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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갈곳이 없어요. 알아볼 데가 없어요"

장애우실직자모임터에서 만난 정신지체장애우 오준석ㆍ최광수 씨

본문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지난 해 시월부터 "장애우실직자모임터"를 운영하고 있다. 모임터에는 어려운 시대, 직업을 가지지 못해서, 그래서 가슴아픈 사연들을 가진 장애우들이 적을 때는 하루 오십여 명, 많은 때는 백여 명이 찾아들고 있다. 그 중에서 눈길을 끄는 두명의 장애우가 있다. 바로 정신지체장애우인 오준석 씨와 최광수 씨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장애우 중에서도 정신지체 장애우는 특히 취업이 힘들다. 사업주의 배려와 사회복지사의 눈물겨운 취업 알선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게 이들의 취업이다. 이 점을 전제한다면, 이 황량한 시대, 실업자가 넘쳐나서 장애우 취업은 아예 관심사가 되지도 못하는 야만의 시대에 정신지체 장애우가 취업처를 구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 보다 힘들 것이라는 예측은 현실에서 충분히 가능한 사실이다. 

  그래서 다른 장애우들은 모임터를 찾지 않는 날도 있지만, 이 두 명의 정신지체 장애우는 취업의 꿈을 간직한 채 모임터를 꼬박꼬박 찾아온다.
  어느 날 모임터에서 이들을 만났다. 두 명의 장애우 중 정신지체 삼급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오준석 씨는 특히 처한 상황이 힘들어 보였다. 집을 뛰쳐나온 지 삼 년째인 그는 현재 거처가 없어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실업자에다 노숙자라는 최악의 환경에 놓여 있는 그의 살아온 삶의 얘기를 가감없이 그의 육성을 통해 들어 보았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정신지체 삼급이라는 장애는 정신지체 장애우 중에서도 비교적 경미한 편에 속하기 때문에 그의 얘기를 지면에 옮기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내 나이 올해 스물일곱 살이에요. 집은 서울 구의동 강변역 근처에 있어요. 아버지 어머니 있고 누나는 결혼해서 따로 살아요. 지금 어머니는 새엄마예요. 나 낳자마자 친어머니는 돌아가셨어요. 약 먹고 죽었어요. 나를 누나가 길러줬지요. 아홉 살까지 길러주고 그 후로는 특수학교인 다니엘학교에 갔어요. 거기서 먹고 자고 하면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했어요.
  그 다음에는 다시 성베드로 학교에 갔어요. 거기서는 1년 밖에 있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빼줘서 학교를 나왔어요. 내가 담벼락에서 떨어졌어요. 친엄마가 보고 싶어서 담을 넘다가 떨어졌어요. 그래서 아팠어요. 그 후로 집에 있다가 계모가 잘 대해주지 않으니까 집을 나왔어요. 내가 공부 안 하고 뺀질이짓 한다고 맨날 야단 맞았어요. 집에 있기가 싫었어요. 어머니가 괴롭히니까, 그리고 계모가 무당이예요. 그러니까 내가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맨날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러는데 어떻게 집에 있어요? 집에 있을 때는 하루종일 텔레비전만 보고 있었어요. 그랬더니 텔레비전만 본다고 엄마가 때리질 않나, 어떤 때는 말 안 듣는다고 때리고 그래서 집에는 있기가 싫으니까 나왔지요.
  삼 년 전에 집 나와서 을지로 입구로 갔어요. 그냥 잠자러 갔어요. 잠은 지하도 바닥에서 자고 낮에는 직장 알아보러 다녔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좋은 사람 만나서 신설동에서 학원 전단지 뿌리는 일을 했었어요. 한 달 월급으로 삼 만원을 받았어요. 그 일을 일년 반 동안 했어요. 잠은 그냥 을지로 입구 지하도에서 잤어요. 추위도 그냥 옷 덮고 잤어요. 그 다음에는 단란주점에서 일 했어요. 아는 사람 소개로 가서 컵 닦고 청소하고 그랬는데 주인이 월급도 주지 않고 부려먹기만 했어요. 잠은 단란주점에서 잘 수 있어서 좋았지만 월급을 주지 않으니까 내가 나왔어요. 그 다음부터는 갈 데가 없으니까 지하철 이호선을 타고 계속 돌았어요. 밥은 꼬지해서 먹었어요. 어느 날 내가 술을 먹었는데 배가 고프니까 한 번 해봐야겠다는 용기가 생겼어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한 푼 보태주세요, 라고 구걸해서 밥을 먹었어요.
