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화상장애우 김광욱씨 > 세상, 한 걸음


[사람사는 이야기] 화상장애우 김광욱씨

"내 안에 이런 당당함이 숨어 있었는지 몰랐어요" 인터넷사이트에 취업실패수기 써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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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를 나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올 때면 늘 어깨에 드리워지는 숙제가 있다. 이 세상이 장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겨운 선입견과 시선의 폭력을 어떻게 거둘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누가 더 낫고 덜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가꾸어 가는 모습으로 사람을 바라봐주면 좋으련만 아직 우리 사회에게 그런 분위기를 요구하는 것은 요원한 모양이다.

오늘 만난 김광욱 씨도 그런 차별 속에서 스물아홉해를 살아온 화상장애우다. 사실 화상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장애 범주에 속하지 못한다. 일상생활을 하는데 기능적으로 문제가 없으면 장애우 범주에 포함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늘 만난 김광욱 씨는 사회적인 제도 안에서는 비장애우인 것이다. 하지만 그가 받고 있는 사회적 장애는 무엇으로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어릴 적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놀림 받은 것에서부터 취업을 준비하면서 받은 다양한 차별까지 그이는 마음에 쌓인 상처들을 50권이 넘는 분량의 차별일기를 써왔다.

세상에 대한 분노가 목까지 차 올랐던 그이가 이제는 차분하고 냉철한 자기점검을 통해 인터넷에 화상장애우로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올리고 있다. 쉽게 흥분하거나 쉽게 상처받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간의 삶을 통해 아프게 느꼈기 때문일까?

개인의 고민으로만 안고 살았던 화상장애문제를 이제는 사회적인 차별의 문제로 풀어내고 싶다는 그이를 만나보았다.

 

혼자만의 상처로 간직된 어린 시절 기억들

그이는 1974년 생이다. 올해 나이 스물 아홉. 태어난 지 7개월쯤 되었을 때 연탄아궁이에 머리가 빠져 3도 화상을 입었다.

화상장애로 인해 한쪽 귀가 녹아버려 소리를 잘 들리지 않고, 피부가 항상 당겨져서 눈이 잘 감기지 않기 때문에 시력도 마이너스다. 더군다나 안면화상장애로 인해 사회생활을 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노동력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두달 전 정부에서 판단해준 공식적인 장애는 청각장애 5급일 뿐이다.

처음 그이를 만났을 때 나이가 동갑이라 비슷한 경험을 했을 테니 얘기를 쉽게 풀어갈 수 있겠지. 더군다나 화상장애우라면 어떤 차별들을 겪었을지 대강은 짐작도 되니 쉽게 얘기를 풀어갈 수 있겠다는 지극히 업무적인 생각에 반갑기도 했다. 군부독재정권 아래서 어린 시절을 보낸 터라 국기에 대한 맹세나 애국조회, 국민교육헌장을 줄줄이 외웠던 기억하며 마지막 학력고사세대였다는 것 등등 많은 부분이 내 기억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아 사실 이야기하는 동안 즐겁기도 했다. 내 짐작대로 화상장애로 인해 학창시절 동급생들에게 상처를 받기도 했고, 취업 문턱에서는 화상장애로 인한 차별로 적잖은 분노도 생겨 있었다.

허나 29년 동안 그의 삶의 모습은 그런 외형적인 차별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가족 안에서 풀지 못한 매듭들 역시 그이에게 적지 않은 상처가 되어 앙금처럼 남아있는 것 같았다.

우선 그이는 어떻게 화상장애를 가지게 되었는지부터 말문을 열었다.

"태어난지 7개월쯤 되었을 때라고 들었어요. 단칸방에 살 때였는데 방문을 열면 바로 연탄아궁이가 있었대요. 기어다니다가 문 열고 나가면서 불을 갈려고 연탄을 빼놓은 아궁이에 장난감을 빠뜨렸었나봐요. 장난감을 꺼내려고 하다가 빨갛게 달아오른 아궁이에 머리가 빠저 3도화상을 입게 됐어요. 가까운 병원으로 갔다가 큰 병원으로 여기 저기 옮겨다니다가 결국에는 서울에 있는 병원까지 오게 됐어요. 다섯 살 때부터 1년에 한번씩 세차례 성형수술을 받았지만 워낙 얼굴 전체에 화상을 입어서 결과가 좋지 못했죠."

