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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그래도 이혼은 할 수 없어요"

주부 이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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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그래도 이혼은 할 수 없어요"
                                              주부 이희숙

여기 한 여인이 있다. 올해 마흔 두 살인 이희숙 씨, 그녀는 마흔 다섯 살의 남편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그리고 초등학교 육 학년에 다니는 딸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주부이다. 그런 그녀가 지금 "여성장애우는 같은 처지의 사람을 만나서 살길 바란다"며 울부짖고 있다. 왜 그녀는 절규하고 있을까? 물론 이희숙 씨 경우는 특별한 사례에 속한다. 그렇지만 그녀의 아픔은 여성장애우들이 겪을 수 있는 아픔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여성장애우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의 결혼 생활을 고백하고 나선 이희숙 씨, 그녀의 파란만장한 고백을 육성으로 들어본다.

 
 
  이희숙 씨의 고백은 십 칠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열다섯 살 때 뇌염을 앓아 그 후유증으로 반신불수의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스물 다섯 살이 되던 해 충남 당진읍에 살고 있었다. 장애 때문에 하는 일없이 지내던 그녀는 무료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모 여성지에 자신의 투병기를 써서 보냈고, 그게 잡지에 실린 게 계기가 돼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됐다.
  투병기를 보고 남편이 편지를 보내오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만남은 남편이 사귄 지 일년여만에 그녀의 집에 나타나 "도와 줄 테니 결혼하자"고 제안하면서 얼떨결에 동거로 이어지게 된다.
  "내 나이 스물 다섯 살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나 동거를 시작했다. 그때 우리 집은 당진 읍내에서 슈퍼마켓을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남편은 내가 몸이 불편한 것을 빌미로 사기를 치고 도망을 치려 했던 것 같다. 그 예로 막상 동거를 시작했는데 남편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사업을 한다며 우리 집에서 빌려간 이백 만원도 갚지 않았다. 내가 돈을 갚아야 하지 않겠냐며 채근하자 그제 서야 서울에 방을 얻어 놨으니 같이 가자고 말했다. 나 혼자 올라가겠다고 하자 친정 어머니가 마음이 놓이지 않으셨는지 같이 가겠다고 해 남편과 나 그리고 어머니 셋이서 서울에 올라왔다.
  그런데 서울에 방을 얻어놨다는 남편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남편은 나와 어머니를 여기저기 끌고 다니다가 우리만 남겨놓고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속았다는 허탈감에 펑펑 울며 동생이 자취하는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당진으로 내려왔다.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남편이 당신읍내에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수소문해 남편을 만났다. 만나서 "왜 나를 속였냐"고 따지며 대들었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혼자 산으로 올라가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러자 나를 따라온 남편이 나를 달래주었다. 남편은 "방을 얻으려 했는데 돈이 없어 얻지 못했다"며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남편이 하는 행동은 미웠지만 나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는 것 같아 남편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남편은 우리 엄마 아버지에게도 "잘못했다"며 용서를 빌었다. 못난 딸자식을 둔 부모님은 남편을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용서뿐만 아니라 부모님은 방 얻을 돈 팔십 만원도 마련해 주었다. 그 돈으로 우리는 서울 가리봉동에 방을 얻고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녀의 신혼생활은 워낙 없이 시작되다 보니 고생의 연속이었다. 밥 지어먹을 그릇도 없이 이웃에서 그릇을 빌려 밥을 해먹어야 했다. 그렇지만 이때가 그래도 행복했다고 그녀는 회상한다. 살림 한가지를 장만하는 기쁨도 컸고, 직업이 없던 남편이 노동 일을 나가 어깨쭉지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와서도 오히려 집에 있는 그녀를 걱정하며 "얼마나 힘들고 고생스러우냐?"고 위로해 줄 때면 그녀의 시름은 씻은 듯이 없어지곤 했다.
그러나 이런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가 큰 아이를 임신해서 힘들어하던 어느 날, 남편은 사소한 말다툼을 빌미로 그녀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남편의 상습적인 구타가 시작됐다고 그녀는 기억하고 있다.
그녀의 고백은 이어진다.
  "겨울이 되자 남편의 노동일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남편은 공장에 취직했다. 그 무렵 나는 큰애를 낳았고, 남편의 공장이 인천 부평에 있어 우리는 부평으로 이사를 했다. 부평에서 우리는 처음에는 아무 탈 없이 잘 지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공장을 그만뒀다.
