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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삼십만통의 편지를 쓴 사내"

오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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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삼십만통의 편지를 쓴 사내"
오규근


  한 장애우가 자서전을 펴냈다. 본인은 간증집이라고 책표지에 적고 있지만 이 책은 단순한 간증집이 아니다. 이 책에는 한마디로 장애우의 편집한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 오아블로라는 필명을 가진, 올해 마흔네살의 오규근씨, 그가 "주의 꽃이 되어 피어나리, 주의 열매되어 피어나리"라는 책을 펴낸 주인공이다. 그를 만나 마흔네 해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오규근씨는 책을 펴낸 것 외에 지금까지 무려 삼십만통에 가까운 편지를 써서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성인의 몸무게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이십육 킬로그램의 몸무게를 가진 자그마한 이 사내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그의 장애는 얼핏 보면 왜소증 장애 같아 보인다. 그렇지만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뼈가 부러져 발육이 되지 않는" 희안한 장애를 가지고 있다. 이 장애를 가지고 그는 마흔네 해를 살아왔다. 그것도 장애우들이 버티기 힘들다는 농촌에서, 가난에 찌들리며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이어왔다. 이런 그의 삶의 이야기는 농촌에서 자란 한 재가장애우의 기구한 삶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그렇게 힘들게 산 장애우가 어디 있을까 싶지만 불과 얼마되지 않은 시일 전에 오규근 같은 장애우의 삶이 분명히 이 땅에 있었다. 그래서 그의 삶의 이야기는 마치 흑백영화를 보는 것처럼 아련하게 가슴에 다가온다.
  지금부터 그가 살아온 날들을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하자. 참고로 이 이야기는 그가 낸 책의 내용을 기둥으로, 보강 인터뷰를 거쳐 기술한 것임을 밝혀둔다.
오규근, 그는 일천구백오십이년 평택시에서 한참 떨어진 외진 산골에서 한 농부의 육남이녀 중 네 번째로 세상에 태어났다.
  그의 자서전은 "어릴 적에는 일년에 서너 번씩, 그리고 열 살이 넘어서 부터는 일년에 한 번씩은 꼭 뼈가 부러지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던 나였기에 세상에 대한 미련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아니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이러한 역경의 삶은 열아홉살까지 이어졌다"고 어릴적 삶을 회상하고 있다.
이렇듯 뼈가 부러져서 겪는 아픔 외에 그를 괴롭힌 것은 굶주림의 고통이었다. "뼈가 부러져서 방안에 혼자 누워있으면 유난히 배가 더 고팠다. 모두가 일을 나가고 나면은, 아침에 보리밥을 물에 말아서 몇 수저 먹으면 그것으로 저녁때까지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일을 하는 사람도 점심을 먹지 못하는데 하물며, 누워있는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소변을 보라고 병을 가져다 놓은 것과, 목이 마르면 마시라고 물을 한 그릇 떠다가 놓은 것이 고작이었다."
그의 불행은 계속 이어진다. 우선 그는 장애 때문에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채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아픔만 겪으며 살았던 나이기에 학교는 문턱도 밟지를 못했다. 내가 어렸을 때 국민학교가 제일 가까운 곳이 내기리였는데 십리가 넘었다. 다른 아이들은 이렇게 먼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지만 뼈가 약한 나로서는 생각도 할 수가 없는 일이요. 부모님들은 아예 나를 학교에 보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먹을 것도 없어서 굶기를 밥먹듯 하던 보릿고개 시대라, 건강한 아이들도 힘들게 학교를 다니던 시절이기에 나 같은 인생에게 공부를 할 여건이 주어진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였다"
  마루에 앉아서, 가방을 메고 집 앞을 지나가는 아이들을 망연히 쳐다보아야 했던 그의 마음이 어땠을 지는 미루어 짐작이 간다. 그렇지만 그는 낙심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이시기 그의 인생의 유일한 무기인 글을 밑에 동생을 통해 독학으로 깨우친 것이다.
"나는 열한 살까지는 글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다치고 낫고, 다치고 낫고 하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글을 알게 된 동기는 바로 세 살 아래인 남동생이 학교에 다니고서 부터이다. 나는 지도해줄 사람이 없는지라 동생을 따라서 조금씩 글을 배웠다. 글을 알게 되자 공책이 귀한 때 이기에 마당이나 부엌의 부뚜막에다 돌과 나무 조각 등으로 연습도 하고, 낙서를 하고 해서, 어렵게 글을 배웠다"
글을 배웠지만 이때만 해도 그의 삶은 철저하게 막혀 있었다. 농촌에서 어린 그가 할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하루하루 세월만 축내야 했다. 그런데 그런 그를 더욱 괴롭게 한 것은 가족들의 냉대였다. 다소 장황하지만 그의 책에서 이 부분을 옮겨 보면 아래와 같다.
