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마을문고 하면서 제 삶이 행복해졌어요 > 세상, 한 걸음


[사람사는 이야기] 마을문고 하면서 제 삶이 행복해졌어요

20년째 마을 금고 운영하는 시각장애우 오윤택씨

본문

전북 김제시 성덕면 남포리에는 우리 나라 최대 규모의 농촌 마을문고인 남포마을문고가 있다. 20여년 동안 장서가 1만 3000권이 넘는 마을문고를 키워온 주인공은 30센티미터 앞을 구분하기 어려운 1급 시각장애우 오윤택 씨. 선천성 각막포도염으로 시력을 잃기 시작한 그이는 초등학교 졸업 후 도시의 노동판을 전전하다가 20여 년 전 허리를 다쳐 고향으로 돌아온 뒤 자신이 가진 것보다 주는 것이 많은 넉넉한 삶을 살고 있다. 84년 마을의 예비군중대 사무실 한켠에서 청소년 공부방을 겸한 마을문고로 시작된 이곳이 장서 규모나 이용률 면에서 전국에서 가장 성공한 마을 문고를 키워내기까지 그이의 삶의 행로를 들여다보았다.

 

보통의 사람에게 마흔이라는 나이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기 시작하는 시기다. 세상살이에 찌들어 적당히 아저씨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나이. 주위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 부끄러움을 잃어 가는 사기. 세상을 바라보는 감수성은 서서히 무뎌지고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점차 전투적인 인간이 되어 가는 게 보통 우리네 삶이다.

▲시각장애우 오윤택씨

그러나 올해로 마흔 살이 된 오윤택 씨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기자가 김제시내에서 20여분 떨어져 있는 남포리에 있는 마을문고까지 찾아오는 길이 걱정되었던지 그이는 마을 청년의 차를 타고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와있었다. 그이와 첫인사를 나눌 때 수줍게 그이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보면서 아, 이 사람에게는 여전히 젊은이의 순수함이 남아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자격지심과 패배의식에 가득차 있었던 청년시절 기억들

남포마을문고가 있는 김제시 성덕면 남포리는 그이의 고향이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원인 모를 선천성 각막포도염으로 시각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시력만 저하된 게 아니라 눈에 통증 때문에 고통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 어린 아들이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니까 어머니는 누가 용하다고 하면 당장 저를 업고 전국에 유명하다는 병원을 찾아다니셨죠. 그때 당시로는 명의들이라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허가도 없는 무면허 한의사들이었던 것 같아요. 아프다고 발버둥치는 아이를 잡아놓고 꼬챙이로 눈에 낀 하얀 막을 긁어내는 게 전부였거든요. 그럼 피가 얼마나 흐릅니까? 고통스러워서 어머니 저고리에 눈을 비벼대서 늘 어머니 저고리는 피얼룩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어요. 부모님께서 고생하시면서 마련해 놓은 전답 다 팔아서 제 치료비를 댔지만 결국 눈도 낫지 못하고 집안 경제력만 어려워 진 거죠. 저희 집이 아들만 둘인데 형도 한쪽 눈에 시력이 나오질 않아서 부모님이 저희 형제 때문에 마음고생만 하시다가 저 세상으로 가셨지요.

어려서부터 유난히 자존심이 강하고 공부 욕심이 많았던 그이는 어머니를 졸라 일곱 살 되던 해 남포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왼쪽은 시력이 전혀 없지만 오른쪽 눈은 각막이 혼탁해져 사물이 흐릿하고 여러 개로 보이긴 해도 마이너스 0.2정도의 시력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 등하교 정도는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눈의 통증이 점점 더 심해져서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14살 되던 해 어렵게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중학교에 입학할 형편도 아닌데다가 어머니가 학교 진학할 돈을 가지고 윤택이 눈을 고치자고 설득하는 바람에 그는 물론 그의 형도 동생의 치료를 위해 학교진학을 포기했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바로 마을에 있던 염전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같은 마을 형들이랑 함께 다녔는데 제가 눈이 잘 안보이니까 형들이 옆에서 늘 도와줬던 게 아직도 고마워요. 염전에서 오륙년 동안이나 일할 수 있었던 건 다 그 형들 덕분이었죠. 하지만 어린 나이에 일을 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더라구요. 아침에 도로가에 있던 염전에서 진흙 뭍은 장화신고 더러운 작업복 입고 일 하다가 말끔하게 중학교 교복을 차려입고 학교 가는 친구들 보면 너무 속상하고 창피해서 숨고 그랬어요. 저도 뭔가를 하고 싶은 의욕은 강한데 시각장애가 걸림돌이 되서 할 수 없는 일 투성이인거예요. 그러니 젊은 혈기에 얼마나 많은 자격지심과 패배의식으로 살았을지 짐작이 되시죠?

