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의 가장 중요한 개념은 보편성입니다" > 세상, 한 걸음


"인권의 가장 중요한 개념은 보편성입니다"

인권운동사랑방 서준식 대표 &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김정열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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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인권운동가로서는 가장 널리 알려진 인권운동사랑방 서준식 대표, 인권법과 인권위원회를 중심으로 국내 인권현실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는 요즈음 부쩍 그 행보에 관심이 모아지는 인물이다. 함께걸음은 서준식 대표를 만나 인권의 개념과 최근 세계적 흐름, 국내 인권현실에 대한 상황, 그리고 장애우 문제를 인권의 차원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지난 94년 장애우 문제를 인권의 차원에서 바라보자는 논의가 국내에서 이뤄질 때도 함께걸음은 서 대표를 만나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으나 이번에는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서 대표가 인권운동에 몸담게 된 개인적인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김정열 : 지난 해는 장애우 인권헌장도 발표됐고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이기도 해서 인권에 대한 관심이 전에 없이 높아지기도 했습니다. 올해는 저희 연구소도 인권운동 관련한 사업을 본격적으로 하려고 하는데요. 현재 논의되고 있는 인권위원회에 관한 것, 새 정부의 인권에 대한 생각, 장애문제를 인권의 어떤 형태로 바라보고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먼저 인권의 개념부터 설명해 주시죠.

서준식 : 제가 볼 때는 존 로크가 인권을 제대로 얘기한 것 같아요. 인권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생존권입니다. 사람이 자연사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권이죠. 이것을 중심으로 자유권과 사회권이 구축이 되고 이것이 종합화된 것이 인권의 개념이죠.
  인권을 "천부인권"이라고 하잖아요. 그렇지만 인권은 절대자가 내린 어떤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내용과 범위가 변해왔어요. 인권이라는 말은 고대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근대 시민혁명 과정에서 생긴 것이고, 서구 중세사회는 신분 사회이기 때문에 인권이 있을 수가 없죠. 자본이 축적되고 자유 평등 박애라는 슬로건과 함께 봉건체제를 무너뜨리는 혁명이 일어났고 혁명이 성공하면서 구호가 법으로 규범화된 것이죠. 이것이 자본주의 법인데 자본주의는 상품경제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평등한 것을 전제로 하죠. 노동자도 평등하게 자기의 노동력을 팔고 돈을 받는 등가교환이 이뤄져야 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혁명에 성공하고 상업 자본이 주도권을 잡는 과정에서 인간의 생존권보다 자유가 더 중요하게 됐죠. 그래서 근대 시민혁명 초기 인권의 개념은 자유권이었어요. 오늘날처럼 사회복지마저도 없는 상태에서의자유권은 산업자본의 이해를 관철시켰죠.

김정열 : 인권의 개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서준식 : 보편성이죠. 그래서 선진국이나 우리나 그 개념이 달라서는 안 되는데 인권이라는 것을 내걸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이해를 관철시키려고 하거든요. 예를 들어 미국은 이스라엘이라든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들의 인권상황을 비판하지 않죠. 이라크와 사우디아라비아는 인권상황이 크게 차이가 없어요. 그런데도 자기 국익에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인권이라는 말을 가지고 두드려 패는 거죠. 1976년에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공을 해서 지금까지 섬 인구의 3분의 1을 죽였는데도 미국은 묵인을 했습니다. 인도네시아가 아시아에서 대국이고 자원도 풍부하니까 그런 계산이 있었을 거예요.

김정열 : 최근 인권의 세계적 추세는 어떻습니까?

서준식 :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지났다고 전부 다 세계인권선언을 칭송하는데 저는 세계인권선언의 한계가 굉장히 크다고 생각해요. 물론 의의가 크지만 기본적인 것을 보면 불인정합니다. 자유권 중심의 세계인권선언을 가지고 지금의 인권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죠. 어느 나라 보다도 자유권이 잘 보장돼 있다는 선진국들이 무기를 제일 많이 팔고 있거든요. 그래서 사회권을 강조하는 것이 최근 국제 인권의 추세인데요. 국제적으로 세계인권선언을 조약화한 인권조약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이건 사회권 부분을 조약한 것이고 또 하나는 시민적ㆍ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조약, 이것은 자유권 부분을 조약한 것인데 자유권 부분에는 실시조치가 있어 지켜지지 않을 경우에 개인이 유엔에 제소하는 제도가 있어요. 그런데 사회권 쪽은 그런게 없거든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반대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자유권 쪽에 실시조치를 마련하는 것이 지금의 과제죠.