  참 막막했다. 다른 직장도 잡아 놓지 않고 공장을 그만뒀으니 살아갈 길이 없었다. 하루 이틀을 넘기기가 힘든데 남편은 직장을 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답답해서 남편에게 "직장을 알아 보라"고 채근했다. 그러자 남편은 화를 내며 쓰레기통을 부수고 살림을 던지며 나를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친정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가 남편에게 "취직하라"고 종용했지만, 남편은 "죽어도 공장에 취직은 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할 수 없이 친정어머니는 우리더러 당진 집으로 내려가자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남편과 나는 당진 친정집으로 내려와서 살게 되었다.
  당진에서의 생활 역시 곤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기억에 따르면 친정집에서 얼마 살지 않고 당진읍에서 한참 떨어진 시골에 방을 세 얻어 살게 되었는데, 둘째 딸까지 태어났지만 남편이 직장을 가지지 않아 어려운 생활이 계속됐다.
할 수 없이 그녀는 면사무소를 찾아갔다. 면사무소에서는 생활보호대상자를 위한 직업훈련원을 소개해 주었다. 귀가 솔깃해진 그녀는 남편에게 "직업훈련원에 가서 목수가 되는 기술을 배우라"고 채근했다. 처음에는 가지 않겠다고 펄펄 뛰던 남편은 "목수 기술을 배우면 우리 살림이 나아질 수 있다"고 그녀가 거듭 설득하자 동의했다고 한다. 논산에 있는 직업훈련에서 육 개월여 기술을 배운 남편은 그 후 목수 일을 평생 직업으로 가지게 된다.
"목수가 되자 남편은 당진 읍내에 집 짓는 곳으로 품을 팔러 다녔다. 같은 노동일을 하여도 기술이 있어 그냥 막노동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사는데도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정어머니가 우리 집에 다니러 오셨다. 마침 남편도 집에 있었다. 어머니는 주무시지 않고 오후 세시쯤 집에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남편도 그 말을 분명히 들었는데 같이 일하는 사람을 만나러 나간다면서 외출한 후 어머니가 돌아가실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 혼자 어머니를 배웅하게 되자 나는 무척 서운했다. 그래서 늦게 돌아온 남편에게 "엄마가 오셨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따졌다. 서러움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나는 막 소리내어 울었다. 그러자 남편은 "궁상떨고 있네!"라고 소리치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더니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남편이 무서워 방을 뛰쳐나왔다. 방 밖에서 들으니 남편이 살림을 때려부수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살림이 너무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옆방 아주머니를 불러 우리 남편을 말려달라고 부탁했다. 옆집 아주머니가 가서 보고 오더니 방문을 잠그고 때려부수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할 수없이 읍내로 나와 언니를 불렀다. 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와서 보니 방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냉장고 문이 떨어져 나가고 세탁기도 부숴져 있었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남편과 며칠이 지나도록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온 남편이 나에게 뚝방으로 가자며 내 손을 이끌었다. 뚝방에서 남편은 "내가 잘못했으니 화를 풀라"며 사과했다. "냉장고 문은 내가 대리점에 부탁을 해놓았으니 걱정을 하지 말라"고 남편은 나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해서 나는 또 남편을 용서했다.
그런데 이 시기 그녀의 고통은 비단 남편의 구타에서만 비롯되지는 않았다. 또 다른 고통이 그녀를 덮쳐왔다. 어느 날 다섯 살 된 딸이 집 앞에서 트럭에 치이는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 것이다. 목숨은 건졌지만 딸은 교통사고로 인해 뇌를 크게 다치게 되었다. 그 후유증으로 공교롭게도 그녀와 똑같은 반신불수의 장애를 가지게 되자 그녀는 할 말을 잃고 충격에 몸져  누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래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어쨌든 살아야 했다. 딸의 치료를 위해 서울로 올라오게 된 것을 계기로 그녀는 다시 서울에 정착했다. 서울에서의 정착이 용이했던 것은 딸의 교통사고 보상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보상금으로 허름한 연립주택 한 채를 구입해 그녀는 꿈에도 그리던 자기집도 갖게 됐다. 이쯤해서 그녀의 아픔이 끝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고통은 내내 이어졌다.
"서울에 살면서 먹지 않고 쓰지 않아 약간의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그 돈을 찾아오라고 했다. 내가 어디다 쓰려고 하느냐고 물어보자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가불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당신이 사장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자기가 목수 팀장이라서 가불을 해줘야 한단다. 나는 같이 일해서 나눠먹는 처지에 누가 누구한테 가불을 해 주냐고 따지면서 돈을 찾아 올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남편은 나더러 근성이 나쁜년 이라고 욕을 하면서 손찌검을 해댔다. 그것도 모자라 남편은 나를 집 밖으로 내몰고 안에서 문을 잠궈 버렸다.