중학교 진학까지 포기하며 열심히 일한 돈으로 아무리 용하다는 의원들을 찾아다녀도 눈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질 않고, 하고 싶은 일들은 모두 눈이 걸림돌이 되어 좌절되자 어느 한 곳 마음 둘 곳이 없었다. 더군다나 형은 일찌감치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나간 터라 하루하루 늘어가는 부모님의 한숨을 감당하는 것도 모두 그의 몫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사회에 봉사하는 인생 살기로 결심

그 즈음 그이는 고향에 있어봐야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염전공장 일이나 농사일 뿐이라 우선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서 그때까지 고향에서 지내온 터라 외지에 나간다는 것이 두렵기도 했지만 당시로는 어차피 눈 때문에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없는데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도시로 나갔지만 막상 전문적인 기술이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육체적으로 때울 수 있는 노동일 뿐이었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체력이 좋아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이해를 구해서 힘으로만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그가 도시에서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그에게는 가장 큰 희망이었고 후원자였던 어머니가 갑자기 앓아 누워 그 다음날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스물 두살 되던 해다.

어머니는 오래 전부터 화병를 가지고 있었어요. 아들 둘이 눈 때문에 고생하고 있으니까 평생 속만 끓이셨죠. 그러다 보니 가슴 밑이 늘 아프다고 말씀하셨어요. 저 때문에 고향에 전답까지 팔아버린 후로는 한시도 쉬지 못하고 남의 농사일 거두면서 살아 가셨거든요. 그래서 어머니와의 추억은 모두 고생담뿐이에요. 어렸을 때 저녁 내내 가족들과 손틀로 가마니 짜서 리어커로 싣고나가 팔던 기억, 뙤약볕에도 남의집 농사 허드렛일을 거들러 다니시던 어머니 모습… 그렇게 힘들었던 기억 뿐이라 앞으로 어머니의 고생이 헛되지 않게 뭔가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결국은 그를 향한 끊임없는 사랑과 희생을 보여준 어머니의 모습이 오늘날 가진 것보다 주는 것이 많은 그의 삶의 모습을 만드는 자양분이 되었다.

 

마을문고 하면서 삶이 재미있다는 생각을 처음 했어요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부터 십여년을 외지에서 노동판을 전전하던 그이가 고향인 남포리에 돌아와 마을문고를 시작한 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 2년이 지난 1984년, 스물네살되던 해의 일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뭔가 뜻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긴 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친 생계해결을 위해 노동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힘겨운 육체노동은 급기야 그에게 디스크라는 질병을 가져다주었다. 열네살되던 해부터 염전, 버섯공장, 농사, 쌀배달, 막노동판에 미역공장까지 전전했으니 그의 몸이라고 성할 리 없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눈이 불편하긴 했지만 몸은 참 건강한 편이었는데 갑자기 허리가 심하게 아프니까 세상이 너무 싫고 사람도 귀찮더라구요. 고향집으로 돌아와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텐트를 치고 거의 두달 가까이 지냈어요. 그때가 84년 1월이었는데 한겨울에 어떻게 텐트 안에서 이불 하나로 지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처음엔 세상이 모두 귀찮기만 하더니 한달쯤 시간이 지나니까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데요.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하기 시작했죠. 제가 어려서부터 외지에서 떠돌면서 생활한 탓인지 학생들이나 청년들한테 관심이 많이 가더라구요. 그래서 마을 후배들에게 마을에 사는 학생, 청년들 명단을 뽑아달라고 했죠. 마을에 학생들이나 청년들이 꽤 많았는데도 마을 분위기는 왠지 침체되어 있었어요. 나이만 젊다고 청년은 아니거든요. 청년들이 나이 드신 분들의 잘못된 관행을 답습해버린다면 지역의 청년문화라는 건 살아남기 힘들 테고 그럼 머지 않아 우리 마을에서도 청년들이 다 도시로 떠나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랜 시간 고민 끝에 우선 마을에 건전한 청년문화를 뿌리내릴 수 있도록 청년회와 학생회를 조직하고 이 조직의 거점이 될 수 있도록 마을문고를 개설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어요. 디스크가 제한테는 굉장한 고통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된 거예요. 마음은 가지고 있었지만 먹고사는데 급급해 그런 실천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 시기에 그런 일들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실천하게 된 거니까요.

