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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제가 먼저 포기하지는 않을래요"

근이양증 장애우 어머니 민성희 씨

본문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을 수 없다네
어머니 가슴에서 못을 뽑을 수도 없다네
지지리 못나게 살아온 세월로도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을 수도 없다네
어머니 가슴 저리 깊고 푸르러
- 함민복 <가을하늘>

 

세상이 달라졌다지만 "어머니"들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자식에게 마르지 않는 샘처럼 사랑을 퍼주며 자기희생을 기꺼이 선택한다는 전통적인 어머니 상은 한국인이면 누구에게나 마음 속 고향같은 아스라한 그리움과 향수를 남긴다. 물론 이십일세기에 접어든 이때 설혹 그러한 이미지의 어머니들은 점차 사라져간다 해도 아마 장애우의 어머니들은 마지막까지 그 모습으로 남을 사람들이다. 그래도 이제 좀 살만한 세상이 되지 않았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장애우 어머니들은 배시시 말없는 웃음을 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웃음과 함께 물리는 눈가의 그늘을 보았을까.

▲혜정씨와 어머니
이번 호 주인공 근이양증 장애우 딸 혜정 씨와 어머니 (50세) 민성희 씨의 취재를 마치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으며 한 가지가 몹시 부끄러웠다. 사실 취재를 위해 대구로 내려가던 길에는, 한 집안에 여섯명이 근이양증 장애우였던 조월자 씨 같은 사연들에 비해 이번 주인공은 독자들도(요즘 유행하는 발음법으로) "약하다"라고 하지 않을까 싶었다. 민성희 씨는 이미 그 장애를 가진 첫딸을 저 세상에 먼저 보냈다고는 하지만 전체 근디스트로피협회 가족들을 뒤져보면 그보다 더 "얘깃거리"가 많은 사례도 있을텐데 싶기도 했다. 은근히 여섯 장 분량을 잘 채울 수 있을까도 걱정이었다.

 

그런데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곰곰 생각해보니 남의 이야기 듣고 글 쓰는 사람으로서 닳고 닳아 언제부터 그리 오만하고 냉혹한 눈을 가졌던가 싶어 스스로에게 화들짝 놀라게 됐다. 근이양증 장애로 큰 딸을 먼저 보내고 같은 장애를 가진 둘째딸을 뒤에서 지켜보는 그 어머니의 연한 속살을 어찌 그리 가볍게 생각했던가. 손대기만 해도 비죽 피같은 눈물이 배어나오던, 칭칭 가슴을 동여매도 금방 다 젖을만큼의 피같은 아픔이 흘러 저 강을 다 채울 것 같던 그이의 뒷모습이 아프게 눈에 남았다.

 

"둘째 아이까지, 이럴 수는 없는 건데..."

 

남편 최득현 씨를 만나 민성희 씨가 결혼한 것은 그이 나이 스물 여덟 때였다고 했다. 맏이로서 동생들 뒷바라지를 다 마치느라 또래에 비해 조금 늦은 결혼이었다. 그래도 결혼 후 곧바로 첫째딸 윤정이가 태어나고, 이십개월 후 둘째 딸 혜정이가 태어나 두 딸의 웃음과 재롱이 방안을 살겹게 채우는 행복하기만 한 신혼이었다.

그런데 사실 혜정이가 태어날 즈음부터 이들 부부에게는 말못할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다. 이십 개월이나 된 첫딸 윤정이가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것이었다. 남의 아이들처럼 잘 기고, 그러다 무언가 잡을 것만 있으면 잘 서던 아이가 돌이 지났는데도 손을 놓고 걸음을 떼질 못했다. "그냥 늦되는 거겠지", 하고 생각하려고 애썼지만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순간이 왔다. 그래서 남편이 직장에 휴가를 내고 두 딸을 부부가 안고 업고 마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일단 우리나라 최고라는 시옷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보였다.

그 병원 의사가 아무 병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 말 듣고는 저나 애 아빠 모두 기분이 좋아서 "그래, 늦되도 좋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하면서 병원 앞에 있는 창경궁에 놀러도 갔어요. 그런데,....

 

윤정이는 계속 그대로였다. 아니, 점점 더 퇴행하는 것 같았다. 고개도, 다리 한 쪽도 못 들었다. 부랴부랴 윤정이에게 물리치료를 시키기 시작했지만 결국 얼마 후 윤정이의 장애명을 알게 됐다. 이미 각오는 하고 있던 일이었다. 다만 하필이면 근이양증(혹은 근디스트로피)이라는 희귀한, 아직 치료법이 개발되지도 않은, 저렇게 서서히 근육이 빠져나가고 마비돼 이십대 전후에 죽음을 맞을 확률이 높은 장애라는 사실에 하늘이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또 하나 성희 씨의 가슴을 누르는 것이 있었으니 멀쩡하던 둘째딸 혜정이도 윤정이와 같은 나이 즈음부터 같은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사실이었다.