  잠은 계속 을지로 입구 지하도에서 잤죠. 그랬는데 노숙하면서 사람들한테 많이 맞았어요. 을지로 지하도에는 대장이 있어요. 대장이 내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막 때렸어요. 그래서 잠자는 곳을 을지로 삼가 지하도로 옮겼어요. 거기서도 많이 맞아서 다시 동대문운동장역 지하도로 옮겨서 잤는데 노숙자들이 나한테 꼬지 하라고 강요하질 않나, 가서 돈 벌어 오라고 그러면서 때리는 바람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어요. 어떤 때는 내가 술 먹고 말썽피울 때도 있었지요. 술을 먹고 나도 괴로우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사람들한테 덤볐어요. 그렇게 싸움도 하고 그래서 거기도 못 있고, 서울대입구역에 가서 잤어요. 낮에는 거기 대합실 에 앉아 있었지요. 그랬는데 어느 날 의경들한테 잡혀서 방범수사대에 끌려갔어요. 어떤 여자 손님이 대합실 만남의 장소에서 지갑을 잃어 버렸는데 내가 훔쳐갔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끌려가서 많이 맞았어요. 의경들이 내가 훔치지 않았는데 훔쳐간 거 빨리 내놓으라고 그러면서 막 때렸어요. 그런 일이 있어서 지금도 서울대입구역은 안 가요.
  갈 데가 없어서 이번에는 사당역으로 갔어요. 낮에는 사당역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밤에는 바깥에 나가서 사당역 근처 주차장의 의자에서 잤어요. 춥지는 않았어요. 그 때는 여름이었으니까 하나도 춥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날씨가 추워지면서 작년 초부터 낙성대역에서 잤어요. 역 대합실에 있는 의자에서 잤어요. 어떤 때 역무원들이 쫓아내고 셔터를 내리면 그 바깥 땅바닥에서 그냥 잤어요.
  그렇게 밖에서 자다보면 정말 힘들어요. 겨울하고 마음이 괴로울 때는 더 힘들죠. 그럴 때는 술을 먹어요. 예전에 지하도에서 잘 때는 술을 더 많이 마셨어요. 하루에 소주 댓병을 먹고 잔 적이 많았어요. 그렇다고 알콜중독자는 아니에요. 소주 먹고 자면 안 추우니까 그래서 술을 먹고 잔 거예요. 내가 돈이 없을 때는 많이 굶었어요. 주머니에 돈 한 푼 없으면 그냥 굶는 거죠. 그러다가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으면 꼬지 일을 했어요. 배가 고픈데 집이 없다고 핑계 대면 사람들이 천 원도 주고 백 원도 주고 그랬어요. 물론 안주는 사람도 많아요. 구걸해서 주머니에 돈이 생기면 그걸로 밥도 사 먹고 술도 사먹었어요. 그리고 수첩도 사고 양말도 사고 오락실에 가서 놀았어요.
  그렇게 다 까먹었어요. 빨래는 못하니까 옷이 더러워지면 버리고 딴 옷으로 갈아입어요. 미아리 성가병원에 가면 옷을 그냥 나눠주거든요. 그래서 옷이 더러워지면 거기 가서 새 옷으로 갈아입어요.
  요즘은 꼬지 일 안 해요. 자존심 때문에 앞으로도 구걸은 하고 싶지 않아요. 남자가 나이가 들었으니까, 그리고 창피하니까 앞으로 구걸은 하지 말아야죠. 그래도 열심히 돈을 모을 거예요. 이래뵈도 꼬지 일 그만두고 여기 실직자모임터에 와서 돈 많이 모았어요. 얼마를 모았냐면, 지금 내 저금통장에 이십육만 백구백칠십 원이 있어요. 모임터에서 주는 하루 차비 이 천원을 쓰지 않고 꼬박 모은 거예요. 작년 시월에 모임터에 왔는데 그때부터 하루 이천원 씩 매일 저금했어요. 돈 많이 모아서 꼭 방을 얻을 거예요. 밥은 어떻게 먹냐구요? 밥은 모임터에서 주는 식권으로 먹어요. 모임터에서 하루 두 장씩 식권을 줘요. 그 식권으로 점심과 저녁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배고프지 않아요.
  비록 노숙 생활을 하지만 나도 가방이 있어요. 가방 속에 옷도 있고, 짐도 있는데 그 가방이 지금 봉천동에 있는데 찾으러 갈 수 없어요. 사당역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같아 가서 자자고 해서 따라 갔는데 방도 지저분했어요. 거기다가 가방을 놔두고 왔어요. 지금 왜 가방을 찾으러 못 가냐면 내가 먹지도 않았는데 방 앞 가게에서 나한테 외상값을 달라는 거예요. 내가 안 먹고 딴 사람이 갖다 먹었는데 가게에서는 자꾸 나한테 외상값을 팔천오백원을 달라고 그래요. 그래서 가방을 못 찾아오고 있어요.
  집은 연락처는 알지만 가고 싶지 않아요. 대신 아버지가 보고 싶으면 전화해요. 전화해서 아버지 어떻게 지내세요, 라고 물어보죠. 그러면 아버지는 어디 아프지 않냐고 물어봐요. 그러면서도 집에 들어오라는 말은 하지 않아요. 아버지는 내 걱정 안 해요. 아버지에게 나는 내논 자식이에요. 실제로 아버지도 자식 내놨다고 그랬어요. 그렇지만 돈 많이 벌면 꼭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싶어요. 그게 내 소원이에요.
  갈 데는 없지만 수용시설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거기 가면 못 나오기가 쉽잖아요. 나는 나오고 싶으니까 힘들어도 시설에는 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시설에 들어가면 거긴 규칙 생활을 해야 하니까 들어가기가 싫어요.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거든요. 자꾸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그러는 건 싫어요.
