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장애인의 삶] 믿음과 소망으로 그려온 평행곡선 > 세상, 한 걸음


[어떤 장애인의 삶] 믿음과 소망으로 그려온 평행곡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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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곳은 대전이었다. 원래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하신 후 서울에서 사셨는데 직장 때문에 대전에 내려와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 쪽으로는 형제분이 많았는데 동생들의 학비 등 거의 대부분의 생활을 당신이 책임지시고 계신 형편이었다. 이러한 부담 속에서 부모님의 대전 생활은 시작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나를 가지시고 난 후 심한 입덧에 시달리셨고 신혼살림의 어려움과 더불어 시부모들의 무리한 학대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까지 당하셨다고 한다. 그리하여 달수도 못 채운 채 내가 9달만에 태어났고 울지도 못하는 나를 인큐베이터에 넣어 가까스로 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후 어머니는 내 등에서 이상한 혹을 발견하셨고 이때부터 어머니의 병원 순례의 생은 시작되었다. 의사들의 기다려보자는 말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항상 근심과 불안에 쌓여 나를 살피셨다고 한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나의 걷는 모습에서 다리를 끌면서 걷는 등 부자연스러움이 보였다. 내 무릎은 항상 넘어져서 온전할 날이 없었고 가끔씩 바지에 용변을 보는 실수도 저지르곤 했다.
 
내가 성장함에 따라 내 등의 혹도 상당한 크기로 자라났다. 그러나 국민학교에 입학하여 다닐 수는 있는 정도였다. 그때 우리 집은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다시 서울로 온 뒤였다. 내가 10살이 되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냈던 아이가 어쩌다 내 등을 세차게 쳤다. 나는 온 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쓰러졌다. 그 전에도 그 같은 일이 몇 번 있었으나 다시 일어나곤 했기 때문에 이내 일어나려니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날은 몇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조퇴를 해야 했고 업혀서 집에 돌아와야 했다. 며칠 후 등을 수술했으나 죽어버린 척추 신경은 살아나지 않았다. 그 이후 나는 다시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척추신경마비" 그것이 내 몸에 대한 병명이었다.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불안 속에 살아 오셨던 어머니는 이제 죽음과도 같은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셨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다. 그때부터 나를 고칠 수 있는 길이라면 정말 안다닌 곳이 없을 만큼 다니셨고 고쳐준다는 감언이설에 속기도 하셨다. 나로 인한 아픔을 보이지 않으시려고 어머니께서는 다른 방에서 그것도 입을 막고 많이도 우셨다고 한다. 오직 신앙의 힘만이 그 모든 고통을 이길 수 있게 한 의지처였다고 하셨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내 미래를 위해 무엇인가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기반을 잡아 놓아야 한다며 오직 일에만 매달리셨고, 어머니는 나와 함께 교회일 외에는 외출을 삼가셨고 나의 유일한 친구요 대화의 상대자가 돼 주셨다.
 
나는 어찌어찌하여 국민학교는 졸업했으나 중학교부터가 문제였다. 척추마비 장애인들이 감수해야 하는 배설문제가 나를 계속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여러 가지 궁리 끝에 어머니는 중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을 집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대학생을 가정교사로 모시게 해 주셨다. 나는 장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생각해 보지 않고 가기 싫은 학교 안가고, 보고 싶은 TV를 마음껏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그런대로 괜찮다고 받아 들였다. 이렇게 무의미하게 허송세월한 것이 몇 년일까? 무던히도 그런 나를 참아주시던 어머니께서 마침내 나의 이런 생활 자세를 나무라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럴때마다 그 순간만 면하려고 했을 뿐 어머니의 깊은 뜻을 마음속에 새기려고 하지 않았다. 또 열심히 운동을 해야 몸이 굳지 않게 되는데 내가 꾀를 부린 탓에 몸의 상태는 악화되고 말았다.
 