 

"설마, 이럴 수는 없는 건데....."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에 하루에도 열두 번씩 천국과 지옥을 엎치락 뒤치락하며 오갔지만 무슨 연유에서였는지 그는 둘째딸의 이상을 일단 자신만 알고 있기로 했다. 워낙 현장근무로 야근도 많은 남편이었지만 남편이 퇴근해 들어오기 전에 애들을 애써 재우고 남편 출근 때까지 깨우지 않았다. 자연히 혜정이가 깨어있을 때의 행동거지를 보지 못하는 남편은 이상을 눈치채지 못할 터였다. 아니,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남편이 사흘간의 휴가를 받아오자 그는 혜정이의 상태를 의사에게 한 번 보이기 위해 윤정이를 놓고 둘만 살짝 다녀오려고 했다. 그래서 일단 "혜정이와 어딜 좀 다녀올텐데 행선지는 다녀와서 말하겠다"고 남편에게 말머리를 꺼냈다. 그런데 남편이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나도 가겠다며, 행선지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같이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입밖으로 꺼내면 바로 사실이 돼버릴 것만 같아 부부끼리도 서로 그렇게 쉬쉬하며 그 엄청난 충격과 아픔을 혼자서만 감내하고 있었을까. 둘째딸까지 근이양증 장애를 갖게 됐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부인하고만 싶었을 이들의 그 때 심정을 남이라면 쉽게 이해하지 못할지 모른다.

"결혼 직후에 남편이 종교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그래요. 저도 좋다고 하면서 이런 저런 얘길 하다가 결국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물론 윤정이의 장애를 알기도 전이에요. 신앙심이 깊어질 즈음 두 딸아이의 장애를 알게 된 건데, 주위 분들은 그것을 능히 이겨낼 자에게만 하느님은 고통을 주신다면서 위로해 주셨지만 그건 그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을 때나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되더라구요."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아 절로 무릎이 꺾이는 가혹한 고통을 누군가가 - 그것이 설혹 신이라고 하더라도 - 일부러 준 것이라면 고통 중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하늘을 찌를 듯한 원망의 마음을 가질 것도 같다. 성희 씨도 절망에 빠진 사람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생각을 자신도 했노라고 고백한다. 그 중에는 자신이 두 아이와 함께 자살하겠다는 생각도 들어 있었다.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생각이었지만 절망 중에 있을 때는 정말 그 생각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죄없는 두 딸의, 해맑기만 한 눈을 보고는 그도 다시금 삶에 용기를 낼 수 있었으리라. 그래도 다시 살자고 생각하고 현실을 보니 고난의 연속이었다. 제대로 걷지 못하는 두 딸이 함께 이동하려면 부부가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했다. 어디라도 외출할라치면 덜컹거리는 시골버스에 각자 아이 한 명씩 그리고 휠체어 한 대씩 껴안고 붙잡고 집을 나섰다. 어리디 어린것들이 작은 휠체어에 파묻히듯 앉아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도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당시로서는 치료법이 없다고 누누이 얘길 들었음에도 그리고 어느 병원이든 새로운 의사가 왔다고 하면 외국에서 새로운 치료법을 공부해왔을 것만 같아 달려갔다. 그러란 희망적인 얘기를 해주는 선생님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 덧 윤정이의 취학통지서가 배달돼왔다. 하필이면 바로 집앞이 학교였지만 윤정이는 도저히 학교에 갈 수 있는 건강상태가 아니었다.

"취학통지서를 받아들고 옥상에 올라가 코앞의 학교 운동장의 아이들을 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이 년 후, 두 살 아래 혜정이에게도 취학통지서가 나오자 성희 씨 부부는 고심 끝에 둘이 함께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특수학교에서 통학을 돕기 위해 운행하는 미니버스가 아파트 밖으로 돌았지만 아파트 안까지 들어와 달라고 사정을 해서 학교에 보냈다.

팔십년대 중반이었던 당시에는 아주 부유한 집들만 차를 굴리는 줄만 알았고, 실제로 집집마다 자가용도 흔하지 않았다. 물론 특수학교에 입학할 당시 다른 부모들도 운전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졸업할 무렵이 되니 다들 운전을 하고 있었다.

