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에 만난 장애우] 민족운동 되살리는데 최선을 다할터 > 세상, 한 걸음


[이달에 만난 장애우] 민족운동 되살리는데 최선을 다할터

김환철 지체장애우

본문

<○"금강"이 필명인 김환철 씨>
올 겨울에는 비교적 이른 듯 싶게 날씨가 영하 권의 추위에 들어섰다.
겨울 외투를 자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신바람 나는 날씨가 될 수도 있겠지만 추위에 서둘러 걸으면서도 마땅히 가야할 따뜻한 공간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걱정스런 일이 빨리도 찾아온 셈이다. "저렴한 가격의 백만 원대 코트"가 많이 나왔다는 기사가 실리던 그 때, 폐허에 비닐 집을 짓고 맨바닥에 널빤지를 깔고 새우잠을 자야하는 사람들이 서울에만도 1만 5천여 가구에 6만여 명이 있다는 사실이 불과 몇 일 전에 기사화 되고 있다. 우리들 모두가 크리스마스를 미리부터 준비하고 있는 양 거리는 온통 캐롤 송으로 가득하지만 구세군의 자선냄비 종소리는 아직 들리지 않는다. 겨울이 더 깊어지기 전에 우리가 사랑하는 방법에는 아무런 문제점이 없는지 돌이켜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갑작스런 상황에 부딪칠 수 있다. 그것은 졸부를 만드는 횡재일 수도 있고 그것으로 인하여 가난해질 수도 있으며 동기가 서한 것이었든 악한 것이었든지 죄를 짓기도 하고 큰 사고를 당하여 장애를 갖거나 죽을 수도 있다.

"금강"이라는 필명으로 무협지 계에 널리 알려진 김환철 씨(33세)가 있다. 그는 국민학교 2학년(9살) 때 양 하지마비라는 장애를 갖게 된다. 처음에는 배가 아프고 열이 난다고 하여 흔히 있을 수 있는 질환쯤으로 생각했는데 쉽게 낫지를 않았다 한다. 그래서 병원을 찾게 되었는데 그것이 그를 영원히 장애우 이게 했던 것이다. 의사가 자세한 설명 없이 수술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하여 수술을 했는데 그 후로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한다. 8개월을 병원에서 입원했지만 그의 상태는 호전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당시 대구 시청에서 근무하시던 어머니는 금지옥엽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직장을 그만두다시피 하여 침, 뜸, 마사지, 녹용, 점, 굿 등등 말 그대로 좋다는 것이 면 무엇이든지 구하여 보셨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도 좋아지지를 않자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서울대학병원, 국립의료원, 삼육재활원 등을 전전하면서 애쓰셨지만 속시원한 해답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한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약 2년의 입원을 마치고 대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 때 그의 나이는 14살이었다.

그가 장애를 갖게 된 것은 당시 의사의 오진이었으며 의사의 실수로 수술도중에 척추신경이 끊어졌다는 것을 후에 알았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의사의 실수로 장애우가 돼>
그는 스스로를 낙천적이라고 말하며 좌절할 시간에 극복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한다고 한다. 서울에서 대구로 갔을 때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좁은 방에 국한 됐을지라도 실의에 빠지지 않고 수공예, 조각(서각 : 나무에 글 등을 새기는 것), 점술(동양철학), 그림 등을 배우기 시작했다.

또 배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국민학교 2학년까지 밖에 하지 못한 공부를 하기 위하여 검정고시를 다시 시작했다. 중입 검정고시에 2개월만에 합격하고 고입·대입 검정고시를 불과 몇 개월 공부하고 모두 통과했다. 그러면서도 늘 책을 가까이 하였으며 한문에도 재능을 보여 16살에는 논어를 배웠다. 그리고 이 한문실력은 후에 "발해의 혼"을 쓰기 위해 중국과 일본의 원서를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이런 그의 성장을 지켜보시던 어머니가 소질을 개발시켜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시고, 다니시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들을 데리고 단 둘이 서울로 상경하였다고 한다. 그의 나이 20살 때였다. 처음 연고도 없는 서울에서의 생활은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던 생활이었다. 그는 그러한 생활고를 타개하기 위하여 과외지도를 시작했는데 그것도 불과 몇 개월, 80년 9월의 과외 중지 조치로 그만 두어야 했던 것이다. 여러 가지 방편을 생각하시던 어머니가 집을 줄여 가게를 하셨는데 그는 어머니 일을 도우면서 다량의 책을 읽을 수가 있었다.
이 중에는 무협지 책도 많았는데 이것이 지금의 그로 만든 토대가 되었다.