언제였는지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나는 이전에 공부할 때나 들여다보던 책들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늘어졌다. 그 결과 나의 생활은 상당히 변화되었다. 이런 내 모습에 어머니께서도 깜짝 놀라셨고, 칭찬까지 해 주셨다. 하지만 내 소망과는 달리 그렇게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뛰어난 머리가 못되는지, 하느라고 해도 공부의 수준은 마냥 그 타령이었다. 특히 수학과 과학 등 이과 계통의 학과는 아예 손을 들어 버렸다. 그 과목 공부시간만 되면 내 능력의 바닥을 보는 것 같아서 괴로웠다. 교회에서 만나는 건강한 친구들을 보면 왠지 주눅이 들고 나 자신을 생각하면 속상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공부해야만 했다. 그래도 그전 만큼 공부에 열의가 나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조금씩 내 내부에서 이전과는 다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어머니의 신앙 생활 덕택에 내가 만나는 사람은 거의가 기독교인이었다. 하지만 나는 단지 끌려가는 자세로 교회에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니까 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차츰 스스로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 성경도 자꾸 읽게 되었고, 설교도 책도 기도도 무엇인가 갈급한 마음으로 임하게 되었다. 그로인해 때로 마음이 평온하고 즐겁기도 했지만, 때로는 나의 추한 모습과 이지적이고 모순된 성격을 발견하고 항상 하나님 앞에 나는 죄인으로서 용서를 구할 수 밖에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어떨 때는 내가 괜찮은 사람같기도 하다가 어떨 때는 형편없이 못되고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의 생활이 싸인(Sine) 곡선처럼 내 생활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래에 대한 뚜렷한 계획이나 목표도 없이 그저 세월 가는대로 시간만 보내는 한심한 십대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제 나 스스로 하나님을 찾는 자리로 나가는 발전이 있었다는 것 외에 이렇다할 것 없는, 지금 생각해도 후회스러운 시절이 아닐 수 없었다. 주위에서 나를 보는 분들은 어머니에게 저리 내버려 두지 말고 기술이라도 배워서 앞으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충고를 했지만, 어머니는 그럴 때마다 거절하셨다. 어머니는 시계 수리나 도장 파는 일로 내 일생이 메꿔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학자까지는 못 되더라도 좀더 나은 생활 수준에서 살 길을 찾도록 해 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정신적인 차원으로 정상인들과 대등하게 살도록 열심히 공부하라고 나를 격려해 주셨다. 아무 방향없이 그저 공부만 하는 내게 어머니는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검정고시를 봐서 내 학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국민학교 졸업 후 처음으로 큰 시험을 치루는 어려움을 견뎌 내야 했다. 정말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해냈다. 성취감은 자못 큰 것이었다. 여기에 자신을 얻은 나는 다음으로 대검에 응시했다. 1년여를 쏟아 넣어 드디어 나는 고등학교까지는 인정을 받는 자리에 서 있게 된 것이다.
 
이때쯤 우리 집은 정말 일 밖에 모르시는 아버지의 노력과 알뜰한 어머니의 살림 솜씨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먹고사는 일에 걱정 없는 기반을 마련해 주기에는,  그리고 인생을 좀 더 뜻 있게 살아 갈 수 있게 해 주시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신 부모님은 결국 아버지께서 개인 사업을 시작하시는 것으로 결단을 내리셨다. 다행히 아버지께서 시작하신 사업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셔서 잘 되어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우리 집은 아버지가 사업 기반을 부산에 옮기심에 따라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내 몸에는 온천 물이 좋다고 하여 언젠가 어머니와 단 둘이 와 보았던 기억밖에 없는 부산이었지만 서울에서보다 더욱 보람 있고 뜻 깊은 제 2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
 서울에 있을 때 막상 대검까지 합격이 되었으나 내게 있어 대학이라는 관문은 꼭 성경에 나오는 여리고 성처럼 뚫고 들어가기에 불가능한 벽처럼 여겨졌다. 나로서는 계속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누구처럼 "성적은 좋은데 장애인이기 때문에 입학을 못 시킨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리니 입학을 시켜달라"는 주장을 할 말큼 시험을 잘 치룰 자신이 없었으므로 장애인이기에 한마디 항의도 못하고 시험을 치러 볼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돌아서야만 했었다. 그런데 부산에서 뜻밖에 내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부모님이 다니시는 교회 목사님의 주선으로 나는 개신교 교단에서 인정하는 신학교에 입학 할 수 있었다.
 
비록 문교부에서 인정해 주는 대학은 아니었으나 감사하게도 나를 가르친 교수님들이 어느 대학 못지 않게 좋은 분들이셨기 때문에 알찬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또 훌륭한 교수님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 기간은 나로 하여금 인격적으로 자랄 수 있는 연단의 기회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잊을 수 없는 일은 언제 당할지 모르는 대변으로 인한 고통도 마침 변비가 심했던 까닭에 바지에 실수하는 위기를 여러 번 면할 수 있게 해준 일이었다. 기숙사 생활도 그럭저럭 잘 해냈고 그 결과 내 노력이 가져다 준 성적표를 받을 때는 아쉬움과 함께 보람도 컸었다.
어느덧 4년의 세월이 흘러 나는 졸업을 했다. 이 일이 나 자신보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신 분들게 감동을 주었다는 사실에 나는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신학교의 마지막 과정인 서울 장신대 1년 코스를 계속 할 수 없는 아픔을 다시 겪어야 했다. 왜냐하면 집을 멀리 떠나 혼자 객지 생활을 한다는 사실에 엄두가 나지 않았고 건강도 그리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쉽지만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4년의 힘든 나날을 견디어 냈다는 것만으로도 나 스스로가 대견해 했다.
 
