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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사회복지 관점에서 소외계층 인권을 말하는 연구관 되고 싶어요."

인권위원회 인권연구담당관 안상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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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는 지난 3월 29일 국가인권위원회의 공채 선발자 51명 중 인권연구담당관에 합격했다. 나처럼 공무원 직급에 대해 사전정보가없는 사람들을 위해 잠시 덧붙이자면, 우리 주위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5급 공무원은 집에서 가까운 동사무소에서 만날 수 있는 동장님을 꼽을 수 있겠다.

이상한 일이다. 왜 나는 아직도 이런 편견 혹은 선입관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 교수 같지 않은 교수, 경찰 같지 않은 경찰이란 말이 비난이 아닌 찬사의 뜻으로도 쓰일 수 있는 말이라면, 같은 맥락에서 안상희 씨는 연구원 같지 않는 연구원이다. 그만큼 위엄이나 권위의식과는 멀찌감치 비켜 있다는 뜻이다. 정말이다. 세시간 동안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는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여전히 소녀의 수줍은 열정과 순수를 간직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첫인상을 한 단어로 대변하라고 한다면 고민하지 않고 단박에 겸손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지는…

 

실력은 자신 있었지만 장애우라서 떨어지면 어쩌나 많이 걱정했어요

▲안상희씨
그이와의 인터뷰는 쉽지 않았다. 내 인생은 지극히 평범해서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없을 것 같다며 겸손하게 고사하는 그이를 어렵게 설득해 정한 약속. 퇴근 시간에 맞추어 시청 근처에 있는 인권위 사무실에 찾아갔지만, 요즈음 인권실태조사 준비와 이를 바탕으로 인권침해 기준을 세우고 지침을 만드는 계획을 세우는 일을 진행중인 그이는 개학날짜를 사흘 앞두고 방학숙제를 시작한 아이처럼 정말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다.

두시간쯤을 그렇게 기다렸을까? 너무 미안해하는 그이는 맛있는 저녁을 먹으러 가자면서 활짝 웃어보였다. 그 백만불짜리 미소 앞에서는 내가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화를 낼 수 있을까. 아무튼 그렇게 어렵사리 그이와의 만남은 시작됐다.

그이는 말할 땐 온통 얼굴이 일그러지고, 걸음걸이가 자연스럽지 못한 뇌성마비 2급장애우다. 하지만 자신감 있는 태도와 말투, 환한 표정으로 누구에게나 격의 없이 다가선다. 그러나 그런 그이에게도 작년 한해는 너무도 힘겨운 상처투성이의 시간이었다고 한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장애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경우가 드물게 있었지만, 작년 한해동안 정말 너무 많이 힘들었어요. 장애우복지관과 장애관련단체에 원서를 넣었다가 떨어졌거든요. 서류전형에서는 문제가 없었는데 면접에서 떨어졌어요. 실력으로 봐서는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이 실망하고 상처받았죠. 아무래도 제가 장애우고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받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요. 그때 처음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 나라에선 장애를 차이로 인정하는 게 아니라 차별의 대상으로 분리하는구나라구요. 그래서 인권위에 원서를 넣으면서도 기대를 안했어요. 실력은 자신 있었지만 장애우라서 또 떨어지면 어쩌나 많이 걱정했죠.

우리 나라에 사는 장애우 대부분이 이런 상처를 지니고 살겠지만, 그이 역시 장애우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 동안 수도 없이 많은 기회를 박탈당해왔던 모양이다. 어쨌든 그에게 드디어 뜻을 펼칠 기회가 제대로 찾아왔다.

원칙, 정의, 합리, 이 세 가지가 제가 가장 많이 쓰는 말이에요. 일을 할 때 판단의 기준도 이것이고, 제 삶도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특히 제가 맡은 분야에 전문성이 부족하지 않아야 한다는 제 원칙에 충실할 생각이예요. 요즘 업무에 있어서 제가 신경 쓰는 부분은 동료들과의 커뮤니케이션 문제예요. 아무래도 제가 언어장애가 있기 때문에 제 생각을 얘기하고 피드백을 받는 부분이 어렵거든요. 지금은 이메일을 이용해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긴한데 앞으로 최대한 나의 제한점을 대신 채울 수 있는 기술을 익힐 생각이예요. 브리핑을 할 때 파워포인트를 이용해 빔으로 쏜다거나하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솔직함이겠죠. 약점을 감춘다고 근본적으로 제 장애가 없어지는 건 아닐테니까요. 정말 제가 맡은 일을 잘해내고 싶은 욕심이 있거든요.

그이는 인권연구담당관으로서 전문지식을 발휘하며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의 인권신장을 위해 일하고 싶은 포부를 가지고 있다.