▲인터넷에취업실패수기올린김광욱씨
세차례 성형 수술을 받았지만 그이의 얼굴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얼굴 전면에 화상으로 인해 피부가 여기저기 당겨지는 흉터가 남았고, 한쪽 귀는 화상으로 녹아내려 제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 탓에 학교에 가면서부터 그이가 받은 마음의 상처는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운동장을 걸어다니면 돌이 날아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것도 삼삼오오로 무리 지어서 돌을 던져대니 저항할 수 없었다.

"어린아이들 시각에서는 제가 특이하게 보이잖아요. 아마 괴물 같았을 테죠. 돌을 던지는 아이는 물론이고 너 때문에 밥맛이 떨어진다, 네 얼굴을 보면 방금 전에 먹은 점심이 다 넘어오려고 한다면서 사라지라고 소리치는 아이들도 있었어요. 어릴 때 친구들에게 그런 식으로 부당하게 당했던 일은 지금까지도 쉽게 잊혀지지 않아요. 학교 다니던 그 시절엔 워낙 소심하고 내성적이라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저 혼자만 힘들어하면서 상처받았거든요. 사춘기 때는 이성에 예민할 때라 혼자서 고민 많이 했어요. 결혼문제나 진로에 대해서 특히 많이 생각했죠. 얼굴을 다치지 않았다면 남들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누리고 나름대로 원만한 인간관계도 가졌을 텐데 얼굴을 다쳤다는 이유로 평범한 부분들을 제가 못하고 그게 굉장히 두렵고 거기서 오는 절망감 때문에 제 자신이 너무 밉더라구요. 자살도 많이 꿈꿔봤고…아무튼 얼굴로 인해서 생활 전반에 다 지장을 받았습니다."

 

활동적인 동생에게 가려져 장남 역할을 해볼 기회 없었다

그이에게 더욱 크게 상처가 됐던 건 가족이었다. 그이는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와 따뜻한 성품을 지닌 어머니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에게 살가운 딸이었던 누나와 워낙 활동적이고 집안의 심부름을 도맡아 집안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동생에게 가리워져 장남의 역할을 해볼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고 그이는 기억한다.

"제가 장남이었지만 동생이 워낙 활동적이고 집안에 심부름은 도맡아 하고 공부도 잘하니까 아버지가 예뻐하셨죠. 제가 할 몫을 어릴 때부터 동생이 다해버렸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서운했던 부분이고 잘못된 거죠. 지금도 가끔 어머니한테 그런 얘기를 해봐요. 혹시 나를 부끄러워했던 게 아니냐고, 내가 부끄러워서 다른 사람들 앞에 내세우지 않았던 게 아니냐고 어머니는 그런 게 아니었다고 말씀하시지만 부모님께 가장 서운했던 게 바로 그런 부분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움츠려 있고 안나오려고 했어도 부모님이 호되게 야단쳐서라도 네가 커서 해야할 일이니까 세상 밖으로 나와야한다고 얘기해주셨으면 좋으련만 부모님은 미처 그 부분까지 생각을 못하셨던 것 같아요."

특히 그이는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이 잊혀지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아버지는 교육열의는 가히 대단했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는 그이에게 의대나 약대를 가는 게 좋겠다고 적극적으로 밀어붙이기도 했다. 얼굴을 다쳤으니 의사나 약사로 자영업을 하면 사람들에게 덜 상처받고 살지 않겠냐는 아버지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공부는 그런 대로 잘 했었는데 학력고사에서 떨어졌어요. 재수하고 우선 목포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지만 아버지의 실망이 아만 저만이 아니었죠. 동생도 삼수를 해서 대학에 갔거든요. 그런 것 때문에 자식들과 갈등이 심했어요. 95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저하고 동생이 번듯한 대학에 입학하는 걸 보시지 못하고 돌아가셨죠. 아버지는 월남특공대 출신으로 대위로 전역하셨는데 완전히 스파르타식으로 교육을 하셨어요. 아버지가 하도 자기방식대로 몰아치니까 그런 강박관념 때문에 집에 들어오기 싫을 정도였으니까요. 워낙 성격이 급한 분이라 스스로 화를 자제하지 못해서 술만 마시면 온가족 괴롭히기 일수였고요."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이의 얼굴이 몹시 불편해 보인다. 긍정적으로 스스로를 다독이며 밝은 삶으로 옮겨가려는 그이건만 이 대목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직업이 사람들 안에 잇는 이야기를 꺼내 듣고 글을 쓰는 일인 것을. 나는 그만 그이의 아픈 기억을 들추어내는 질문을 또다시 던지고 있었다.

