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서로 다른 악기로 화음을 맞추듯 우리도 그렇게" > 세상, 한 걸음


[사람사는 이야기] "서로 다른 악기로 화음을 맞추듯 우리도 그렇게"

데스다 4중주단과 수원시 향 바이올리니스트 이강일 씨

본문

 클래식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 하나, "집은 부자겠군." 그리고 과정을 좀 보탠다면 그 예상의 99%는 현실과 맞아떨어지기도 한다.(그런 선입견을 갖게 된 이유는 모두 다 알 듯 하니 부연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장애계의 큰 행사에서 곧잘 모습을 드러내며 은근히 이름을 높이고 있는 "베데스다 4중주단"에 대한 시선도 사실 그러하다. 희거나 검은 예복을 입고 은은한 선율을 선사하던 그4중주단원들은 그 무대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그렇게 우아하게 살아왔겠지, 장애로 인항 아픔까지도 그들만큼은 비켜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나 다른 단원들도 마찬가지지만  이 강 일(44)씨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현재 수원시향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그가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의 사연을 들어보면-매우 드물게도- 자신도 모르게 예정돼 있는 길을 묵묵히 가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바이올린 사달란 말 못했죠"


  장손으로 주위의 기대를 모은 채 오십육년 대전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무렵 소아마비에 걸렸다. 학교 갈 나이가 됐을 때도 제대로 걷지 못했던 그를 그이 어머니는 업어서라도 학교에 매일 다니게 했다. 공부도 곧잘 했던 그는 당연히 상급학교로 진학을 원했는데 그를 받아준다는 중학교가 없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진학이 가능했던 대전성세재활학교 중등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처지가 비슷한 또래 장애학생들과의 기숙사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뒤돌아보면 그 때가 전화위복의 기화가 됐던 것도 같아요. 가정에서 보호만 받는게 아니라 서로 비슷한 애들이랑 경쟁하면서 생활하니까 제 스스로에게 이점이 굉장히 많더라구요. 가정에서 갇혀만 있고, 사회에 진출하지 못하는 장애우들이 많잖아요. 그런 장애우들한테는 기숙사생활이 굉장히 필요해요. 제가 볼 때는."
  그러다 중등부 3년 때, 드디어 바이올린과 만난다. 그 만남을 주선한 이는 강 민 재라는 한 자원 활동 바이올린강사였다.
  그 강사 선생님은 유성온천 인근을 자주 지나다니면서 그곳을 지날 때마다 늘 눈에 띄는 한 학교를 어느 날은 유심히 바라보게 됐다고 한다. 저 학교는 "뭐 하는 학굔가"하는 의문이 들어 성세재활학교를 직접 찾기까지 했다. 그래서 여기 저리를 둘러본 후 자신이 바이올린을 좀 할 줄 아니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겠다고 제안해 왔다.
  예상과는 달리 이 강 일 씨는 다른 아이들과 선생님이 바이올린 배우고 가르치기에 열심일 때 한 쪽 뒤편에 떨어져 선생님을 따라하는 친구들의 어설픈 연주소리를 바깥에서 듣고만 있었다고 한다. 바이올린 장만은 각 학생들의 몫이었는데 바이올린인 5천 원은 당시 돈으로 한 달 치 하숙비에 해당하는 큰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사달라는 말을 부모님께 하기가 왠지 죄송했다. 채신공무원이셔서 보수가 그리 많지는 않으셨던 아버지에게는 자신 말고 동생이 셋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주 후 집에 갔더니 빛나는 새 바이올린이 그의 방에 놓여 있었다. "어떻게 부모님이 아시고 바이올린을 사놓으셨는지 저도 애써 묻지 않았었기 때문에 아직도 그 내막을 잘 몰라요. 원래 부모님이 그러신 분들이세요. 겉으로는 애정표현 잘 안 하시고 다른 형제들이랑 똑같이 대해주는데 속으로 저한테 많은 신경을 써주셨죠"
  여하튼 그 때부터 바이올린을 손에 잡게 된 그는 "아무리 겸손하려고 해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 할 수밖에 없듯" 두드러진 실력 향상을 보였다.
  "처음 악기 접하고 배우기 시작할 때 재미가 있었어요. 흥미도 있었고, 물론 사실 선택할 다른 것도 없었죠. 바이올린을 정말 적성에 맞아서, 좋아서 했나 스스로 묻는다면 금방 답이 안 나올지 몰라요. 그냥 저는 신체 구조상 다른 큰 악기는 할 수가 없었고 관악기는 더군다나 앉은 상태에서 하기가 힘들긴 하죠. 그래서 저로서는 바이올린이라는 이상적인 악기를 만난 겁니다."
  그와 비슷하게 실력이 좋은 차 인 홍, 신 종 호, 이 종 현 이 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주위의 주목과 관심을 한껏 받았지만 곧 졸업이었다.
  더구나 대전시내에 고등부가 있는 특수학교가 없고 갈 수 있는 일반 고등학교는 더더욱 없어 갑자기 갈 곳이 없어졌다. 그런데 강 민 재 선생의 소개로 알게 된 또 다른 선생님은 이 강 일 씨를 비롯한 네 명을 눈여겨보고 4중주단을 해보라고 적극 권하셨다.
  그 말에 자극을 받아 방을 하나 얻어 자취를 하면서 한마음으로 연주 연습을 해 나갔다. 장애우 네 명이 살았지만 별 다르게 부엌이나 화장실을 개 보수한 것도 아니고 집안일을 해줄 다른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무지 지저분’ 했지만 우정어린 경쟁도 하면서 음악에의 꿈을 키워갔던 그 때를 이 강 일 씨는 매우 즐겁게 회상한다.
  밥 먹고 연주 연습만 하다 보니 실력도 어느 새 서서히 높아갔다. 이들의 대한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 서울에까지 닿았고 소아마비협회 정립회관의 황 연 대 전 관장은 이들의 연주 모습을 직접 보려 내려와 사는 곳까지 와서 보고 갔다.
  매우 비좁은 공간에서 식사와 빨래까지 스스로 해결하느라 연습시간을 빼앗기는 듯한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황 연대 씨는 그들을 정립회관 기숙사에서 생활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강 일 씨를 비롯한 베데스다 단원들의 서울 생활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었다.