그이는 뜻 있는 선후배들을 설득해서 그해 6월 100여명의 청년들과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남포청년회와 학생회를 만들었다. 청년회 발족 당시에는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장애우가 무슨 청년회를 조직하고 문고운영을 하느냐고 주위의 비난과 비웃음도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청년회 초대회장이 된 그는 남포초등학교와 김제농촌지도소에서 책과 책상을 지원 받아 불과 사오백권의 책으로 예비군중대본부의 빈사무실을 이용해 남포마을문고를 열었다. 그리고 야간에는 마을문고를 독서실로 개방해 학생들이 언제든 와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나갔다.

그당시 마을문고 독서실은 매일 100여명의 학생들이 이용할 정도로 붐을 이루자, 마을의 대학생들과 현직교사들이 저녁마다 돌아가면서 영어, 수학, 생활한문 등을 가르치겠다고 나서 당시 오지였던 남포리는 향학렬로 뜨겁게 달구어졌다.

밤세워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그이는 하루하루 품팔이로 어렵게 번 돈을 기꺼이 학생들의 간식을 사는 데 주머니를 털어 넣곤 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새벽까지 공부하는 학생들을 관리하다 꼬박 밤을 새는 경우가 태반이어서 불면증으로 고생을 하기도 했고, 끼니도 라면으로 대강 해결하다보니 몸은 점점 힘들어졌다. 그러나 이 대목 이야기를 하면서 마을 한곁이 따뜻해지는지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 입가엔 금새 행복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이에게 그때만큼 행복했던 시간도 없었던 모양이다.

아침에 수도가에 세수를 하러가보면 세숫대야에 물고기가 돌아다니고 가끔은 덜 익은 과일은 가지 채로 꺽어와서 담아놓곤 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동네 아이들이 저 먹으라고 강가에서 물고기도 잡아오고, 과일 서리를 해서 가져다 놓은 거더라구요. 그럴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뿌듯했는지 몰라요. 그런 개구쟁이들이 이제는 청년으로 성장해서 마을문고 터줏대감들이 됐다는 게 대견하고 신기하죠. 삶이 재미있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어요. 몸이 그렇게 피곤해도 게으름 한번 피울 생각이 안들 정도였으니까요.

재미있게 산다는 것. 손에 잡히지 않는 얘기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게을러지고 싶기도 하고 만사가 귀찮아지는 순간도 있을법한데 마을문고를 시작하던 그 무렵부터 지금까지 그이에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는 건 이 일이 분명 그의 삶을 행복하게 하고있기 때문이리라.

 

마을문고 기금 조성해 장학회 운영까지

협소한 공간에서 꾸려가던 마을문고가 90년에는 전라북도와 김제시의 지원으로 마을문고 건물을 신축해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90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이는 아예 마을문고로 거처를 옮겨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보수해가며 마을문고를 활성화시키는데 온 힘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마을문고의 규모가 늘어나면서 문고를 운영하는데 사비를 털어 넣는 것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마을문고 운영이래 처음 맞는 위기였다. 그러나 위기라는 말속엔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듯이 첫번째 찾아온 어려움은 오히려 그이가 마을 주민들과 가까워 질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그이는 우선 마을문고운영기금을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우선은 마을 경로당에 농지를 빌려서 보리갈이를 하기도 하고 마을 청년들과 경운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버려진 쓰레기를 수거하는 과정에서 폐비닐과 농약병들을 모아 팔아서 마을문고 기금을 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가장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96년 한가위 명절부터 시작된 남포대축제에서 마련한 기금이다.

