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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하나도 변한게 없네요

독일 망명 뒤 10년만에 고국 찾은 최경만 씨

본문

 

 

  지난 일월 삼십일, 김포공항에 내린 한 사내가 있다. 양 클러치를 하고 작은 가방을 하나 든, 눈으로 연신 누군가를 찾으면서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사내, 누가 보더라도 한국인임이 분명한데 그의 국적은, 그러나 독일이다.
  이름이 최경민(40), 독일에서 "경만 루끄"로 불리는 그는 정확히 십 년만에 고국을 찾아오는 길이다. 흔히 쉽게 생각하는 입양아 출신은 아니다. 오 년여 전에 그는 독일 정부에 망명을 신청했었는데, 지난 해 결혼과 함께 독일 국적을 얻을 수 있었고 내년에는 시민권도 얻게 된다.
  그가 방한하기 며칠 전 함께걸음의 한 독자로부터 그러한 이력을 가진 어떤 사람이 보름 여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그런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사실 무척이나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폐차장에 버려진 한 아이
  지금으로부터 사 십  년 전 전남 광주지역의 한 폐차장에 생후 칠팔 개월 정도 된 어린아이가 버려져 있었다. 한 신부의 눈에 띄여 보육원으로 옮겨졌고, 어느 정도 자라나 다리에 장애가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ㅅ재활원으로 또 다시 옮겨졌다. 왜 부모가 자신을 그곳에 버려야 했는지 그로서는 알 수 없을 텐데 "장애 때문에 버려졌다"고 그는 분명한 목소리로 말한다. 자신이 지난 시절 겪었던 불행이 장애 때문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는 투로.
  아무튼 그 재활원에서 그는 곁으로 보기에는 별다른 문제없이 그럭저럭 잘 지낸 듯 하다. 혼자라는 외로움과 앞날에 대한 막막함만 뺀다면 그러나 같은 장애우라도 부모가 있는 친구들과 자신과 같은 고아출신이 갖는 작은 차이점에 대해서 그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부모와 가족이 있는 친구들은 그래도 뭔가 모르게 믿는 구석이 있는 눈치였다. 실제로 재할원에 있다가 집에 갔다 온 친구들이 무심결에 하는 말들 가운데 조금씩 배어나는 가족들의 관심과 헌신은 그 친구들에게 매사에 여유를 가져다주는 듯도 했다.
  그러나 자신은 만만치 않아 보이는 세상을 자신 혼자의 힘으로 헤쳐가야 했다. 시계수리나 도장 파는 일 중에 선택을 해서 사회로 나가 방을 얻고 결혼을 해서 자리를 잡고, 일이 순탄하게 풀린다고 해도 과연 몇 년이나 걸릴 지 알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 중에 시계수리 일을 선택했다. 직업훈련으로 시계수리기술을 배운 그는 수료 후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녔다. 영세한 시계점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를 쓰겠다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장애를 가진 그가 가게에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면 손님이 떨어질 것이라는 얘기를 대놓고 하는 주인도 있었다. 인생에 대해 자위하기에는 삶이 너무 힘겨웠다.
  "사회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쉽지 않았어요. 삶의 의욕도 없고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막막해서 울기도 많이 울었죠. 주변 친구들도 다 그런 과정을 겪었는데 서로 답답한 심정을 하소연할 뿐이지 서로 어떤 도움도 못 주는 형편들이잖아요. 한 친구는 근처 시장에서 같니 앵벌이를 하자고 하대요."
  그래도 그는 어렵게 시계유리 가공업체에 취업을 했다. 그 곳에서 그는 한 달에 구만 오 천 원 정도를 받았다. 그나마도 어떤 달은 그 절반, 어떤 달은 한 푼도 받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사장 내외를 친부모처럼 따랐고,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이번 한국방문 때도 꼭 한 번 찾아 뵙고자 했지만 그 사장은 아이엠에프 탓인지 몹시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찾아 뵙겠다는 그의 청을, 그들은 자신들의 현재 모습이 부끄럽다며 거절해 그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들었다.

