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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 뜨거운 삶의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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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에 취재할 분이 있다는 독자 이상향씨(경주 "낙원 미용실"에 근무하는 미용사)의 전화 연락을 받고 1월 25일 새벽 4시 30분 경주 역에 내린 "함께 걸음" 취재팀은 너무 이른 감이 있었지만 이동준씨댁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부지런한 분들이라 신호가 두 번 가자 금방 응답이 있었다. 잠을 깨워 죄송하다는 기자 말에 인정 많은 시골 어른들의 따뜻한 반응, 벌써부터 잠에서 깨어 천장 쳐다보고 누워 있었노라며 추운데 택시 타고 빨리 집으로 오라고 하면서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셨다. 정확히 5분 뒤 취재팀은 이동준씨가 세 들어 사는 경주○○학교 교장선생님 댁 앞에 도착했다. 대문너머로 불 켜진 방이 보인다 했더니 우리의 인기척에 대답하듯 아주머니의 조용조용한 발걸음소리가 들리고 이내 대문이 열렸다. 주인댁에 방해될세라 기자들도 고양이걸음으로 아주머니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인사를 끝내자마자 빽빽한 취재일정 때문에 염치 불구하고 새벽부터 쳐들어왔노라고 양해를 구하고 얘기를 시작했다.
 

올해 46살 되는 나는 한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월성군 외동면 신계리 산골짜기라 학교 다닐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혼자 집에서 국문을 깨쳤다. 그전엔 노는 것을 좋아해서 남의 집에 놀러 다니며 세월을 보냈다. 그렇게 스무 대여섯 해 공밥을 먹고사는 동안 동네 친구들은 군대로, 여자 애들은 시집으로 떠나가 버리고 어느새 나이 많은 동네 아주머니들의 얘기 대상자로 혼자만 남게 되었다.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고 뭔가 해야 되겠구나하는 결심이 섰다.
 
바로 이웃동네에서 대나무 제품을 만드는 친척 어른을 찾아뵈었다. 60이 넘은 그 어르신께서는 내가 기술을 배우겠다고 하자 무척이나 반가와 하셨다. 그러나 우리 집 식구들에게는 비밀로 했다. 1주일동안 해보니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이제 우리 집에 가서 해 보겠다고 친척 어른께 말씀 드렸더니 견본으로 대나무제품 몇 개를 주시며 뭐든 잘해보라시며 내 등을 토닥여 주셨다.
 그 어른이 만들어 주신 견본품은 밥을 담아 쉬지 않도록 천정 끝에 매달아두는 대바구니였다. 집으로 돌아와 막상 시작하려고 하니까 재료(대나무)가 없었다.
 나보다 12살이나 많은 형님께는 어려워서 대나무 살 돈 좀 달라는 소리를 못하고 형수님께 귀띔을 했다.
 형님이 돈을 주셔서 월성 김씨네 대밭을 샀다. 내딴에는 잘산다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눈살미가 좋은 대 장수에게 팔고 남은 찌꺼기였다. 속았다는 사실에 분이 났으나 내 재주껏, 성의껏 대바구니를 만들어서 시장에 내다 팔았다. 다행히 큰 손해는 없었다.
 
여하튼 그런 식으로 2년쯤 한 뒤, 대바구니 판돈으로 암송아지를 샀다. 그때 돈으로 5만원이었다. 현금으로 2만원이 모자랐으나 그것은 신용이 있는 까닭에 외상으로 대치했다. 그 송아지를 2년 먹여(키워)서 25만원에 다시 팔았다. 그 돈으로 외상값을 갚고도 큰 액수가 내 손에 쥐어졌다.
 그때 내 나이 스물 일곱, 남은 돈으로 구멍가게를 할까한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반대하셨다. 이번에도 형수님의 도움이 컸다. 고집 센 시아버님을 설득해서 내 뜻을 펼치도록 거들어 주셨다. 쌀 1말 값만 내면 이용할 수 있는 인천 이씨 가문의 산을 빌어 쓰려고 도움을 청했으나 아무도 거들 떠 봐주지 않았다. 나는 산판이 좋은 곳에 집을 지으려고 아는 선배에게 부탁하여 인부를 두 사람 샀다. 그리고 산에 있는 생나무를 잘라내어 집을 짓기 시작했다. 산림구역이라 용도 변경 신고를 하지 않고 구멍가게를 지으면 벌금을 낸다는 충고를 들었지만 배짱으로 밀고 나갔다. 벽지도 미처 못 바르고 문도 달아 붙이기 전에 가게를 벌였다.

