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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이승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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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이야기]

이승영

 

 

 

강원도 화천의 한 초등학교. 열 살의 소년 이승영은 헉헉대며 오래달리기를 하면서 확실히 남과 같지 않은 자신의 건강상태를 느꼈다. 죽을힘을 다해 달려보지만 선두와 거의 한 바퀴나 벌어지는 건 단순히 운동신경이 떨어져서라기보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 시원히 그 의문이 풀어지지 않은 채로 1년마다 몸은 점점 더 나빠져 갔다. 걷는 데도 발뒤꿈치가 묘하게 들렸고, 팔과 다리가 차례로 한 쪽씩 힘이 없어지고 움직이기가 힘들어졌다.

이승영씨 자신이 근이양증 장애우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스물아홉 살이 넘어서였다. 무슨 일 때문에 그는 꽤 유명해졌고 자신을 취재 온, 장애우를 많이 접해본 한 리포터로부터 근이양증같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올해로 이승영씨는 서른네 살. 스물두 살 때부터 기르기 시작했다는 구레나룻과 짙은 눈썹, 날카로운 눈매 등 왠지 범상치 않은 인상답게 그는 이제 추리문학계에서 인정받는 작가다. 오 년 전인 스물아홉 살에 그를 유명하게 만든 일이라는 것은 당시 우리나라의 유일한 추리문학 작가 등용문이었던 김내성 추리문학상에 당선된 것이다. 그의 응모작 "미스코리아 살인사건"은 "기성작가를 뛰어넘는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심사위원 전원의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선정됐었다.
"추리문학에 뜻을 두기 시작했던 열 아홉 살 때 서른 살이 되기 전에 무언가 이루어내겠다고 다짐을 했었죠. 당선이 되고 다른 무엇보다 어쨌든 목적한 대로를 결국 내가 해냈다는 데 대한 기쁨이 제일 크더군요."
당시 그 책은 판매에도 호조를 보여 오만 부가 넘게 팔려나갔다.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에 얼떨떨해지면서도 십년공부가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위에 보여주고, 상금으로 받은 1천만원으로 집 공사비도 보태고 해서 모처럼 아들 노릇도 할 수 있었다는 것 외에 그의 당선은 다른 무엇보다 스스로의 인생에 있어 일대 전환점이 됐다.

사실 당선되기 직전까지 그는 참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가 상사인 예편한 후 인천으로 옮겨오면서 전학을 했으나 무거운 가방을 들고 이십여 분씩 버스를 타고 다니는 일도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의 건강상태로는 더 이상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없어 혼자 검정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중학교 2학년 이후로 학업은 포기해야 했다.
그나마 검정고시 준비도 여의치 않았다. 응시원서 준비를 위해 강원도를 왔다 갔다 해야 했는데, 굳이 그렇게 해서까지 제도적인 이력을 따내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것도 포기했다.
몸의 장애상태가 점점 심각해져갔던 그 즈음인 열여섯 살부터 남들처럼 뛰어 놀 수도 없이 혼자 지내야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무섭도록 책을 읽어댔다. "형제나 친구들도 모두 건강한데 세상에 나만 이렇게 몸이 정상이 아니구나" 싶어 한탄스러우면서도 그런 사실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고 한다.
"제법 큰 S병원 같은 데서 진료를 받아보긴 했지만 결과를 부모님이 솔직히 말씀해주시지는 않아서 제 장애의 원인에 대해 자세히 몰랐죠. 아마 치료약도 없고 스무 살을 넘기기 어렵다는 얘기도 들려서 제가 상처받을까봐 가슴 아파 말씀을 못하셨겠지요."
자신의 장애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을 땐 다행히 사춘기 소년이 아니었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포기할 건 포기하고 그렇게 살기로 했다. "제 외모가 부모님이나 형제들하고 닮은 데가 별로 없이 조금 특이하게 생겨서 자랄 때 다들 농담처럼 넌 돌연변이 같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근데 말하자면 저는 이렇게 유전자를 돌연변이로 장애를 갖게 됐네요."라는 농도 이젠 던질 수 있다.

