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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누구를 만나든지 자랑하고픈 우리 아이들"

마라그룹홈 운영하는 쳐녀 엄마, 이영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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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든 결혼도 안한 한 여성이 남의 자식을 보고 "이 아이는 나와 평생을 살아야 할 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당사자들 앞에서 소리내어 그 생각을 말로 끄집어낸다면 부모들 반응이 어떨까. 여느 부모라면 아이를 자신의 뒤로 감싸안듯 숨기며 행여 곧 유괴를 당하기라도 하는 양 그 사람을 매서운 눈초리로 아래위를 훑어 볼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도 그 사람의 두 손을 잡고 눈시울을 적실 부모들도 있다. 고맙고도 서러워서, 때로는 자식들이 자신들보다 저 세상에 앞서 갔으면 하는 모진 마음까지 들곤 한다고 고백하는 정신지체장애우들의 마음까지 들곤 한다고 고백하는 정신지체장애우들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바로 그들이다. 자신이 죽은 뒤 아이가 주변 사람들에게 천덕꾸러기로 남지 않을까, 여기 저기 휘둘리며 사회의 그늘을 전전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차라리 그 꼴 보지 않고 자신들에게 여력이 있을 때 먼저 땅에 묻고 , 그리고 그 아이를 다시 가슴에 묻은 채 세상 떠나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어머니, 아버지들.
  송파구 문정동에 있는 "마라그룹홈"에 자식들을 보내놓은 열 명의 정신지체, 자폐아 부모들은 그 마음 어렵지 않게 듣곤 한다. 그곳 원장인 이영민(40) 씨에게서, 그리고 두어 주만에 집에 와서도 저녁때쯤 되면 원장님만 찾고, 집에 가야한다며 양말과 가방을 찾아드는 자식들을 보고 한편 섭섭하면서도 한편으로 저윽이 마음이 놓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죽어도 이 아이는 사랑 받으며 살 수 있겠구나, 하고
  몇 달만에 부모님이 계신 집에 가는 이 원장도 마찬가지다. 뒤척이며 잠을 못 이루고 밤 열시 열한시가 되도록 가방에 손을 댔다 말았다 안절부절 하는 딸을 보며 이 원장의 어머니도 "니 집으로 가라"하고 담담하게 말씀하시고 만다. 그리고 다시 마라그룹홈에서는 이 원장과 아이들의 얼싸안는 상봉식이 치러지는 것이다.

 