 생각보다 가게는 잘 되었다. 그러나 식생활 해결이 큰 골칫거리였다. 어머니께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 어머니 말씀이 "불구자식 따라 나섰다가 에미도 늙어 가는 판인데 끝까지 나를 거둬두지 못하면 큰며느리한테 다시 올 수 없으니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마고 어머니께 굳게 약속했다. 그러자 곧 추석이 다가왔다. 나는 추석 대목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영감제사를 치루고 부조 들어온 돈을 가지고 있는 엄마 친구분께 돈 좀 돌려달라(융통해 달라)고 했다. 그 돈을 빌어와서 가게문을 달아 붙이고 물건을 많이 들였다. 기대보다 훨씬 많은 이윤을 남겼다.
 한편 가게를 하면서도 나는 대바구니를 계속 만들었다. 그러면 엄마나 형수가 시장에 갖다 팔아주셨다. 그 돈으로 나는 또 돼지를 사다 키웠다. 그 일은 내게 벅찼지만 그럭저럭 3년을 하는 동안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내 나이 서른 하나 되던 해(1973년) 정월, 이제야 어머님 호강 시켜 드릴 수 있겠구나 하고 좋아했는데 평소에 시름시름 앓으시며 힘들어하던 것을 나이 탓인가 했던 어머님이 자리에 눕고 말았다. 한약을 지어다 정성껏 보양을 했지만 10개월 남짓 고생하시다 끝내 세상을 뜨시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0호 남짓 사는 우리 마을에 소비조합이 들어서는 바람에 가게문을 닫아야만 했다. 문을 닫기 전에 소비조합에 찾아가 양보 좀 해 달라고 서너 번 사정사정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구석구석 내 손끝의 정이 담뿍 배인 집을 버리고 아랫마을 김해 김씨네 동네로 옮겨갔다. 마침 그곳에서 가게 하던 친구가 도시로 나간다고 가계를 세놓았기 때문에 그 가게를 인수받아 그 동네에서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그 곳에서도 나는 계속 대나무 제품을 만들어 팔았다. 이번에는 갈쿠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박 원주라는 사람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그는 경주시내에서 중국요리점에 납품하는 대나무 젓가락을 만드는 공장주인으로 대나무를 사다가 마디가 긴 쪽으로 젓가락을 만들고 나면 마디가 짧고 통이 넓은 부분이 남아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까 궁리하던 차에 갈쿠리를 만들면 안성맞춤이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장에 가서 갈쿠리를 제일 잘 만든 사람을 찾던 중 내가 만든 갈쿠리를 보고 수소문하여 편지를 띄웠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연락이 닿아 그 해 가을동안 경주로 가서 갈쿠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 이듬해 또 해달라는 부탁이 있었으나 들어줄 수 없는 입장이라고 했더니 대나무 재료를 시골 내 가게로 실어다 주면서 추수 때까지 만들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던 중 내가 세든 가게 주인이 집을 팔았기 때문에 나는 갈쿠리 만드는 공장이 있는 경주로 나왔다. 그때가 내 나이 33살 되던 해 음력 10월이었다. 그 후 석 달 뒤 구정을 쇠러 간다고 하고 공장 주인이 도망을 쳤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부도를 냈다고 했다. 그 당시 내게는 한푼도 없는 상태였다. 조금 있는 돈은 어머님 병구완하느라고 썼고 어머님 돌아가신 후 허탈한 마음을 달래느라 나머지 돈을 헤프게 써 버렸던 것이다. 또 그동안 갈쿠리 만든 품삯을 한푼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방세조차 밀린 상태였다. 게다가 무릎이 골수염에 걸려 수술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최악의 상태였다. 그래도 나는 살 궁리를 했다.
 
그때 역전시장에서 대패자루를 만드는 김노인, (시장에서는 사람들이 "참판댁"이라 불렀다)의 일을 거들어 주고 밥을 얻어먹었다. 그러던 중 시장에 나온 고향사람을 통해 아버지가 할배(할아버지 사투리)네 산판(나무)을 팔아 4-5백 만원을 받았다는 소릴 들었다. 그래서 장사 밑천으로 몇 십만 원쯤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체면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시골집으로 갔다. 그러나 아버님이 내게 주신 돈은 겨우 1만원이었다. 할 수 없이 또 형수한테 손을 내밀었으나 형수에게는 돈이 없었다. 독이 오른 나는 아버지가 사다놓은 소를 한 마리 훔쳐 시장에다 팔아먹을 계획을 짰다. 형수님께 모르는 척 해달라고 다짐을 해두고서, 5월달 낮의 힘든 농사일로 식구들이 모두 곤히 잠에 빠져있는 틈을 이용해 황소를 끌고 집을 나섰다. 안개가 자욱히 낀 밤에 호랑이가 나온다는 재를 넘어가는데 황소도 겁을 집어먹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밤 1시쯤 이슬비까지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하자 소가 길에 드러누워 막대기로 때려도 꼼짝을 하지 않았다. 약이 잔뜩 오른 나는 소꼬리에 불을 질렀다. 그때야 황소도 놀라 움직였다. 얼마를 갔을까 재너머에 사는 친척네 목장에 도착해 재워 달랬더니 우리 아버지 성미를 잘 아는지라 못 재워 준다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슬비가 내린 통에 길에 소발자국이 박히는 바람에 쉬지도 못하고 나는 밤새 황소를 끌고 장터에 도착했다. 눈치 빠른 소장수들은 내가 아버지 소를 몰래 끌고 나온 것을 약삭빠르게 알아차리고 헐값을 주고 사려고 했다. 그렇지만 나 역시 믿는 데가 있었다. 설마 아들이 아버지 소 팔아먹었다고 붙잡혀 들어가지야 않겠지 하는 오기로 버티다가 조금 아쉽다 싶은 27만원 선에서 타협을 보았다. 그 돈을 갖고 여관에 가서 자기도 겁이 나서 내가 알고 지낸 김노인네를 찾아가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은행에 그 돈을 저금했다. 그리고 밀린 방세를 갚기 위해 전세방에 들어와 누워있는데 아무래도 시골집에서 누가 찾아올 것만 같아 내방 앞의 신발을 치우고 비어있는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소 잃은 이튿날 형수랑 목장집 사촌이 내가 세사는 집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주인 아주머니께 내가 집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겠노라며 언제까지나 내 방을 지킬 태세였다. 옆방에서 문틈으로 형수 얼굴을 본 나는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방으로 건너가 한푼도 되돌려 줄 수 없다고 그냥 돌아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이웃마을 봉계장에 가서 송아지를 두 마리 샀다. 소장사를 해볼 양으로.
 