 

가족 모두가 아프고, 다치고, 죽고…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저로 인해서 우리 집안이 불행한 집안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결코 아니거든요. 물론 제가 어릴 때 사고를 당한 것이 가장 크게 부각되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저희 가족이, 그리고 제 인생이 제 사고 때문에 불행으로 치달았던 건 아니에요. 사실 저희 집에서 너무 무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거든요.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예요.

제가 다치고 난 후 일어난 후였는데 저는 방안에서 놀고 있었고, 마루에서는 동생이 놀고 있었는데 어떤 할머니가 마당에서 쌀을 씻고 있던 어머니를 보더니 얘기 하나 불 속에 집어넣더니 나머지 아이 또 하나도 들어가게 생겼다고 그러셨대요. 어머님이 너무 놀라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하니까 이 집안에는 귀신이 너무 많아서 어떤 것을 믿어도 소용이 없다고 하더래요. 아무리 근거 없는 이야기라지만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하면 어머니 입장에서는 섬뜩하셨을 거예요. 할머니는 젊은 시절부터 정신질환을 가지고 계셔서 아버지와 날마다 부딪히기 일수였죠. 큰아들인 저는 돌이 되기도 전에 화상을 입었지요. 동생도 어릴 때 뇌막염을 앓은 데다가 2층에서 떨어져 응급실로 실려가기도 했고,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결국 머리 때문에 군대를 면제받았거든요.

누나는 간질을 앓아서 어머님이 목포에서 기차를 타고 광주에 있는 조선대병원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어요.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약을 먹었기 때문에 어머님은 늘 누나에게 건강한 아이를 낳기 어려울 테니 결혼을 하지 말라고 했지요. 하지만 그게 어디 사람 마음대로 되나요?

결국 누나는 연애를 해서 스물네살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뇌가 자라지 않는 거예요. 병원에서는 1년 정도 살다가 죽을 거라고 했는데 7년 동안이나 갓난아기로 누워 있다가 작년에 죽었어요. 누나가 말을 안 하니까 처음에는 죽었다는 사실도 몰랐어요. 나중에 화장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죠. 아버지도 95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속된 말로 완전히 저주받은 느낌이더라구요.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약먹고 자살하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셨거든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두달전쯤 어머니한테 이런 말씀하셨던 게 생각나요. 자네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정신적인 위안이라도 찾지만 난 도무지 이런 가정 속에서 기댈 곳이 술밖에 없었다고요. 가장 입장에서 그런 일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지금 생각해보니 이해가 되기도 해요."

그야말로 그이이게, 아니 그이 가족 모두에게는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가 늘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학창시절 똑같은 교복을 입은 또래 아이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거리를 쏘다닐 때도 그이는 그런 평범한 꿈 한번 꾸어보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만 스며들어가고 있었다.

 

이력서내면 면접시험에서 100% 탈락, 기대와 좌절 수백번 경험해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그이가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소통의 열망을 격려해준 것은 다름 아닌 가족이었다. 특히 어머니와 동생이 보여준 각별한 사랑은 그이를 세상으로 한 걸음 내딛게 하는 큰 힘이 되었다.

