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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람들] 행복회 야마기시즘 사회실현지에 사는 김현주·서혜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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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돈이 필요없는 사이좋은 즐거운 마을"이라는 모토를 가진 야마기시즘 생활실현지에 대한 짤막한 자료를 보게 되었다. "공동체"를 넘어선 "일체무소유" 사회, 어느 지면에선가 읽은 적이 있는 유토피아적 공동체가 우리 나라에도 있나 싶어 바짝 관심이 생긴 기자는, 그 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김현주 씨와 학교 동문이라는 세상의 끈을 이용해 비교적 쉽게 통화할 수 있었다. 일러준 대로 수원에서 발안을 지나 표지판을 따라 화성군 향남면 구문천3리에 있는 실현지에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나, 모두와 함께 번영한다" 등의 글이 써진 삼각탑 조형물과 독특한 건축물, 그 아래 탁트인 평지에 넓게 자리잡은 계사와 밭이었다.
  생활관이 모여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식당으로 사용되는 애화관에서 맛난 점심을 얻어먹으며 자연스럽게 김현주(37) 씨와의 이야기는 시작됐다.

 

 

-"야마기시즘"이란 게 뭔가요?
  "원래 야마기시는 일본 사람이름이에요. 그 분이 제창한 정신을 야마기시즘이라고 하죠. 현재 이곳과 같은 야마기시즘 실현지가 일본, 한국 뿐 아니라 미국, 브라질,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태국 같은 8개 나라에 50여곳 정도 설립돼 있는데, 아무래도 일본에서 가장 활발해요."
  이곳 출판부에서 올해 4월에 출간된 <야마기시즘농법>이라는 책에서는 야마기시즘에 대해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지향하여 일본에서 시작된 사회운동"이라고 간략히 정의내리고 있다. 그리고 분기마다 한 번씩 나오는 소식지에는 행복회야마기시회(세계 각곳의 실현지는 모두 "행복회야마기시회"라는 통칭으로 일정한 연계를 갖고 있다) 취지를 "자연과 인위, 즉 천지인의 조화를 도모하여 풍부한 물자와 건강과 친애의 정으로 가득찬 안정되고 쾌적한 사회를 인류에 가져오는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 때문에 국내에서는 아무래도 이름에서 주는 뉘앙스가 부정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제창자 야미기시의 씨의 견해로는 자신의 성을 그대로 딴 것이 아니라 산의 언덕(주변)으로, "산에 오르려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밝히고 있어 이름자체의 의미도 있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이곳의 넓은 농지는 보통 "산안농장"이라고 불린다.

 

