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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와 평등권 보장 이뤄내다

군가산점 위헌 소송 내 승소 판결 이끌어낸 정강용 씨 이야기

본문

상당수의 장애우들이 공직에 진출하는 데에 가산점제도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경제사정이 변화하고 교육의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면서 장애우에 대한 차별의식이 점차 희박해져가고 있고 장애우의 자립과 사회참여의 필요성이 더욱 확대되는 현실에서 가산점제도는 공직에 진출하려는 더 많은 장애우들에게 직접적인 제약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심각한 것은 공무원이야말로 장애우에게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공정한 경쟁시장이라는 점이다. 사회적 문화적 편견으로 말미암아 장애우에게 능력에 맞는 취업의 기회를 민간부문에서 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이에 반하여 공무원채용시험은 국가가 능력주의와 평등원칙에 입각하여 공개적으로 실시하는 것이고, 또 그러하여야 하므로 이들을 공무원채용시험에 있어서마저 차별을 가한다면 그만큼 이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가하는 것이 된다. 헌법이 강도높게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장애우에 대한 차별금지라는 헌법적 가치이다. 그러므로 법익의 일반적, 추상적 비교의 차원에서 보거나, 차별취급 및 이로 인한 부작용의 결과가 위와 같이 심각한 점을 보거나 가산점제도는 법익균형성을 현저히 상실한 제도라는 결론에 이르지 아니할 수 없다.’
작년 12월 23일 헌법재판소가 내린 군필자 가산점 위헌 판결문의 요지이다. 헌법재판소는 장애우 정강용 씨가 98년 4월 제소한, 군제대자에게 공무원 채용 시험에서 가산점을 주는 것이 위헌이라는 헌법 소원에 대해 소수 의견도 없이 9인 재판관 전원 의견일치로 이와 같이 역사적인 위헌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의 이런 위헌 판결이 나온 이후 사회가 이 문제로 들끓고 있다. 군필자에게 주던 가산점(이하 군가산점)을 둘러싼 논란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헌재 판결에 분노한 일부 남성들이 헌재의 인터넷 사이트를 마비시키고 여성단체에 항의전화를 거는 등 노골적인 적대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헌법에 명시된 차별금지와 평등권 보장이라는 본질은 제쳐둔채 여성과 남성의 성 대결, 나아가 감정적인 대립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작금의 사태를 지켜 보면서 정작 착잡함을 느끼는 것은 장애우다. 언론에서 제외했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처음 헌법 소원을 제기한 당사자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장애우 정강용 씨였고, 정 씨는 여성에 대한 차별도 문제지만 장애우에 대한 국가 기관의 차별이 부당하기 때문에 이를 시정해 달라고 여성단체보다 6개월 앞서 헌법 소원을 냈다.
그 결과로 이번에 헌재의 위헌 판결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따라서 헌재의 위헌 판결에 대한 일부 남성들의 반발은 어떻게 보면 장애우에 대한 국가 기관의 그동안 차별이 정당했다고 강변하는 셈이어서 장애우들을 무척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헌재에 위헌 소송을 내고 차별이 잘못됐다는 판결을 이끌어낸 정강용 씨는 장애계에서는 낯선 인물이 아니다. 93년 충남도 공채 시험에서 군가산점으로 인해 탈락한 이후 7년째 혼자서 고독하게 법정투쟁을 해온 그를 많은 장애우들이 기억하고 있다.
그동안 장애우에 대한 차별에 맞서 힘든 싸움을 벌여온 정강용 씨, 그가 싸워온 이야기를 통해 군가산점 문제의 본질에 다가서 보기로 한다.

군가산점 때문에 차석 하고도 탈락

“현실을 봤을 때는 암담했죠. 군제대자는 엄청난 다수고 뒤에 국가 기관이 있었어요. 이렇게 현실은 긍정적인 게 없었지만 법대로 보면 군가산점 제도는 위헌임이 분명했어요. 그래서 저는 현실로 가면 지고 법대로 가면 이긴다고 생각했는데 헌재가 과연 법대로 판결해줄 것인가에 대해서는 솔직히 반신반의했어요. 이번 헌재 판결을 보면서 어쨌든 제가 옳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게 기분 좋습니다.”