김정열 : 각기 다른 사회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인권을 정의하는 것이 가능한가요?

서준실 : 지난 1993년 비엔나 시계인권대회 때 가장 강조된 것은 인권의 보편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반대하는 나라들이 많이 있었어요. 서구 선진국, 제3세계 인권운동가들은 찬성했는데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같은 제3세계의 개발국가들이 인권을 희생시켜 경제개발을 하기 위해 반대를 했죠. "서구 선진국들은 발전하는 과정에서 온갖 나쁜 짓을 해 가지고 자본을 축적해서 일정한 정도까지 이르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거다. 우리도 개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을 하는 거죠. 결국 이 나라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서 인권은 보편적인 것이지만 각국에서의 인권은 정부가 책임진다는 것으로 정리가 됐죠.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인권은 어느 사회에서나 목표가 돼야 하고 어느 사회에서나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정열 : 과연 문화나 경제의 차이를 다 아우를 수 있는 인권의 보편적 개념을 정의할 수 있을까요?

서준식 : 그게 과젠데요. 어쨌든 인권의 개념이 역사와 더불어 변해왔고 이것은 인권운동이 진보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운동은 운동의 흐름 속에서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지기 마련인데 이럴 경우 이해관계가 대립하면 이 사람의 인권은 지키는데 저 사람의 인권은 못 지킨다 이거예요. 그래서 저는 문제의 핵심은 계급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서로 같은 방향이 아니에요. 반대되는 방향이죠. 이 관계를 그대로 두고서 모든 사람의 인권을 보장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봐요.

김정열 : 그럼 생산방식도 변할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서준식 : 변할 수 있죠. 모든 사람이 다 노동자가 될 수 있죠. 어떤 사회든지 인권보장에 있어서 완벽한 사회는 없습니다. 이 사회는 본질적으로 어느 부분의 인권을 집중적으로 제약하고 있어요. 사회의 양태에 따라서 침해하는 인권의 부분이 다르다는 겁니다. 우리 나라는 지금 IMF로 노동자들이 많이 압박을 받고 있잖아요. 특히 IMF 초기에는 여성노동자가 해고의 제 1순위였죠. 이 사회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시대의 의지가 인권침해로 나타나는 거죠. 지금은 거의 힘이 없어졌지만 사회주의국가를 보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말을 쓰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공익에 반하는 인권을 제약한다는 것인데 이것도 이 사회의 지배의 의지가 나타나는 것이죠.

김정열 : 사회권과 자유권이 둘 다 중요한 데 공존할 수 있을까요? 사회권을 확대하면 개인의 무한한 욕구인 자유권이 어려움을 겪을텐데요.

서준식 : 어떤 부분의 자유권은 어려움을 겪겠죠. 그런 자유권은 전체의 이해관계와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점차 도태되는 거죠. 그러니까 자유권과 사회권을 보장해 가는 과정에서 어쩔 수없이 희생돼야 할 자유권이 있어요.

김정열 : 서 대표께서는 지금 절대적인 것보다 상대적인 차원에서 지금보다는 사회권으로 무게중심이 이동되는 게 인권의 보편성을 확보해 나갈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서준식 : 적어도 지금 단계에서 사회권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건 사실인데 그러나 사회권과 자유권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거죠.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맨 처음에 자유권밖에 없다가 나중에 사회권이 생겨서 양자가 별개의 것처럼 생각되는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시민혁명의 과정에서 여러 문건을 볼 때 강조됐던 것은 생존권을 중심으로 한,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자유가 경제계에서 잘못 자리잡고 있는 거죠. 그래서 지금 유엔에서도 공식적인 견해가 불가분의 원칙이라고 자유권과 사회권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얽히고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고 개인적으로 저도 이것을 지지합니다.