성희 씨 부부도 누구라도 먼저 따는 사람이 있으면 하루라도 빨리 운전을 시작하자고 해 부부가 같이 운전면허를 땄고 팔십팔년 무렵부터 운전을 시작했다. 나중에서야 왜 더 일찍 차를 갖지 않았을까, 후회했던 것은 실제로 자가용을 갖게 되니 보험료나 할부금이 생각했던 것만큼은 그렇게 많지 않았고 대신 그를 짓누르던 일상의 짐에서 많이 놓여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눈 돌리게 한 그 애의 죽음

 

같은 장애를 가졌어도 혜정이 보다 특히 몸이 약한 윤정이가 늘 걱정이었다. 한 번은 윤정이가 감기에 걸렸는데 급속도로 악화돼 병원에 입원할 정도가 됐다. 호흡이 불안정할 정도의 죽을 고비도 두 번이나 넘겼고, 그 와중에 혜정이까지 아파 같은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의 축복 속에 퇴원은 했지만 이후에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윤정이는 제대로 앉아 있기조차 힘들어했다. 윤정이가 워낙 학교 다니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교실 밖에 있다가 힘들어하면 잠깐씩 성희 씨가 업어주고 또 다시 교실로 데려가고 하면서 애를 써보았지만 결국 삼학년을 못 넘기고 휴학시켜야 했다. 그 때 성희 씨 부부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 혜정이까지 같이 휴학원서를 냈다. 이들이 두 딸아이를 따로 생각하기 어려웠던 것은 왜일까.

 

일 년여 집에서 지내는 동안 그래도 둘은 하루 종일 붙어 지내며 재미있어 했다. 그러나 다른 친구들이 사학년에 올라갈 때 비교적 건강한 혜정이까지 마냥 학교를 쉬게 하는 것도 못할 일이었다. 이 일로 가족회의를 할 때 혜정이가 "학교 가고 싶다"고 조심스레 말하자 윤정이도 "그래, 너는 (학교) 다녀야지"라고 힘없이 얘기했던 것을 그이는 기억한다.

그리고 이년 후 혜정이가 오학년이 됐을 때 윤정이는 다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됐다. 중환자실에 입원해있어 윤정이를 옆에서 지키지 못한 어느 날 언니에게 전화를 해보던 혜정이가 이상하다며 직장에 있던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달려가 보니 윤정이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작은 천사는 운명했다.

 

이들 부부는 혜정이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가 우선 망설여졌다. 또래보다 성숙한 혜정이를 오래 지켜봐 온 주위 사람들의 권유대로 그 사실을 혜정이에게 알렸고, 꿋꿋이 입관하는 것까지의 모든 장례일정을 다 따라다니던 혜정이는 그날 밤 일기장에 하늘이 무너진 날이라고 썼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언니 이야기를 입밖에 잘 꺼내지 않는다. 그러나 혜정이도 어찌 잊었겠는가. 최근에 대구에서 열렸던 재활공학 세미나는 일정이 끝난 후 최신 재활기기들을 세미나참석자들이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혜정이도 자세보정용 의자에 앉아보고 처음으로 자신의 몸에 딱 맞는 편안한 느낌이었는지 몹시 좋아했다. 그러다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이게 빨리 나왔으면 우리 언니 그렇게 빨리 안 죽었을텐데..." 라면서.

 

성희 씨 역시 겉으로 보기에는 그 슬픔에서 잘 헤쳐 나왔다.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여전히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혜정이가 눈앞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남모르는 그의 속울음은 계속되고 있다. 그 아이가 떠난 지 십년이 다 돼가지만 혜정이가 고삼이 돼서 같이 바빠지기 전까지도 혼자 무덤가를 찾아가곤 했단다.

 

윤정이의 죽음은 자기 자신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다시 되돌아보게도 했다. 사 개월 후 그는 성당에서 주관하는 심리강좌를 들었고 얼마 후 호스피스 양성교육까지 받았다.

"호스피스활동을 삼 년 정도 했는데, 하면서 오히려 위안도 많이 받았죠. 제가 경험한 것 보다 죽음에 대해서 훨씬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도 되고. 그래도 그 분들의 아픔이 그대로 오니까 아무래도 힘들더라구요. 제가 맡았던 분들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올 때마다 우니까 남편이 우는 거 지겨우니 제발 그만 두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이의 얼굴에 스치는 씁쓸한 웃음.