정강용(39세) 씨에게 헌재의 위헌 판결에 대한 소감을 묻자 그가 한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이어 “이기든 지든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끝까지 하겠다. 져도 좋다. 그렇지만 반드시 기록을 흔적으로 남기겠다는 오기 하나로 버텨왔다.”고 지난 세월을 회상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에는 착잡함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왜 허탈하지 않겠는가, 그가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지난 7년여 혼자 고독하게 벌여온 법정투쟁 과정이 무척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정강용 씨의 차별에 대한 투쟁은 정확하게 말한다면 7년 전이 아니라 그가 충남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취업전선에 나선 지난 88년부터 시작됐다.
구체적인 차별 사례를 열거하기에 앞서 잠시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정강용 씨는 어렸을 때 폭발물 사고로 왼손이 절단돼서 3급 지체장애를 가지게 됐다. 그렇지만 장애가 심한 편이 아니었고 표시도 거의 나지 않아서 그는 초 중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반장도 하고 달리기 선수도 하는 등 장애로 인한 차별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자랐다. 그는 대전 동산중과 서울 경기고, 그리고 충남대 행정학과를 나왔는데 학업성적도 우수해서 중·고교 때는 반에서 10등 안팎의 성적을 유지했고, 대학에 다닐 때는 성적우수 장학금을 여러 번 받기도 했다.
이렇게 평탄하게 자란 그가 자신이 장애우임을 인식하게 되고, 사회에 장애우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한 것은 대학을 졸업한 다음해인 88년 기업체 공채 입사시험에 응시하던 때부터였다. 그는 88년부터 91년까지 3년 여, 10여 차례에 걸쳐 기업체 공채 시험에 응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기업체 공채 시험에 응시했을 때마다 필기시험에는 합격하고 면접에서 탈락하는 일이 되풀이 됐다는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이 실력이 부족해서 기업체 공채시험에서 탈락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같이 응시한 친구는 합격하고 자신은 탈락하는 일이 계속 반복되자 그는 비로소 장애우에 대한 기업체의 차별 때문에 자신이 번번이 면접에서 탈락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 판단을 하자 그는 화가 났다. 그래서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지, 아니면 장애우에 대한 차별 때문에 자신이 탈락했는지 한 번 확인을 해보기로 했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을 탈락시키고 합격자 발표를 한 기업의 인사담당자를 찾아갔다. 그는 인사담당자에게 “제가 불합격 처리된 데 대해서는 깨끗이 승복하겠습니다. 하지만 불합격한 이유만은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을 불합격 이유를 밝혀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인사담당자는 “이유를 알려줄 수 없다.”며 한 마디로 그의 말을 일축했다. 그렇지만 그냥 물러설 그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와서 합격시켜 달라는 것도 아니고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실제 있는 그대로 불합격된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라고 인사담당자에게 계속 졸랐다. 몇 차례 실갱이가 벌어졌고, 그 끝에 인사담당자가 한 말은 그의 가슴에 비수가 돼 아프게 박혔다.
인사담당자는 “설사 당신이 필기시험에서 1등을 했더라도 합격시키라는 법은 없다. 불합격시키든 합격시키든 사람을 채용하는 것은 임용권자의 전권 사항이다. 우리는 절대 당신이 장애우라고 차별하지 않았다. 필기 시험에서 1등 했다지만 불합격시킨 것을 차별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전권사항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을 쓰는데 불합격시키든 합격시키든 우리 마음이지 왜 차별이니 뭐니 하며 시비를 거느냐.”라는 말을 했던 것이다.
그는 이 일이 계기가 돼 기업체 입사 시험을 깨끗이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7급 공무원 공채 시험에 매달렸다. 그 당시 그는 공무원 공채 시험을 준비하면서 군가산점 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는 군가산점 제도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필기시험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 더 노력해서 공부하면 무난히 공무원 공채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기업체 공채시험과 마찬가지로 그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실제로 7급 공무원 공채 시험을 같이 준비하고 응시한 행정학과 동기생 13명은 모두 2~3년 내에 무난히 합격했지만 매번 비장애우 동기생들보다 필기시험 성적이 우수했던 그는 번번이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리고 그가 공무원 채용 시험에서 매번 탈락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군필자에게 주는 5%의 가산점,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한 과목당 5점 9과목 합해서 45점의 가산점 때문이었다. 