자폐아들과의 첫대면
  취재약속을 하고 안내 받은대로 찾아간 문정동 주택가의 빨간 벽돌 삼층집에서 기자를 맞은 이영민 씨에게선 자그마한 키와 송아지같이 순한 눈망울이 먼저 눈에 띈다. 두 팔에 약간의 장애가 있고 숭실대 사회복지대학원을 나왔다는 등등의 소소한 개인 이력은 이미 알고 있던 터였지만 그것들이 정신지체장애우들과 함께 하고 있는 현재 그의 삶을 어떻게 씨줄과 날줄로 엮어 내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학원에 다닐 때 남부장애인 종합복지관에서 자폐아 부모들을 대상으로 심리상담을 했었어요. 그 때 처음 자폐아를 봤어요. 겉으론 멀쩡해 보이는 녀석들인데 전혀 대화도 안되고 이상한 행동을 막 하는 거예요. 그런 아이들을 보고 부모님들이 저를 붙잡고 자신들의 제일 걱정거리가 늙고 병들었을 때 어디다 의탁해야 하나, 차라리(저 자식이) 먼저 갔으면 좋겠다면서 불안해 하시더군요. 그 때 대학원 졸업하면 뭘 할까 고심하고 있던 터였기도 하고 부모님들의 생활 자체가 자기 시간 하나도 없이 너무 아이들한테만 매여 계신 것 같아서 그냥 강의 끝나고 한두 시간 정도 애들을 제가 봐주겠다고 얘길 했죠. 마침 어느 학원이 세시부터 일곱시까지 공간이 빈다길래 처음엔 한 여덟 명 정도 봐주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금방 스물 여섯 명까지 늘어나대요."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찾아간 서울 신림동의 <사랑의 집>이라는 곳에 만난,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산 한 아일랜드 신부님의 영향으로 사회복지학을 택해 대학땐 강의보다 자원활동 다니는데 더 열심이었다는 이영민 원장. 그러나 한 병원에 상담 자원 활동을 하러 갔더니 상담 받을 사람들이 그의 장애를 보고는 오히려 환자 취급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먼 길을 오셨냐"라고 말하며 되레 상담을 해줄 태세를 취하는 것을 반복해서 경험하다보니 자신의 전망에 대해 약간의 좌절도 하고 그랬던 터였다.
  그를 도와 함께 가르칠 사람도 한명 두명 부르면서 정신없이 보내던 그 때 일은 재미와 보람도 있었다.
  이상행동을 하고 자해나 과격행동도 서슴지 않던 아이들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발견하면서 "아, 조금만 더 가르치면 되겠는데"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가정적인 환경 속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교육도 할 생각으로 구십일년부터 부모회를 조직하고 공간마련을 위해 돈을 모으는 등 일을 조금씩 크게 벌여나가기 시작했다. 이 일은 자신이 평생을 두고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어느 새 마음속에 담겨 있었다.
  얼마간의 돈이 모였지만 그리 넉넉지 않았고 주변 환경도 나을 것 같아 우선 부모들과 함께 서울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지역을 중심으로 집을 지을 곳을 알아보았다. 여러 군데를 다니다 선택한 곳이 강화도 지역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장애아들이 살집을 짓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결사반대" 머리띠를 두르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현재의 문정동에 자리를 잡았고 오히려 여기에 온 것이 어찌보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같이 기도도 해주던 주민들이 하루 아침에 험악한 얼굴로 돌변해 자신들의 등을 떠밀었던 그 사건은 지금도 이영민 씨에게나 부모들에게 크나큰 상처로 남아있다. "아무리 서울인심이 각박하다고 해도 장애우들을 자주 접해봤던 서울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는 낫지 싶어요." 그래, 사람사는 이치가 자주 생활 속에서 얼굴을 맞부딪쳐야 서로 익숙해지기도 하고 정도 들고 그러는 것 아닌가.


 

