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도시 사는 사람들 하나도 부럽지 않아요" > 세상, 한 걸음


[사람사는 이야기] "도시 사는 사람들 하나도 부럽지 않아요"

고향을 지키는 농부 정문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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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친구 정문교의 배우자를 찾아주세요"
  함께걸음 편집부에는 배우자를 찾아 달라는 전화가 매달 몇 통씩 걸려 온다. 주로 본인이 아니면 당사자의 부모 혹은 형제가 신청을 하는 것이 보통인데 정문교 씨의 경우는 좀 다르다. 그이의 옛 고향 친구인 김상일 씨가 전화를 걸어 온 것이다. 김상일 씨는 오래 전에 고향을 떠나 현재 인천에서 생활하고 있다. 얘기를 들어보니 편집부에 전화를 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한다. 3년 전에 우연히 여성장애우 모임인 "빗장을 여는 사람들"을 알고 친구의 배우자를 찾아 달라고 전화를 했단다. 그런데 연락처를 적어 둔 쪽지를 잃어버리고 최근에야 다시 함께걸음을 보고 전화를 한 것이다. 아마도 함께걸음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던 같다.
  그리고 알고 보니 상일 씨 자신도 서른을 넘긴 총각이었다. 그런데 굳이 친구 문교 씨의 색시감부터 찾아 달라고 하는 이유는 뭘까? 옛 말에 중이 제 머리는 못 깎는다고 하는데 그런 이유에서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함께걸음은 정문교 씨와 김상일 씨가 함께 살던 고향, 경기도 양평 양동면 매곡리에 찾아갔다.

 


언제나 반겨주는 고향 같은 친구
  문교 씨와 상일 씨가 경기도 양평에서 함께 살 때는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고 한다.
  나이로 보면 문교(32)씨가 상일(31)씨 보다 한 살 위이지만 문교 씨는 뇌성마비 장애 때문에 초등학교에 늦게 들어갔던 것이다. 그래서 학창시절 문교 씨는 상일 씨보다 상일 씨 바로 아래 동생과 더 친했다고 한다. 또 중학교를 마치고는 상일 씨가 집안 사정상 인천으로 올라가 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서로의 기억속에 두 사람은 같은 반 친구의 형, 혹은 동생의 같은 반 친구 정도로만 남아 있다.
  그런 두 사람이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상일 씨 어머니 때문인 것 같다. 큰아들인 상일 씨는 어려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데 어머니가 매달 고향에 있는 절에 내려가 불공을 드렸던 것이다. 어머니가 절에서 불공을 드리는 동안 상일 씨는 고향 친구들의 집을 찾아가곤 했다. 그러나 친구들은 오래 전에 모두 도시로 떠나고 남아 있는 집은 빈 집이거나 어르신들만 살고 있었다.
  그런데 문교 씨만은 달랐다. 옛날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치 고향을 지키는 뒷동산의 느티나무처럼. 이때부터 상일 씨는 고향에 내려 갈 때마다 문교 씨에게 전화를 했고 또래 친구가 없어 외로웠던 문교 씨도 상일 씨가 내려오는 날은 열일을 제쳐두고 상일 씨를 기다렸다.
  그러고 보면 고향이란 참 묘한 것이다. 사귄 지 얼마 안된 사이인데도 "고향친구"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아주 오랫동안 사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정기적으로 만났고 전에는 몰랐던 서로의 사정도 알게 되었다.