그런데 그동안 다리 골수염이 심하게 되어 송아지를 손해보고 다시 팔아야 했다. 그리고는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하고 겨울을 나느라고 가진 돈을 술술 다 빼먹고 말았다.
 수술을 한 뒤 아무에게도 연락 않고 머리를 빡빡 깎고 방에 앉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궁리를 했으나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수술하고 5,6개월 뒤에야 의족을 댈 수 있을 만큼 살이 단단히 자리잡았다. 오른쪽 다리에 의족을 착용하기 위해 경주기독병원 소개로 「경주 의료기」상회를 찾았다. 내 형편을 들은 「경주 의료기」상회 주인 이 인호씨는 경주 경찰서 보안과에 가서 자기가 아는 박순경을 만나 보라고 권했다. 박순경은 내게 도움을 주고 싶지만 나이가 너무 많아서 재활원이나 기술학원에 입학시켜 주기가 곤란하다고 했다. 그 대신 다른 방법을 알려주었다. 내가 사는 동사무소의 소장님을 찾아가 사정얘기를 하고 동사무소장님이 경주시장께 청원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과정 끝에 나는 시장님 지시로 순경들의 단속에 쫓기지 않고 노상에서 구두닦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 인호씨는 자기 가게 앞, 복다방 옆에서 일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아무것도 없는 내게 의자와 구두닦이 통, 구둣솔 등 필요한 도구를 사주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소문을 내서 손님으로 보내주었다. 그는 또 내가 생활보호 대상자로서 의료보호수첩을 부여받아 싼값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방법을 내게 알려 주었다. 그래서 나는 1호로 의료보호 수첩을 부여받았다.
 
늘 정상인들의 속임수에 빠져 손해만 본 나로서는 이 인호씨 그가 정상인이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시골에서 살아온 탓에 본 것은 없었지만 나는 곧 구두 닦는 선수가 되었다. 구두 닦는데 자신이 생기자 구두수선 도구를 마련해서 구두수선도 했다. 구두 닦는 것만으로는 수입이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 다시 생활이 안정되었을 때 중매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 1980년도에 결혼했다. 아내도 몸이 불편하지만 꼼꼼하게 살림을 아주 잘해준다. 자랑할게 더 많이 있지만 팔불출이 되고 싶지 않다.
 어느덧 밖은 훤히 밝아있었다. 이동준씨가 얘기하는 동안 간간이 옆에서 정확한 햇수를 조용조용 알려주던 아주머니는 아침상도 슬그머니 내밀었다. 아침식사를 하며 왜 아이가 없느냐고 물으니 아주머니 몸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라고 했다가 눈을 깜빡이며 언제까지나 신혼의 기분 속에서 살고 싶어서라고 얼버무렸다.
 
식사 후 화덕에 연탄을 피워 오토바이에 싣고 일터로 간다기에 취재팀도 따라 나섰다. 오토바이가 멈춘 곳은 바람막이도 없는 길가였다. 그 곳에 사과상자를 엎어놓고 구두수선에 필요한 물건들을 펼쳐놓자 곧 손님이 나타났다. 손님이 간 뒤 하루 몇 켤레나 닦느냐고 물었더니 30여 켤레라고 하셨다. 열심히 일해서 비 오는 날에도 일할 수 있도록 구둣가게를 얻을 생각이라고 이동준씨는 아주 작고 소박한 꿈을 밝혔다. 담배를 한 대 피워 문 아저씨께 그 작은 꿈이 속히 이루어지길 비노라는 인사말과 함께 안녕을 고하고 취재팀은 울산으로 향했다.

작성자정형란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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