나는 문 밖에서 남편에게 밤이니 제발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남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는 서러움에 막 소리를 내어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남편이 내가 운다고 창문 밖으로 그릇을 집어 던졌다. 나는 그릇이 아까워서 울 수도 없었다. 그렇게 밤 열두시가 지나고 새벽 한시가 됐다. 나는 계단에 주저앉아 밤새 자다 깨다 하면서 밤을 새워야 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아침 여섯 시였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했다. 나는 마음이 급했다. 다시 문을 열어달라고 남편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남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할 수없이 공중전화로 동생 내외를 불렀다. 그제서야 남편은 문을 열어주었다. 아이구 내 신세야, 내 입에서 한탄이 저절로 나왔다.
참으로 기가 막힌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그녀의 남편은 왜 그녀를 괴롭히는 것일까?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원인은 다름 아닌 그녀의 장애이다. 내가 몸이 성치 못하니까 남편이 괴롭혀도 할 말이 없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실제로 남편도 틈 만나면 그녀에게 "너는 몸이 성치 않으니 참고 살아야 한다"는 점을 주입시켰다고 한다. 문제는 그녀의 태도인데 그녀 또한 남편의 말에 수긍하고 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나 자신을 너무 잘 안다. 나는 너무 못난 것이다. 남편도 못난 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고 있으리라. 그것을 모르는 내가 아니다. 나 자신도 무능한 나 자신이 싫어질 때가 너무나 많이 있다. 그래서 나는 늘 남편에게 지고 살았다. 그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 온갖 정성을 다했다. 새벽 네시에 일어나 남편 밥을 짓고 녹즙을 만들어 놓고, 우유도 한컵 따라 놓는다. 남편이 그걸 먹고 일하러 가면 나는 마음이 편하고 가벼웠다. 하지만 어쩌다 시간이 없어 못 먹고 나가는 날이면 하루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런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기는커녕 남편은 끝없이 그녀를 배신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 배신의 정점은 외도였다. 남편이 올해 초, 그녀 몰래 다른 여자를 사귀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지는 그녀의 회한에 찬 고백을 들어보자.
  "나는 이날 이때까지 내 생일을 모르고 살아왔고, 결혼기념일도 모르고 살아왔다. 내가 생각해도 내 인생이 불쌍하다. 그런데 남편은 내 속도 모르고 현장에서 음란 비디오를 보고 와 별 해괴한 소리를 다 해댔다. 남편에게 나는 하체로서만 필요한 여자인 것 같았다. 어제 저녁에는 내게 욕을 해대며 때리던 남편이 오늘은 좋은 것 한번 하자고 하면서 추근 댔다. 어느 여자든지 그것만 잘해주면 다음날 아침이면 좋아서 콧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남편의 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부터 남편은 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사업을 한다. 노임을 줘야한다. 갖가지 핑계를 대며 친정에서 돈을 빌려오라고 채근 대는 것이었다. 내가 거절하면 남편은 나를 구타했다. 나는 남편의 구타가 무서워 여기저기서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빌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식으로 돈의 액수가 날로 불어났다.
  그렇게 지옥 같은 날들이 계속되던 어느 날 느닷없이 남편하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 서너명이 남편에게 받을 돈이 있다며 집으로 나를 찾아왔다. 어느새 남편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 노임까지 가로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분들은 돈을 받으러 왔지만 온몸에 피멍이 든 내 모습을 보자 오히려 나를 위로하고 돌아갔다. 돌아가면서 아저씨 중 한 분이 나에게 "남편에게 여자가 생겼으니 조심하라"고 일러 주었다. 나에겐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나는 그저 아저씨를 붙잡고 "어떤 여자냐?"고 물어 보았다. 그 아저씨는 우물쭈물 하더니 "아마 다방여자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 날 저녁 집에 돌아온 남편을 추궁했다. 하지만 남편은 모르는 일이라며 오히려 화를 냈다. 내 가슴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렇지만 증거가 없으니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랬는데 그 날 새벽 한 시경 여자가 전화를 해왔다. 남편이 잘못 걸려온 전화라면서 수화기를 놓지 않고 통화를 하는 것으로 보아 그 여자가 분명했다. 나는 화가 나 큰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다방이나 다니는 미친년 주제에 남의 남편을 꼬시려 든다"고, 남편이 말렸지만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다음 날 낮에 여자가 다시 전화를 해왔다. 이번에는 내가 전화를 받았다. 여자는 내가 자기를 다방이나 다니는 주제라고 욕을 했다고 따지기 위해서 전화를 했다고 한다. 나는 "너 지금 나를 훈계하려고 하느냐?"고 화를 냈다. 그러자 여자는 "남편도 간수 못하는 주제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내뱉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 후로도 여자의 전화는 계속 걸려왔다. 한 번은 내가 "어떻게 하려고 남의 서방을 홀려서 그렇게 많은 돈을 발라먹느냐, 네가 여우냐, 다방에 다니는 여자는 다 그러냐?"고 여자에게 따진 적이 있다. 여자는 "다방에 다니는 여자니까 돈을 발라먹지. 나는 네 남편이 돈을 갖다줘서 쓴 죄밖에  없다"고 말을 받았다. 그러면서 "당신은 당신 남편이 잘난 줄 아나본데 착각이다"라고 내 약을 올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편의 삐삐 음성녹음을 들어보면 "나 지금부터 잘 테니까 전화하지마, 내 몸이 안 좋아. 내가 술을 먹어서 안 좋은 건 나도 잘 알아. 내일 통화하자구. 미안해요"라고 나긋나긋한 음성이 녹음되어 있기 일쑤였다.