-여기서 생활하신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저는 87년 초에 여기 내려왔는데 제 경우에는 부모님과 동생이 그때 이미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었어요. 제가 대학교 3학년 무렵인 84년도에 실현지가 이 지역에 처음 창설이 됐는데 저희 가족이 그때부터 같이 한 초창기 멤버 다섯 가구 중의 하나였거든요. 그 즈음에야 아버지가 60년대부터 야마기시즘에 관심을 갖고 나름대로 준비해 오셨다는 걸 알았죠. 그때는  여기가 온통 그냥 비닐하우스였어요. 거기서 먹고 자면서 집짓고 밭 갈고 하느라 사람들은 정말 밤낮없이 열심히 일했죠. 그런데 저는 따로 자취를 하며 대학을 다녔고, 그 때 한창 사회민주화운도에 온정신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이곳에서 무엇을 실현하려고 하는지 제대로 알지는 못했고 알려고도 안했어요. 운동과 관련된 저 자신만에 고민 때문에 정말 너무 바빴거든요."
  김현주 씨는 대학시절 총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86년 전경련회관 점거농성사건으로 1년여 수형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후 일단 부모님이 계신 집인 이곳에 내려왔는데 그를 보고 "네가 하려고 하는 일을 존중하지만 이 애비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한 번 알아보고 결정해보지 않겠니"라고 아버지가 제안해 오셨다고 한다. 그래서 일단 7박8일의 특강을 받았는데, 그 강습을 받으면서 엄청난 세계관의 변화를 맞으면서 현재까지 이곳에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은 변혁의 대상이고, 그 변혁은 대립물간의 투쟁과정의 변화, 발전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철학적 사고를 절대적 가치로 믿고 있었던 그에게 인간의식의 변혁이 먼저 선행되어야 하고, 그러할 때 모두가 행복한 즐거운 사회도 가능하다는 명제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그 충격으로 그는 결국 야마기시즘이 구현하고자 하는 새로운 이상을 이곳 사람들과 함께 실현해보기로 마음을 먹고 이곳에 정착했다. 그리고 얼마 후 결혼도 했고,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다.
  이곳에는 현재 갓 태어난 아이에서부터 60, 70대 노인분들까지 모두 50명이 생활하고 있다. 성인들은 채소부, 양계부, 세탁 혹은 식사를 담당하는 생활부, 아이들의 양육과 학습을 담당하는 학육부, 여기서 생산되는 유정란이나 각종 채소를 택배로 외지에 공급하는 공급부, 이렇게 다섯부서 가운데 한 굿에 배치돼 일을 하게 된다고 한다. 부서는 6개월에 한 번씩 바뀌는데 개인의 요구에 따라 그때 그때 조정이 되기도 한다.
  김현주 씨는 현재 8년여 동안 학육부만 담당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그렇게 장기간 아이들을 맡다보니 자신이 내심 가지고 있는 규범을 아이들에게 은연중에 간요해 그것이 고정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생긴다고 했다.


 

 

"소유개념, 그런 거 여긴 없어요"

 

― 여기 모토가 "돈이 필요없는" 마을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이 마을 안에서 돈이 어떻게 쓰여지고 있는데요?
  "그냥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만큼 써요."

 

―와, 말로만 듣던 공산제 사회네요.(웃음)
  "공산제가 아니라 사실 여기 살다보면 돈이 필요할 일이 별로 없어요. 만약 옷이 필요하다 싶으면 (의)생활부에 이런 이런 옷이 필요하다고 말을 하면 사줘요. 직접 사고 싶다고 하면 돈을 받아서 시장에 가서 살 수도 있고요. 여기에 12세대가 사는데 각 세대마다 분배되는 생활비 같은 건 없지만 중고등학생들은 기본적인 차비에다가 나이에 따라 정해진 얼마간의 용돈을 주긴 하죠."
  그 때 일요일이라 야유회를 나갔던 젊은 부부 몇 쌍이 돌아와 잠시 시끌벅적했다.

 

―옷도 브랜드에 따라서 값이 천차만별인데 간혹 욕심을 부려 다른 사람들보다 비싼 옷을 산다거나 젏게 몇몇 쌍만 따로 나간다거나 영화보러 외출을 한다거나 해서 별도의 지출을 하게 됐을 때는 형평성에서 걸리지 않나요?
  "돈이 필요없는 사회라는 걸 좀 딱딱하게 얘기하면 무소유의 사회라고 할 수 있어요. 구체적으로는 한 가족처럼 하나의 돈지갑으로 사는 거죠. 일반 가정에서도 아이가 부모님께 뭘 사달라고 했는데 형편상 그럴 수 없으면 사줄 수 없다고 말하잖아요. 그거랑 똑같아요. 저네 살림살이를 맡아서 하는 경리쪽 담당자가 있는데 전체 살림살이 규모로 판단을 해서 그 사람 요구대로 해줄 수 없으면 어렵다고 말하죠. 그거 어려운 일 아니잖아요. 어디 놀러 가거나 일을 하거나 하는 일상은 각자 가능한 시간에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해요. 처음 와보신 분들은 그런 생활이 정말 가능하냐고 물어요. 그런데 그것이 불가능할 거라고 보는 것은, 말하자면 다른 사람이 이기적으로 굴지 않을까, 욕심을 부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거나 저 사람이 저 정도 했으니까 나도 그만큼은 요구해야겠다 하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는데서 출발했다고 봐요. 그런 마음을 없애고 서로를 믿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죠."

