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네 사내, 거리로 나가다 > 세상, 한 걸음


[사람사는 이야기]네 사내, 거리로 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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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내가 모여 노점상 일을 시작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시시하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두 명의 장애우가 가족이 없는 상태에서 중증장애우로 살아오면서 겪어야 했던 좌절감과 희망 없음의 상실감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를 한다면, 친구들이 시작한 노점이 결코 하찮은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친구들을 돕기 위해 자기 일 처럼 나선 두 명의 비장애우들을 보는 시각도 그럴 수도 있지 쉽게 치부하고 넘어갈 수만은 없을 것이다. 

 

<"취업이 어려워서 걱정이에요">
여기 네 명의 사내가 있다. 두 명은 장애우이고 두 명은 비장애우다. 그 중에서 두 명의 장애우는 지금 거리에서 그림 액자를 파는 노점상 일을 하고 있다. 한 명의 비장애우는 사회복지학과 학생이고, 또 한 명의 비장애우는 장애우를 대상으로 취업을 알선해 주는 직업재활 상담원이다.
그러면 이들 네 명은 어떻게 만났고, 어떤 인연으로 얽혀있을까?
잠시 엉뚱한 주제지만 중증장애우의 현실, 구체적으로 성인이 된 중증장애우의 취업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우리가 흔히 중증장애우라고 얘기하는 장애 등급 1 2급, 그리고 정신지체나 뇌성마비 장애우들의 취업은 과연 가능할까, 만약 취업이 불가능하다면 성인이 된 중증장애우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물론 언급한 중증장애우 전부가 취업이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중증장애우들의 취업이 힘들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결국 중증장애우들이 온전히 가족의 부담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성인이 된 중증장애우에게 가족마저 없다면 어떻게 될까?
각설하고 이제 네 명의 사내 얘기를 해보자.     
먼저 김성오씨, 올해 스물다섯살인 이 청년은 뇌성마비 1급 장애를 가지고 있고,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고 있다. 중증장애를 가졌는데, 지금 김성오씨에게는 가족이 없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빚을 많이 져서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살았던 기억이 있어요. 제가 다섯 살 때 시립아동병원에 보내졌는데, 그 때 기억에 따르면 부모님이 호프집을 하고 있었어요. 닭도 팔고 맥주도 팔고 그랬는데, 부모님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흐릿해요. 살던 동네 이름도 모르고요. 아동병원에서 살다가 바로 주몽재활원으로 왔어요. 일곱 살 때 왔는데, 그때부터 재활원에서 자란 거죠. 재활원에서 중 고등학교 과정 마치고, 1년 직업전문학교에 가서 전자기기과에서 납땜하는 기술 배웠어요. 취업이 안돼 다시 재활원으로 왔는데, 그때 시설에서 계속 생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재활원에서 나오지 않으면 다른 시설로 옮겨지게 되거든요. 성인 장애우 보호시설인데, 지방 외진 곳에 있어요. 그런 시설에는 가기 싫었어요. 저는 다 생각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시설에서 감옥 같은 생활을 하며 남은 생을 마치기는 싫었어요. 사람들하고도 많이 접하고 싶었고, 그래서 자립생활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재활원에서 자립생활 프로그램을 실시했어요. 그래서 지원해서 시설을 나오게 된 거죠. 재활원에서 근처에 월세방을 얻어줘서 지금 친구 두 명과 같이 살고 있어요. 생활은 기초생활보호대상자에게 주는 정부 생계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데 한 달에 30만원 가량 나와요. 그 돈으로는 저축은 꿈도 꿀 수 없고, 그래서 취업하기 위해 많이 애를 썼는데, 그 동안 장애우 취업박람회는 모두 가보고, 고용촉진공단에도 여러 번 가보고 했지만 취업이 안됐어요. 작업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단순직은 가능할 것도 같은데, 취업이 안돼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걱정이에요."
