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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저는 서른 살에 세상에 나왔어요"

충남예대 수석 졸업한 억척장애우 고정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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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저는 서른 살에 세상에 나왔어요"

 

충남예대 수석 졸업한 억척장애우 고정심씨

 

  올해도 대학을 졸업한 장애우의 이야기들이 신문이나 TV를 장식하고 있다. 장애우들의 대학졸업은 여전히 신기하고 대견한 일로만 느껴지는 것일까. 하기사 우리나라처럼 장애우들이 대학을 마칠 정도까지 공부하기 힘든 나라도 없기 때문에 장애우들의 졸업장이 더 의미있고 대견한 일로 느껴지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어려운 대학공부를 수석으로 마친 42살의 억척 장애우가 있다. 바로 고정심씨다. 두 살바기 아들까지 두고 늦은 나이에 충남대의 예술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것이다. 물론 그렇게 힘들게 졸업장을 고정심씨 혼자만의 힘으로 얻어낸 것은 아니다. 서른이 넘은 딸의 공부를 위해 허리까지 휘어버린 고정심씨의 어머니가 있었기에, 이제는 어머니 대신 그녀의 다리가 돼주는 남편이 있었기에 그 모든 일이 가능했다. 그러나 항상 누군가의 도움으로 무언가를 해야하는 그녀에게 그건 도움이라기보다 희생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절절한 마음고생을 해야 했던 그녀에게도 쉬었던 시간은 아니었다.
  고정심씨가 장애를 갖게 된 건 다섯 살 때다. 밥을 먹고 체해 고열을 앓다가 그 지역에 퍼지기 시작한 소아마비에 걸려버린 것이다. 그 후로는 계속 병원신세를 져야 했고 수술도 여러 차례 받았지만 몸 상태는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동생들의 숙제를 대신해 주는 것과 손장난으로 시작한 그림 그리기뿐이었다. 그림 그리기래 봤자 주위에서 본 그림들을 그대로 베껴 그리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래도 똑같이 그려진 그림을 볼 때면 많은 위로가 됐다. 주위 사람들도 그녀가 그린 그림을 보면 칭찬을 해주었다. 잘 그린 그림은 아니어도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어린애가 그림이라고 그려놓은 것이 기특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칭찬들이 지금의 그녀를 만들어갔다.
  고정심씨는 초등학교에도 입학할 수 없었다. 대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계속되는 병원생활 동안에도 그림을 그렸고 꾸준한 연습으로 주위 사람들도 잘 그렸다고 칭찬해 주는 날이 많아졌다. 31살이 되던 해에는 그 동안 그린 그림을 가지고 미술대회에 나갔다. 그녀가 대회에 출품한 그림은 동양화였다.
  어렸을 때 병원 벽에 있던 동양화를 그린 적이 있었는데, 그 그림을 보며 어른들이 한 칭찬에 신이나 동양화를 주로 그렸던 것이다. 아프기만 한 자신이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그림이었고, 동양화를 본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 같지 않다는 평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그녀에게 그림대회의 입상은 많은 용기가 되었다. 그리고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리던 그림이 서서히 그녀의 삶을 변화시켜 나갔다. 그림대회 심사위원은 그녀에게 어느 대학에서 그림을 배웠냐고 물었다. 초등학교도 못 가본 그녀에게 대학은 꿈도 못 꿔볼 일인데 말이다. 사정이야기를 들은 그 사람은 그녀에게 전문가로부터 수업을 받아보라고 권했다. 자신은 서양화가 전공이라 고정심씨에게 그림을 가르쳐줄 수 없지만 동양화가를 찾아가 전문적으로 사사를 받으면 그림이 더욱 좋아질거라는 말을 하면서, 제도교육이란 것과는 담을 쌓고 지내던 그녀에게 그건 새로운 희망이었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동생들의 숙제를 대신 해주기 위해 동생들에게 물어가며 배운 것이 고작인 그녀에게도 선생님이 생길지 모른다니 정말 꿈같은 일이었다.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연필 한 자루 잡는 것, 매일 매일의 등하교 길을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걸어보는 것이 소원인 사람이 있다. 그건 고정심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제 자신에게도 선생님이 생기고 수업을 받을 수도 있다니…. 그건 삶의 새로운 시작이기도 했다.
  어렵게 수소문을 해서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동양화가 한 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분은 고정심씨에게 장애가 있다는 말을 듣고도 흔쾌히 승낙을 하셨고, 한 번 찾아오라고 하셨다.
  "가슴이 설레서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어요. 여태까지는 남들이 그린 그림을 베껴 그리는 수준이었지만 이제 선생님한테 정식으로 배우고 나면 나도 제대로 된 예술가가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꿈을 꾸면서 선생님을 찾아간 것이 봄이었다. 그런데 그 동양화가는 그녀를 만나보고 장애가 심한 걸 보고 새삼 놀랐던지 확실한 대답을 피했다. 지금은 바빠서 누구를 가르칠 시간이 없으니 얼마쯤 후에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고정심씨는 그렇게만 믿었다. 유명한 분이고 하니 당연히 바쁠거라고, 그러나 연락을 하고, 다시 연락을 해도 언제 오라는 흔쾌한 승낙이 아니라, 다시 전화하라는 소리뿐이었다. 그러다 "이 사람이 나를 가르칠 마음이 없구나,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짐작이 틀리지 않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된 건 가을이 돼서였다.
  "화가 났어요. 차라리 나를 처음 봤을 때 가르치기 힘들겠다고 얘기했으면 일 년이 다되는 시간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잖아요. 그리고 공부를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았을 거구요."
  그 동양화가의 집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고정심씨와 어머니는 한참을 울었다. 모든 것이 서럽고 힘들게만 느껴졌다.
  "나중에는 오기까지 생기더라구요. 그래 당신한테가 아니더라도 꼭 그림을 공부할테니 두고 봐라, 그래서 꼭 보란 듯이 내 모습을 보여주고 말테다 하고 말이에요."
고정심씨는 어머니와 안가본 곳이 없다. 시청에서 운영하는 야학에도 가보고 공부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워든지 알아봤다. 그런데 어느 곳에서도 그녀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초등학교 교문도 못가본 고정심씨의 학력도 문제였지만 그녀를 보면 다 고개를 흔드는 것이다. 보통 사람도 매일 나오기가 힘든데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수업을 듣느냐는 것이었다.