 


IMF가 와도 부도나지 않는 든든한 직장
  문교 씨는 어머니 김용붕 씨의 여섯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런데 어머니 김 씨가 뱃속에 아이를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임신 3개월쯤 됐을 때 치과에서 앓던 이를 뽑고 마이신 같은 독한 약을 먹었다고 한다. 그 후 김 씨는 임신 사실을 알고 이를 뽑은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이었다. 7개월 후 아이가 태어났고 예상했던 대로 아이는 뇌성마비 장애아였다.
  막내아들이 장애아라는 사실에 속이 상했던 문교 씨 아버지는 그때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시기 시작해 6년 전 어느 겨울날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때 마침 볼일이 있어 고향에 내려갔던 상일 씨는 다리 밑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눈이 퉁퉁 부르트도록 울던 문교 씨의 모습을 6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문교 씨는 학교를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다. 시골이어서 다들 많이 배울 형편도 아니었다. 그래도 다른 형제들은 중학교까지 나왔는데 문교 씨만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 때문이었다. 매곡리가 워낙 시골이라 중학교가 마을에서 한참 떨어져 있었는데 "학교를 멀리 다니면 몸이 약한 문교가 오래 살지 못한다"고 문교 씨 아버지가 중학교를 보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문교 싸는 한때 아버지에 대해 원망도 했다.
  "다른 친구들은 많이 배워서 도시에 나가 사는데 저만 고향에 남아 농사를 짓는 것이 원망스러웠어요.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해요. 초등학교 동창 중에 서울에 올라갔다가 회사가 부도나서 내려와 있는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 보고 있으면 농사짓기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직장 다니는 친구들은 출근하기 싫어도  출근해야 되고 사장이 그만두라면 그만 둬야 하지만 저는 비가 오면 일 안 나가도 되고 일하기 싫은 날은 일 나기지 않고 집에서 책도 보고 낮잠도 잘 수 있으니까요."


 

경운기 몰 때 가장 자신감 넘쳐
  문교 씨는 아버지가 물려주신 백 오십 평되는 땅에 어머니와 함께 노아를 짓고 산다. 밭에는 옥수수를 심고 논에는 벼농사를 짓는다. 열심히 일하면 가을에 한 사십 가마쯤 거둬들인다. 이 중 문교 씨와 어머니가 먹을 양식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결혼한 누나와 형님 댁에 올려 보낸다. 그러면 누님과 형님들은 어머님을 모시느라 애쓴다며 문교 씨에게 생활비를 보내 준다. 그래서 문교 씨는 농산물 수매가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또 요즘 농가의 가장 큰 골치거리인 빚도 없다. 조금만 검소하게 살면 형님과 누님이 보내주는 생활비만으로도 두 사람이 시골에서 충분히 생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교 씨가 어머니와 사는 집은 전형적인 농가다. 넓은 마당에는 개집과 외양간이 있고 마당 모퉁이 아궁이에는 소여물을 끓이는 큰솥이 얹혀 있다. 벽에는 밤새 이불에 오줌을 싼 아이가 머리에 쓰고 소금을 받으러 다니는 키도 걸려 있다. 문득 "문교 씨도 어렸을 때 이 키를 써봤을까"하는 궁금증이 발동한다. 기자의 질문이 짓궂었는지 문교 씨는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린다.
  "마당에 있는 저 암소 이름이 뭔지 아세요? 무대포예요. 한 달 보름 전에 새끼를 낳았어요. 아직 이름을 짓지 못했어요. 저기 강아지 이름은 뽀삐예요." 그러면서 무대포 앞으로 가 여물통에 마른 볏단을 넣어준다. 배가 고팠는지 무대포는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어 치웠다.
  집 바로 옆에 있는 공터에는 빨간색 경운기가 한 대 있다. 전에 문교 씨 아버지가 쓰던 것을 팔고 밭도 조금 팔아서 새로 구입한 것이다. 몸이 불편한 문교 씨는 경운기가 없으면 아마 농사를 짓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문교 씨가 경운기를 처음 몬 것은 구년 전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부터 경운기 모는 것을 배워서 지금은 선수가 다 됐다. "이 경운기로 밭도 갈고 논도 갈고 편찮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진료소에도 다녀온다"고 했다. 한 번 시범을 보여 달라고 하자 문교 씨는 정말 기자와 사진기자를 경운기에 태우고 마을을 반 바퀴 돌아 보였다. 그러고보니 문교 씨는 경운기를 몰 때 가장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듬직한 말동무 암소 무대포
  빚도 없고 쌀수매가 걱정도 없는 문교 씨도 때론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다. 혈기왕성한 총각이 아직까지 장가를 못 가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이는 아무리 땀 흘려가며 설명을 해도 사람들이 그이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때도 그렇다. 또 술집에 가면 손이 떨려 다른 이들처럼 술잔에 술을 따라 마시지 못하고 대접에 따라 마셔야 하는 것도 스트레스 받는 일 중에 하나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는 긴장이 돼서 말을 더듬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일 끝나고 모여서 술집에도 가지만 저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책을 봐요."
  그래도 가끔씩은 적적할 때가 있다. 그 때는 마당에 나가 암소 무대포를 쓰다듬으면서 말을 건다. 사람들은 문교씨 이야기를 잘 못 알아듣지만 무대포는 문교 씨가 다가가기만 해도 소 여물통에 머리를 내밀고 문교 씨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두 눈을 끔뻑거리면서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그래서 문교 씨는 무대포 앞에 있을 때 마음이 가장 편하다. 그만큼 무대포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다.
  술 마시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만 스트레스 받는 건 아니다. 장애 때문에 일하는데도 지장을 받을 때가 있다. 좁은 논길을 무거운 비료부대를 들고 걷는 것은 문교 씨에게는 아주 힘든 일이다. 또 모내기를 할 때도 직접 논에 들어갈 수가 없다. 물이 찬 논에 들어가면 중심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비료를 뿌려주거나 형님들이 내려와서 거들어 준다. 모내기는 이웃에게 이앙기를 빌려서 한다. 그밖에도 문교 씨가 밭에서 할 수 없는 잔일은 그 동안 어머니가 해오셨다.