  "어머니는 나를 야단칠 때마다 전생에 죄가 많아서 저런 자식을 두었다고 하여 내마음을 아프게 했다. 어렸을 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냥 넘어가곤 했으나 내가 조금씩 철이 들기 시작하고부터는 마음이 아프거나 슬플 때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 그런데 때로는 전생에 죄가 많아서 병신으로 태어나 늘 집안의 십자가가 된다고 구박하시던 어머니, 때로는 차라리 창피하니까 죽어버리면 나도 편하고 너도 편할 것이라고 가슴속에 심한 상처의 못을 박으시던 어머니가 때로는 남몰래 눈물을 지으시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럴때면 내가 죽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요 어머니나 형제들에게 가장 큰 소원을 이루어지게 하는 길이다 라는 생각에 마을을 찢으며 수없이 눈물을 짓던 밤과 낮의 날들도 많았다. 건강한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도 되고, 장애우들은 이 세상에서 쓸모가 없기에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나는 가슴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살았다. 내 자신이 나를 생각해 봐도 아무 곳에도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어렸을 때는 창피한 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냥 모르는 사람이 집에 찾아오면 부모 형제들이 나를 숨기고 하였기에 모르는 사람이 오면 무조건 숨어야만 하는 줄로 알고 있었다.
  내가 장애우이기에 부모 형제가 창피하여 숨긴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골방에서 손님이 사온 과일이나 사탕을 조금 가져다 주면 그것이 좋다고 혼자 먹으며 놀았다. 밥도 혼자 따로 가져다 주었다. 그것도 상이 아니라 두어가지 반찬과 밥을 방바닥에 가져다 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그것도 좋다고 먹고 하였다. 그러던 나도 나이를 먹어 가면서 서서히 철이 들어갔다. 내 동생뿐만이 아니라 부모님을 비롯하여 온 가족이 손님과 함께 즐겁게 노는데 늘 나만이 혼자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내가 장애우이기에 창피하여 숨겨 놓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일을 알고 나서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많이 울었다.
  그 후로부터는 손님이 올 때마다 나는 싫었고 내 자신을 원망하고 비관하여 울기도 많이 하였다. 그 후로는 가져다주는 사탕도 과자도 나에게 소용이 없었고, 밥도 마음의 아픔으로 한 수저도 먹을 수 없어서 울다가 그냥 잠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러나 나의 아픔과는 아랑곳없이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도 건너방에서는 즐겁게들 놀고 하였다.
"아니 왜 밥을 안먹었니? 어디가 아프냐..."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때로는 소리를 죽여가며 울다가 그냥 잠이 드는 경우도 있는데, 밥을 주었던 그릇을 가지러 오셨던 어머니가, 나의 마음을 알리 없는 어머니가 무심하게 물어보는 경우가 있을 때면 나는 "아니 그냥 먹기가 싫어서..."
하고 대답을 하였다. 손님이 올 때마다 창피하다고 숨기는 것이 분해서 그런다고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 자존심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철저히 버려진 인생이었다. 교회에서 심방을 와도 혼자서 숨어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웠으나 찬송가소리는 좋았다. 때로는 소리 죽여 따라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찬송가 소리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런 가족들의 냉대로 인해 그는 당연히 죽음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자살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가 자살을 결행하지 않은 이유는 어떻게 보면 매우 순진해 보인다.
"내가 죽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 가정은 기독교 가정이기에 부모님이나 형제들이 교회를 다녔는데 사람은 제명에 죽어야지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간다는 것이었다. 지옥이란 늘 유황불이 쉬지 않고 타고있는 곳으로서 죄가 많은 사람들 즉,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들이나 자살한 사람들이 가는 곳인데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는데 그 영혼은 영원히 죽지를 못하기에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땅에 묻히지만 죄가 많은 사람의 영혼은 지옥에 가서 너무나도 뜨거워 영원토록 죽지도 못하고 늘 펄펄 뛴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니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었다"
  죽지도 못하고 살자니 괴롭고, 그의 답답하고 힘든 삶은 성인이 될 때까지 이어진다.