  맞는 말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고정심씨는 초등학교 졸업시험을 보기로 하고 독학으로 공부를 했다. 그리고 가을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험을 봤다. 워낙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시험이 덜컥 붙어서 초등학교 졸업장을 따게 됐다. 그제서야 고정심씨에게도 자신감이 생겼다. "하니까 나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처음엔 고정심씨가 공부하는 걸 반대하셨던 아버지도 기뻐해 주셨다. 힘든 몸에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마음에 상처만 입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래도 뭔가를 해냈구나 하는 생각에 자랑스러운 생각마저 든다고 나중에서야 고백을 하셨다.

  "시험장에서는 엄마 생각이 많이 났어요. 그때 마포에 있는 경수중학교에서 시험을 봤는데 엄마가 학교 옆에 있는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계셨거든요. 엄만 항상 그런 모습이셨어요. 그때 이후로 내가 공부하고 있는 교실 밖에서 언제나 기도하고 계시는 거죠. 자식 몸이 불편하게 어머니 잘못도 아닌데 말이에요."

  공부를 시작해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갖기까지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어머니 등에 업혀 하루도 빠짐없이 학원에 다녔고 검정고시를 준비할 땐 학원 근처에 어머니와 둘이 자취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막상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증이 생겼는데도 고정심씨를 받아줄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의 어머니가 한 고생은 말로 다 못한다고 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보내려고 어머니는 딸을 받아줄 만한 대학은 다 다녀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언제나 한 가지였다. "따님의 재능은 아깝지만 저희 학교에는 장애우를 받아줄 만한 시설이 없습니다." 서로 짜기라도 한 듯이 똑같은 말들이 돌아왔다. 입학만 시켜주면 다니는 건 알아서 하겠다고 사정도 했지만 안타까움과 분노만 더하게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매번 거절을 당하면서도 단념을 못하셨다.