그런 음성녹음을 들을 때면 내피는 거꾸로 솟았다. 정말 남편이 여우같아 보였다. 일도 하지 않고 낮에는 그 다방여자랑 놀다가 밤늦게 들어오니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현장에서 일하다가 늦는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집에 있는 나를 속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치가 떨리도록 속이 상했다.
  여자의 전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도 딸 방에서 자다가 화장실을 갔다오는데 안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바로 다방여자와 다정하고 자상한 목소리로 통화하는 남편 목소리였다. 나는 안방 문을 열었다. 그러자 남편이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나는 "간섭 안 할테니 전화 계속해요. 그렇게 다정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니 여자가 좋아 하겠네요"라고 이죽거렸다. 그러자 남편이 전화통을 나에게 던지고, 내 머리카락을 붙잡아 나를 방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어 남편은 발로 나를 짓밟아 댔다.
  그날 무지막지한 구타를 당하고 나자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다음날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떼고 친정 식구들을 불렀다. 그 날 저녁 남편이 집에 있을 때에 친정 아버지와 어머니가 오셨다. 남편은 겁이 났는지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소리쳤다. 내가 문을 열어주었다. 남편은 황급히 안방으로 들어갔다. 뒤 쫒아간 친정 어머니가 남편을 막 때렸다. 남편은 꼼짝 않고 맞고 있었다. 한참을 때리고 나서 친정어머니가 "너 억울하냐?"고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내가 잘못해서 맞았으니 억울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뒤이어 남동생 내외가 왔다. 남동생은 남편에게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따졌다. 남편은 "무조건 잘못했다"고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남편에게 심한 창피를 줬는데 남편은 그때 뿐 그 후로도 계속 그 다방여자를 만나는 눈치였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까지 그 여자에게 갖다준 돈이 삼천만원은 넘을 것이다.  내가 "돈 벌어서 왜 미친년 갖다 주냐"고 따지는 날이면 남편의 주먹이 날라 온다. 지금 내게는 남편의 구타로 인해 생긴 상해 진단서가 세 장이나 있다.
  그녀 남편의 바람기는 지난 사월 그녀가 수소문해 다방여자가 있는 곳을 알아내, 여자 머리끄뎅이를 잡고 난리를 피운 끝에 다시는 남편을 만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냄으로써 잠잠해진 상태이다.
  하지만 남편은 요즘도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가끔 전화로 "애들 잘 있느냐, 돈 없어서 어떻게 생활 하냐고, 지금 일하고 있으니까 돈 벌어서 갔다주마"고 안부를 물어올 뿐이다.
  그녀는 지금 친정에서 도와줘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남편이 그녀 속을 다 태웠지만 그녀는 이혼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 "내가 장애를 가져서 아무래도 부족하니까 남편이 바람을 피우겠죠. 아이들 때문에도 헤어질 수는 없어요. 내가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혼자 벌어먹고 살수가 없잖아요"그녀의 말이다.
  집안이 이렇게 풍지박산이 나다보니 아이들도 꿈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특히 교통사고로 엄마와 같은 장애를 가지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 딸 수희,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수희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보자 수희는 조심스럽게 "장애우 직업훈련원에 가서 기술을 배울 수 있냐?"고 물어온다. 꿈 많아야할 초등학교 육 학년 아이의 장래 꿈이 고작 기술을 배우는 것이라니, 무엇이 아이에게서 꿈을 뺐어 갔을까?
이희숙씨 또한 희망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나라에서 토큰박스나 신문판매 가판대를 하나 주면 그걸 해서 아이들하고 같이 살고 싶다"는 것이 그녀의 남아있는 유일한 소망이다.
"아이들은 내가 없으면 죽도 밥도 아니에요. 얼마 전에는 하도 답답해서 남편에게 나라 혜택이라도 받게 이혼하자고 말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돌아서서 생각해 보니 아이들 때문에 이혼은 힘들 것 같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희숙 씨는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군다.

글/ 이태곤 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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