여기서 군가산점이 공무원 채용 시험 합격 불합격자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가 겪은 사례를 통해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91년 총무처 주관 7급 행정직 공채 시험에 응시해서 82.22점 이라는 점수를 받았다. 이 점수는 나중에 한 신문사가 추적해 알아본 결과 가산점이 없는 상태에서는 응시자 가운데 차석을 차지한 높은 점수였다. 당시 7급 공채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최저 점수는 가산점 5%가 포함된 상태에서 83.33점 이었다. 따라서 만약 그가 가산점을 받았다면 87.22점 이라는 안정권 점수로 당연히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차석의 높은 점수를 받은 그는 탈락하고 실제 시험 점수가 78.33점에 불과한 군필자가 그를 밀어내고 가산점 5%를 더해 83.33점으로 7급 공채 시험에 합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그가 더욱 억울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같이 시험에 응시한 동기생 한 명이 81점을 받았는데, 가산점 5%를 받아 86점으로 전체 순위 5등을 했다고 그에게 자랑을 했기 때문이다.  
총무처에 전화해서 시험 성적을 받아본 그는 몹시 화가 났다. 어떻게 실제 시험 성적이 높은 자신은 불합격 처분되고 시험 성적이 낮은 친구는 합격할 수 있는지 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짧은 생각에도 그는 군가산점이 위헌이며 지나치게 평등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렸고, 그래서 시험 성적표를 근거로 헌법재판소에 군가산점 위헌 법률 심사 청구를 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만약 이때 그가 마음먹은대로 헌재에 위헌 소송을 냈다면 군가산점 문제는 좀 더 일찍 사회적 논란거리로 제기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구체적인 소송 절차를 몰랐던 그는 자문을 구하기 위해 주변의 아는 변호사와 선배들을 찾아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소송절차 대신 “헌법 소원을 내봤자 골치만 아프고 시간만 많이 든다. 소송할 시간에 차라리 시험공부에 매달리는게 더 나을 것”이라는 만류의 말만 들을 수 있었다.
마음이 흔들린 그는 헌법 소원을 내겠다는 생각을 접고 주위의 권유대로 다시 시험 공부에 매달렸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하루 13시간씩 공부하는 강행군을 한 끝에 다음해인 92년에 7급 공무원 채용 시험에 응시했다. 결과는 또 가산점 때문에 불합격이었다. 오기가 생긴 그는 잇따라 93년에 충청남도 7급 행정직 공채 시험에 응시했는데, 이때도 마찬가지로 군가산점 때문에 또 불합격 처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고등법원에서는 승소, 대법원에서는 원심 파기

이번 헌재의 군가산점이 위헌이다는 판결을 이끌어낸 결정적인 계기가 된 93년 충청남도 7급 행정직 공채 시험에서 그는 점수로는 합격자 45명중 순위 28등을 했다. 그런데 가산점이 적용되다 보니 133등으로 밀려 탈락했다.
여기서 잠시 다시 군가산점 얘기를 해보면, 보통 7급 공채 시험은 경쟁이 몹시 치열해서 소수점 아래에서 합격 불합격이 결정되는 것이 다반사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예가 그가 응시한 93년 충청남도 행정직 공채 시험에서 불합격 처리된 46등 동점자가 13명이었는데, 45등과 46등의 점수차가 1점도 아닌 0.56점 차이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박빙의 점수로 합격 불합격자가 결정되다보니 군가산점 5%를 받을수 없는 여성과 장애우 등이 공채 시험에서 합격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했다. 실제로 예전 공무원 채용 시험을 주관했던 총무처 통계에 따르면 6급 이하 공무원 채용 시험에서 가산점 없는 상태에서 합격자는 3% 미만에 불과하고 합격자의 97%는 군가산점을 받고 합격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어쨌든 3년 연속 군가산점 때문에 7급 공무원 채용 시험에서 불합격되면서 그는 무척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가산점 없는 상태에서 계속 공채 시험에 응시해 봤자 도무지 승산이 없었고, 그렇다고 모아둔 돈이 있어 있어서 장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 입장에선 자신이 벼랑 끝에 내몰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공무원 시험 공부를 포기하고 미뤄뒀던 소송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때 생각한 소송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헌재에 위헌 법률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그랬는데 도서관에서 법전을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한 법이 장애인고용촉진법이었다.