김정열 : 상투적일 수 있지만 서 대표께서 인권운동을 하게 된 개인적인 계기가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서준식 : 저는 1948년 일본에서 태어났어요. 제가 1948년생이니까 지난 해는 세계인권선언 50주년, 건국위 50주년, 4ㆍ3항쟁 50주년 그리고 서준식 50주년인 셈이죠.(웃음) 과거에는 그런 인식을 안 했는데 인권운동을 하면서 세계인권선언 50주년 서준식50주년, 국가보안법 50주년 서준식 50주년.... 이렇게 국가보안법과 세계인권선언과 함께 살아온 삶이라 뭔가 숙명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사실 저희 가족은 다른 한국 사람들의 거주지역이 아닌 평범한 일본인들 동네에서 살았고 의식도 일본인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생활하고 있었는데, 중학교 3학년 때쯤 대단한 민족적 각성의 시기를 경험했어요. 그때가 60년대 중반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일본인처럼 가장하면서 학교를 다니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죠. 예를 들어서 친구들하고 같이 있는데 내가 일본 사람인줄 알고 마음놓고 일본 친구들이 조선사람 욕을 한단 말이에요. 이럴 때 갑자기 "야, 무슨 소리 하냐?"고 할 수도 없고, 그걸 삭이고 삭이다 도저히 안돼서 중학교 3학년 때 웅변대회에 나가서 일본 친구들 앞에서 나는 한국인이라고 선언을 해 버린거죠.

김정열 : 통상적으로 중학교 3학년 정도면 사회에 대한 생각이 그리 많지 않은 시기 아닌가요?

서준식 : 큰 형님이 저처럼 쭉 일본사람 같이 살다가 대학에 들어가고 첫 방학 때 돌아왔는데 완전히 변해 있더라구요. 실은 대학에서 조총련 쪽에 가까운 학생운동을 하셨던 거죠. 그 때 아버지만 쓰던 우리말을 아버지 보다 더 많이 쓰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러다 일본에서는 민족 차별 때문에 아무래도 취업에도 제한이 있고 해서 열 아홉살 때 한국에 오게 됐는데 말로만 듣던 우리 나라의 실상을 직접 와서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 저는 종로에 사는 당숙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는데 저보다 어린 아이들이 학교에도 가지 않고 하루종일 종묘공원에서 맨발로 껌이나 신문을 파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죠. 그때 사회의식이 생기기 시작한 거예요. 저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마음속으로 법학과를 지망해 놓고 있었는데 사회의식이 조금씩 생기니까 법학을 공부한 게 굉장히 후회돼요. 법률의 속성이 보수적이고 가진 자 입장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울타리를 지키는 사람이라고도 하잖아요. 결국 대학교 2학년 말쯤 가서 법학공부를 그만두고 그  후에는 사회과학 공부를 많이 했어요.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사회과학 서적이 없어서 저는 방학 때마다 일본에 가서 사회과학 서적을 봤어요. 당시 일본은 사회과학의 전성기였죠. 그래서 저는 그때 대학생치고는 맑스 레닌주의를 가장 많이 공부한 사람이에요. 그렇지만 학생운동은 못했어요. 제가 일본에서 왔기 때문에 여기 학생들도 저를 경계했고 중앙정보부에서도 저를 감시해서 학생운동은 안 하고 그냥 주변을 맴돌았죠. 그게 많이 안타깝고 답답했어요. 그래서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일본에 갔는데 형님이 우연찮게 북한에 몰래 갔다 올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돼 저도 별 생각 없이 그냥 가 보고 싶은 마음에 8박9일 동안 북한에 갔다 왔죠. 안 들 킬 줄 알았고 만약에 갔다 온 사실을 들키더라도 학생이니까 봐주거나 기껏해야 징역 2,3년 정도, 잘되면 집행유예로 풀려 나오겠지라고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잡혀서 법전을 보여주는데 무기사형이더라구요. 저는 학생이어서 간첩죄의 최하형인 7년을 선고받았지만.

김정열 : 그것이 운동을 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계기셨겠네요.