98년 대학 졸업을 앞둔 4학년 시절, 그이 역시 다른 학우들처럼 진로문제를 놓고 고심하기 시작했다. 이미 수없이 많은 곳에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았지만 결과는 항상 면접시험 탈락이라는 한가지 이유로 모아졌다. 고민 고민하다가 마지막 방법으로 생각해 낸 것이 얼굴과 상관없이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학원강사, 성우, 방송국PD 등등 닥치는 대로 시험을 보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기대와 좌절을 반복하기를 수백번. 이제 더 이상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해봤다는 생각이 드니까 더 절망스럽더라구요. 그렇다면 내가 이 땅에서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이민이었어요. 영어라면 어느 정도 자신이 있으니까 언어는 크게 문제될 건 없을 것 같았고 무얼 해도 여기보다 낫지 않겠나 싶었거든요. 이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하면서 동시에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게 뭐였나생각해봤어요. 갈 때 가더라도 정말 해보고 싶었던 일에 대해 도전은 해봐야하지 않겠나 싶더라구요."

그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교사자격증을 따려면 교육대학원을 진학해야하는데 대학원 진학을 결정하기에 앞섰다. 과연 얼굴의 화상문제를 어떻게 뛰어 넘을 것인가 하는 거였다. 교원선발시험을 생각해봤지만 그 시험 역시 면접이 포함되어있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사립학교 교사로 채용되는 것이 방법인데 그때 아버지가 일하시던 사립고등학교가 생각났다. 생각 끝에 아버지가 교감으로 일하던 학교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그이를 어릴 때부터 보아왔던 교장선생님을 만나 사정을 이야기하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 까하는 한가닥 희망을 믿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자격도 없이 무작정 자신을 교사로 채용해달라는 게 아니라 대학원에 진학해서 교사자격증을 따면 교사로 임용될 수 있을지 확답이라도 받아두고 싶었던 거였다.

"어머니도, 저도 교장선생님을 잘 알고 지냈거든요. 물론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지만 그대로 꿈을 접어버리는 건 너무 억울하고 속이 상하더라구요. 어머님이 원래 말씀이 없으시고 점잖으신 분이라 남에게 싫은 소리나 아쉬운 소리는 절대 안하시는 분인데 제가 그렇게 재촉을 하니까 이를 악물고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우리 아들이 아시다시피 얼굴에 화상 때문에 취업도 어렵다.

그런데 지금까지 공부한 게 영어고, 스스로 영어교사가 되길 원하고 있다. 자격증도 없는데 무리하게 당장 교사로 채용해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자격증을 받아오면 우리 아이 사정을 고려해주실 수 있는가하고 말이죠. 교장선생님이 한참을 아무 말씀 없이 계시다가 저에게 그러시더군요. 네가 얼굴만 이렇지 않으면 우리 학교에서 교사가 되는 건 문제될 게 없다. 하지만 화상을 입은 네 얼굴을 아이들이 거부할 수도 있고 학부모들이 반발할 수도 있다. 학교의 책임자로서 그런 일들을 감당하기 힘들 것 같다라구요. 물론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고 찾아간 길이었지만 그래도 그냥 거기서 물러설 수는 없어서 제 생각을 말씀드렸죠. 기회도 안줘보시고 어떻게 알 수 있냐,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이 반발하고 안하고의 문제는 내가 하기 나름이라구요. 다녀오면서 속상했지만 후회는 없었어요. 꼭 그렇게라도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 일이 있고 난 뒤 대학원 진학을 포기한 그이는 집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틀어박혀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런 그이의 모습이 안타까웠던 동생은 형의 취업을 위해 발을 동동 굴렀다. 당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동생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형이야기를 하며 얼굴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곳이 없는지 알아보기도 했다. 같은 고향사람인 국회의원의 선거운동원으로 일하면서도 그곳에서 형의 취업문제를 상의할 정도로 동생은 그이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아마 그 국회의원이 공무원시험을 보는 건 어떻겠냐고 이야기를 했었나봐요. 동생이 면접이야기를 하니까 만약 면접 때문에 차별을 당했다고 하면 그건 법에 위배되는 일이니 문제를 좀 더 쉽게 풀어나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2000년 겨울 서울에 올라와 동생과 함께 살면서 학원을 다니면서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기도 했지요. 다니던 학원이 망하는 바람에 어렵게 여러 군데 학원을 옮겨다니면서 시험준비를 했었는데 1년 준비해 시험 한번보고는 접었어요. 동생이 보건복지부에 전화해서 얼굴 전면에 화상이 있는데 면접시험에서 가능하겠냐고 문의를 하니까 된다 안된다는 얘기는 없이 귀밑에 작은 화상이 있는 사람이 공무원시험을 봤는데 면접에서 세 번이나 떨어졌다는 말을 하더래요. 몇 년 동안 준비해 점수로 합격한다해도 면접에서 떨어질 거라면 이걸 왜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동기부여가 안되더라구요."