96년 추석부터 남포대축제 라고 해서 도시에서 고향으로 내려온 주민들과 마을주민들이 어우려저 불우이웃돕기 노래자랑도 하고 여러 가지 행사를 3일동안 했는데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렸어요. 이때 처음 만들어진 기금이 350만원이나 됐거든요. 이걸 기반으로 해서 주민들 50여명 참석해서 매년 6만원씩 걷어서 우산 장학회라는 걸 만들었어요. 이 기금은 마을문고 운영비로 쓰기도 하지만 96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집안사정이 어렵거나 모범학생들 20여명에게 20만원씩 장학금을 주고 있어요. 지금은 원금이 천만원이 넘어서 그 이자로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는데 마을 주민들이 남포대축제를 계기로 한결 가까워진 것 같아요. 3년 전부터는 마을문고 기금과 마을 부녀회원들이 음식을 마련해서 남포경로 잔치를 여는데 마을 어르신들은 물론이고 주민들 모두가 참여하는 마을잔치로 자리잡아 참 기뻐요.

 

주민들의 민원 해결사로 통해

그의 활동은 마을문고 운영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이는 청년회 회원들과 함께 농하기에 극성을 부리던 도박을 마을에서 완전히 몰아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마을에서 도박 때문에 가정파탄이 나거나 이웃간에 사이가 벌어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어요. 도박을 근절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청년들과 들고 일어났죠. 한 2년간을 마작이나 화투를 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서 말리고 설득하고 그렇게 한 것 같아요. 처음에는 도박을 하는 어르신들이 몸도 성치 않는 주제에 왜 남의 일에 간섭이냐고 쫓아내기도 하고, 몸싸움도 하고 그랬죠. 감정이 상하기도 했지만 이삼년간 꾸준히 활동하다보니 우리 마을에선 이제 도박이라는 게 아예 없어졌어요. 도박을 말리는 과정에서 감정이 상했던 마을 주민들도 이제는 오히려 고맙다고 말씀 하시더라구요.

그이의 꾸준한 여러 가지 활동들에 신뢰가 쌓인 마을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그이에게로 달려와 상의하기 시작했고, 이제 그이는 남포리의 민원해결사로 통한다.

94년으로 기억해요. 농협 정미소에서 계량조작을 한다고 마을 주민들이 한탄을 하더군요, 농민들에게 불합리하게 저울을 조작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길로 7개월간 끈질기게 민원을 제기한 결과 계량조작 횡포가 없어졌어요. 그 문제를 해결한 게 계기가 돼서 지금까지 꾸준히 마을에서 민원이 생기면 해결하고 있죠.

이후 마을의 1000여명의 농민들은 중간상인들의 계량기조작이나 가격폭락, 선별구매들의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김제농협에서 직접 수매하는 시스템을 갖추어 영세농민들의 수입안정과 지역농민들의 권리 찾기가 가능해졌다.

 97년 여름 그가 막 각막이식 수술 후 퇴원했을 즈음이었다. 혐오공해시설인 대규모양계장 사업계획이 진행중이었다. 이미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동의한 상태였고 허가가 나와있는 상황이 왔지만 길이가 110미터나 되고 100여 동의 양계장이 마을에 들어선다고 생각하니 잠이 오질 않았다. 각막수술 직후여서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해야했지만 무더운 여름 내내 반대성명을 받기 위해 혼자서 발로 뛰며 주민들을 설득하면서 힘겹고 지루한 싸움을 해 양계장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내기도 했다.

99년에는 경지정리 부실공사를 막기 위해 주민감시단을 운영하는 등 스스로 권익 찾기에도 앞장섰다.