 


"그래, 독일로 가는 거야"
  그 공장에 다닐 당시에도 역시나 앞날에 대한 희망은 찾기 어려웠지만 그를 달뜨게 하는 일이 하나 있었다. 어차피 혼자 헤쳐가야 할 세상이라면 장애우에 대한 인식이 형편없는 이 한국 땅, 좁은 우물 안에서 헤맬 것이 아니라 외국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곳은 적어도 열심히 노력만 하면 언젠가는 기회가 주어질 것 같은 생각에.
  "사람이 태어나서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발전을 추구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동물같이 밥 먹고 잠자고, 그것만 충족시키려고 하는 것은 그건 진정한 생활이 아니죠."
  처음 관심을 가졌던 나라는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웬지 친숙하게 생각되는 미국이었다. 비행기표 값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월급을 모으는 도중에 일단 미국에 비자신청을 해 보았다. 그런데 관광비자를 얻기 위해서도 증인을 요구하는 미국이란 나라는 구와 같이 장애를 가진, 가진 돈도 없는 고아출신에게는 그렇게 처음부터 접근금지였는지 모른다. 서 너 번 거듭 비자신청을 해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비웃음이 담긴 "불가"도장 이었다.
  다음으로 눈을 돌린 나라가 바로 독일, 마침 이미 육 년여 전부터 펜팔을 해온 독일 여성이 있었다. 자신 보다 일곱 살 연상인 로즈마리라는 여성을 잡지에서 보고 편지를 보내기 시작하면서 독일어를 혼자 공부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실력이 달려 처음엔 번역사무실에 번역을 맡기기도 하면서 차츰 동화에서처럼 자신을 구원할 밧줄이 드리워지는 것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친구들은 이런 그를 외국 바람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고 비웃었지만 그는 사뭇 진지했다.
  편지가 오고 가면서 독일에 이러저러해서 한 번 가고 싶다는 뜻을 비쳤고 로즈마리는 언제나 환영한다고, 와서 독일의 상황을 둘러보는 동안 어떤 계기가 있지 않겠느냐고 답장을 써 보내왔다.
  그래서 그 동안 모은 돈으로 비행기표를 사서 팔십 오 년, 처음 독일에 발을 딛었다. 미국과는 달리 보증이나 증인 같은 것은 필요 없이 보다 손쉽게 관광비자를 받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런데 막상 독일에서 독일사람들을 만나는데 일단 언어가 처지다 보니 말이 안나오는 거예요. 때 제 독일어실력은 사전보고 어찌어찌 해서 혼자 편지를 쓸 만큼은 됐었는데 독일에 가보니까 사람들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아는 사람은 로즈마리 한 사람 뿐이고 한국 사람은 한 명도 찾아볼 수가 없고, 이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닌데 싶고, 여기서 살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겁이 나더라구요. 웬만하면 그 때 자리를 잡으려고도 했었는데 한 달만에 그냥 돌아왔어요."
  그 후 한 동안 그는 심리적 후유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처음엔 자신이 생각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버린 듯한 절망감이 가장 컸다. 그런데 다시 냉정히 생각해보니 자신의 마음가짐에도 문제가 있었다. 여기서든 독일에서든 어쨌든 자신은 남들보다 곱절은 고생해야 한다는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마음속으로는 그저 쉬운 길만 찾고자 하는 생각이 컸었다는 사실이 그를 부끄럽게 했다. 그 부끄러움은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다시 비행기표 살 돈을 모아 사 년 후 두 번째 독일 행을 감행한다. 제일 싼 표를 사서 비행기를 다섯 번이나 갈아타고 어렵게 독일에 도착한 후, 이번엔 어떻게 해서든 완전히 여기에 정착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때 가가 가진 돈은 오백마르크(약 사십만원)에 불과했다. 그것도 도착한 지 사흘만에 유스호스텔에서 몽땅 잃어버렸다. 막막한 그가 의지할 데라곤 또 다시 로즈마리 뿐이었다.
  로즈마리도 재회를 반가워하긴 했지만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것은 한 달 정도 자신의 집에 머물 수 있도록 하는 것뿐이라고 못박았다. 그도 자신의 불법체류로 인해 친구와 그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신고정신이 강한 독일 국민들에게 자신은 금방 눈에 띄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별 탈 없이 프랑크푸르트에 이년 동안 머물 수 있었다. 버티기 어려웠을 때 한국교회에 가서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 너 번 도움을 주던 그 교회에서도 더 이상은 곤란하다고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다시 길거리 신세, 해가 지면 아무데서고 잠을 청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해 한 번은 몹시 심한 감기에 걸리기도 했다. 다행히 한국인 식당 주인 눈에 띄여 거기서 이삼일을 보냈다. 그러나 그 주인은 자신이 곤란해진다며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그에게 다시 나가 달라고 했다.
  이렇게 독일에서 자리잡기가 쉽지 않자 문득 다른 나라에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은 육지로 연결돼 있는지라 기차만 타면 여러 나라에도 갈 수 있었다. 한 한국인 여행객이 기차표를 사줘서 독일에서 벨기에로 간 후 또 프랑스로 네덜란드로 다시 스위스로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혹 독일 보다 자신이 자리를 잡기에 좋은 곳이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유심히 살펴보면서.
  물론 위험한 순간도 많았다. 독일로 올라오는 길에 한 번을 독일경찰이 여권을 보고 기간이 지났다며 기차탑승을 막아 다시 네덜란드로 쫓겨나기도 했다. 굶주림에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될 때는 집집마다 다니며 구걸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 개 국어로 일상 회화문이 적힌 책을 들고 "배가 고프다"고 가리키자 지팡이로 때리며 가라고 내쫓았던 프랑스 할아버지도 있었고, 그래도 자기 집에 데려가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그렇게 영락없는 국제 거지행색이었지만 그는 한 번도 한국 땅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주위 친구나 선배들이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외국 바람 들어서 돈 다 날리고 들어온 한심한 녀석"이라고 할 것이 뻔했다. 뭔가를 이뤄놓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줄 때까지는 결코 돌아가라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부유해 보이긴 하지만 밤이면 공원 같은 곳에 마약중독자들이 백오십명 넘게 우글거리는 스위스를 끝으로 긴 여정을 마치고 다시 독일로 향했다. 그래도 독일이란 나라가 제일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독일에 돌아온 후 곧바로 한국인이 운영하는 비디오 가게를 알게 되어 이년 정도 그 곳에서 지내면서 조금씩 돈도 모을 수 있었다. 독일말도 어느 정도 늘었다. 그런데 한숨 돌리고 자리를 잡아가려고 할 때쯤 주인의 사소한 오해로 또 다시 그 곳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다시 거리생활을 해야 했을 때 우연히 만난 한 독일인으로부터 자신과 같은 경우 독일정부에 망명를  할 수 있고 신청을 한 순간부터 정부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망설일 것이 없었다.즉시  그는 망명을 신청했다. 나중에서야 그렇게 망명을 신청했던 한국인들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한국인들은 밝히고 싶지 않은 과거가 드러날까봐 같은 한국인에게 그런 정보를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그러나 누구도 원망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망명 신청 직후부터 장애수당을 받고