 


동냥레슨만 받던 시절


  정립회관에서 연습에 전념하며 보냈던 삼 년 여 동안 특히 달라진 점은 음악계 인사들과의 교류가 더 빈번해졌다는 점이다. 지방인 대전 보다 문화적인 움직임이 더 집중되어 있는 서울을 활동무대로 삼아 음악에 대한 양분을 부족하나마 양껏 채워나갈 수 있었다.
  "그 때 차도 없었으니까 휠체어 타고 악기 들고 다니기가 사실 어려웠죠. 그래도 4∼5킬로미터는 택시 안타고 그냥 걸어다녔어요. 한 번은 어느 연주회에 초청을 받아서 공연장에 가려고 택시를 잡는데 죽어도 안잡혀요. 간신히 한 잡았는데 이 택시 기사 아저씨가 우리 행색을 보고는 마음이 바뀌었는지 트렁크에 뭐가 가득 차 있다고 트렁크를 안 열어주겠다는 거예요. 탈래면 타고 말래면 말아라. 하는 식이죠.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한 친구가 그 아저씨를 한 대 때렸어요. 그래서 경찰서까지 가게 됐는데 저희도 가서 사정 얘기를 했죠. 그랬더니 경찰서장이 뭐라고 판결을 내리냐면 트렁크를 열어서 아무 것도 없으면 기사를 입건하고 뭐가 가득차 있으면 우리를 입건하겠다고 그래요. 근데 열어봤더니 아무 것도 없어요. 경찰들이 그 기사를 입선하겠다는 걸 우리가 그 사람 처벌하는 것보다 이제 진짜 시간 없으니까 공연장까지 태워다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 택시기사가 태워다줬는데 택시비 안받더군요."
  그 즈음 음악가 신 동 옥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이들의 앞날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신 동 옥 선생님은 만난 지 얼마 후부터 이들에게 유학을 권했다. 유학이라니, 이들에게는 너무나 먼 얘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특수학교 졸업학력은 정식으로 인정이 안돼 단원들 모두 학력이 "국졸" 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때 나이 스물일곱, 다들 머리가 굵어졌지만  실낱같은 기대를 가지고 분발해서 검정고시를 통해 금방 대학입학 자격을 따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어마어마한 유학비용이었다.
  "그 때  국내에서는 우리 같은 4중주단을 체계적으로 지도해 줄 학교가 없다고 신동옥 선생님은 우선적으로 신시내티 대학을 권하셨고, 아는 분을 통해서 오디션을 봤는데 저희 실력이 괜찮았는지 그 냥 대학원에 진학하라는 거예요. 그것도 장학금까지 준다고 하고요."
  유학을 하는 동안의 생활비 마련도 다들 만만한 문제가 아니어서 다시 고민을 하게 됐는데 신 동 옥 선생님이 발 벗고 나서 다행히 아산 재단으로부터 전원 유학 생활비 지원도 약속도 받아 오셨다. 그렇게 유학을 성사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애써주신 신 동 옥 선생님은 이들이 유학을 떠난 지 6개월만에 돌아가셔셔 한동안 이들을 먹먹하게 했다.
  "돈 한 푼 안들이고 미국에서 대학원까지 졸업한 사람은 아마정말 드물걸요. 저희도 일이 그렇게 잘 될 줄은 몰랐는데 사실 저희들 실력만 갖고는 안될 일이었죠. 그 때 정말 하느님이 계시다는 걸 알았어요"
  이들 베테스다의 탄생과 성장과정을 보면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정말 매우 드문 케이스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이들 네 사람은 주위의 축원 속에 유학길에 올랐고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이 나왔다는 명문 신시내티 주립대학에서 사년, 또 뉴욕 시립 대에서 2년여 동안 마음껏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본격적인 음악 수업은 처음이었기에 이들의 공부에 대한 갈증은 그제서야 제대로 풀렸다. 마른땅에 단비가 스미듯 그렇게 유학시절은 꿈결같은 시간이었다.