농지경리공사는 농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의견이 배제된 채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요. 99년 12월에 남포리에도 농지경리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이때 농민들의 권리를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일곱 개 마을 이장과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서 경지정리 부실시공 주민감시단을 구성했어요, 감사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철근이나 콘크리트 등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거나 허용치를 초과한 불법 건축폐자제를 투입해 지반침하와 농기계사고 발생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리고 도면 설계 상에는 없는 농수로가 만들어진 것도 발견했고요.

그이가 주축이 돼 마을 주민들은 혹시 농지경리공사에 비리나 특혜가 있는 게 아닌지 문제 제기하면서 시정 요구를 했다. 남들이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그이는 이번 일로 인해서 마을 주민들 모두가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스스로의 권익을 지켜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 같아 무엇보다 기쁘다고 했다.

 

정보화시범마을로 선정돼 선진 농촌마을 만드는 게 가장 큰 소망

96년에 각막이식수술을 한 후부터는 눈이 더 안좋아진 탓에 그이는 매일 김제에 있는 안과에 가야한다. 동네에 시내버스가 다니긴 해도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그이가 시내버스를 이용한다는 게 쉽지 않아 차를 가지고 있는 마을 선후배들이 돌아가면서 병원 가는 일을 돕고 있는 형편이다.

전북대병원에서 각막이식수술을 받았는데 실패했어요. 수술을 하기 전에는 현미경으로 안을 들여다봐도 각막이 뿌옇게 혼탁해서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가 없었죠. 그런데 수술하고 나서 현미경으로 정밀검사를 해보니까 뇌와 눈을 연결하는 신경다발이 거의 없답니다. 그게 태어날 때부터 없었다고 하더라구요. 수술 전에 병원에서 성공과 실패할 확률이 반반이라고 얘길 해주긴 했어요. 그래도 조금 시력이 남아있던 눈을 수술했는데 오히려 더 악화가 돼서 그 당시에는 세상을 더 이상 못살 것 같은 생각도 들었어요. 어려서부터 시력저하와 함께 통증을 느끼고 살긴 했지만 수술 후에는 더 힘들어졌어요. 문제는 수술 후유증이 평생 간다고 하네요. 요즘도 눈에 통증 때문에 매일 김제에 있는 안과에 가서 안약 타오고, 치료받고 그래요 제 주머니에는 항상 눈을 닦아낼 수 잇는 깨끗한 손수건과 안약이 있어요. 이게 없으면 밖에 외출을 할 수 없거든요.

기자가 온다고 열심히 청소했을 그이의 방에는 여기 저기 안약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눈의 통증과 힘겨운 싸움을 하면서도 여전히 마을문고의 이런저런 부족한 면을 채워나가느라 자기몸 돌볼 겨를 없이 달려왔을 그이의 지난 시간들을 짐작해보니 마음 한편이 짠해졌다.

책이 만여권, 열람석이 60개를 갖춘 남포마을문고. 그이의 20년 정성으로 만들어진 마을문고는 문화시설이 없는 이 지역에서는 작은 도서관일 뿐만 아니라 문고 내에 있는 마을사랑방에는 대형 텔레비전에 에어콘, 노래방기기 등이 갖추어져 마을 주민들의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마을문고에서는 김제시청과 우체국으로부터 14대의 컴퓨터를 기증 받아 무료로 정보화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반응이 아주 좋다고 한다. 마을의 학생들은 물론 손마디가 굵어진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매일 저녁 찾아와 밤늦도록 컴퓨터 앞에서 씨름을 하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작년 12월부터 체신청에서 강사를 지원 받아서 평일 7시부터 9시까지 마을 학생들과 주민들을 대상으로 정보화교육을 하고 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아요. 어떤 아주머니는 여기서 배운 한글프로그램을 이용해 가족 주소록을 만들었다고 자랑스러하시기도 하고,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기가 무섭게 서로 컴퓨터를 차지하기 위해 마을문고로 달려오죠. 하지만 원하시는 분들에 비해서 컴퓨터가 턱없이 모자라는 형편이에요. 그래서 저희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정자치부에서 선정하는 정보화 시범마을로 김제시의 추천을 받아 정보화시범마을로 선정이 되면 컴퓨터 100여대가 무료로 주민들에게 들어오고, 정보화교육시설이 구축이 되고 저자상거래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4억정도가 투자가 되나봐요. 오는 5월에 선정되는데 그게 선정이 되서 선진농촌마을로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게 요즘 저의 제일 큰 소망입니다.