서준식 : 아니요. 갔다 와서도 그런 의식이 별로 없었어요. 그러다가 감옥에 들어가서 미결수 상태에 있으면서 배가 고파서 철도 레일을 훔쳐서 달아나다 잡힌 사람, 자전거 한 대 훔치고 2년형을 받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런 사람들하고 같이 있으면서 확실히 이 사회는 거의 넘나들기 어려운 두 개의 세계가 있고 두 세계는 전혀 별개의 세계란 걸 알게 됐죠.  그리고 기결사동에 넘어가서는 장기수를 만나 같이 살았죠. 이 과정에 많은 걸 생각하게 됐어요. 아마 감옥에 안 갔으면 그냥 취직하고 먹고 사는 일, 결혼하는 일, 이런 일에 쫓기면서 살았을 테고 판사가 됐으면 가장 나뿐 판사가 됐을 거예요. 감옥에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이런 것들이 저를 사람으로 만들어 줬다고 생각을 하죠. 스물네 살 때부터 마흔 한 살까지 감옥 안에서 17년을 살았죠. 받은 형기는 7년인데 사상전향을 안 해서 70년대 중반에 박정희가 특별법으로 만든 사회안전법에 따라 10년을 더 받았죠. 이 법은 14년 동안 계속되다가 89년에 없어졌어요. 이것은 법원에서 결정한 것도 아니고 행정부에서 장관명령으로 감옥살이 더 하라고 명령하는 거예요.

김정열 : 이런 법이 다른 나라에도 있나요?

서준식 : 다른 나라에는 없어요. 멀지 않은 과거에 우리 나라에 이런 법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죠. 그래서 50여일 동안 단식투쟁을 했죠. 법의 판결에 의하지 않고 단순히 위험인물이라고 해서 나를 감옥에 가둬놓는 건 부당한 거다. 우선 이것부터 싸워보자 하는 생각에 단식투쟁을 시작했는데 제 건강상태가 위험하게 됐을 때도 중앙에서 아무도 내려오지를 않았어요. 죽으려면 죽으라는 거죠. 단식으로 말라서 완전히 대꼬챙이처럼 됐을 때 그만뒀는데 그래도 내가 졌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어요. 그냥 웃음이 절로 나왔어요. 내가 할 때까지 했다는 느낌하고 이 투쟁 때문에 언젠가는 풀려날 것이라는 예감이 들면서 그 동안의 고뇌가 없어지더라구요. 그러면서 밖에 나가면 말로 하는 일보다 구체적인 행동을 가지고 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김정열 : 감옥에서 나오면서 인권운동을 할 결심을 하셨나요?

서준식 : 인권운동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전혀 할 생각이 없었어요. 인권의 개념이 지금처럼 정리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서구 자본주의 사회와 굉장히 친화적인 개념이다. 인권운동이라는 것은 피해당사자, 대중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중산층의 미지근한 운동이다. 이런 생각을 했던 겨죠. 그래서 죽어도 할 생각이 없었죠. 사실 밖에 나와서 맨 먼저 하고 싶은 알은 글 쓰는 일이었어요. 안에서 편지 쓰는데 재미가 붙어서 옥중서간집 3권짜리를 냈죠.
  그런데 한 가지만 의리를 지키고 글을 쓰자는 생각을 했어요. 그 당시 감옥에서 같이 살았던 장기수들 이야기를 하고 나서 글을 쓰자는 생각에 그때부터 장기수 이야기. 사상전향 이야기를 하고 다녔죠. 그 당시만 해도 장기수 문제에 대해서 얘기를 꺼내기가 굉장히 껄끄러웠어요. 우리 나라 장기수는 거의 다 간첩죄라는 죄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간첩죄에 대한 설명없이 장기수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정권의 필요 때문에 조작된 간첩과 이북에서 내려온 정치범, 저는 장기수를 이렇게 대강 둘로 나눴죠.  놀랍게도 그 당시만 해도 장기수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전향문제는 더군다나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장기수에 대해 좀 아십니까" 그러면 "죄송합니다. "장기수"가 누군지 얼른 생각이 안 나네요"이러는 거예요. 사상전향 문제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1년 동안 대학 돌아다니면서 또 각종 모임에 가서 이런 문제들을 얘기하고 다녔죠. 이제 할 일 다 했다고 글을 쓰려고 하는데 웬 아줌마15명이 몰려와서 "당신이 도와줘야 한다. 우리는 여자니까 못한다"고 하는데 이 사람들이 장기수 가족들이에요. 그 당시만 해도  장기수 가족들이 민가협에서 소외당하고 있었어요. 학생들 어머니 중에는 간첩들하고 같이 석방운동 못한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래서 장기수 가족들은 딱히 민가협에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민가협에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닌 구심점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저를 찾아온 건데 제가 마음이 약해서 어쩔 수 없이 2년만  하겠다고 수락을 했죠. 그 때만 해도 내가 인권운동가란 의식이 없었어요. 그냥 장기수 문제를 하는 거죠.