 


"당신이 앞에 있으면 그림이 안좋은데"


  "졸업후요, 물론 고민이었죠. 저희는 사중주를 이끌어 나가고 싶었는데 우리 나라 여건상 공부하기도 어려운데 다들 바라는 대로 자리를 잡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저같은 경우에는 졸업 후 당연히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거기서도 편하기는 하죠, 그렇지만 학구에서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살아왔으니까 여기도 낯익고  편안하긴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계단 많은 곳에 혼자 가더라도 옆에 지나가는 청년 둘만 잘 잡으면 편안하게 올라 갈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한국에 돌아온 후, 큰 기대도 안했지만 당장 그를 반기는 곳은 없었다. 특수학교 졸업학력에 곧장 유학을 떠난 그였기에 무슨 학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속된 말로 "비빌 곳"이 없었다. 그렇게 실업자 생활을 일년 정도하고 있는데 수원 시항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 때  시향이 시민회관에서 연습할 땐데 계단이 한 삼층 높이고 엘리베이터가 없어요. 면접관이 당신 앞을 어떻게 다니겠냐고 묻더라구요. 그래서 그건 내 문제니까 걱정마라. 그랬어요. 그 다음에야 단원들이 있으니까 사실 이동은 문제가 안돼죠. 그래도 삼층까지 휠체어 탄 저를 옮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얼굴 한 번 안 붉히고 젊은 단원들이 잘 도와줬어요. 지금은 문제가 하나도 없어요. 연습실을 여기 야외음악당으로 옮겨왔는데 공법들도 계단이 없는 쪽으로 가고 있지만 새로 지을 때 저도 의견을 내놓고 그래서 턱이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저 때문인지 모르지만 일층을 쓰던 시립합창단이 지하로 내려가고 저희가 일층을 사용하죠."
  다들 물리적인 조건은 그렇게 순탄히 헤쳐 나올 수 있었지만 장애우로서 그가 느낀 장벽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름만대면 웬만한 사람들도 다 알 정도로 유명한 수원시향의전 지휘자 금난새 씨는 휠체어를 탄 그를 무대 그림을 망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한 번은 수원시향이 부산 시향하고 협연을 하게 됐는데 제가 수석대행을 했거든요. 그래서 제일 앞자리에 앉았는데 두 악단이 합치니까 자리가 좁아서 그런다고 총무가 저보고만 뒤로 가래요. 나중에 들으니 지휘자가 제가 맨 앞에 있으면 그림이  안 좋다고 뒤로 가라고 그런 거였어요. 그때 제가 막 화를 냈는데 왜 더 화가 났냐면 그게 장애우를 위한 연주회였거든요. 원래 뒤에 앉아 있어도 다른 장애우들한테 힘을 주도록 앞으로 나오게 할 판인데, 그 사람은 우리 교향악단 전체 사진을 놓고 저를 손으로 이렇게 가려 보더래요. 제가 없으면 그림이 어떻게 되나 싶어서, 그렇게 우리 나라에서 유명세도 있다는 지도층 사람들이 일반 사람들의 의식을 못 따라가나니..."
  예전에 그는 무대에 오른 후 타고 온 휠체어를 미관상 무대 박으로 치워두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도 그렇게 했더니 다른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하는 것이었다. "네가 필요한 건데 왜 그걸 손쉽게 쓸 수 있게 네 옆에 두지 않느냐"고 물어왔다. 자신 스스로도 휠체어를 눈에 걸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그걸 깨달은 후 그는 이제 휠체어를 탄 채 연주를 한다. "장애를 드러내놓고 알릴 이유는 없지만 우선은 내가 편한 것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나의 사랑, 호산나오케스트라