“93년만 해도 저는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있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고용촉진법이 있어서 이 법은 무슨 법이지 하고 보니까 국가 기관의 장애우 의무 채용율을 명시한 법 이더라구요. 그러면 법이 있는데 왜 안 지키고 있나 라는 의문이 들어서 총무처와 지방자치단체가 어떻게 시험을 시행 했는지 공고를 뒤져 봤어요. 그랬더니 9급 공채 시험에는 장애우 채용 할당률을 적용하고 있었는데 7급에는 할당률이 없었어요. 다시 고용촉진법을 보니까 법에는 장애우에게 적합한 직무 직급 직종 대상이 7급과 9급이 전혀 차이가 없이 동일했어요. 그 조항을 보면서 바로 이거다 라는 생각이 들었죠. 법은 7급과 9급이 동일한데 9급만 할당제를 실시하고 7급은 채용하지 않는 것은 행정관청이 이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위헌 소송 대신 행정관청이 장애인고용촉진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내가 탈락했다 이렇게 가닥을 잡고 대전지방고등법원에 충남도청을 상대로 고용촉진법을 제대로 지키라는 행정심판을 청구했죠.” 
그가 소송을 시작한 것은 94년 2월이었다. 소송 요지는 충청남도가 7급 채용시험에 할당률을 적용하지 않은 것은 장애우는 9급 정도의 직무에 적합하다는 편견에 바탕하고 있는데, 이는 헌법이 보장한 장애우의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기 때문에 위법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그후 1년 6개월을 끈 재판에서, 비싼 선임료 때문에 변호사를 선임할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못한채, 혼자서 자료를 찾고 직접 수 천 페이지의 증빙서류를 준비해서 재판에 임했다.
“실제 재판을 해보니까 엉터리였어요. 법원에 준비서면을 제출하러 가면 진술할 기회도 줘야 하는데 1분도 채 안 걸려서 재판이 끝나는 거였어요. 제가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아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죠. 그래서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판단이 들어서 시민단체와 장애우단체를 찾아다니며 도와달라고 요청 했어요. 그렇지만 별반응이 없었어요. 할 수 없이 친구들을 동원했죠. 점차 방청객이 늘어나고 일부 언론에 제 재판이 보도되기 시작하면서 재판 분위기가 확 달라졌어요. 진술할 기회도 주고, 그래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했죠.”
그는 고등법원 재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있는데 왜 9급과 7급 공채 시험에 동일하게 적용하지 않느냐, 법에서 의무조항으로 정했으면 법대로 해야 한다. 의무조항은 이행하라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9급은 이행하고 7급은 이행하지 않은 충청남도의 처사는 부당하다는 주장을 밀어 붙였다.
결국 그의 주장은 법원에 의해 받아 들여져 대전고등법원이 ‘충남도청은 7급 행정직 공채 시험을 치르면서 장애우고용촉진법 의무 조항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법하다.’는 승소 판결을 내리게 된다. 이때가 95년 8월이었다.
법원 판결이 나오자 언론이 나서 대대적으로 이 사실을 보도했다. 그러자 당시 충청남도 부지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법원 판결을 존중해 신속하게 임용절차를 이행 하겠다.”고 밝혔다.
이제 그가 충청남도 7급 행정직 공무원으로 임용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뿐 의심할 수 없는 대세였다. 그는 안심했고, 공무원으로서의 새 삶에 대한 기대로 부풀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는 지독하게 운이 없는 사람이었다. 충청남도가 임용절차를 이행 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간단히 그 약속을 뒤집어버렸던 것이다.
법원 판결이 난지 세 달 이 지났지만 도청에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왜 임용 절차가 늦어지나, 궁금했던 그는 도청 인사과를 찾아가서 담당자에게 “언제 임용 되는지 궁금해서 왔습니다.”라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담당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건 대법원에 상고 됐어요.”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즉 충청남도가 고등법원 판결에 불복해서 대법원에 상고 했다는 말이었다. 그는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가까스로 이성을 찾은 그는 “부지사가 직접 이행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어떻게 상고할 수 있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담당자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로 부지사와 도지사가 다 바뀌었다. 윗 사람들은 다 바뀌고 우리는 별도의 지시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상고할 수밖에 없었다.”며 “상고 취지를 말씀드리면 법률 검토 결과 우리는 장애우고용촉진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7급을 선발하든 9급을 선발하든 장애우에게 이익을 주는 부분이기 때문에 시험 실시기관 재량에 속한다는 취지로 대법원에 상고 했습니다.” 라며 묻지도 않은 상고 이유까지 알려줬다.