김성오씨와 같이 살고 있는 박계형 씨도 가족이 없다. 올해 스물세살인 계형 씨도 성오 씨와 같은 뇌성마비 1급 중증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그나마 나은 것은 성오씨와 달리 걸어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저도 고아예요. 주몽재활원에 들어온 게 아홉 살인데, 그 전에는 시립아동병원에 있었어요. 부모님은 전혀 기억이 없어요. 재활원에서 고등학교 과정 마치고 성분도복지관에 가서 컴퓨터를 배우게 됐는데, 몇 개월 하다가 나왔어요. 선배가 취업을 시켜준다고 해서 나왔는데, 취업은 아니고 서울 면목동에 있는 장애우 공동체에 가서 화장지 파는 장사를 했어요. 그런데 착취가 너무 심해서 몇 개월 못 있고 뛰쳐나왔어요. 화장지를 파는 대로 월급을 주는데 떼 가는 게 너무 많았어요. 화장지 한 묶음 팔면 개당 1천5백원 남는데 한 달에 15만원 기숙사비 내고, 또 생활비도 따로 내야 했어요. 그래서 한 달 꼬박 일해도 20만원 벌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만두고 마침 성오형이 같이 살 룸메이트를 구한다고 해서 성오형과 같이 살게 됐어요. 저도 정부에서 주는 생계비에 의존해서 살고 있어요. 한 명이 한 달에 15만원 씩 내서 월세 20만원 내고, 나머지 25만원으로 쌀 사고 전기세 내고 살아요. 나머지 돈으로 핸드폰 요금 내고, 친구들 만날 때 얻어먹을 수만은 없으니까 한 번씩 햄버거라도 사면 남는 돈이 없어요. 그래서 취업하려고 채용박람회도 쫓아다니고, 면접도 몇 번 봤지만 취업이 안됐어요. 취업이 안되면 장사하려고 마음먹고 있지만 여건이 안돼서, 저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걱정이에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생겨서 좋아>
이제 네 명의 사내 중 나머지 비장애우 두 명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사재광씨, 올해 스물여덟살인 이 청년은 늦깎이 사회복지학과 대학생이다. 내년 졸업을 앞두고 지금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직업재활팀에서 직장체험을 하고 있다.
"성오 계형이를 만난 것은 97년 3월이에요. 제가 97년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동양공전에 있는 한나래라는 자원활동 동아리에 가입해서 활동했어요. 그 동아리가 하는 일이 매주 토요일 주몽재활원에 가서 목욕시켜주고 놀아주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두 친구를 알게 됐는데, 학교에 다니던 2년 동안은 매주 빠짐없이 재활원에 갔는데, 졸업하고나서는 취직을 해서 자주 못 갔어요. 그래도 졸업생들 중에서는 제가 자주 가는 편이었어요. 보통 동아리 활동을 학교 다닐 때는 열심히 하지만 졸업하면 뜸하거든요. 제가 재활원에 자주 간 것은 장애우 친구들에게 정이 들었기 때문이죠. 특히 제가 알고 있는 친구들이 나이가 들어서 시설을 나오게 되니까 걱정도 돼서, 친구들이 시설에 있을 때는 직원들이 돌봐주지만 나오면 돌봐줄 사람이 없잖아요.   
실제로 친구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많이 아파요. 지금은 큰 문제가 없지만 친구들의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으니까 걱정이 되는 거죠. 그래서 장애우들이 시설에서 나와서 힘들어하는데,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을까 해서, 생각 끝에 사회복지에 한 번 뛰어들어 보자 고 결심하고 작년 7월에 평택대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했어요. 제가 동양공전 나와서 바로 엘지전자에 취직했는데, 연봉 2천3백만원을 받았어요. 일은 재미있었지만 제가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죠. 그래서 과감히 뛰쳐나와서 사회복지학과에 갔어요. 지금 친구들 보면서 안타까운 건 아까도 말했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저축한 것도 없고,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나, 걱정뿐이에요. 그리고 친구들이 사회를 너무 모른다는 것도 안타까워요. 시설이라는 온실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물론 욕구도 있겠죠. 울타리안에만 갇혀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까 돈 쓰고 싶은 욕구도 생기겠지만, 제가 보기에 돈을 너무 헤프게 써서 가끔 잔소리할 때도 있어요.