 

공포의 계단 여섯 개

 

이제 그의 일상은 온전히 혜정이가 차지하고 있다. 혜정이가 특수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학교 보내고 나면 하교할 때까지 자유롭게 돼서 호스피스, 레지오활동도 활발히 했었지만 혜정이가 지난 해 ㄷ대학 애니메이션과에 진학한 다음부터는 하루 중 거의 모든 행동을 혜정이와 함께 한다. 다른 아이들과 다른 혜정이의 조건은 그가 다 메꿀 수밖에 없다.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수업시작 이십분 전에 강의준비를 마치도록 애쓰고 있다. 중간에 강의실이 바뀌어 혜정이가 움직여야 할 때도 이제껏 한 번도 휠체어를 다뤄보지 않은 학생들이라 그가 마음이 안 놓여 혜정이를 맡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제 일년 정도 지나니 과 친구들 중에 숙달된 친구들이 생겨 조금 사정이 나아지긴 했다.

 

지난 해 내내 그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건물 앞 계단은 다행히 지난 해 말 경사로로 바뀌었다. 계단수는 여섯 개에 불과하지만 매번 도움을 부탁해야 하는 일은 스트레스 자체였다. 조용한 성격의 그도 용기를 내어 몇 번이나 학교측에 요청을 했는데도 자꾸 공사가 미뤄지자 돈 때문이라면 공사비의 절반을 부담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이학기 때도 공사가 시작되지 않자 그는 혜정이를 휴학시킬 수밖에 없다는 협박아닌 협박도 했다. 그러고도 한참 뒤인 이학기 말에나 경사로는 결국 완성됐지만 그 어려움이 학교측에 충분히 받아들여져 이후로는 혜정이의 수업 시간에 맞춰 건물 앞에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게 됐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차로 한 시간 반정도. 오고 가는 시간이 애매해 그는 혜정이가 수업을 받는 동안 내내 차안에서 책을 읽으며 기다린다. 물론 처음에는 통학을 위해 인근 기숙사에 혜정이와 함께 입주한 적도 있다. 그러나 편의시설이 안 돼 있는 기숙사에서 지내는 일은 더 힘들어 두 달만에 나와버리고 말았다. 특히 지금 혜정이의 목욕이나 머리감기는 일은 성희 씨에게 힘에 부치는 일이어서 남편이 전담하고 있는데 머리감는 일 때문에라도 어차피 집에 자주 가야 했던 것이다.

 

입학 후 혜정이는 각종 학교 행사 참석을 욕심낼만큼 모든 일에 적극적이다. 물론 그 뒤에는 그림자같이 그가 있었다. 입학 후 일박이일간 진행된 오리엔테이션에도 남편과 함께 참석한 적도 있다. 일반 버스에는 앉지 못하기 때문에 혜정이를 차로 데려가 엠티장소였던 콘도에서 따로 방을 하나 잡아 지냈는데 물론 부부는 그림자처럼만 행동했다.

그래도 혜정이가 공부에 의욕을 보이고 성적도 곧잘 받아와 어머니인 성희 씨는 같이 힘이 난다. 간신히 혼자 힘으로 식사를 하고 이를 닦는 정도만 할 수 있는 혜정이가 힘들다는 소리 안 하고 학과특성상 실기가 많은 학과 공부도 잘 따라 가고는 있지만 올해는 특히 졸업작품전이 있기 때문에 더욱 강행군이 될 거라고 한다.

 

성희 씨와 혜정이는 요즘 가끔 졸업 후 전망을 놓고 교사를 하는 게 어떨까, 아니 공무원이 더 낫지 않을까, 하며 나름대로 꿈에 부풀어 있다. 이런 모녀 간 대화를 듣고 남편은 물론 가슴을 친다. 현실도 모르고 괜히 혜정이한테 옆에서 헛바람이나 들게 한다고 성희 씨에게 타박이다. 만약 취업되면 그럼, 거기도 그렇게 붙어다닐 거냐고.

"왜, 못해. 내가 다 하면 되지!" 진심으로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의 말을 듣다 보니 정말 "왜 안돼?"하는 생각도 든다. 혜정이를 위해서 이민갈 생각도 해봤던 그이다. 물론 그 계획은 혜정이의 뜻을 충분히 고려해서 조정될 것이다.

 

그가 혜정이의 뒷바라지에 그렇게 열심인 것은 그의 가슴 한 켠에 녹슬지도 않는 한 마디 말 때문이다.

"처음 정확한 장애명도 모르고 윤정이를 물리치료 시키고 있을 때였어요. 그곳 원장 선생님이 가벼운 소아마비 장애를 갖고 계신 분이었는데 정확히 생각은 안 나지만 윤정이의 상태에 대해 조금 비관적인 말씀을 하셨던가 봐요. 그 말을 듣고 제가 울기 시작하니까 그 분이 그러시대요. "왜요, 부모님이 왜 우시는데요. 그래도 결국 포기는 부모님이 하십니다," 라고 했던 그 말이 잊혀지지 않아요."