<○무협지 금강경혼 가장 애착이 가>
그는 지금 무협지 작가이다. 이 길을 걸어온 지 10년 째가된다. 무협지를 읽다 "내가 쓰면 이것보다야 잘 쓰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중 글을 써 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고, 처음에 2백자 원고지 5백 매 정도를 출판사 측에 보낸 것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다음날 바로 연락이 와서 매 당 250원 이라는 당시 보통 100∼150원 보다 훨씬 많은 금액으로 계약을 했다. 이게 바로 그의 처녀 작품인 「금강경혼」이다. 단 3개월에 원고지 3,800매 분량으로 6권의 책 한편을 썼던 것이다. 그는 지금도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금강경혼」을 꼽는다. 지금 "김환철"이라는 그의 이름을 대신하고 있는 필명 "금강"은 우연히 책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인연을 맺게 된 스님이 지어주신 것이라고 한다. 그가 칠보사의 석주 스님께 글을 띄워 법명을 부탁했었는데 세상에서 제일 단단하여 깨지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한 "금강" 바로 이 이름을 지어 보내주셨단다.

그는 일년에 평균 3∼4편의 글을 쓰며 이제까지 10년 동안 「천주전기」, 「영웅독보행」, 「풍운만장」, 「신룡전기」등 30편에 약간 모자라는 작품을 썼다. 팩 1편이 5∼6권으로 구성되며 작품을 완성하려면 원고지 3,500매 정도가 해당된다고 할 때 놀라운 분량이다. 하루에 최고 300매까지 써봤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손으로 쓰다가 손이 아프고 속도도 느려 전동타자기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것도 한번 실수하면 교정하기가 힘들어 지금은 워드 프로세서를 사용하고 있단다.
사소한 단어 하나, 쉽게 접하는 일들이 작은 글감으로 되어 그의 상상력으로 완성되는 그의 작품을 주위에서는 스케일이 크고 장중하며 박진감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그 쓰는 자체는 즐거운 작업이며 그의 정신세계의 일부를 표현하는 수단이 글 쓰기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무협지의 세계는 그에게 우리의 역사와 민족에 대한 사랑을 일깨워 준 스승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국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곳에 무한한 상상력과 더불어 작가의 정신이 깃들여 완성된 것이 무협지라고 했을 때, 그가 이런 과정에서 중국의 역사와 전혀 무관할 수 없는 우리의 역사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새로운 분야의 책을 쓰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혼신의 역작 발해의 혼>
87년에 세상에 빛을 보게 된 "발해의 혼"은 역사 무협 소설로서, 그의 7년여의 무협세계가 탄생시킨 새로운 분야의 작품이다. 독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에게 있어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이 책을 위하여 그는 1년 전부터 준비를 하였단다. 우리나라에는 발해에 대한 연구와 자료가 거의 없어 중국과 일본의 원서들을 구하여 상고사에 대한 공부를 하였다. 또한, 다른 작품을 쓸 때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완성했다고 한다. 이 작품을 쓰면서 그리고 쓰고 나서, 그는 우리 역사에 대한 연구의 당위성과 민족혼을 되살리는 의미로써 민족 정신을 고취시키고 자긍심을 함양할 수 있는 내용의 책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단다. 그리고 국사 교과서에는 왜곡됐거나 밝혀야 될 것임에도 밝히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단다.

단적인 예로 「삼국 사기」의 저자로서 사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김부식을 이완용보다 더 나쁜 인물이라고 그는 말한다. 또 우리 땅덩이의 모양이 "순한 토끼"로 표현된 것은 일제시대 때부터인데 아직도 그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그 이전에는 "호랑이의 웅크린 모습"으로 표현됐다고.

그는 지금 우리나라 3대 경전 중의 하나인 「천부경」을 읽기 쉽고 재미있게 풀이, 이해하기 쉽도록 한 책을 준비중이라고 한다. 이 작업과 병행하여 요즈음 만화 스토리를 쓰는 일을 하고 있단다. 만화가 종류도 많고 소재도 다양하지만 상상력에 의존하고 있으며 계층의 구별 없이 누구 나가 즐기는 것이므로 상품성이 높아 이 일을 하면 경제적인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어 장애우에게 권할 만한 직업이라고 자신의 일을 소개한다.

<○만화 스토리 작업 장애우에게 권할 만한 직종>
장애문제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생각한단다.
"장애문제는 비장애우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장애우들은 자칫 자기비하나 자기 비판의 관점으로 흘러 감정적일 수 있는 우려가 있다.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보다 현재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여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스로 자립 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만약 만화 시나리오에 대해서 관심이 있거나 해보고자하는 장애우가 있다면 기꺼이 도와주겠단다.

기자가 방문했을 당시 김환철 씨는 결혼 준비로 한창 바빴었는데 지금쯤은 신혼 생활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간호 대를 졸업하셨다는 아름다운 신부와 행복하시길 바라며 축하드리고 싶다. 그리고 역사와 민족에 대한 관심과 의욕으로 시작한 의미 있는 작품활동에 무언의 지지를 보낸다. 앞으로 시작되는 "민족혼 되살리기 작업"이 좋은 출발이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조계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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