  망명을 신청한 그 때부터 독일 정부는 고맙게도 그의 공식적인 체류를 인정하고 장애수당도 지급했다. 그러나 망명신청이 받아들여지려면 심사기간만 육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의 경우 오년째에 망명 신청건에 대한 재판이 진행됐다.
  독일 정부는 그의 신청을 기각했지만 그는 변호사와 함께 다시 소송을 제기 했다.
  그러는 동안 망명자수용소에도 잠시 있었지만 한 독일인이 그에게 관심을 나타내며, 원한다면 자신의 집에 기거해도 좋다고 했다. 그래서 삼 년간 그의 집에서 지냈는데 그 독일인에게서 지역 장애우단체를 소개받기도 했다. 그 장애우단체는 비장애우와 장애우가 친구가 되어 서로 돕고 친교를 나누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곳이었다. 그 곳에서 그는 단체의 마크를 만드는데 일조를 할 정도로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고 현재는 임원급 멤버이다.
  또 무엇보다 그곳에서 그는 평생의 반려자, 에리카를 만났다. 가진 것 없고 게다가 망명신청자 신분의 그를 에기카란 독일 여성은 받아들여 주었다.
  "프로포즈할 때 그거 하나만은 분명하게 말했죠. 내가 가진 것 없고 보잘 것 없는 외국인이지만 내 일생에 결혼을 한다면  그건 당신과 하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라고."
  영화 "그린카드"의 이야기처럼 불법체류자들에게 다른 나라 국적을 손쉽게 취득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그 나라 이성과의 결혼이기에 때로는 일정 비용을 주고받기로 하고 위장결혼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와 에리카의 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졌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다.
  어찌됐건 그는 지난 해 에리카와 결혼을 함으로써 긴긴 방황을 공식적으로 끝낼 수 있었다. 결혼과 동시에 독일 국적을 취득했고, 내년에는 시민권도 얻게 됐기 때문이다.
  결혼 직전부터 그는 비로소 자신의 일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시계수리, 직업훈련을 받은 후 한 번도 본격적인 일자리로 삼아본 적은 없었지만 시계수리용 공구만은 독일행 비행기를 탈 때에도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아무리 돈이 급한 상황이었어도 한 번도 품에서 놓아 본적이 없다. 다행히 신기하게도 예전에 익힌 기술은 녹슬지 않은 채 그대로 살아있었다.
  "독일 사람들이 워낙 근검절약 하잖아요. 사실 값이 저렴한 홍콩 시계들이 많이 들어와 있어 누가 시계를 고쳐가면서까지 쓸까 싶었는데 고치는 비용이 새로 하나 사는 비용 보다 많이 든다고 해도 꼭 고쳐 쓰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요. 그리고 역사 깊은 커다란 괘종시계 같은 것을 가끔 들고 오기도 하는데 그런 것들은 돈도 돈이지만 고치면서 저도 재미있었어요."
  이제 국내 시계를 독일에서 수입 판매하는 일에도 그는 관심을 갖고 있다. 그이 방한 목적 중의 하나는 바로 그 가능성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한국 산이 싸고 질도 좋다면 일본, 홍콩제가 판치는 중저가 시계시장에서 가망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여기 있었다면 거지가 됐겠죠"