"나는 스무살이 되기까지는 몸이 약하여 일을 하지 않았다. 매일 혼자서 집을 보는 것이 일과처럼 되었고, 콩을 까거나 고추 꼭대기 따기, 가위로 고추의 배를 가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혼자서 산으로 놀러 다녔다. 멀리는 가지 못하고 집 근처의 산으로 놀러 다녔다. 어릴적에는 꼬맹이 친구들이 그래도 많이 찾아 와서 바둑과 장기도 두고 하였는데, 나이가 먹을수록 외톨이가 되었고, 혼자만의 시간을 항상 가지게 되었다"
그가 무료함에서 벗어나 그나마 자신이 할수 있는 일을 찾아낸 것은 그의 스물한살 때였다. 그가 숱한 고민 끝에 찾아낸 일은 바로 소설쓰기였다.
  "어느날 집에 돌아온 나는 그나 밤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무의미한 인생을 보내고 말 것인가, 아니면 무엇이라도 하여 성공을 해서 나도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일 것인가, 하는 생각에서 였다. 인생은 과연 몇 번을 사는 것인가? 한번뿐이다. 그런데 나는 무엇인가 이렇게 쓰레기처럼 낙엽처럼 뒹굴다가 그 누구도 인간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 삶 속에서 썩어져 버릴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내 자신을 생각해도 나의 삶은 너무나도 억울했다. 그렇다면은 정말 뜻 있는 일을 해야만 하는데 그 당시 입장에서는 나에게 뜻있는 일은 미루어 놓고라도 아무것도 할 만한 일이 없었다.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문제를 가지고 오육일간 고민에 빠졌다. 낮에도 밤에도 마음이 괴로웠다. 그러다 보니 입맛도 없었고, 밤에는 잠도 오지 않았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깊은 고민에 빠진 것이다. 뒤를 돌아보아도 앞을 바라보아도 생각하면 할수록 꽉 막힌 인생이었다. 사람마다 인생의 길을 가다가 보면은 때로는 삶의 길목에서 그대로 주저앉고 싶을때가 있는데 내가 바로 그러한 입장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렇게 며칠동안 고민하던 나는 기쁜 마음으로 손뼉을 쳤다. 참으로 좋은 묘책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가지고 있던 소설가의 꿈을 이루는 것이었다. 글을 쓰는 일이라면 그 누구의 도움이 없이도 혼자서 할수 있다는 생각에서 였다"
그렇지만 소설 쓰는 일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인가,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그로서는 소설을 쓴다는 게 더더욱 힘든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렇지만 일단 그는 용기를 냈다. 하지만 소설을 쓰는 것은 용기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었다.
  " 사실 펜만 잡으면은 좋은 글이 막 쏟아져 나와서 얼마든지 쓰게 될줄 알았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일이었다. 어제만 해도 좋은 생각이 많이 떠올랐는데 막상 펜을 잡으니 모두 달아나 버렸다. 아무리 글을 써보려고 머리를 쥐어짜 보아도 글은 써지지 않았다.
펜을 잡았다가 팽개쳤다 하기를 십여일간 했다. 그러다가 조금씩 생각이 나기 시작하여 연습장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제동이 걸렸다. 책은 참으로 많이 보았지만 글공부는 하지를 않았기에 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책을 가져다 놓고 아무리 뒤져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원고지 쓰는 법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원고지 한칸에 혹시 두자씩 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두자씩 써보고 세자씩도 써보았다. 그러나 알수가 없었다. 이때처럼 공부하지 못한 것이 후회된 적을 없을 것이다"
  그는 결국 소설 쓰는 작업도 포기해 버렸다. 무려 구년여의 세월을 그 작업에 바치고 난 후였다. 그나마 붙잡고 있던 실날 같은 희망이 사라지게 되자 다시 그는 절망에 빠져들게 된다.
  "내가 쓰던 글을 팽개쳐 버린 때는 이십구세가 되던 해였다. 어느날인가 나의 나이를 돌아보니 삼십대였다.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것도 없는데 나이만 먹고 있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내가 언제가 마음속에 생각하기를 삼십살이 되면 죽으리란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나이가 어느새 된 것이다. 도무지 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글을 아무리 써보아도 소용이 없는 것 같았고, 아무리 다른 일거리를 생각해봐도 헤어날 길이 없었다.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남들은 말을 하지만 나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나에게는 힘이 되어 길을 열어 주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만 아팠다. 마음이 아니 온몸이 아팠다.