김정열 : 장기수 관련한 활동을 2년 동안 하시면서 그런 사람들이 얘기할 공간을 마련하자는 취지에서 93년에 사랑방을 만든 건가요?

서준식 : 아니요. 민가협 활동을 2년 하고 이제 글을 쓸까 했는데 전민련에서 인권위원장이 와서 전선운동도 배워볼 겸 같이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어요. 그래서 전민련으로 갔죠. 전민련에 간 지 한 달 정도 지나니까 강경대 유서대필 사건이 터졌죠. 그 때 제가 전민련 인권위원장이었는데 저를 보좌하는 보조 활동가가 한 명 있었어요. 그게 바로 분신 자살한 고 김기서씬데 그이가 매일 연필로 작성한 보고서나 성명서 초안을 나한테 가져오면 그걸 제가 다 고쳐줬죠. 이런 관계였는데 그 사람이 죽었잖아요. 서강대에서 나온 유서라고 주는데 김기서 얼굴하고 확 겹치더라구요. 나만큼 김기서 필적을 아는 사람이 없는데 그 필체의 진위를 가리는 일에 내가 빠질 수 없잖아요. 어쩔 수 없이 진상규명 활동을 하면서 또 다시 1년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죠. 그 때 인권운동가로 살아갈 것을 결의한 거예요. 그러면서 감옥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 때 쓴 문건이 지금도 남아있는데 인권운동을 전문화시키자. 그러기 위해선 우선 활동가부터 전문성을 가져야 된다는 생각에 그 때부터 인권운동사랑방에 대한 구상을 하면서 인권교육, 자료실, 홍보, 국제연대라는 골격을 생각하고 사회권을 생각하고 인권교육가. 인권운동가의 재생산 이런 걸 생각했죠. 감옥에서 나와서 곧바로 그 일에 착수하고 93년에 사랑방을 만든 겁니다.

김정열 : 인권이라는 것이 부문운동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엄밀히 얘기하면 인권과 관련되지 않은 일이 없죠.

서준식 : 그런 부분이 바로 인권운동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사랑방을 만들고 굉장히 많이 헤맸어요. 인권이라는 게 만국을 포괄하고 있는 공통분모 같은 건데 여성이나 장애우, 각 계층이나 영역별로 하나 하나 갖춘다 해도 장애우 문제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훨씬 나은 상황에서 도대체 인권운동의 전문성을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계속 안 풀리더라구요. 지금은 인권운동의 전문성에 대해서 대강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각 부문운동은 나름대로 전문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이익집단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이익집단이기 때문에 다른 부문하고의 교류가 없어요. 있어도 일시적인 것이고 사안별 연대만 해서 운동의 파편화 현상이 나타나는 거죠. 이런 부분을 인권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하면서 맺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됐어요. 예를 들어서 유엔의 인권위원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국제적인 인권조약이 뭐가 생겼는지 이런 것들을 계속 입수해서 국내 부문운동단체에 나눠주는 것과 또 어떤 단체가 어떤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하면 기걸 어떻기 풀어야 되느냐에 대해서 인권분야에서 줄 수 있는 도움이 뭔가 생각하고 제공하는 일이죠. 또 고유의 인권문제, 어느 누구도 맡지 않는 교도소내 인권문제, 이런 건 우리 나라에서 특화된 단체가 없으니까 또 그런 문제들을 하는 거죠.