하지만 시험준비를 하면서 얻은 게 있다면 동생에 대한 믿음이었다.

"지금 동생은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영국으로 떠나기 전에 술을 마시면서 이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어릴 때는 형 얼굴이 남들과 달라서 자기 친구들이 오면 보여주기 싫었대요. 친구들이 무시하면서 놀릴까봐 무섭기도 했다고 해요. 하지만 커가면서 그런 자신이 생각이 형을 더 많이 힘들게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래요. 자기는 형이 얼굴 때문에 사회생활을 못한다 해도 지금까지 끊임없이 도전하며 살아온 형이 너무 좋고 자랑스럽다고 말해주는데 제 마음이 얼마나 따뜻해졌는지 몰라요. 아, 가족이란 게 이런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화상장애, 개인적인 고민에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사회적인 문제로 풀어내고 싶어

사람들은 슬픔이나 좌절을 표현할 때 눈물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그이는 남들 앞에서 별로 울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단다. 저마다 얼굴 생김이 다르듯이 사람마다 마음의 결이 달라서 어려움이나 좌절에 대응하는 방법도 달라야한다는 게 그이의 생각인 듯 했다.

그이는 작년 가을부터 사단법인 한국화상가족협의회에서 자원활동을 하면서 정부과천청사에 가서 복지업무를 하는 실무자들을 만나 화상장애우들의 현실을 알리고 이들이 화상장애로 인해 얼마나 큰 사회적 장애를 받으며 사는 지 알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처음엔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일이라 생각했건만 이런 활동들은 그이에게도 좌절을 삶의 한켠에 접어두고 또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자원활동을 하면서 화상환자수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통계조차 없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장애우들은 부족하나마 정부의 지원이나 혜택을 받고 있으니 이런 것들때문이라도 밖으로 나설 수 있잖아요. 하지만 화상환자, 특히 저같이 안면부장애를 가진 경우는 남앞에 선다는 게 어찌 보면 죽기보다 어려운 일일 수 있거든요. 화상으로 인한 사회적 장애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없을만큼 엄청나죠. 그런 이유로 사회에서 활동하는 화상장애우는 극소수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화상환자들은 가장 절실한 건 무엇보다 수술인데 화상의 경우 기능적인 장애가 없는 경우에는 의료보험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법제도 개선을 하려해도 사람이 모여야 일을 할텐데 우선은 사람이 없으니까 일을 진행하는 게 어렵구요. 지금까지는 화상장애를 개인적인 고민으로만 안고 있었지만 이 일을 하면서 이 문제를 사회적인 문제로 풀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대목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이 사람 더불어 숲이 되기를 원하는 건강한 나무로구나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치고 올라왔다.

신영복 선생의 홈페이지에 가면 가장 눈에 뜨이는 글귀가 바로 더불어 숲이었다. 하나이면서도 여럿이고, 여럿이면서도 하나인 숲 말이다. 키 큰 나무부터 키작은 이끼들까지 서로 햇빛을 나누어 받기 위해 서로서로 빈틈을 메꿔 자리잡은 모습은 가히 예술 아니던가.

그이가 자신의 문제를 자기 안에서 닫아걸지 않고 지금처럼 열심히 뛰어다니며 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더불어 숲이 되길 자청하는 고마운 나무로 비유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넷 취업사이트에 쓰고 있는 취업실패수기로 사람들의 관심 모아

이이의 활발한 움직임에 요즘 한껏 가속도가 붙고 있다. 화상가족협의회에서 활동하던 중 빈곤문제연구소 류정순 소장을 만나게 돼 그곳에서 비상근 간사로 활동하게 됐고, 사회복지관에서 그이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회복지사들도 만났다. 그것이 계기가 돼 지금은 인터넷 취업사이트에 취업실패수기를 쓰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화상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알리고 있다.