얼마동안 나는 다시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생활을 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컴퓨터 붐이 한창 크게 일어났는데 외삼촌이 내게 개인용 컴퓨터를 선물하신 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그것을 배우는 일에 완전히 빠져버리게 되었다. 컴퓨터와의 만남은 내게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그것은 장애인 친구들과의 만남이었다. 그때까지 내가 알고 지낸 사람들은 정상인들뿐이었다. 그런데 컴퓨터를 배우고 있던 중 나는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컴퓨터 직업 교육을 시킨다는 "한울"이라는 모임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1기생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나는 입회 신청을 하고 "한울"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 첫 오리엔테이션 장소에 나갔다. 거기에는 나와 같은 여러 장애인들이 같은 목적으로 나와 있었다. 이것이 내가 장애인 친구들을 만나게 된 첫 기회였다. 처음엔 서먹서먹했지만 차츰 서로를 경계하던 시선이 허물어지자 서로의 신상에 관한 일들을 얘기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면서 나는 많은 장애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운 현실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전혀 몰랐던 고충들을 보고 들으면서 어쩔 수 없이 이제껏 살아온 내 삶과 비교도 해보게 되었다. 가장 가슴아픈 사실은 대부분의 장애인들의 생활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돈벌이를 해야만 되는데 이렇다할 기술도 없고 그렇다고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기에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고 하여 모두들 어려운 처지였다. 이런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나는 장애인의 문제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관심속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사회적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1년여에 걸친 컴퓨터 교육 기간이 끝나 우리들이 그렇게도 그리던 전산실을 연 순간의 기쁨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때 도와주신 분들게 내가 수강생들 대표로 감사의 말을 했는데 목이 메여서 울먹이는 바람에 장내가 숙연했던 일과, 뭔가 해냈다는 긍지에 가슴 뿌듯했던 일을....... 안타깝게도 전산실의 운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주문을 받아야 하는데 주문이 좀처럼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다. 훗날 들은 얘기로는 전산실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찾아와 보니 좁은 공간에 장애인들이 모여 있는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더라는 것이었다. 그 일을 통해 나는 장애인인 우리가 우리를 내세우고 주장하려면 확고한 무엇, 즉 실력이라는 것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절감했다. 막연히 "누군가 도와 주겠지"하는 것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기회조차 충분히 얻지 못한 채 우리들의 꿈의 자리를 잃는다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었다. 도와주셨던 분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한편, 잘못했을 때, 우리 부모로부터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모멸스러운 면박을 당하면서 사회라는 것이 참 냉정하고 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렇듯 새로운 경험을 쌓고 친구들과 재미있게 지내던 중에 나는 다시 건강이 나빠져 병원 신세를 져야할 형편에 처하게 되었는데 입원을 하고 있으면서 그동안 쉬었던 신학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전산실을 나왔다. 얼마 후 전산실도 끝내 문을 닫고 말았다.
 
막상 혼자 공부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아서 그냥 저냥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서울에 K재활원이 새로 세워지고 컴퓨터과가 생겨 개인으로서는 엄두도 낼수 없는 고가의 컴퓨터를 구입하여 교육을 시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머니는 내가 집에만 있음으로 해서 우물안 개구리가 되는 것을 염려하여 재활원 같은데 보내 친구들을 더 많이 사귈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늘 마음속에 지니고 계셨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재활원들이 시설이 너무 미비하여 망설이고 있었는데 K재활원의 시설이 아주 잘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께서도 오랫동안 생각해 오던 것을 실행해 볼 좋은 기회라고 여기시고 내게 그곳에 가보라고 권하셨다. 나도 고급 컴퓨터를 만져 보고 싶은 욕심에 찬성했다.
 
정말 그렇게 집을 떠나보기는 29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재활원에 나를 데려다 주시고, 뒤 돌아서 가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나도 부모님도 모두 울었다. 재활원에서의 생활은 규칙에 따라 진행되었고 규칙을 어기면 그에 대한 징계가 내려졌다. 좋은 점은 많은 사람들이 각 처에서 왔기 때문에 여러 층, 여러 성격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일이다. 특히 나와 다른 종류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을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게 했다. 또 부산에서 한울 모임 친구들과는 친하게 지냈지만 생활을 같이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서로를 온전히 알고 지낸다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같이 목욕도 하고 침식도 같이 하는 등 가족처럼 지내면서 보다 깊이 있게 사귈 수가 있었다.
 