제가 연구소에 실습 와서 직업재활 파트 선택한 것도 친구들 때문이에요. 연구소에 실습하러 오면서 친구들한테 내가 이런 곳에서 실습하니까 취업은 걱정 마라고 큰소리 쳤거든요. 그랬는데 계형이를 데리고 이리저리 면접을 보러 다녔는데 취업이 안 되는 거예요. 중증장애우라 힘들다는 거죠. 더구나 장애우 표준사업장이라는 장애우들만 일하는 곳에서조차  중증장애를 가졌다고 거부하니까, 더 이상 갈곳이 없구나, 절망을 느꼈죠. 성오도 취업을 시켜준다고 큰소리 쳤는데, 성오는 계형이보다 장애가 더 심해요. 휠체어를 타고, 손도 잘 사용하지 못하고, 성오보다 장애가 경한 계형이가 취업이 안되는데, 성오는 아예 취업이 불가능할거라고 생각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 연구소 홍 간사님이 노점을 해보자고 제안을 한 거죠.
지금은 자원봉사 개념을 떠나서 친구들과 형 동생이 되어버렸어요. 친구들에게 무슨 일 생기면 쫓아가고, 집이 파주지만 거리가 먼 거는 생각 안 해요. 제가 회사 다닐 때 밤늦게까지  일하고 재활원 찾아가서 친구들 만나고 돌아가면 웬지 마음이 뿌듯하고 피곤함이 없어졌던 기억이 있어요. 그래서 친구들 곁을 떠나지 못하나 봐요. 내년 8월이면 저도 사회복지사가 되는데, 앞으로 시설에서 나오는 친구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주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올해 서른여덟살인 홍정표씨가 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직업재활팀에 있는 이 사내, 장애우 취업 관련 일에 몸 담아온지 올해로 7년째다. 96년 7월 노동부 산하 서울 인력은행에서 장애우 취업 관련 일을 처음 시작했고, 작년 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같은 일을 계속 하고 있다.
"올해 7월에 재광씨가 실습을 하러 왔는데, 자기가 아는 동생이 있는데, 취업을 시켜줘야 하는데 좋은 자리 있느냐고 물어보는 거였어요. 그때는 계형씨만 얘기했어요. 그래서 장애가 어떻게 되냐고 물어보니까 1급인데 손도 사용할 수 있고, 컴퓨터도 잘 다루고, 걷기도 한다고 그랬어요. 그러면 한 번 데리고 와봐라 그래서 계형씨가 왔는데 막상 보니까 장애가 너무 심했어요. 제가 몇 군데 회사 데리고 가봤는데 면접을 보는 과정에서 걸음걸이가 많이 흔들리니까, 또 계단 같은 데를 잘 못 내려가니까 면접 초기에서 취업 거부를 당했어요. 처음 간 곳은 장애우 표준사업장 핸드프리 생산하는 곳인데 거기 가서 안됐고, 트로피 상패 만드는 회사에서 워드 치는 일이 있다고 해서 가봤는데 역시 거부당했고, 홈페이지 관리 회사도 취업이 안됐어요. 그 다음에는 계형씨가 아무 일이라도 하겠다고 해서 일단 서 있는 건 되니까, 평소 알고 지내는 장애우에 대한 애정이 있는 개포동 사랑마트라는 슈퍼마켓에 계산원으로 취업시키려고 데리고 갔는데 거기도 면접과정에서 안 됐어요.