지금 그이는 마을 청년인 손정권, 서동환 씨와 함께 지내면서 마을문고를 운영하고 있다. 정권 씨와 동환 씨는 마을 문고 지척에 집이 있지만 마을문고를 꾸리면서 혼자 지내는 그이를 위해 이곳으로 올해로 마흔 고개를 넘어선 그는 아직 총각이기 때문이다. 마을문고 처음 시작하던 20대 때부터 평생 이렇게 봉사활동 하면서 혼자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후 자기 혼자 알고 있으면 지키기 어려울 것 같아 주변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독신으로 살겠다고 얘기하고 다녔단다.

외롭진 않아요. 초등학생들 학교 끝나면 인터넷 하러 쳐들어오죠. 저녁시간되면 마을 주민들 인터넷 교육하러 오시죠. 혼자일 때가 별로 없어요. 게다가 우리 마을 사람들하고는 유치원 꼬마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가족처럼 지내요. 밥도 같이 먹고 제가 외출할 땐 마을에 있는 차가 모두 내 자가용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선후배들이 제 발이 되어 주구요. 마을 사람이 아니라 식구 같죠.

결혼은? 글쎄…지금도 마을에 나가면 인사가 결혼 안하냐는 게 인사라서 곤혹스럽고 불편해요. 하지만 정작 저는 너무 오랫동안 혼자서 개방적으로 사는 것이 몸에 익숙해져 있어서 결혼에 대한 적극성이 없어졌어요. 물론 저를 이해하고 같이 봉사활동에 동참할 수 있는 여성이 나타나준다면 모를까 일부러 결혼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독신으로 살아온지 40년. 새삼 결혼이라는 게 절실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자가 그가 얘기 말미에 했던 같이 봉사활동에 동참할 수 있는 여성이 나타나 준다면 모를까라는 부분을 꼬투리 잡으면서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결혼하실 생각도 있으신가보다고 물었더니 그는 천천히 말했다. 이 일이 끊임없는 자신과의 싸움인 것 같다고. 무엇보다 마을 청년들 가운데 버티고 서서 중심을 잡아주어야 하는 일이기에 외롭다고…

왜 안그렇겠는가. 하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주변에 그이의 편인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꾸준히 책을 보내주는 곳이 있어요. 서울에 새마을문고 중앙회, 재단법인 출판금고, 원광대학교 도서관, 솟대문학, 금호문화, 모아미디어, 동네주민들 이 분들이 마음문고 주인이시죠. 또 김제시청 사회복지과와 총무과, 공보실 직원 분들도 여러 가지로 도움을 많이 주셔서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인터뷰를 끝낸 다음날 오후 그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고마웠다는 말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이 더 있다는 것이다. 무슨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 소감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우선 수첩에 그 이름들을 받아 적어 내려갔다.

마을 청년 중에 손정권, 서동환이 저와 함께 살면서 많이 애써주고 있구요. 이밖에도 최연학, 김상철, 반형환, 이노식, 유상훈, 서인철, 손정우, 박상준, 손정인, 전주에서 매일 와서 컴퓨터 점검해주는 인터게이트 송현주 씨한테도 고맙다고 기사에 꼭 넣어주세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내편으로 끌어들이기. 그것만이 자신이 힘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그이의 야무진 욕심이 밉지 않다. 그이가 한 번 씨익 웃고나면 금방 뇌의 화학작용으로 인해 행복에 둘러싸일 것이므로, 그가 사람을 작동시키는 방식은 부드러운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글 사진 이나라 기자

작성자이나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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