"복지관을 찾아다니면서 사회복지사들을 만나 저를 비롯한 화상장애우들의 수술비 후원문제라던가, 취업문제를 상담하기 시작했거든요. 처음엔 별로 성과가 없어서 기운이 빠졌었는데 두달정도 지나니까 전화가 쏟아지더라구요. 그 중에 어떤 사회복지사 분이 자기가 인터넷 취업사이트 인쿠르트에 아는 분이 있는데 한번 만나보지 않겠냐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뜻밖에도 인쿠르트에서 제 얘기를 사이트 안에 있는 커뮤니티라는 공간에 소개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일주일에 두세번정도 일기 형식으로 화상장애로 인해 취업에 실패했던 일들을 올리는 거예요.

인쿠르트 쪽에서는 이번 작업으로 취업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동시에 연말 즈음해서 사이트 안에서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수술비마련 행사를 하겠다고 얘기하고 있어요. 저에게는 기쁜 일이죠. 하지만 제 글이 단순히 저의 수술비를 후원 받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안면부 화상장애우들을 대변해 화상장애를 가진 사람이 어떤 어려움과 차별을 겪으며 살고 있는지 제대로 알려내고 싶은 욕심도 있어요. 인터넷에 글을 쓰면서 새롭게 느끼는 것은 내 안에 이런 당당함이 숨어있었구나 하는 거예요."

글을 올린지 채 한달이 안됐지만 어릴 때 백일장을 휩쓸었던 숨은 저력과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꾸준히 일기를 써온 글발 때문인지 글을 올릴 때마다 조회건수가 천번이 넘을 만큼 그이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다.

그이는 서울생활을 하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발소에 갔다. 얼굴과 귀부분을 가리기 위해 늘 길게 길렀던 그이의 머리카락. 가끔씩 어머니가 정성스레 가위로 잘라주시던 그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 버렸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도 저는 늘 머리를 길게 하고 다녔어요. 부모님께서 담임선생님한테 제 얼굴의 흉터와 녹아버린 귀를 가리기 위해서 머리를 기르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거든요. 나의 치부를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감추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고 싫은 일인지 겪어본 사람은 알 거예요. 사회생활도 해야할테고 그러려면 계속 움추려드는건 저에게도 불리한 일이잖아요. 아직은 모자를 쓰고 다니긴 하지만 언젠가는 모자도 벗게 될 겁니다. 우선은 저부터 달라져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젠가는 제 얼굴이 아닌 능력으로 평가받을 날이 올 거라 믿어요."

사실 스물아홉해를 살아오면서 그이는 세상의 선입견과 폭력 안에서 자신의 본색을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의 본색이 당당함이었음을 발견한 김광욱 씨. 이제 그이에게는 자신에게 맞는 색깔을 입고 자신의 삶을 키워나가는 일만 남아있다.

  

 

 

글 · 사진 이나라 기자(n2906@hanmail.net)

 

 

"지하철을 타면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께서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일어나 다른 자리로 가버리고 만다. 면접만 보면 얼굴에 심한 흉터 때문에 다음에 연락을 준다해놓고서 답을 안해 준다. 장애우도 비장애우도 아닌 우리화상환자들은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다. 전신 85%화상을 입은 사람이 목욕탕에 들어섰을 때 주인이 어디를 들어오냐고 큰소리 치며 내쫓았던 적이 있었다. 마치 무슨 큰 병이라도 옮기는 전염병자처럼 취급하며 문전박대하는 것은 부지기수이고 얼굴을 다친 사람들은 다방에 커피 한 잔 마시러 가기도 어렵다.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하고 스스로가 위축되고 서서히 자신감을 상실하게 된다. 중략 이제까지 소외당하고 외면당해야 했던 화상환자들의 불우한 생활에 이 사회가 관심을 가져주고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밝은 미래를 보여 준다면 지금까지 아파했던 세월을 위로 받을 수 있을텐데."
- 김광욱 씨의 글 화상환자에게 관심을 중에서-
 
 
 
 

작성자이나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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