 

실제로 물리치료를 시작하면 금방 다 나을 것처럼 생각돼 희망을 갖던 부모들도 차도도 없이 상황이 비관적으로 되는 것 같으면 금방 포기한다는 것이다. 자식인 장애당사자 보다 먼저, 어쩌면 너무도 쉽게 말이다. 그래서 자신도 가끔씩 포기하고 싶어질 때 그 말이 떠올라 다시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러나 그도 안다. 혜정이의 장애는 진행성임을. 근이양증의 양상이 너무도 다양해 급속히 진행되다가 또 갑자기 진행이 정지돼 장수하는 경우도 있다는 건 알지만 혜정이는 그 경우가 아닐지도 모른다.

 

다시 냉정을 되찾아 그에게 묻는다. 왜 그걸 꼭 물으려 하는지, 스스로를 책망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묻는다. 이제까지 호스피스 활동을 하면서 그만큼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셨으니 혜정이의 죽음에 대해서도 담담히 생각해본 적이 있지 않느냐고.

그의 대답은 의외로 선선했다.

"모든 장애자식 가진 부모들 소원이 그렇잖아요. 나보다 먼저 가기를 바라죠."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다른 얘기 중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예전에 제 사연을 알게 된 어떤 분이 그러더군요. 그래도 함께 있을 때가 행복이죠. 알고 보니 그 분도 저와 같은 경험이 있었던 분이셨어요. 가만 생각해보면 정말 그 말이 너무 맞아요. 예전에 휠체어 타는 두 아이 같이 데리고 다니려면 고생되서 짜증도 났지만 그 때가 너무 행복했어요, 지나놓고 보니."

부모는 먼저 간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는 말, 정말 딱 맞는 말이다.

 

어머니 우주의 헌법은 사랑

 

예전에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취재차 만난 척수장애 화가 김희정 씨가 인터뷰 도중 잠시 누구에게랄 것 없이 짜증을 냈던 일이 계속 기억에 남는다. 유명세 덕분에 인터뷰를 자주 하긴 하는데 기자들은 예외없이 장애를 입은 당시와 지난 날에 대해 묻는다고 했다. 그 질문에 대답하다 보면 정말 지옥같았던, 처절한 아픔뿐인 그 때 당시를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된다고, 그럴 때는 내가 왜 이 인터뷰를 왜 하고 있나 하는 짜증이 솟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민성희 씨에게 처음부터 조금 미안하고 조심스러웠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김희정 씨 얘기를 들려주며 지난 일들을 다시 떠올리게 될텐데 괜찮겠냐고 먼저 묻기도 했다. 그는 자주 눈물을 쏟았지만 기꺼이, 성의껏 아픈 지난 얘기를 해주었다.

 

그러나 잠시 후 수업을 끝낸 혜정이와 마주했을 때 또 질문을 하기가 망설여진다. 해맑은 그 아이의 눈을 보며 언니에 대해서나 어머니에 대한 깊은 질문은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원래 만화를 좋아했는지, 애니메이션 쪽에서도 어느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을 통해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지를 가볍게 물었다.

혜정이는 예전에 집에 있을 때 일부러 종이를 네 칸으로 나눠서도 그려봤다고, 그러면 언니가 참 좋아했었다고 했다. 앞으로 출판만화에는 관심이 없고 본격 애니메이션을 그리고 싶다고.

"음, 최근에 엄마가 보시던 "사자의 서"란 책을 저도 잠깐 봤거든요. 거기에 카르마(업보)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무척 흥미로웠어요. 저도 그 인생의 업보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남다른 삶의 경험이 혜정이에게 삶과 죽음에 대해 성숙한 눈을 갖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혜정이는 자신의 장애에 대해,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주위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짐과 번뇌에 대해 업보로 설명될 수 있는 어떤 답을 찾았을까.

 

긴 세월 지나 바다에 몸푼 당신이 흘린 눈물
미역으로 자주 흔들리는 나를 보듬고
작아서 우리 삶 같은 애잔한 통통배 소리
물비늘 건반 타고 내가 한줌 뼛가루로 흩어질 때
아, 어머니 우주의 헌법이 있다면 사랑이라고
철새들 푸드득 다시 만날 기약으로 날아올라요.
- 함민복 <어머니 2>중에서

 

글 한혜영 객원기자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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