그는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무렵부터 혼자 꾸준히 책을 보면서 세상 돌아가는 원리와 다양한 모습을 지켜보고 여러 가지 생각에 빠졌다. 스스로 "모색기"라고 칭한 이 시간에 건강치 못한 몸으로도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일도 열심히 찾았다. 그러다가 팔십년도 무렵부터 문학에, 그것도 당시엔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추리문학에 한 번 승부를 걸어보겠다는 뜻을 세웠다.
기존 신춘문예 공모에는 추리문학 부문이 있지도 않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장편으로 출판사를 공략하면 무언가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도 섰다. 단편 가지고는 먹고살기가 막막하지 않겠느냐는 판단과 함께.
자신의 건강상태가 우선 고려될 수밖에 없는 결정이었지만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작곡 같은 것은 아무리 공부를 해도 그다지 승산이 없을 것 같았다고 한다.
"자라면서 셜록 홈즈류의 탐정소설에 한 번씩 빠져들면서도 모두들 순수문학으로만 등단하려고 하고 추리문학은 저질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있죠. 사실 당시 제가 접한 국내 추리문학들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왜 이런 식으로 쓸까, 독자들이 분명 외면할 텐데 하는 안타까움과 함께 나는 전통을 살려 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보기엔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는 십 년 내에 추리문학도 활성화가 될 것이라는 판단이 서더군요."

다행히 팔십오년도부터 "소설문학"이라는 문예지에서도 추리문학 공모를 시작했다. 오 년여 혼자 그렇게 아가사 크리스티나 앨러리 퀸 등의 고전 추리문학집을 정독하며 습작을 계속하다가 이듬해인 팔십육년 처음으로 공모에 응했다.
결과는 최종심 탈락. 아쉬움이 많았지만 계속해서 정진해나갔다. 그러나 다시 오 년 후 나름대로 잘 썼다고 자부하면서 응모했던 그 "미스코리아..."도 심사발표예정일에서 보름이나 지나도록 소식이 없는 것이었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되나 그때 제일 회의가 들더군요. 오 년 혼자 공부해서 최종심까지는 올랐지만 문학이란 길을 가는 데 있어 당선이라는 형식의, 주위의 인정 없이는 사실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미스코리아..." 같은 경우 정말 이렇게까지 썼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으면 도대체 나보고 어쩌란 얘기인지 절망스럽더군요."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 당선을 꼭 해서 인정을 받고 싶었지만, 그렇게 간절하게 당선을 바랬지만 이번에도 안 되면 마흔 살까지 목표를 연장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문학은 결국 그가 파 들어가야 할 한 길의 우물이었으니까. 일이 잘 되지 않는다고 그때 다시 또 다른 길을 찾는다는 건 그로서는 솔직히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다행히 얼마 후 결국 그의 응모작품은 "한국 추리문학 최고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제2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에 당선됐다는 연락이 왔다.
이승영씨는 작품의 기본 소재인 미스코리아 대회의 전과정을 묘사하기 위해 대회녹화 테이프를 방송국에 문의해 구입했다. 그걸 여러 번 반복해 보면서 구체적인 무대배경을 묘사하는 데 참조했다. 신문과 잡지들을 통해 전체적인 대회 일정이 어떻고, 어떤 과정을 통해 전국의 미녀들이 본선 대회까지 나오게 되는지도 조사해 나갔다. 작품에 등장하는 용인별장. 이 부분도 여성지의 인테리어 부분과 여행가이드 부분들을 종합적으로 그의 머리에서 재구성하여 그려낸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사실 사회적 자연적 정황묘사를 위한 직접적인 취재는 상당히 중요하다. 간혹 장애를 가진 작가들을 향해 다양한 경험이 부족하고 발로 뛰는 취재가 부족하다는 점이 아무래도 작품의 질에 반영되지 않느냐는 의심 섞인 질문이 던져지곤 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각종 잡지와 서적을 탐독하면서 특유의 집중력으로 꼼꼼히 세상의 갖가지 지식과 이야기들을 자기 것으로 채워나갔다.
그것을 필요할 때 끄집어내어 사용하는 데 있어 별다른 부족함을 느끼지 못한단다. 조심스러운 자찬대로 "머리는 있는 듯한" 그의 면모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바깥세상을 손쉽고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들도 역시 그에게는 좋은 소재창고다.
현재 형님과 여동생이 결혼 후 부모님 곁을 떠난 후 그는 부모님과 셋이 산다. 보수공사 후에 꽤 근사해진 삼층집의 아담한 이층의 공간이 팩시밀리와 컴퓨터, 대형 텔레비전 등이 갖춰진, 세상을 향한 그의 전진기지이다. 그곳에서 느지막이 일어나 세 개의 일간신문을 정독하고 텔레비전도 끝까지 본 후 다른 가족들이 모두  잠드는 밤 열두시부터 새벽 세시경까지 그는 작업을 한다.