충청남도의 상고로 다시 원점에 서게된 그, 그러나 그는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는 도청에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로 윗사람들이 바뀌었다지만 어쨌든 충청남도가 언론을 통해 임용 하겠다고 약속한 사항이다. 그러니 다시 검토해서 약속을 지켜달라.”는 건의서를 내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렇지만 돌아온 회신은 바뀐 도지사와 부지사는 사전에 보고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내용 뿐이었다. 한술더떠 충청남도 인사계 과장은 “시간이 조금 걸려서 그렇지 이 건은 고등법원에서 승소했기 때문에 대법원에서도 승소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대법원 판결 나올 때까지 기다려라.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이 나오면 우리도 이행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기는 거고 당신도 떳떳할텐데 뭘 그렇게 조급하게 생각하느냐”며 핀잔까지 줬다.
그렇지만 그는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인사과를 찾아가 “나한테는 긴 세월 고생해서 얻어낸 소중한 판결입니다. 그러니까 상고를 취하 하는 배려를 해주십시오.”
라고 졸랐다. 그렇게 그가 간절하게 매달리자 얼마 후 인사과에서는 차선책을 내놨다. “상고는 취하할 수 없고 대신 대법원 판결 나올 때까지 경제적으로 고충이 있을 테니까 배려를 하겠다."며 "대전에서 출퇴근 하기도 쉬우니까 판결 나올 때까지 근무해라.”라며 충청남도보건환경연구원 가축위생시험부 지방위생원 시보라는 복잡한 이름의 기능직 9급 자리에 그를 임용했다.
“가축위생시험소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미리 설명해 줬으면 가지 않았을텐데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는 일체 설명을 안 해주고 무조건 출퇴근 하기 쉽다고만 그래서 가게 됐어요. 가보니까 하는 일이 주로 가축 전염병 예방하는 곳이었는데 서무계도 있었지만 제가 발령 받은 곳은 방역계였어요. 가축 피 뽑아 오고 예방주사 놓는 것이 해야 할 일인데 막말로 행정학을 전공한 제가 가축 전염병에 대해 뭘 알겠어요. 그래서 가서 그냥 가만히 있었죠. 정말 황당하더라구요. 나중에는 제가 답답해서 저 일 못합니다. 해고하든 말든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나가지 않았는데 그래도 월급은 꼬박꼬박 주는 거예요 그냥 조용히만 있으라는 거였죠. 95년도 10월 18일 부터 98년까지 3년여 동안 집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다른 직원이 주사 놀 때 소꼬리나 잡아주고 지냈어요. 거기 다니면서 얻은 유일한 수확은 사람이 홧병 들어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죠.”
그는 괴로워하면서도 일단 대법원 판결이 나올 때까지만 기다리자고 마음을 추스렸다. 충청남도 인사과에서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 신속하게 임용 한다고 약속 했으니까 그때는 적어도 딴소리는 안 하겠지.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면서 그는 세월을 보냈다.

 

군가산점은 약자의 권리 박탈 주장

그가 애타게 기다리던 대법원 판결이 97년에 나왔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뜻밖의 판결이 내려졌다. 그는 꿈에도 파기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대법원은 충청남도와 총무처 그리고 노동부의 주장을 받아들여 장애인고용촉진법의 의무고용 조항을 지키는 것은  시험 실시기관의 재량에 속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고등법원에서 위법하다고 내린 판단이 잘못 됐으며, 따라서 파기 환송한다고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저는 지금도 당시 대법원 판결이 잘못 됐다고 보고 있어요. 제가 소송을 낸 것은 장애우에게 이익을 안 준게 위법한게 아니라 불이익을 준게 위법하니까 이 부분에 대해 판단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대법원은 불이익을 준 부분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일체 언급을 하지 않고 이익을 주는 부분에 있어서는 국가의 재량이다 그러니까 위법하지 않다고 판결을 내렸어요. 막말로 판단해 달라고 한 건 안 하고 엉뚱한 판단만 내린거죠.”