 

―일상 생활은 대개 어떻게 이루어지는데요?
  "아침에 대게 6시나 6시 반부터 자유롭게 일어나는데 식사는 하루 2식을 해요.(식사법에 대한 이론이 여러 가지지만 2식을 했더니 확실히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한다) 각자 일을 나갔다가 11시쯤부터 자유롭게 식사를 하고 또 6시나 7시쯤 또 식사를 하죠. 일이 진행되는대로 자기 편한 시간에 먹기 때문에 모두 한꺼번에 먹는 일은 거의 없어요. 공동체라고 해서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움직인다면 너무 힘들 거예요."

 

―밥먹고 일하고 자는 것 외에 다른 특별한 행사나 프로그램은 없나요?
  "연찬회라고 일주일에 한 번씩 전체회의 형식의 회합을 갖죠. 거기 참석여부도 강요는 안해요. 직장마다 매일 이 시작하기 전에 연찬회를 하기도 하는데, 공급부같은 경우 아침에 잘 안 모여서 요즈음 안해요.(웃음) 매달 정해진 연찬 주제가 있는데, 그건 세계 공통적으로 주어지죠. 그리고 명절은 저희도 다 지내고요."
  연찬에 대해 다른 분에게 물으니"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진리에 비춰서 서로 모두가 함께 끝까지 이를 찾아가 보는 것"이라고 한다. 이게 옳다, 그르다라는 판단을 내리기 전에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정말은 어떨까" 하는 의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과정을 두 사람 이상이 모이면 함께 시작하게 되는데 일상 생활에서 던져지는 수많은 일들을 연찬의 주제로 삼아 근원과 본질을 찾아나간다.

 

― 이곳의 전체 사람들을 대표하는 "장"은 계신가요?
  "없어요. 여긴 없는 거 참 많아요. 책임이나 의무도 없고, 소유도 없고, 상벌이나 규율도 없고 정관, 규정 이런 것도 없어요."

 

― 아이들 교육은 그냥 인근 학교에서 받나요?
  "의무교육 안시키면 법에 걸리잖아요. 그래서 인근 학교에 다들 통학해요. 아직 수가 적어서 여기 마을안에 사립학교 인가를 얻어 학교를 세울 형편은 아니니까. 상급학교들도 선택은 아이들 보고 알아서 하도록 하는데 되도록 생활근거지인 이 마을은 떠나지 않았으면 하죠."
  이곳에는 "태양의 집"이라고 하는 아이들 숙소가 따로 있어 만5세가 지나면 아이들끼리만 주로 생활을 한다. 아이들이 생활하는 곳에 어른들은 들어가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이유는 괜히 어른들이 아이들의 생활을 보면 사소한 것도 자꾸 간섭하고 지적하면서 자신들 생각대로 시키고 싶어하는데 그것이 결국 아이들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다. 바닷가의 조약돌이 서로의 몸을 부딪혀 둥글어지듯이 아이들은 아이들끼리의 무리 생활을 통해 서로 배우면서 자란다고 이들은 믿고 있다.
  아이들도 원하면 채소기르기 같은 간단한 농사일을 하되 강요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이들은 일을 하면 어른들한테 칭찬을 받기 때문에 할 수도 있지만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닐 수 있잖아요. 강요나 규울에 의해서 농사를 하게 된다면 성장했을 때 자연이나 농사일과 심리적으로 더 멀어질 우려도 있으니까요."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 신장되는 사회를 꿈꾸며

 