이제 어느 정도 유명해진 그는 올해까지 장편 네 편의 작품집을 발표했고, 매달 5∼6편의 꽁트를 쓴다. 마감 날이 모두 다르니 사실 여러 편의 꽁트를 써내는 일만도 바쁘긴 하다. 그래서 주위에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다고 감탄해마지 않는다고 한다.
신인의 때를 벗고 활동연수가 꽤 되기 시작한 작가라면 소재가 떨어지고 작품구성에 대한 아이디어도 고갈될 것 같은 두려움을 누구나 갖는다. 다행히 그렇게 써 대는 데도 아직은 마감 전날 책상머리에 앉으면 그래도 줄줄 써진다. 이제는 컴퓨터를 치는 데도 두 손가락만을 동원할 수 있는 몸 상태지만 한참 아이디어가 떠오를  땐 자신도 모르게 자판을 치는 속도가 붙는다.
때로는 상금을 보태 구입한 승합차 "그레이스"를 타고 그를 따르는 동네 동생들이랑 여행을 떠난다. 내부가 넓은 승합차는 장거리 여행할 때 몸이 불편한 그에겐 침대로도 쓸 수 있다는 점이 좋아 선택했다.
올해 삼월경 삼 년 만에 내놓은 네 번째 장편 "위험한 내일"은 탈고 후 그가 가장 뿌듯함을 느꼈던 작품이었다. 그런데 전 사회적으로 불어 닥치고 있는 불황이 출판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를 실망시키고 있다. 경제불황에 가장 민감하게 영향 받는 분야 중의 하나가 추리문학인지라 광고도 변변히 못해봤다.
추리문학 지망생들의 등용문이었던 김내성 추리문학상도 그 다음 삼회를 끝으로 사라져버렸고 추리문학이라는 계간지도 결국 장사가 되지 않아 없어져 버린지 오래다.
그래도 추리문학이라는 장르를 택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추리문학에는 문학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기술과 함께 가장 사람다운 사람의 이야기가 녹아있다고 이승영씨는 생각한다. 범죄라는 것은 그야말로 악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고, 추리문학만큼 선과 악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는 것도 없으니까 말이다. 이것이 그가 설명하는 추리문학이 묘미이다.

아직까지도 추리문학은 사실 우리나라에서의 뿌리가 너무도 약하지만 국내 추리문학계에 정통의 맥을 잇고, 그래도 우리나라에도 정통 추리문학 작가 이승영이 존재한다는 인정을 받아내는 것이 그의 단호한 바람이다.
"한국추리소설은 안 읽는다, 저질이다. 이것이 한국 독자들의 냉정한 시선이죠. 그래도 잘된 작품을 꾸준히 내보이면 영웅대접을 해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욕지기를 듣기 쉽상이고요." 그러하기에 그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걸 안다.
또 한 가지, 서른 전에 그의 인생에서 문단 데뷔라는 매듭을 지어냈듯이 인생의 또한 구비인 마흔을 앞두고 그는 또 다른 계획을 내심 세워가고 있다. 몇 개월에 한 번씩 선진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치료약개발상황 등을 잔디회 관계자에게 전해 들으면서 그때쯤이면 그 계획이 현실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건 바로 결혼이다.

피 말리는 초조함 속에서 서른 즈음에 그의 두드림에 대한 응답이 왔듯 근이양증에 대한 치료약 개발과 새로운 희망으로 남은 생을 영글어갈 반려자도 조심스럽지만 슬쩍 그의 앞에 다가왔으면 한다. 물론 그는 또 혼자 중얼거릴 지도 모른다. "그때 안되면 오십이 될 때까지 계속해봐야지, 뭐"

 

 

글 / 한혜영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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