동네에서 창문이 제일 많은 집
  다행히 현재 살고 있는 주택에는 별다른 충돌 없이 마라그룹홈이 들어설 수 있었다. 그동안 이웃들과 적지 않은 해프닝이 있었고 눈총도 많이 받았지만 구십사년 입주를 마친 수 오년이 넘어가면서 이제 이 동네 일대에서 마라그룹홈은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됐다고 자부한다. "이 동네에서 우리 집에 안 들어와 본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니까.
  지은 죄 없이 찔리는 구석이 많아 동네 사람들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아니 그 사람들이 쉽게 자신들에게 다가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한 사람이라도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아이들 옆구리를 쿡쿡 찔러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도록 했더니 이젠 누구든 서로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청해오곤 한다.
  부활절이면 아이들하고 선생님이 부활절 계란을 나눠먹자는 뜻에서 서너말씩이나 삶아서 동네 구두닦는 아저씨부터 경찰서 아저씨까지 인근 모든 주민들에게 계란을 돌리기도 한다. 그런데 처음엔 아이들을 앞세워 그것을 파는 줄 알고 "얼마 주면 되냐"고 물어오는 사람도 있었고 억지로 돈을 쥐어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땐 그 돈만큼 계란을 사서 다시 갖다 주는 방법으로 조용히 그들의 시각을 바로 잡도록 했다.
  그렇게 동네 사람들과 돈독한 관계를 쌓기 위해 살얼음판 걷듯 조심조심 다가가는 한편 이 원장은 이십사 시간 같이 지내게 되면서 새롭게 발견하게 된 아이들의 이상행동들과도 치열한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아이들과 숙식을 같이 하는 교사들도 있지만 이 원장은 부모님이 계신 집보다 이 곳이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해 처음부터 같이 지내고, 지금도 아이 두 명과 함께 잠을 잔다.
  "이전에 몇 시간 맡아 볼 때는 가끔씩 부모님들이 어제 새벽 몇 시까지 아이가 울면서 잠을 안자서 고생했다거나 새로운 집에 이사갔더니 구조가 바뀐 것에 적응이 안돼서 다시 예전처럼 바꿀 생각으로 망치를 들고 달려들더라는 얘기를 들어도 저랑 있는 시간동안에는 말을 제법 잘 들어서 사실 이해가 잘 안갔거든요. 그런데 같이 살아보니 그제서야 부모님들이 이해가 되더라구요."
  처음 부딪친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큰 소리로 울어대는 자폐아들의 울음 소리였다. 새벽  너다섯시부터 대성통곡을 해대는 아이의 울음소리는 그대로 새벽정적을 깨고 동네 일대에 퍼져나갔고 그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때를 가리지 않고 계속 되자 이웃들의 수군거림이 그대로 이 원장에게로 전달돼 왔다.
  지나가다가 마주치면 "왜 이렇게 애들을 울려요"하면서 정말 이상하다는 듯이 물어보기도 했고, 한 번은 우는 아이에게 겁주려고 "매 좀 갖고 와"라고 말했더니 그 말을 지나가다 듣고 "어머, 저 원장 애들 되게 때리나봐"하는 말이 돌기도 했다.
  그래서 요즘도 일단 아이가 울기 시작하면 선생님들은 창문을 닫느라 분주해진다. 꼭 베란다에 나가서 우는 아이도 있어 그곳까지 창문을 설치했다.
  하지만 대부분 워낙 어렸을 때부터 이영민 씨를 봐오던 아이들이기도 해서, 이제 그의 눈빛이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이 반쪽만 불리는 것으로도 아이들은 금방 수그러든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예전엔 눈도 안 마주치던 아이가 이제는 대화도 잘 돼서 이 원장이 "아, 북어국 먹고 싶다"하고 말하면 인스턴트제품을 사서 죽이 되든 뭐가 되든 끓여 내오거나 약국 심부름도 도맡아할 정도로 상태가 좋아져 그이를 즐겁게 한다.
  그렇게 길게는 십년 넘게 봐온 아이도 생기면서 자폐증에 관해서도 전문가 수준이 됐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쉽게 보여주지 않고 닫아 걸어버린 아이들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면서 그도 새삼 새삼 놀란다.
  "물론 일상생활에서는 인내심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테스트를 하는 아이들이죠. 그렇지만 소통이 안돼서 그렇지 그 정신세계는 정말 아름다워요. 또 한 가지씩은 기가 막힌 재주들이 있죠. 그런 것이 쉽게 발견되지 않는 아이도 언어능력이 부족하거나 다른 것을 통해서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해서 그렇지 다들 무한대의 능력을 한 가지씩은 있다고 생각해요. 저희 주단기보호센터에 오는 아이 중에 어떤 노래를 몇 번 듣더니 풍금을 치는 아이도 있어요. 그것은 그 자리에  풍금이 놓여있기 때문에 발견할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죠."
  가끔 자녀의 장애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려고 애쓰는 아버님 중에는 한 가지 그런 능력을 보이면 천재 났다고 무척 들떠 하시는 분도 있다. 그럴 때 이 원장은 그건 그저 편집증적인 것일 뿐이라고 냉정하게 말하지는 않는다. 정말 천재일지도 모르니까. 그렇지만 어떠어떠한 점들은 좀 부족하기 때문에 교육을 계속 받아야 한다고 조용히 말씀드릴 뿐이다.