  여기까지 얘기를 하고는 김현주 씨는 그 날 식생활부쪽에 일손이 달려 그 일을 해야 한다면 다른 한 여성분에게 우리를 소개하고 "인계"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여성민우회 부회장을 지내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했던 서혜란 씨였다. 전 한국불교사회교육연구소장을 지낸 그의 남편 이남곡 씨는 나이 오십을 헤아리던 94년, 모든 사회생활을 정리하고 두 아들과 부인 서 씨와 함께 이곳에 정착해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하루 두 갑씩 피웠다던, 그래서 이곳으로 오는 차 안에서까지 피워대던 담배를 이남곡 씨는 여기 온 그 다음날로 끊었다고 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이곳 사람들은 다들 술을 마시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술을 마시고픈 욕구가 전혀 생기지 않아 한다"고 말한다. 생활 자체가 즐겁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 없으니 그런가?
  사진기자와 함께 서혜란 씨가 안내하는대로 우선 계사들을 둘러봤다. 초창기 계사 두 개 동에서 출발해 순전히 농업으로 인한 소득으로 현재는 약 3만 마리에 달하는 규모로 키웠다는 자부심을 이곳 사람들은 갖고 있었다.
  이 닭들은 양질의 유정란을 생산하고 있는데 아파트식으로 된 닭우리에 앉아 먹고 알낳는 일만 계속하는 다른 양계장 닭들과는 달리 자유롭게 계사 안을 활보하고 있었다. 특히 계사는 도르레로 열면 햇볕을 받고 비가 오면 닫아주는데 그렇게 햇볕이 하루 종일 들어가게 설계돼 있다.
  "우리가 양계장이나 농사를 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 아니니까 무엇보다 닭들과 하나 된다는 마음으로 정말 사이좋게, 애정을 담아서 마치 사람을 대하듯 합니다. 여기 양계부 사람들이 그래요. 닭들이 크는 만큼 자신들도 큰대요." 서혜란 씨의 설명이다.
  마음껏 풀밭을 활보하게도 하고, 기존 사료에 특별히 영양가 있는 성분을 넣은 이곳만의 독특한 사료를 먹인 탓인지 계사에도 우선 닭특유인 구린 냄새가 없을뿐더러 사람이 가도 놀라는 기색없이 친근하게 굴었다.
  이곳에서는 값비싼 특용장물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상추나 오이같은 평범한 채소들을 가꿔 서울이나 수도권 뿐만 아니라 멀리 대전, 대구, 광주 등까지 배달한다. 이곳 생산품들은 시장가격에 따라 값이 매겨지는게 아니라 이곳 사람들이 자신들이 투여한 노동력이나 사료값을 등을 따져 이만큼은 받아야겠다 싶으면 그대로 가격을 정하는 "고집"을 부리고 있다. 그래서 값이 다른 곳에서 생산된 품목들보다 비싼 것이 사실인데도 그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어 주문은 꾸준한 편이다.
  이렇게 창설 후 15년이 지나는 동안 양계와 채소재배를 근간으로 한 이곳의 전체 살림규모가 안정되어 가고 있다. 각자 담당한 부서에 있더라도 농사일은 기본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농사일도 고구마캐기 같이 그때 그때 하고 싶은 농사일이 있으면 같이 할 수도 있지만 누구나 해야 하는 "기본"은 아니라고 한다.
  서혜란 씨는 특히 이 곳에 온 후 여성운동에 몸담았던 칼칼한 눈으로 봤을 때 한 가지 주목할 점을 발견했다고 한다 "(의·식)생활부가 다른 생산부서가 동등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는 점"이 비로 그것이었다. 다른 곳에서 애써 동등하게 인정받기 위해 임금으로 수량화해서 요구하는 운동을 벌여왔다면 여기서는 이미 가사노동도 농사일과 똑같이 전문분업으로, 오히려 애정이라는 면에서는 더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곳으로 옮겨 오시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으셨나요?
  "제가 좀 많이 아팠어요.(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라이놀드 증후군, 갑상선 기능저하 등의 병마가 그에게 다가왔다고 했다) 죽음까지 생각하게 되면서 지난 삶을 돌아보니까 어느 누구 못지 않게나 하고 싶은대로 살아왔지만 그것도 그렇게 즐거움만으로 이어진 삶이 아니었다는 결론이 내려지더라구요. 순간적인 기쁨이나 보람도 컸지만 그 순간을 위한 긴장과 자기희생이 너무 컸죠. 그때 나도 기쁘고 남도 기쁜 삶을 이룰 수는 없을까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남편도 불교사회운동을 하면서 80년경부터 새로운 문명에 대한 고민을 해오고 있었는데 그 무렵에 여기 특강을 들은 후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과 너무도 맞아 떨어진다면서 같이 가자고 해 이곳에서 함께 남은 생을 걸기로 했죠."