 

어릴적 시사잡지 읽어주던 삼촌 덕분에 사회문제에 관심 갖게 돼

비교적 유복한 집안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난 그이는 연세재활초등학교, 삼육재활중고교, 대구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장애우라고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적성에 맞는 공부를 하고 당당한 사회인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준 가족들 덕분에 그이는 밝고 적극적인 성격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집안이 굉장이 다복해서 어려서부터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어요.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들과 다같이 사는 대가족이었는데 제가 집안에서 처음 태어난 아기이다 보니 특히 귀여움을 받은 것 같아요. 엄마한테 듣기로는 하루종일 사람들에게 안겨있었기 때문에 방바닥에 누을 틈이 없었을 정도 였대요. 제가 몸이 불편하니까 밖에 나가 놀지를 못해 친구들이 자주 집으로 놀러왔는데, 친구들이 쉽게 우리 집에 올 수 있도록 가족들이 알게 모르게 지원을 많이 해줬어요. 그리고 부모님이 나를 학교에 보내줬다는 사실을 늘 감사하고 있어요. 남들이 들으면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는 일은 당연하다고 얘기할지 모르겠지만, 제 입장에서 보면 첫단추를 잘 끼운 거죠. 학교에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내 앞에 있는 기회를 준 것이라 생각해요.

이렇게 집안에서 금지옥엽 크던 그이에게 집 밖에서 겪는 차별은 깊은 상처를 안겨줬다. 사람들은 대개 말이 어눌하면 지능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요. 제가 언어장애와 안면장애가 있거든요. 그렇지만 이런 장애와 지능은 하등 상관이 없어요. 뇌성마비가 정신지체가 아니라는 건 기본적 상식인데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그럴 때면 좌절감이 크게 다가와요. 예전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지금도 가끔 식당이나 상점에서 쫓겨날 때가 있어요.

사람들이 장애우에 대해 편견을 갖는 것은 매스컴 탓도 크다고 지적하면서 그이는 이제라도 매스컴이 그런 부분들을 바로잡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복지를 전공한 탓도 있겠지만 그이는 정말 사회 전반적인 문제에 해박하다. 알고보니 어릴 적부터 신문이나 시사잡지를 읽어주던 삼촌 덕분에 사회문제에 일찌감치 눈을 떴다고 한다.

막내 삼촌하고는 열살 차이밖에 안나다보니 어려서는 같이 놀고 목욕도 하고 그러면서 컸어요. 조금 더 자란 후에는 삼촌에게 여러 가지로 영향을 많이 받았죠. 삼촌은 매일 신문이나 역사소설, 사회과학서적을 읽어줬는데, 간혹 사회 전반적인 얘기를 하면서 밤을 새우기도 할 정도로 저랑 맘이 잘 통했거든요. 막내 삼촌은 장애관련신문사를 운영하고 있어서 지금도 만나기만 하면 둘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어요.

그런 삼촌의 영향으로 그이는 사회학을 전공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졸업후 취업문제를 고려할 때 사회학이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 내린 결론이 사회복지학이었다. 대안으로 선택한 사회복지학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사회복지학을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만큼 사회복지는 그이에게 매력적인 공부였다.

 

사회복지학 공부에 매력 느껴 유학 결심

대학생활 얘기를 꺼내자 컴퓨터만 있었다면 대학생활은 환상이었을 것이라면서 4년의 생활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재미있었던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교수님들게 묻고 싶은 게 있어도 언어장애 때문에 묻지 못할 땐 솔직히 속상하기도 하고, 그때만해도 컴퓨터가 흔치 않은 시절이라 손이 자유롭지 못한 그이가 레포트를 작성하는 일은 쉽지 않아 어려움도 겪었다. 하지만 워낙 사람 사귀길 좋아하는 그이인지라 동기들과 잘 어울려 친구들이 서로 자신들의 노트를 빌려주고 레포트 쓰는 일도 도와줘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사회복지학 공부에 재미를 느낀 그이는 유학을 결심했다.

말로만 보내달라고 하면 안보내줄 것 같더라구요.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내가 유학을 얼마나 원하는지 보여줄 전략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대학 4년 내내 방학마다 영어학원을 다니면서 내가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줬죠.

장애를 가진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는 0.2%라는 수치를 떠올린다면 그 희박한 기회를 갖게 된 그이는 분명 특권혜택을 누린 게 틀림없었다.

그이는 미국 미네소타 대학으로 건너갔다.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지으며 안상희씨는 유학 당시의 어려움을 재미있게 들려줬다.

미국이 장애우 천국이라고들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아니었어요. 완벽한 편의시설과 서비스 등 미국 자국민에 대한 서비스는 완벽했지만 유학생인 제게는 자원이 제한되어 있었거든요. 게다가 장보기, 음식 만들기, 빨래, 청소 등 집안 일도 제가 직접 다 해내야 했어요. 한국에 있었다면 어머니가 대신 해주셨겠죠. 어떤 날은 입을 옷이 없어 세탁통에 넣었던 옷을 다시 꺼내 입기도 하고, 밥이랑 찌개를 일주일 분량만큼 한솥 가득 해 먹으며 버텼어요. 개인적인 삶의 질 측면에서는 한국에서가 낫다고 할 수 있죠. 제 성격이 원래 독립적이긴 했지만 유학생활을 하면서 완전히 독립군처럼 변한 것 같아요.

