을 만났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는 이때의 괴로움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장애의 벽을 사랑으로는 허물 수 없는 것일까? 순옥이 왔다 간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 나는 그녀가 보고 싶어 전화를 한다. 보고 싶으니까 오라고 하면 순옥이는 사진을 보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사진하고 직접 보는 것하고 똑같냐고 한다. 이렇게 전화를 이틀에 한 번씩 하면서 나의 마음에 있는 말들을 모두 털어놓고 이야기했다. 순옥이는 나에게 꼭 소유하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그때 언젠가는 순옥이가 떠난다는 것을 생각하니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어느 자매님이 한 말이 생각난다. 정을 주고 산다면 형제님만 상처를 받는다고 하던 말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왜 장애우들이 쉽게 정을 주지 않고 살아가는지를 이제는 알 것 같다."
잇따른 사랑의 실패는 그에게 지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줬다. 그렇지만 그는 괴로워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에게도 할 일이 있었다. 그는 비록 누워서 지냈지만 어떤 일이든 사회에 봉사하며 살고 싶었다. 그래서 개설한 것이 "사랑의 다이얼"이라는 상담전화였다. 그는 지금 삼 년째 이 전화를 운영하고 있다. 이 전화를 통해 그에게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들은 모두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 그는 그가 처음 상담했던 한 여인을 잊지 못하고 있다.
"첫 상담은 삼십대 아주머니와 새벽 두 시간 넘도록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여인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밤늦게 죄송하다며 울고 있었다. 술을 많이 마셨다며, 세상 살아가는 것이 정말 힘들고 괴로워서 못 견뎌, 늦은 밤이라 미안한 줄 알면서도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말을 더듬는 것을 보니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았다. 남편은 집을 나가 행방불명되어 돌아오지 않은 지가 몇 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지금은 딸 둘과 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술집에 나가는데 손님이 따라주는 술을 마시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힘이 든다고 했다.
그런 아주머니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힘과 용기를 갖고 살아가라는 따뜻한 말 한 마디였다. 나는 그 아주머니에게 내가 살아온 경험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얼마 후 그 아주머니는 자그마한 가게를 차리게 됐다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전화를 다시 주었다."
그는 지금 그의 네 형제들이 한 달에 십만원씩 내서 모아 보내주는 사십만 원의 돈으로 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다. 사십만 원 중 이십만 원은 융자금과 공과금을 내고 나머지 이십만 원으로 한 달을 산다. 먹고살기에 빠듯한 실정이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세상사는 동안은 아름답고 즐겁게 늘 기쁨을 갖고 작은 추억들을 만들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작은 철학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소망하는 세계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속한 희망을 위해 살아가지만 나는 하늘에 속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살아간다. 사람들은 내가 살아가는 것이 슬퍼 보일지 모르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 삶이 그렇게 슬픈 것만은 아니다. 비록 장애 때문에 건강은 잃어버렸지만 얻은 것도 있는 것이다. 작은 것 하나를 잃었지만 되찾은 것이 더 많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는 말을 맺으면서 전동휠체어 한 대만 생긴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단다. 그 말을 하며 웃는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밝다.

 

글/이태곤 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께걸음 과월호 모아보기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8672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노태호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