그런데 사랑마트에 가서 보니까 그 앞에 노점이 많더라고요. 제가 알고 있는 장애우 고용 사업장 중에 경기도 부천에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분이 사장으로 있는, 그림사랑이라는 그림 액자를 만들어서 파는 사업체가 있었어요. 문득 그 곳이 생각났고, 그림을 받아다가 노점을 해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사랑마트 사장님에게 부탁했죠. 밖에 노점들이 많은데 두 세평 임대해 줄 수 없느냐고 부탁하니까 사장님이 가능한 부분이니까 검토해보자 그래서 하기로 됐는데 문제는 친구들이 집이 먼 상태에서 상품을 가지고 가서 팔고 다시 집에 가져간다는 게 도저히 안 된다는 거였어요. 상품을 보관할 데도 없었고, 그래서 고민 끝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앞에서 노점을 하기로 한 거죠. 나도 있고 재광씨도 있으니까 가능할 것 같아서 시작해보기로 했어요. 그런데 또 하나 문제는 장사 밑천이 전혀 없다는 거였어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돈이 없으니까 후불제로 하기로 하고 부천에 가서 그림사랑 사장님과 부탁을 했죠. 한 달 단위로 물건을 가져다가 팔고 판매 금액을 넣어주는 걸로 합의보고 노점을 시작하기로 했어요.
노점 하기 전에 먼저 파출소 찾아가서 얘기했어요. 우리가 이런 장사를 하려고 하는데 봐달라고 하니까 파출소에서는 괜찮다고 했어요. 동사무소 가니까 우리는 눈감아줄 수 있다. 그러나 민원이 들어오거나 구청에서 단속 나왔을 때는 우리가 딴 소리 할 수 있으니까 알아서 눈치껏 해라 그러더라고요. 구두로 허락 받은 셈이죠. 구청에는 얘기하지 않고 노점을 시작하게 됐어요. 노점을 시작하면서 성오씨와 계형씨에게 우리는 장사 아이템과 장소 마련을 도와준 거니까 돈과 관련해서는 알아서 하라고 얘기했죠, 그림을 걸 앵글 사고 액자 담아줄 봉투를 사는데 18만원이 들었대요. 지금 일주일 장사했는데 그 돈 다 갚았어요. 그리고 남은 순 수입만 36만원이라고 친구들이 좋아하고 있어요. 제가 도와주는 것은 차를 몰고 부천에 가서 물건을 실어다 준 게 두 번 이고, 한 번은 재광씨와 제가 밀대 가지고 가서 전철 타고 물건을 실어온 것 정도예요. 일주일동안 친구들과 두 번 술을 같이 마셨는데, 친구들이 먹자고 해서 마셨어요. 왜 먹자고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처음 순 수입으로 6만원 벌었을 때 두 번째는 8만원 벌었을 때 굉장히 좋아하는 거예요. 오늘은 너무 기분이 좋다고 그래서 마셨어요. 이 친구들이 상일동에 사는데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서 여기까지 오는데 두 시간이 넘게 걸려요. 지하철 타고 오는데 리프트를 타야하니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예요. 친구들 말을 들어보면 장사를 시작하지 않았을 때는 귀찮으니까 매일 라면만 먹고살았는데, 장사를 시작하고나서는 꼬박꼬박 밥을 먹는대요. 그리고 무엇보다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생겨서 좋다고 말을 해요.
솔직히 말하면 친구들과 노점을 하면서 조금 부담됐던 건 사실이에요. 나도 내 일이 있는데, 그리고 장애우들을 취업시킨 실적도 있어야 하는데 노점이 실적으로 잡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전적으로 매달릴 수는 없는데, 그렇지만 당장 물건을 갖다줘야 하니까 물건 갖다주는데 반나절 시간을 빼앗겨 버리니까 아무래도 신경 쓰이죠. 그리고 단속 나왔을 때, 그 동안 구청에서 세 번 단속이 나왔는데, 처음에는 하지 말아라 두 번째는 다음에 또 하고 있으면 우리가 끌고 가겠다. 세 번째는 하지 말라는데 왜 자꾸 하고 있느냐, 그러면서 신경질 내고 갔대요. 만약 액자를 구청에서 들고 가는 상황이 벌어지면 그 때는 구청 찾아가야 하는데,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난감하죠. 어쨌든 지금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데 바자회라든가 벼룩시장을 찾아가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고, 친구들에게 물건을 갖다주는 것은 재광씨가 운전면허 시험을 봐서 해결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성오 계형 씨에게 바라는 건 현재 친구들이 처한 상황이 열악한데 지금보다 나아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기존에 갖고 있던 내가 정말 취업이 안 된다. 나는 이거밖에 안 되는 인간이다. 나는 부모도 없고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내가 지금 일을 하고 있다. 나도 내 힘으로 돈을 벌고 있고, 누구한테 원하는 것을 사줄 수도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궁극적으로는 이 일이 친구들이 원하는 창업을 하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죠."