4년동안 학원을 다니며 영어를 공부했던터라 언어가 크게 문제가 될까 싶었지만 처음 1년간은 강의를 듣고나면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 없어 두통약을 달고 살았다. 남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게 속상해서 기숙사 화장실에서 물을 틀어 놓고 운 적도 많았다. 그이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걸 알고 가족들은 네가 공부를 그만두고 돌아온다고 해도 여전히 너는 안상희 아니겠냐며 귀국하라고 설득하기도 했다.

제가 욕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죽을만큼 힘들어도 그만두질 못하겠더라구요. 어려서부터 나를 믿고 지원해준 가족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도 없었고, 어쨌든 장애우로서 유학을 갔다는 건 어떻게 보면 선택받은 인생이라는 건데 열심히 공부하고 돌아와서 여성장애우의 리더로서 후배들을 써포트해주는 역할을 꼭 해보고 싶었거든요.

의지의 한국인 안상희 씨는 결국 유학을 떠난 4년만에 미네소타대학에서 장애우교육여가활동이라는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95년부터 정립회관 등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장애우교육 관련 서적인 형제자매를 번역하기도 했다.

 

사회복지사의 눈으로 인권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나의 소망

그이가 최근 가장 관심을 갖고 고민하는 부분은 사회복지를 인권담론속에 포함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난 지금도 사회복지를 전공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용적인 동시에 사회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잖아요. 인간에 대한, 사회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하는 한마디로 매력적인 학문이죠. 하지만 우리나라의 사회복지가 지나치게 실천만을 강조하다보니 인간에 대한 기본 이념이나 사회적인 기본철학을 놓치고 가는 것 같아요, 사회복지의 꽃이 실천이라는데 이의는 없지만 필요한 이념들을 놓치고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사회복지도 인권의 관점에서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을 바라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흔히들 생산적 복지라는 말을 많이 쓰죠. 하지만 복지는 시민으로서, 사회인으로서 당연히 누려야라는 권이입니다. 인권에서 얘기라는 사회권이죠. 당분간은 인권의 전문가로서 인권문제를 심층적으로 보려고 노력할거예요. 하지만 그런 눈이 길러지면 사회복지사의 눈으로 인권문제를 바라보게 제 소망이죠. 저의 경험과 지식을 나눌 곳이 학교가 될지, 장애관련단체가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또 어디에선가 열심히 일하고 있을거예요.

이번에 인권위에서 일하게 되면서 수없이 많은 매체에서는 그이를 앞다투어 취재했었다. 장애와 여성이라는 이중적인 차별을 뚫고, 자신의 실력으로 당당하게 인권연구담당관 자리에 섰기 때문이다. 그런 그이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도전의식을 갖기도 하겠지만 그이의 입장에서 보면 처음부터 어느만큼 부담감을 어깨에 짊어지고 출발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이는 우리 사회에서 몇 안되는 여성장애우 리더로 주목받을 테니 말이다.

물론 저의 모습에서 많은 장애우들이 힘을 얻길 바래요.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나를 자연인 안상희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동안은 싫든 좋든 내 이름 앞에는 여성장애우라는 타이틀이 늘 따라 다녔어요. 물론 장애를 숨길 이유는 없지만 내 입장에서는 여성장애우 안상희 보다는 똑똑하고, 능력있고, 인생의 멋을 아는 안상희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인터뷰 말미에 그이가 나에게 “다른 기자들은 다들 왜 결혼을 하지 않았느냐고 묻던데 왜 그런 단골질문을 빼먹었냐”질문을 했다. 올해 나이 서른 일곱된 처녀이니 그런 질문을 지겹게 받았을 것이다. ‘왜 그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곰곰히 생각해보니 결혼을 해본 내 입장에서는 우리나라 여성에게 결혼제도라는 게 불리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별로 권하고 싶지 않은 나의 정서가 반영된 것도 같았다. 그이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지니고 이는 것 같았다.

난 명백한 비혼이예요. 이전에도, 또 앞으로도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사실 우리나라에서 여자가 결혼을 하면 너무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잖아요. 그리고 그런 것들이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요. 난 공부, 일, 놀이, 친구 이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아요. 더군다나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수 있게된 지금 이 순간이 딱 좋아요. 앞으로 해야할 일들과 하고싶은 것들이 산더미 같아서 결혼을 생각할 틈이 없을 것 같네요.

한창 물오른 푸른 나무들을 보니 봄의 한가운데 와 있는 듯 하다. 그가 키우고 있는 희망의 나무 한그루도 이 봄빛으로 말미암아 땅속 깊숙히 뿌리를 내렸으면 하는 소망 간절하다

 

 

글 사진 이나라기자

작성자이나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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