김정열 : 인권은 보편적인 것이 대중이 전제돼야 되는 것 아닙니까?

서준식 : 대중들이 지금 당장 받아들이느냐 나중에 받아들이느냐 이건 다른 문제죠. 예를 들어서 운동을 하려면 후원회원이 많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해야만 하는 어떤 주장 때문에 후원회원이 줄어들면 어쩔 수 없는 거죠. 굶으면서 해야죠. 지금 운동이 돈의 노예가 되고 있어요. 심한 경우는 단체를 유지하기 위해 운동을 하는 건지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운동을 하는 건지 분간이 잘 안 갈 때가 있어요. 이렇게 되면 운동이라고 할 수 없죠. 우리가 회비를 걷기 위해서 반공의식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의 정서에 우리의 말을 맞춘다면 이건 운동이 아니죠. 그래서 운동가는 독립군입니다. 일제시대 때 독립 운동했던 사람이 월급 받으면서 일했던 거 아니잖아요. 월급 안 받고 일하는 게 가장 정도고 정통적인 해결방법입니다. 그래도 운동가라는 게 실무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운동가와 실무자가 뭐가 다른가. 저는 젊은 사람들이 운동가이기를 바랍니다. 운동가가 되려면 월급 받아먹고 운동한다는 생각하면 안 돼죠. 운동에 대해 자기가 책임을 진다면 운동의 재원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죠.

김정열 : 새 정부가 들어선 지 1년이 지났는데 지금 우리 나라 상황을 인권의 잣대로 보면 어떻습니까? 또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 같습니까? 새 정부는 진보적인 인권의 방향에 접근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서준식 : 김대중이라는 사람은 적어도 역대 대통령들보다 인권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외국에 나가서 인권, 인권하고 이야기하니까 그 발언에 구속되는 측면도 있고 해서 기대를 하는데 지금까지는 실망이예요. 김대중 대통령 출범부터 지난해 10월 21일까지 구속된 사람 수가 하루 평균 2.5명 꼴이에요. 김영삼 정권 때는 5년 통털어 2.45명, 전두환 땐 2.6명, 노태우 땐 4명 이상이에요. 양심수의 문제가 인권문제의 바로미터일 수는 없지만 바로미터 중의 하나겠죠. 그런 점으로 봐도 나아진 게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나아지려고 하는 부분이 개혁입법인데 현재 이런 것들이 좌절되고 변질돼 가고 있어요. 그 한 예가 국가인권위원횐데 박상천 장관이 법무부 통제 하에 두고 싶어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검찰세력과의 문제거든요. 얼마 전 청와대에 다니는 어떤 보좌관하고 얘기를 했는데 자기가 볼 때는 대통령의 인권에 대한 의지는 비교적 강한 편이라고 느끼는데 검찰이 사사건건 완강하게 저항한다고 그래요. 우리나라에서 검찰세력, 군, 경찰 이런 세력들이 굉장히 결속이 잘 돼있고 완강하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김대중 대통령의 인권의식에 문제가 없냐 이건 아니죠. 예를 들어서 반성을 해야 내보낸다는 준법서약서는 김대중 대통령 아이디어거든요. 인권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점에 있어서도 역대 위정자하고 똑같죠.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으면서도 결정적 타격을 받지 않는 양심수 석방을 하면서 국내 인권상황이 크게 좋아진 것처럼 떠들지만 이 과정에서 실업자의 생존, 수용시설의 문제, 감옥에서의 인권문제는 중요한 인권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호도되는 거죠. 즉 사회권보다는 자유권이 더 중요한 것처럼 인식하도록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거죠.

김정열 : 국가인권위원회에의 역할에 대해서는 어떻게 전망 하십니까?

서준식 : 국가인권위원회가 제대로 만들어지고 제대로 된 사람만 앉히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겁니다. 일단 인권의 모든 문제가 무시되는 일없이 국가인권위원회의 손을 거치게 될 테니까 기대가 큽니다. 법무부에서는 법인 주장을 전혀 굽히지 않고 있지만 대통령이 비교적 민간기구에서 주장하고 있는 안으로 기울고 있어요. 2월 임시국회 때 결판이 나겠죠.