 


무공해 콩나물공장으로 문정동 시장 석권할 터
  현재 미라그룹홈은 이삼 층으로 나뉘어져 이층에 장애아 다섯 명과 교사 한 명, 이 원장이 그리고 삼층에는 장애아 다섯 명과 교사 한 명이 산다. 열 명이 한 번에 모여 살기도 해봤지만 다섯 명씩 그룹홈 형태로 사는 것이 훨씬 좋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고 한다. 작은 시설이 되지는 말자는 것이 그룹홈을 운영하면서 늘 경계하는 점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그룹홈에 입주한 장애우가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전단계로서만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몇몇 경증정신지체인의 경우 해당될 수 있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중증 정신지체장애우들 같은 경우 몇 년 동안 그룹홈에서 생활훈련을 받는다고 해서 자립생활이 가능하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지역에 이용시설이 다양하게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복지사가 자주 방문해 돌봐주지도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만약 그룹홈에서 나온다면 현실적으로 가정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죠. 그런데 대부분 몇 년 동안 바로잡아졌던 행동들이 가정으로 돌아가면 다시 퇴행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가족들도 또 다시 그 장애우를 별다른 대책도 없이 떠안게 되면 스트레스로 갈등도 생기고요. 그래서 저는 이 아이들과 평생을 지낼 생각이에요. 제일 나이 어린 아이가 열여덟살이지만 제일 많은 아이가 서른한살이니까 슬슬 아이들 노후도 준비해야 될 것 같고, 주단기프로그램에 오는 아이들도 제가 책임지게 되겠죠."
  그런데 시나 복지부에서 기존 그룹홈을 지원할 때 내세우는 지침이나 규정들은 그를 참으로 답답하게 한다.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잘 알려고도 않고 "규정에는 이렇게 돼 있다", "지침대로 돼 있지 않아서 곤란하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시에서 설정하고 있는 그룹홈의 상과 저희가 운영하고 있는 현대의 그룹홈 모두 약간씩 수정을 거친 새로운 모델이 생겼으면 하고 저도 바라고 있어요."
  다행히 지난해 한국장애인부모회 송파지부가 되면서 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아 서울시 지원으로 주단기보호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있게 됐지만 그룹홈 전체 운영에는 정부로부터 한푼의 예산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올해도 그룹홈 운영비를 부모회비와 후원에 기댈 수밖에 없다. 뛴 만큼 들어오는  후원에 더 매달려야 할 것 같아 숭실대에 출강하던 것도 시간관계상 거절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 산하에 운영하고 있는 주단기보호센타에서 아이들이 보석함이나 한지공예를 직업훈련으로 하고 있는데 지난 연말에 전시회를 열어 순식간에 백육십만원을 벌 수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그것이 아이들의 안정적인 수입원이 되지는 못하는 실정이다.
  그래서 이 원장은 무공해 콩나물공장을 차리는 것이 꿈이다. "아이들 중에는 물을 잘 주는 능력이 있는 아이가 있고, 포장을 잘 하는 아이, 배달 잘하는 아이 이렇게 각각 잘 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씩은 있거든요. 그래서 한 열 평 정도 공간만 주어지면 이 문정동 콩나물시장을 석권할 자신도 있어요.(웃음) 아직은 공간도 문제고 제가 콩나물 기르는 법에서부터 그 사업의 운영체계를 어떻게 잡을 것인지를 고민할 여유가 없지만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봐요."
  또 주단기센터에 오는 아이들의 부모 중에서도 이미 그룹홈 입주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정생활훈련을 위해 지금 단기를 예정하고 들어와 있는 아이들도 있는데 그 아이들은 위해 이 공간은 계속 운영하더라도 아이들의 노후는 좀 더 공기 맑고 너른 들판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도록 해주고 싶은 것이 그의 또 하나의 바람이다.
  그것 또한 부모님들과 개미군단과 같은 후원자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 관연 언제쯤이나 그것이 이뤄질지는 이 원장 자신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런 집을 가질 수 있다면 그 집에서는 이런 노래가 흘러 나올 것이다 . 그 때 문정동에 살 때 다른 친구들과 하나 되어 부르던 "눈오는 밤"이라는 노래가.
  "그 시절의 친구들은 어디에서 무얼할까/ 우리들의 얘길할까/ 누구를 만나든지 자랑하고 싶은 우리들의 친구 이야기들/ 세월이 흘러 흘러 가서 먼훗날이 와도/ 그때 그 친구들 다시 만나겠지/ 오늘도 눈 오는 밤 그날 생각하네"

 

글 한혜영 기자    사진  김학리 기자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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