여기에서도 제일 큰 관심과 걱정은 생활과 직업이었다. 무언가 살아볼 기반을 찾을 수 있을 까 해서 찾아 왔는데 막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혼 뿐 아니라 집안 일을 책임져야 하는 부담을 지닌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한 사연들을 듣고 보면 가슴이 답답한 사정들이 많았다. 유감스럽게도 컴퓨터를 배우러 갔는데 들여오겠다던 기계는 들어오지 않고 시간만 자꾸 지나가고 있었다. 결국 실망해서 나는 5개월만에 다시 부산에 내려오고 말았다.
 친구들 간의 우정은 소중한 것이었다. 특히 공동 생활에서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하는 예의에 대해서 배운 것은 귀한 소득이었다. 교육생으로 재활원에서 있어야 했기에 많은 것을 참고 지내야 했고 문제를 일으키는 친구들에게 내려지는 징계와 처리 과정을 보며 다시 한번 장애인들의 불리한 현실을 뼈 아프게 느껴야 했다. 너무 고생스럽게 지내온 친구들을 보면서 나 자신 지난 시간을 너무 안이하게 살았다는 자책감도 들었다.
 
아무 목적 없이 부산으로 내려온 나는 뜻밖의 일을 맡게 되었다. 부산 보훈 병원 원목이신 황도일 목사님께서 보훈 병원에 와서 설교를 한번 해 달라는 것이었다. 몹시 망설여 졌지만 용기를 내어 설교가 아닌 간증을 했다. 나는 굉장히 떨면서 했으나 병원에 계신 분들께서는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목사님은 내게 앞으로도 계속해서 설교를 해달라고 하셨다. 갑자기 주어진 큰 일에 당황한 나는 극구 사양을 했으나 목사님은 격려의 말씀과 더불어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셨다. 결국은 한 달에 두 번씩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내게도 뜻 깊은 시간이 되었다. 물론 설교를 준비할 때는 고민스럽고 몹시 힘들었지만 그래도 반갑게 맞아 주시는 불들의 마음을 대할 때면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새로 나가시게 된 교회의 박영구 목사님의 호의로 중등부 아이들을 가르칠 기회도 생겼다. 그 교회는 재활원 안에 있는 교회였는데 비장애 아이들과 장애를 가진 아이들도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여기서 가르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선생님이라 부르며 따라 주는 학생들이 너무도 고마웠다.
 
어느 덧 `87년도도 끝나 갈 무렵, 나는 용기를 내어 장애인용 자동차를 운전해 보자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한번 나다닐 때면 차 잡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올라가 운전을 배우면서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는 쾌감을 맛볼 수 있었다.
 
서울에 있으면서 우연히 참석한 성서 연구 모임에서 지난 날 부산에서 같이 신학교를 다니며 공부했던 동기생을 만날 수 있었다. 또 부산에서 나를 도와 주신 황목사님이 서울에 올라 오신 후 나더러 신학을 계속 공부해 보라는 격려도 있고 해서 장신대 목연 과정에 지원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운전을 배우고 부산에 내려와 얼마 안 남은 기간이었그나 준비를 하고 시험을 쳤다. 그리고 얼마 전 합격통보를 받고 요즘은 서울에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다. 얼마만큼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어쨌든 애써 해볼 다짐을 하고 있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 낳은 고통을 받으며 살아 온 친구들에 비하면 확실히 나는 불행속에서나마 축복 받은 환경을 지닌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도 "척추 신경 마비"라는 평범치 않은 삶을 살아오면서 느끼는 것은 이런 처지에서도 인생을 살아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비록 사람마다 그 이유를 발견하는 대상이 다를지 몰라도 내 경우엔 내가 믿는 하나님 안에서 찾고 있다. 나만 불행한 사람이라고, 부족한 부분만 보고 한탄한다면 아무리 주위환경이 좋고 나를 뒷받침할 만한 배경이 든든하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이 될 것이다. 이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들이 어람든지 있고 그 속에서도 살아 보겠다는 뼈 아픈 노력들을 내 눈으로 확인한 이상 유독 장애인들에게 불공평한 듯 보이는 현실을 불평만 하고 있을 수 만은 없다.
 
나는 생각한다. 사는데 까지는 살아보리라고, 해보는데까지는 해보리라고, 지금 내게 꿈이 있다면 하나는 하나님 안에서 나 자신을 매 순간 확인시켜 나가는 일과 내게 주신 그 사랑과 이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뜻을 깨닫게 해주시는 대로 같은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하는 장애인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다. 혹은 글로, 혹은 대화로 말이다. 또 한가지는 교회를 나가려 해도 계단 때문에 여러 사람에게 불편을 줘야 하는 부담감 없이 휠체어로도 얼마든지 출입할 수 있는 작은 우리만의 장소를 마련하여 함께 예배드리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위대한 사도였던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모든 장애우들에게 임하기를 기원하고 싶다.

작성자유원철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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