  그래서 될대로 되라 싶어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산으로 돌아다녔다. 어머니와의 다툼도 이때가 제일 많았다. 그러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무조건 화가 났다. 그래서 여름철에도 겨울철에도 산으로 돌아다니다가 졸리면 아무 곳에 쓰러져 자고 하였다. 마음이 완전히 타락한 것이다. 내가 내 자신을 생각해 보아도 구제불능이었다. 그러한 나를 이따금 뒤돌아보면은 내 자신이 슬펐다. 슬픔이 변하여 울분이 되었고, 나중에는 온몸이 활로 얼룩졌다. 모든 상황에 적개심만 깊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다시 자신이 할 일을 찾게 된다. 벌을 치는 양봉일이었다.
  "그럭저럭 지내다보니 어느새 구월이 되었다. 구월의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서울의 어느 사람이 꿈에 벌이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이 현실로 이루어져 그날 낮에 많은 벌이 집안으로 날아들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그걸 보고 나는 무릎을 쳤다.
"아 그러면 되겠구나 나에게도 벌이 들어오면 되겠다. 그러면 나도 양봉가가 될 수 있는데..."
나도 예전부터 돈이 있으면 양봉이나 해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일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았고, 바로 나의 일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삼년여 벌을 쳤다. 많을 때는 일곱통까지 치면서 그는 비로소 살아가는 보람을 맛볼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양봉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판로가 보장되지 않아 그는 애를 먹어야 했다. 그런데 이시기, 그의 생의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찾아온다. 그 계기는 벌을 처음 치게될 때처럼 우연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한편으로는 벌을 돌보면서 한편으로는 간간히 시를 낙서하기도 했다. 돈이 있으면 시집도 낼수 있다는 말을 그 누구에겐가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내던 어느날 서른살이 되던해 삼월말 쯤이었다. 우연히 라디오 다이얼을 돌리다 아름다운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방송은 기독교 방송 찬양의 꽃다발 프로였다. 네시쯤에 무심코 다이얼을 돌리는데, "이 시간을 애청하시는 장애우 여러분과 환우 여러분 이 시간은 세상에서 소외당하여 외롭게 지내시는 여러분의 시간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실어 함께 보내어 드리는 찬양의 꽃다발입니다.."
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나와 마음을 사로잡았다. 장애우와 함께 하는 프로라는 그 소리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더욱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장애우와 서신 나누기를 원한다는 남자여자들의 주소와 이름이 흘러나온 것이다.
나는 즉시 몇 명의 주소를 적은 후 곧 편지를 썼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주소를 적어 편지를 보냈다. 이러기를 며칠동안 하면서 답장을 기다렸다. 사흘만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편지가 왔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받아보는 편지였다. 그것도 건강한 여성이요 장애우를 이해한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나는 마치연애 편지를 받은 것 같이 부끄럽고 기뻤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볼까봐 몰래 뜯어보고 그 편지를 내 책상속에 감춰 두었다. 이 때부터 나의 편지 쓰는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편지 쓰는 인생, 그는 그날 이후 자신의 삶을 이렇게 규정 짓는다. 하지만 이때쯤만 해도 그는 편지를 쓰는 게 그의 직업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외로웠던 그에게 답장을 보내주는 사람들이 고마웠고, 또 자신이 소설 쓰는 작업에서 익힌 글솜씨로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게 즐거웠을 뿐이다. 그 날 이후 그는 그렇게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한통의 낯선 편지를 받는다. 그리고 그편지가 계기가 돼 편지를 쓰는 일이 직업이 되는 문서 선교사로서의 그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칠월 어느날 나는 글씨도 볼 수 없는 이상한 필체의 편지를 한통 받았다. 주소도 제대로 알아볼수 없었다. 나는 편지 봉투를 뜯어 편지를 꺼냈다. 겉봉 필체보다도 내용필체가 보기가 더 어려웠다.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편지를 보낸 사람이 장애우라는 것이었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자신은 원래는 건강한 사람이었는데 집 짓는데 다니며 노동을 하면서 살던중 칠년전에 일을 하다 떨어져서 하반신마비가 되어 지금은 열심히 서신으로 복음을 전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살면서 문서 선교사가 되라는 권고를 담고있었다. 마땅히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일단 그 장애우를 만나보기로 했다"
  이런 인연이 계기가 돼 그는 문서 선교사로 다시 태어난다. 말하자면 그가 십사년동안 써서 보낸 삼십만통의 편지는 거의 다 문서 선교 차원에서 보낸 전도의 편지인 셈이다.