 


"마음 고생 안시킬 자신 있어요"
  문교 씨는 요즘 고민이 생겼다. 아버지와 형님 누님들이 모두 떠난 집을 함께 지켜왔던 문교 씨 어머니의 건강이 최근에 많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류마티스 관절염 때문에 손마디가 휘어지고 얼굴도 많이 부어 올랐다. 거동도 불편해지셨다. 안방에서 마당까지 걸어 나오는데도 한참이 걸리고 곧잘 벽을 짚곤 하신다. 계속 진료소에 나가고 있지만 이제는 문교 씨의 일을 전처럼 거들 수가 없다.
  문교 씨 어머니 역시 당신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안다. 건강이 더 나빠지기 전에 막내 문교 씨의 짝이 나타나 둘이 오손도손 사는 것을 봐야 마음이 놓일텐데 감감 무소식이다.
  그래서 문교 씨 어머니는 요즘 교회에 열심히 나간다. 전에도 곧잘 나갔지만 요즘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린 적은 없었다.
  "자식을 둔 애미로서 자식들 모두 건강하고 하는 일 다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다 같겠죠. 그러나 그 중에서도 우리 막네 문교가 어서 좋은 배필을 만나 오손도손 사는 것이 제 가장 큰 소원이에요. 그 기도만 이뤄주면 더 바랄게 없겠네요."
  어머니가 하는 얘기를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문교 씨 표정이 어느새 심각해져 있다.
  분위기를 바꿔 문교 씨에게 공개구혼을 한 번 해 보라고 부탁했다. "돈을 많이 벌 자신은 없지만 제가 하는 일은 행여 부도날 염려가 없어요. 그리고 제게 시집오는 사람 마음 고생 시키지 않을 자신도 있구요."
  일반적으로 남성들은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청혼을 할 때 "나한테 시집오면 평생 손에 물 한 방울 적시지 않도록 호강시켜 주겠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잘 해주어도 손에 물 한 방울 적시지 않게 하겠다는 것은 거짓일 수밖에 없는데
  "평생 마음 고생 시키니 않을거"라는 그이의 말은 꼭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마음씨 착한 두 노총각 문교 씨와 상일 씨 모두 올해는 좋은 사람을 만나 꼭 장가를 갔으면 좋겠다.

 

글/ 노윤미  사진/ 김학리 기자

작성자노윤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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