김정열 : 그렇다면 인권위원회가 생기고 나서 만약에 굶어죽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 장애우가 있는데 형제도 없고 주위사람도 다 떠나가 버렸고 시설도 포화돼서 더 이상 받아줄 수 없다고 할 때 이런 문제도 인권의 문제로 볼 수 있습니까? 아니면 그 동안처럼 복지부로 보내서 국가가 일정 정도 투자를 해서 시설을 만들어서 다시 시설에 보낼까요?

서준식 : 그건 복지문제이면서도 인권의 문제죠. 세계인권선언에 사회복지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잖아요, 다만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죠. 장애우단체가 이익집단인 측면이 있고 인권단체인 측면이 있는데 지금까지는 인권단체라는 자각이 별로 많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애우 단체 스스로 자각을 해야 세상에서도 그걸 인권의 문제로 보겠죠. 그리고 장애우 문제를 계속 인권의 문제라고 이야기를 해야 되구요. 우리 나라 장애우 관련  법들을 대강 보니까 어떤 법에 더 장애우의 권리가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는 것 같더라구요.

김정열 : 이번에 장애인복지법에 선거권이라든지 접근권 같은 것이 명시돼서 개정돼 제도적으로는 권리 개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어요. 형식적으로 다른 나라에는 없는 장애우 인권헌장도 대통령이 직접 싸인을 해서 통과시켰고요. 장애우문제도 인권 차원에서 접근을 하겠다는 정부의 시각을 환영하면서도 이것을 정책화하고 실제화하는 과정에서는 부족한 부분이 많아 여전히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죠. 그리고 개인적인 부분인데요. 서 대표께서는 일주일 중 하루를 꼭 가족과 함께 보내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흔히들 운동하는 사람들이 바깥일에 신경을 쓰다보면 가정에 소홀할 때가 많은데요. 가정일과 바깥일에 대해서 어떤 원칙을 가지고 계신가요.

서준식 : 결혼한 지 9년 되어 가는데 결혼 초기부터 일주일 중 하루는 집사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겠다고 했죠. 그래서 목요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집에서 아이들 봐주고 밥 챙겨 주고 그래왔어요. 실은 제가 아이들하고 같이 있고 싶거든요. 아이들이랑 아내가 좋아하더라구요. 좋아하는 걸 보니까 여자들은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껏 일주일에 하루만 내주는데 그렇게 좋아하다니.(웃음)
  그런데 일주일에 하루 내주는 것 때문에 내 운동역량이 떨어져도 할 수 없어요 다른 운동가보다 하루 빠진 능력이 내 운동능력의 한계라고 솔직히 인정합니다. 다른 활동가들이 일주일에 엿새 일하면 내 능력은 닷새 일하는 능력밖에 안 된다고 생각해요.

김정열 : 오늘 여러 가지 말씀을 많이 해주셨는데 끝으로 서 대표님께서 앞으로 운동을 이렇게 전개할 것인지 지켜보게 될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서준식 : 저는 항상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해오지 못했어요. 이제까지 했던 모든 것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어요. 지금도 실은 어느 정도 의무감, 의리 때문에 하고 싶은 일 제껴놓고 하고 있는데요.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하기 싫은 일만 쫓아다니며 살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일단 운동가로서 이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열심히 해야죠. 그게 단지 사회를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라기 보다도 내가 후배들한테서 짊어진 책임, 인권운동이 자유권을 주장하면서 자유경쟁체제를 정당화시켜주는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는 부분을 경계해야합니다. 이것은 진보적인 인권운동의 마인드를 가지지 않으면 꿰뚫어보지 못해요. 이걸 후배들을 위해서 좀 더 정리를 하고 싶어요. 그리고 죽을 때쯤 우리 딸들이 "우리 아빠는 좋은 일을 하셨다. 좋은 사람이었다"라고 얘기해주는 것이 목표예요.
  


글/ 노윤미 기자 사진/ 김학리 기자

작성자노윤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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