  모임터가 문을 닫으면 어디로 갈지는 아직 생각 안 해 봤어요. 어떻게든 직장을 알아봐야죠. 직장 잡아서먹고 자고 했으면 좋겠는데 아직 어떤 직장을 잡고 싶은지는 생각 못해봤어요. 솔직히 말하면 노숙 생활을 하다보니 내가 손을 많이 떨거든요. 그래서 일을 하기는 힘들어요. 그래도 시설에는 가고 싶지 않아요. 혹시 밤에 잠만 잘 수 있게 해 주고 낮에는 내 맘대로 하게 해주는 시설이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데 그런 시설은 없나봐요.
  아플 때는 누나가 많이 생각나요. 누나가 보고 싶은데 계모가 연락처를 가르쳐 주지 안아요..... 꿈이요? 스물일곱이나 먹었으니까 빨리 결혼해야죠.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실직자 모임터에서 만난 또 한 명의 정신지체 장애우 최광수 씨는 오준석 씨 보다는 형편이 나았다. 그는 집이 있었고 가족이 있었다. 그렇지만 직장이 없기는 그도 오준석 씨와 매한가지였다.
  최광수 씨도 정신지체 삼급의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외관상으로 볼 때 오준석 씨 보다는 장애가 더 심해 보였다. 그렇지만 그는 실직자 모임터에 오는 장애우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다. 그가 모임터 장애우들에게 환심을 사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그는 집에서 하루 오천원의 용돈을 받아 모임터에 나온다. 그 돈을 잔돈으로 바꿔 차비를 빼놓고는 모두 장애우 동료들에게 커피를 사주는데 쓰는 것이다.
  그렇게 한없이 사람 좋아 보이는 최광수 씨도 물론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무슨 일을 하나, 무슨 일을 하나"란 말을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이 중얼거림 속에는 일을 하고 싶은 최광수 씨의 강렬한 열망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또 일은 하고 싶지만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아서 그는 답답해했다. 오죽했으면 그의 소원이 수용시설에 들어가는 것일까.
  "지금 신길동에서 살아요. 나이는 서른한살이에요. 모임터에서 오기 전에는 그냥 집에 있었어요. 모임터는 인력은행에서 소개받아서 오게 됐어요. 인력은행에 일자리를 알아보러 갔는데 마침 모임터 간사가 왔다가 나를 데리고 여기 왔어요.
  여기 나오면 재미 있어요. 집에서는 하루종일 전화만 받고 있었어요. 그 전에는 국립재활원에 있었어요. 재활원에서 뭘 했는지는 오래돼서 모르겠어요. 무슨 일을 하고 싶냐구요? 무슨 일을 하나, 무슨 일을 하나,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요. 자립해야 하는데 일할 데가 없어요. 알아볼 데가 없어요. 오래 전에 비닐을 봉지에 담는 일을 했었어요. 그 일을 하다가 눈이 아파서, 눈이 충열되서 그만뒀어요. 그 일 말고는 여태껏 한일이 없어요.
  부모님은 신길동에서 가게를 해요.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면 내가 집에서 전화 받고, 텔레비젼 보고 있어요. 요즘은 여기 나와요. 여기 나오면 심심하지는 않지만 답답해요. 그런데 달리 갈 데가 없어요.
  모임터에는 혼자 와요. 집에서 마을버스 타고 전철 이호선 타고 와요여. 부모님이 돌아가시지 전에 자립해야 하는데 뭐해서 자립해야 하나, 뭐해서 자립해야 하나, 어떻게 자립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침에 나와서 모임터에서 지내다가 저녁 여섯 시에 집에 들어가요. 집 열쇠는 없어요. 내가 열쇠를 자주 잊어 먹어서 부모님이 나한테 열쇠를 맡기지 안아요. 그래서 부모님 가게에 가 있으면 동생이 와요. 동생하고 같이 집에 가는 거죠.
  남동생은 회사 다니는데 동생은 나한테 잘 대해줘요.
  나는 시설에 들어가고 싶어요. 장애우들 모여 사는데 어디쯤에 있어요? 가르쳐 주세요. 시설에 들어가면 부모님 못 본다구요? 그래도 괜찮아요. 가족하고 떨어져 사는 것도 괜찮아요.
  왜 집을 나오고 싶냐면 집에 계속 못 있을 것 같아서예요.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에 집을 나와야 할 것 같아요. 시설을 소개해 주세요.
  자유가 없고 밖에 못 나와도 상관없어요. 어디예요? 소개시켜 주세요. 집에 있고 싶지 않아요. 집에 있으면 전화가 계속 와요. 안 오면 좋겠는데 전화가 계속 와 가지고 싫어요. 어디든 가고 싶은데 갈 데가 없어요. 알아볼 데가 없어요..."

 

글/ 이태곤 기자,  사진/ 김학리 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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