  미국에서 졸업을 앞두고 기회의 땅이라는 그곳에서 보다 그는 오히려 한국에 돌아가서 할 일이 많음을 느꼈다. 현재 그가 이끌고 있는 호산나오케스트라는 그 당시 그가 꿈꾸던, 자신이 받은 달란트와 주위로부터 받은 사랑을 다시 나누는 기쁜 과업중의 하나다. 그 단원들이 초중 등 학생들이라는 점에서 그는 더욱 애착이 크다.
  수원중앙 침례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이 오케스트라는 현재 백 이십 명의 단원을 자랑하는 거대한 조직이지만 원래 다섯명에서 출발했다. 그가 직접 지휘를 하고 있는데 휠체어에 앉은 채 지휘를 하는 그가 잘 보이도록 단상도 조금 조정을 했다.
  "원래 미국에 있을 때 교회에서 연주를 많이 했었지만 그게 조금 피곤한 일이어서 한국에서는 조용히 예배만 보고 가고 그랬어요. 그런데 한 번은 김 장 환 목사님이 심방을 오셔서 "나도 장애우 문제에 관심이 많은데 내가 백 마디 말하는 것보다 당신이 앞에 나가서 한 번 연주하는 것이 사람한테 훨씬 큰 감명을 줄 거다" 하고 말씀하시더라구요. 안 그래도 수원시향에 있으니까 수원을 위해서 내가 할 일이 뭔가 하고 생각하다가 후배양성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을 때였어요. 그래서 시작하게 됐는데 대체로 우리 나라 음악 교육은 솔리스트 위주의 교육인데 커나가는 아이들이 악기 합주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양보하고 같이 서로 화합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나갔으면 합니다. 여러 악기가 화음을 맞춰 연주되는 과정 자체가 더불어 사는 모습하고 비슷하잖아요."
  교회 내에서도 무대에 설 기회가 많아지면서 어느 덧 유명인사가 된 그를 배려해 교회건물을 개보수 할 때 지하까지 리프트를 설치했다. 그런 소문을 듣고 다른 장애우들도 그 교회에 많이 찾아오고 있는 점도 그를 기쁘게 하는 일이다. "처음 연주 시작할 때 저 같은 장애우들이 좀 잘하면 굉장히 잘 하는 것으로 보여졌던 것처럼 조금 잘 가르치면 소문이 금방 난다는 이점이 있다."고 말했지만 후배들을 가르치는 재미에 그는 함뿍 빠져 있다. 제대로 된 개인 레슨 한 번 없이 알음알음으로 소개를 받은 분들한테 동냥 레슨만 받아왔던 자신의 지난날을 생각해 보면 재능 있고 의욕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동기를 부여해주는 일은 그에게 다시없이 보람된 일이다.
  "간혹 직접적으로 장애우 학생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볼 생각은 없냐는 질문을 하는 분이 있더군요. 안 그래도 며칠 전에 모교인 성세학교를 좀 관심 있게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요즈음엔 소아마비는 없고 중복장애만 많잖아요. 연주할 때 손은 중요하거든요. 그들을 위해서 음악을 들려줄 수는 있어도 악기 연주를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 같아 그게 좀 안타깝더군요."
  현재 베데스다는 원래의 단원 한 명이 미국으로 건너가 사는 바람에 비 장애우 연주자를 객원을 해서 요청이 있을 때마다 한데 뭉치곤 한다. 스케줄에 따라 다르지만 연주 일정이 있으면 시향에 들러 연습을 하고 오후에는 개인 스튜디오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일요일엔 다시 호산나 단원들을 지도하고.(그의 두 딸도 호산나 단원이다) 매우 단순하게도 음악으로만 채워지는 일상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그를 비롯한 성세재활학교 학생들에게 음악의 불씨를 던져 준 그 자원활동 교사 강 민 재 씨가 새삼 고마웠다. 그가 없었다면 그의 삶은 어떻게 됐을까.
  "학교 다닐 때 수학을 좀 잘 했어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집안 내력이 좀 있어서 작은 아버님이 수학 박사시고 동생들도 수학관 공대쪽으로 진학했어요. 공부를 저도 좀 잘했기 때문에 아마 잘 풀렸으면, 정말 잘 풀렸으면 대학 교수가 됐겠고 아니면 방구석에 앉아서 비관만 하고 있었을 지도 몰라요. 실제로 그렇잖아요. 장애우들은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지점까지 오면 더 이상 풀리기가 어렵잖아요."
  어쨌든 그 때 음악을 접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그가 걷고 있는 길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이 강 일 씨도 그래서 그렇게 어린 학생들에게 음악의 씨앗을 나누는 일에 열심인 모양이다. 그들이 쉽게 찾지 못하고 있는 음악에의 길을 적시에 알려줄 수 있다면 팔이 아픈 것도 즐겁게 감내할 수 있는 이정표가 되겠다는 생각에.

 

글/ 한혜영   사진/ 김학리 기자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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