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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밟혀도 밟혀도 더욱 끈질긴 생명력을 잔디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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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에 대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일반적인 얘기를 한 번 꺼내보자.
장애인 복지는 왜 필요하고, 장애인 복지는 도대체 어떤 논리적인 배경 아래 가능한 것인가, 여러 가지 학문적인 분석이 있을 수 있겠고,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견해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가지고 깊은 토론을 하자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일방적인 주장을 해보면, 장애인 복지는 장애를 가진 것에 대한 보상의 개념에서 비롯됐다고 얘기할 수 있다.

장애를 가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기회와 선택의 제약이라는, 원하지 않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장애인은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없고, 하고 싶은 일을 뜻대로 할 수 없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런 상황이 장애인들을 빈곤의 나락으로 밀어 넣고 있고 인간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문명사회는 전쟁에서 다치거나 사망한 사람들에게 보상해 주는 것처럼 장애인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장애인이 기회와 선택의 제약에 따라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보상해주기 위해 복지라는, 보상의 또 다른 이름으로 여러 가지 시책을 마련하고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런 가설을 인정한다면 한 가지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보상에서 비롯된 복지는 권리의 개념이 무척 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쌍한 사람을 돌보기 위해 나눠주기 식의 복지시책을 시행하는 것과, 권리를 보장해주기 위해 복지시책을 마련하고 시행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또 보상의 개념에서 비롯된 복지라 하더라도 적극적인 보상의 개념에서 시행되고 있는 복지인지, 아니면 미온적인 입장에서 마지못해 시행하고 있는 복지인지 차이를 분명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장애인 입장에서는 당연히 적극적인 보상의 개념에서 비롯된 복지를 선호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사회정의에도 맞는 것이기 때문에 장애인 복지는 적극적인 보상의 이념을 가지고 시책이 마련되고 시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하나도 지나침이 없는 주장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장애인 복지는 과연 어떤 개념과 이념을 가지고 시행되고 있는가.
최근 주관적으로 목격한 두 가지 사례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보상의 개념에서 비롯된 장애인 복지가 시행되기는커녕 보상의 개념에 한참 모자라는 최소한의 사회정의에 부합하는 장애인 복지라도 시행되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 짙은 회의를 품게 만들고 있다.

한 사례는 언론에도 보도된 경남 함안에서 한 장애인이 얼어죽은 사건이다. 이 사건의 본질은 장애인이 얼어죽은 게 문제가 아니라 장애인이 얼어죽을 수밖에 없도록 이 사회가 철저하게 장애인을 방치했다는 데 있다. 외출도 하지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중증장애인을 산골짜기 마을에 9년간 홀로 방치했다. 당연히 복지가 없었고, 살아 있어도 산목숨이 아닌 그는 결국 죽음으로 삶을 끝내야 했다.

또 한 사례는 한 중증장애인이 쓰러진 사건이다. 그는 장애 때문에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수용시설에서 자라야 했으며,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그는 노점상으로 전전해야 했고, 중증의 장애를 가지고 먹고살기 위해 애를 쓴 게 몸에 무리로 작용해 한계상황에 다다르게 되면서 쓰러진 것이다.

두 사람의 장애인에게 정부가 해준 것이 있기는 하다. 바로 기초생활보장수급자로 지정해서 최소 생계비를 지원한 것이다. 그렇지만 최소 생계비가 두 사람의 장애인이 사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비극적인 결과가 웅변해 주고 있다.

두 명의 장애인에게 일어난 일을 목격하게 되면서, 이 사회와 국가가 장애인에게 지나치게 비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니 비정을 넘어 잔인하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국가는 한 중증장애인을 산골짜기에 내팽겨쳤으며, 한 중증장애인에게는 먹고살려면 일을 하라고 거리로 내몰았다. 그래서 복지가 실종된 상태에서 살려고 애쓰고 발버둥치다가 한 장애인은 죽고 한 장애인은 쓰러져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물론 이런 비극적인 상황이 장애인들 전체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상황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도 장애 때문에 고통스런 상황에 놓여 있고, 그 상황이 한계에 이르러 비극적인 결과를 목전에 둔 장애인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런 장애인들의 한계상황 앞에서 점진적으로 나아지는 복지가 무슨 소용인가, 정부 입장인 지금의 현실을 무시하고 먼 미래를 얘기하는 것은 장애인을 우롱하고 두 번 죽이는 처사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비극적인 상황이 연출되는 것은 근본적인 원인이, 정부의 장애인 복지정책에서 장애라는 현실에 적극적인 보상이라는 개념이 망각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복지정책 시행에서 보상의 개념이 적용된다면 장애인이 방치되고 쓰러지는 복지의 사각지대가 생길 리 없다.

이렇게 강조하는 것이 소귀에 경 읽기인가, 그러면 최소한의 양심을 가지고 있다면 정부 스스로 복지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작성자함께걸음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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