  그가 예전에 독일로 나가겠다는 계획을 조심스럽게 밝혔을 때 주위의 친구, 선배들은 이렇게 그를 비웃었다. "너 나가면 길어야 삼 개월이다. 죽든지 살든지 삼 개월이면 다시 기어들어 올 거다"라고
  거의 거지같은 행색으로 낯 설은 이국 거리를 헤맨 것이 오 년, 서서히 자리를 잡고 안정을 꾀할 수 있게 된 것이 망명을 신청한 즈음인 오 년 것이다. 그래서 고국인 한국을 다시 찾은 올해는 묘하게도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꼭 십 년만의 일이다.
  찾아갈 가족도 없는지라 예전 교회 친구 집에 짐을 푼 후 그 다음 날로 친구와 함께  자신이 성장기를 보낸 그 ㅅ재활원을 찾았다. 재활원은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 쪽으로 이전했는데 예전자리는 무수한 아파트와 빌딩이 들어서 있어 도저히 옛날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시 경기도 광주에 있는 현재의 위치를 어렵게 물어물어 다시 찾았더니 놀랍게도 예전 그의 친구들 가운데 몇 명이 아직 그 재활원에 있었다. 물론 중간에 자립을 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쓰다가 그도 잘 안돼 다시 재활원에 들어오게 됐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예전에 그가 떠날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 친구들을 보고 다시 한 번 그는 자신이 모진 고생을 무릅쓰고 이국 행을 감행했던 것을 백 번 잘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예전과 똑같이 별다른 삶의 희망이나 기대도 없이 그저 시설 안에서 맴을 돌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 친구들의 무력함에 그는 화도 났다. 그러나 그 친구들이 노력이 부족한 탓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재활원에서 관성화 된 자세로 "수용·보호"만 할 것이 아니라 장애우 개개인이 진정으로 자립을 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독일에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 장애운동이 진행되고 있고, 독일 정부는 장애우들을 위해 어떤 정책을 펴고 있는지 진지하게 설명한다.
  "만약 나도 그냥 이 곳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 봤어요. 그냥 흔히 보이는 거지 중의 한 명이 됐겠죠."
  그는 한국에서 보름여를 보내고 이월 십삼일,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그 사이 함께걸음에 장애우를 위해 써달라며 성금을 기탁하기도 하고 함께걸음 지난 호들에 소개된 딱한 사연을 읽고는 도울 방법을 제안해 오기도 했다.
  그렇게 그의 촉수는 자신의 친구들의 다른 모습이기도 한 국내 장애우들의 삶의 모습에 늘 닿아 있을 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갑자기 기자의 마음도 급해진다.

 

글/ 한혜영 기자 사진/ 김학리 기자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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