그러면 어떻게 편지 쓰는 게 그의 직업이 됐을까? 그가 방송이나 주의 사람들을 통해 편지를 보낼 사람들의 주소를 알아내 자신의 삶 이야기를 하며 낙망하지 말 것을 권하는 편지를 써서 보내면 그의 편지를 받아보고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우표나 현금을 보내온다. 그리고 때로는 생활비에 보태쓰라고 별도의 돈을 보내오는 사람들도 있다. 넉넉지는 않지만 이 돈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또한 그는 편지 외에 "문서가정복음"이라는 회지를 병행해 내고 있는데 이 모임의 사십여명 정도인 회원들이 보내오는 회비도 그의 생계를 돕고 있다.
  오규근, 그는 지금 서울 응암삼동의 이천오백만원짜리 전세방에서 올해 서른살인 윤금자씨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다. 그런데 그가 비장애우 윤씨와 결혼에 이르게 된 과정도 드라마틱하다. 물론 두 사람을 맺어준 계기가 된건 역시 편지였다.
그는 문서 선교사 일을 시작하면서 서울에 정착했다. 그가 응암동한 지하방에서 누나와 함께 살 무렵인 팔십팔년, 그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오던 스물네살 처녀를 만나게된다. 이 부분을 윤금자씨의 입을 통해 들어보자.
  "그때 저는 서울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저는 막연히 어렸을 때부터 좋은 일하며 살아야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만해도 고아원 같은 데만 생각했지 장애우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어요. 그러던 어느 날 기독교방송 찬양의 꽃다발을 듣게됐는데 거기서 이사람의 간증을 듣게됐어요. 간증 말미에 편지를 보내달라고 해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왔어요. 그게 계기가 돼 오년동안 우표를 보내주는 회원으로 있었죠. 그랬는데 이사람이 보내준 회보를 보게 되면서 제 인생이 바뀐거예요. 회보 뒤에 이사람 사진이 실려 있었어요. 그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속에서 너다 내가 가서 도와줘야 할 사람이 이사람이다 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예요. 그렇지만 전 인정하기 싫었죠. 그래서 저는 기도했어요. 하나님 왜 많고 많은 사람중에 나를 택하셨나요. 나는 못하니까 다른 사람을 보내라고 기도했지만 자꾸만 마음이 끌리는 거예요. 그래서 한번 만나 보기로 했죠"
  그녀는 편지를 보내고 응암동으로 그를 찾아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한 꼬마가 그녀를 맞았다. 그녀는 처음 그 꼬마가 오규근씨 조카인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꼬마는 오규근씨 당사자였던 것이다. 그에게 이끌려 방안으로 들어오면서 그녀는 "세상에 이렇게 작은 사람도 있을까?"라는 놀라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렇지만 운명은 이미 그녀의 미래를 점지해 놓고 있었다. 어쩌면 신의 뜻이라는 표현이 더 맞는 말일 것이다. 그녀는 잠시의 갈등을 극복하고 "그래도 내가 할 일이다"라는 결심을 굳히고 만난지 삼개월만에 짐을 싸서 그녀의 집에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오규근씨에게로 숨어들었다. 그로부터 칠년, 두 사람은 하루종일 같이 지내는 재미로 세월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고 즐겁게 지냈다.
  그의 인생의 기적은 비단 결혼뿐만이 아니다. 그는 지금 살고있는 방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 계기를 통해 얻었다. 처음 부부가 살던 방은 지하 월세방이었다. 그 방은 비만 오면 천장에서 물이 새고, 습기가 가득해 그로서는 견디기 힘든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생각지 않게 기독교방송 새롭게 하소서 프로에서 출연해 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그 방송에 나가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하인생을 고백했다. 그 방송이 나가자 이름 모를 독지가가 선뜻 그가 지상으로 탈출할 수 있는 비용을 쾌척했다. 이때가 사년 전 일이다.
  이런 기적에 가까운 일들이 모두 신의 자비라고 생각하는 그는 오늘도 자비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편지를 쓴다. 그가 편지를 보내는 대상자는 주로 장애우와 청송감호소에 있는 죄수들이다. 이들에게 그는 복음의 편지를 띄운다. 그들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아도 좋다. 자신이 보낸 편지를 읽어보기만 했다는 것으로도 그는 만족을 느낀다.
지금까지 줄잡아 이천명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낸 그, 그의 편지 쓰기 인생은 특별한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태곤/ 본지 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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