  그 결과 어렵게 찾아낸 곳이 충남대학교였다. 서울을 빼고 고정심씨가 다니기에 가장 편한 곳을 찾다보니 충남대학교를 알게 된 것이다. 편의시설은 없지만 어렵더라도 다니겠다면 입학을 받아들여 준다고 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동양화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고정심씨에게 충남은 낯설고 어색한 곳이었다. 항상 어머니가 옆에 계셨지만 수업시간이나 강의 중간중간의 쉬는 시간에도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로선 당혹스럽기만 했다. 그렇게 힘든 학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이귀동이라는 남성이 그녀를 찾아 충남까지 내려왔다.
지금의 남편이 된 이귀동씨를 알게 된 건 검정고시학원에서였다. 고정심씨보다 11살이나 어렸던 이귀동씨와는 누나 동생하면서 지냈었다. 고정심씨의 성격이 밝아 사람과 만나기를 좋아하기도 했고 그런 그녀가 편해 이귀동씨는 자주 찾아와 이야기를 하며 지내다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된 것이다.

  "공부도 안돼 힘들어 할 때 이 사람을 봤어요. 항상 같은 시간에 하루도 빠짐없이 오는 것을 보면서 안됐다는 생각도 들고, 저렇게 힘든 몸으로도 공부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유심히 지켜보다 친구가 되자고 했죠…. 충남까지 찾아갈 땐 "이 여자가 내 여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죠. 옆에서 힘이 돼주고 싶었습니다. 저도 어려운 형편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려운 사람끼리 도우면 살자는 생각도 들었구요."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고정심씨는 장애우인데다 11살이나 연상이었기 때문이다. 이귀동씨를 아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결혼을 말렸지만, 고정심씨 집에서도 반대를 했다. 멀쩡한 남의 집 사람을 데려다 고생시킬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고정심씨의 어머니는 그녀가 학교를 졸업하면 같은 장애우끼리 결혼시킬 계획이었다고 했다. 그럼 서로 도와주며 잘 살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두 사람은 부모님께 열심히 노력해 잘 살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고 결혼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두 살 난 아들, 상준이의 재롱을 함께 지켜보는 평범한 행복이 감사하기만 하다.

  요즘은 얼마 전에 안양에 개원한 학원 때문에 바쁜 나날들을 보낸다. 아직 어수선한 학원 정리도 해야 하고, 홍보도 해야 하고, 집에 있는 2살 난 아이도 눈에 걸리고, 정말이지 마음 쓸 일은 많기만 해, 힘들었던 옛날 같은 시절이 다시 시작된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도 지금은 희망이 있어서 좋다. 남들보다 많은 노력을 해야 하지만, 노력만 하면 어렵더라도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고정심씨는 학원이 자리를 잡는 대로 대학원에 가려고 계획 중이다. 홍익대학교에 새로 생긴 미학과에서 공부하고 싶어서다.

  "어떻게 한 공분데요, 계속 해야죠. 대학생활 동안 임신을 했을 때였어요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도 미안한데 남편마저 일을 나간 날이 제일 힘들었어요. 보면 도와주지만 임신까지 해서 업기도 불편한데 날을 고생시킨다는 게 미안하잖아요. 그래서 같은 반 친구들이 다 가고 나면 엄마와 뒷계단에 신문지를 한 장씩 깔로 교실을 내려왔어요. 엄마를 붙잡고 계단 하나하나를 울면서 말이죠."

  지금도 그때를 얘기하면 눈가에 눈물이 글썽해진다. 그러나 이내 웃는 얼굴이 된다. 어둡고 칙칙한 것보다는 아름답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그녀의 밝은 성격 때문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어둡고 긴 터널을 무사히 통과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가 더해져, 그녀는 이제 아주 밝은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장애우들이 이젠 밖으로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은 장애우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 모습에 관심이 없어요. 저도 서른 살이 넘은 나이에 세상에 나왔어요. 겁도 나고 의기소침하기도 했지만 그런 내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안보이는 것 같더라구요. 세상은 방안에서 볼 때보다 힘들고 어려운 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내 모습에 자신을 갖고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죠. 자기의 모습을 싫어하고 사랑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사랑해 주겠어요?"

  고정심씨는 오늘도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은 4층 학원을 오르내려야 한다. 남편 등에 업혀, 남편의 몸이 움직일 때면 그녀도 같이 흔들리며 계단을 하나씩 올라갈 것이다.

그렇게 앞으로의 어려움도 헤쳐나가야 한다. 그리고 또 꿈을 꾼다. 고정심씨 자신도 어려운 삶의 계단을 오르는 누군가에게 등을 내밀어 그를 편안히 업어줄 수도 있는 날들이 있기를 기대하며.

 

글/ 서현주 객원기자

작성자서현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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