<답이 없는 취업, 그렇지만 포기할 수만은 없어>
네 사내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다. 결국 네 사내가 모여 노점상 일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이 결론이 시시하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글로서는 채 표현 못한 두 명의 장애우가 가족이 없는 상태에서 중증장애우로 살아오면서 겪어야 했던 좌절감과 희망 없음의 상실감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를 한다면, 친구들이 시작한 노점이 결코 하찮은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친구들을 돕기 위해 자기 일 처럼 나선 두 명의 비장애우들을 보는 시각도 그럴 수도 있지 쉽게 치부하고 넘어갈 수만은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얘기지만 이 지면을 빌려서 얘기하고 싶은 문제 제기는 두 가지다. 먼저 시설에서 나온 장애우들을 위한 대책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성오씨와 계형씨를 연결 지어서 살펴보면, 현재 주몽재활원이 있는 서울 상일동 근처에는 성인이 돼서 재활원을 나온 10여명의 중증장애우들이 각각 방을 얻어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기초생활보호대상자로 정부에서 주는 생계비에 의존해 근근히 살고 있다. 그것 뿐 다른 대책이 없다. 장애가 심해 취업이 안 된다면 그리고 돌봐줄 가족이 없다면, 정부 차원에서 먹고 살 수 있게 생계를 책임져 줘야 도리일 것이다. 그렇지만 정부는 한 달 30여만원의 생계비만 지급하고 나몰라라 하고 있다. 이들 가족이 없는 중증장애우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걸까? 재활원이 한 두 군데도 아니고 전국에 수 백개의 재활원이 있는데, 그러면 가족이 없는 중증장애우는 모두 다른 시설로 보내져야만 하는 것일까, 그래서 평생 시설에서 살다가 삶을 마쳐야 하는 걸까? 이건 당사자에게는 너무 잔인한 일이 아닐까? 누군가 이 물음에 답해 줬으면 좋겠다.
두 번째 문제제기는 현재 장애우를 대상으로 취업 알선을 해주고 있는 기관과, 취업 알선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직원들의 중증장애우 취업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물론 정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직업재활사업이 얼마나 많이 장애우를 기업에 취업시켰느냐는 실적을 우선 따지고 있기 때문에, 기관과 담당자들이 취업이 비교적 용이한 경증장애우 취업 알선에 주력하고 상대적으로 중증장애우 취업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중증장애우 취업이 어렵다고, 취업을 하기 위해 찾아온 장애우에게 "취업이 어려우니 기다려 보라"고 말 한마디만으로 상담을 마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닐까, 그 장애우가 어떤 환경에 처해있는지, 정말 생계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지는 않는지, 취업이 어려우면 다른 방법은 없는지, 머리를 맞대고 같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장애우 취업알선을 담당하고 있는 기관과 직원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까,
노파심에서 하는 얘기지만 지금 많은 중증장애우들이 정작 취업이 안 되는 것 보다 기관과 담당자들의 장애우를 대하는 고압적인 자세에 깊은 상처를 입고 있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결론을 내리면 중증장애우들 취업과 관련해서는 답이 없다는 말이 정답인 것 같다. 그만큼 취업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중증장애우들도 삶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젠가 미래에 정부에서 대책을 마련해 주겠지만 기다리는 기간 동안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야 한다.
한 점 오해가 없기를, 중증장애우들 모두가 노점을 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지금은 일 보다는 중증장애우들 문제를 같이 고민하고 함께 문제를 풀어 가는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글 사진 이태곤 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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