 

-이곳으로 이주를 결정할 때 자녀분들까지 이 야마기시즘에 대해서 이해하고 들어온 것은 아니었을텐데요.
  "그랬죠. 그때가 큰 아이가 인근 고등학교에 합격을 해놓은 상태였는데 공부를 곧 잘 했어요. 그래서 자기 딴에는 거기서도 좀 해볼만 했는지 여기 오는 걸 반대하더라구요. 그래도 아버지의 "부모가 자식에게 나쁜 길을 가라고 하겠니"하는 한 마디에 백기를 들었죠. 그 아이가 여기 들어오기 전에는 그냥 무협지나 운동을 좋아했고 다른 일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했는데. 이곳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금방 이렇게 말하대요. "여기서는 뭐든 하고 싶어요." 지금 그 아이는 일본 야마기시학원에서 오이를 전공하고 있어요."


-흔히 소련이나 현실사회주의국가들이 붕괴한 이유가 인간의 이기심을 조율하는데 실패했다고 하면서 그 부분을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했다는 분석이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 사회와 같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성장한 대부분의 이곳 사람들이 그것도 계속적으로 그러한 외부의 영향이 유입되는 상황에서 무소유의 사회를 꾸려간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기하게 보이는데요.
  "음, 그냥 되더라구요. 물론 서로가 참아내야 할 부분도 있지만 무슨 일을 하다가 힘들었을 때 "가만 내가 지금 누가 시켜서 일했나" 하는 물음을 하게 되더라구요. 그러면서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 신장되는 사회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다들 하니까요. 그래도 사실 이곳에 살겠다 하고 들어온 후에 약 6개월 정도는 서로 적응하는 시기가 돼요. 그 시기보다 더 오래 걸리는 경우도 적지 않고. 그렇지만 연찬과정에서 서로가 갖고 있는 모습을 점검해보는 작업을 계속 하는데 사람이라는 게 점점 더 나아지고 싶은 욕구가 있잖아요. 그래서 얼마 지나면 별다른 문제가 없어져요."
  이곳을 방문하기 전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다소 폐쇄적인 곳이 아닐까 잠시 염려 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행복회야마기시회에서는 성인을 위해서는 격월로 12일부터 19일까지 7박8일동안 정기적인 특강을 열고 있고, 아이들에게는 여름과 겨울 두 차례 자연하교 형식의 "어린이낙원촌"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특강은 올해 8월로 1백85회를 맞아 특강을 수료한 회원만 거의 2천여명에 달하고 있다.
  그런데 야마기시즘의 이론에 대해서 정식으로 정리된 책도 없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그 책에 실린 대로 고정되기 쉽지만 우리는 어떤 사상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실정과 시대에 맞게 고치고 또 고치고 함녀서 변화해나간다"는 설명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까, 있을까… 행복만 가능한 나라"라는 가사의 노래가 생각난다.
  그 가사에서는 곧바로 "이 세상 아무데도 없어요. 정말 없어요" 하고 화답하지만 이곳 야마기시즘 실현지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 하고나 사이좋은 즐거운 마을을 가꾸면서 살 수 있지 않냐고 이렇게 삶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 구체적인 증거를 김현주 씨와 서혜란 씨 뿐만 아니라 그것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의 너무나도 여유롭고 해맑은 웃음에서 찾을 수 있을 것도 같다.

 

글/ 한혜영   사진/ 김학리 기자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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