대법원 판결을 지켜보면서 그는 한순간에 법이 엉터리라고 단정 지었다. 이미 고용촉진법은 법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정부가 고용촉진법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지키지 않으려고 반발하고, 거꾸로 이행을 안 한게 적법하다고 주장하는 게 도대체 무슨 법인가, 그 생각끝에 그는 법이 장애우의 자유권과 평등권을 무시하는구나. 법관들도 장애우에 대해서는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고, 따라서 이제 장애우로 싸우면 안되겠다. 앞으로의 싸움에서는 장애우도 장애우이기 전에 인간이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대로 원심이 파기돼서 대전지방고등법원에서 다시 재판을 시작해야 했을 때 그는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강하게 주장했다. 당시 그의 주장은 이랬다. 장애우도 인간으로서의 자유권과 평등권이 있다. 이익 안주는건 좋다. 그런데 어떻게 헌법에 명시된 자유권과 평등권을 침해할 수 있는가, 그런 헌법적인 근거는 없다. 재판도 어떻게 보면 국가의 공권력에 불과한데, 공권력은 인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는거지 침해 할 권리는 없다. 내 주장은 장애우에게 이익을 주기 이전에 불이익을 주지 말아야 한는 것이다. 이익을 준다는 전제는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는 전제가 당연히 포함된 거다. 불이익을 주면서 이익을 준다는건 법적으로 성립되지 않고 근거가 없는거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그는 법을 집행하는 행정 관청 공무원들이 관행으로 위법을 저지르고 있다고 성토했다.
그런다음 그가 고등법원에 요청한 것은 위헌법률 제청 신청이었다. 고용촉진법이 위법하지 않다면 국가유공자예우법에 명시된 군가산점이 위헌이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 고등법원이 헌재에 위헌 법률 청구를 해달라고 신청했다. 그랬지만 고등법원에서 나온 판결은 이유없다. 기각한다. 그러고는 끝이었다.
오기가 발동한 그는 그러면 내가 한다고 마음먹고 마침내 헌법재판소에 직접 헌법소원을 내게 된다. 그런데 헌재에 위헌 소송을 낼 경우 변호사 강제주의를 채택하고 있어서 반드시 변호사를 선임해야만 소송을 할 수 있다. 선임비가 없었던 그는 궁여지책으로 학교 선배중 안면이 있는 변호사를 찾아갔다. 소송은 내가 할테니 이름만 걸어달라고 사정해서 가까스로 위헌법률 이유서에 변호사 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97년 말과 98년 4월에 걸쳐 그는 헌재에 두 건의 헌법 소원을 냈는데 98년 4월에 낸 헌법소원은 언급한대로 군필자 가산점이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이었고, 그전 97년말에 낸 헌법소원은 공권력에 의한 기본권 침해가 부당하다는 내용의 헌법소원이었다.
그러면 그는 군가산점 위헌 소송외에 공권력에 의한 기본권 침해가 위헌이라는 소송은 어떤 이유로 제기했을까,
“공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법률 명령 규칙 처분 등 국가가 일방적으로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입법권 행정권 그리고 사법권을 행사하는 것을 말하죠. 분명한 것은 헌법상 근거없이 자유권이라든가 평등권 그리고 능력에 따른 기회균등권을 제한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없다는 거예요. 제가 장애우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면 가장 강력한 권리가 자유권이예요 자유권을 법률용어로 배타적 권리라고 하는데 국가 권력에 대해서 대항할 수 있는 권리가 자유권이죠. 왜냐하면 자유권은 헌법이 보장한 권리예요. 주권자인 국민이 국가를 지배할 수 있는 권리가 자유권인거예요. 그런데 대법원 판결은 바꿔서 얘기하면 장애우에겐 자유권이 없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었어요. 이건 장애우 문제 이전에 더 근본적인 부분에 문제가 있는 거죠. 어떤 나라든 자유권을 제한할 수 있는 규정은 없어요. 심지어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능력에 따른 기회균등권은 인정하고 있죠. 그런데 대법원 판결을 보면 현실은 분명히 제한을 했잖아요. 제가 복잡했던 게 권리 침해는 있는데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공권력을 걸어 이유가 어떻든 기본권이 침해된 것은 명백하니까 그 근거를 헌재가 밝혀라. 이런 취지로 헌법 소원을 제기한 거죠.”
그러나 그가 제소한 공권력에 의한 기본권 침해건은, 당시 재판이 진행중이다는 게 이유가 돼, 법원의 재판이나 구제 절차가 있으면 그 절차를 거친 다음에 헌법 소원을 내야 한다는 헌재법에 저촉돼 기각되고 말았다. 대신 군가산점 문제는 헌법소원이 진행돼 언급된 대로 위헌 판결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면 군가산점 문제의 본질은 무엇일까,
“군가산점은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40년 가까이 이어져온 제도예요. 그렇지만 헌법에 근거가 있는건 아니죠. 지금은 군제대자지원에관한법에 관련 조항이 있지만 예전에는 국가유공자예우법에 제대군인의 가산점을 인정 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어요. 국가유공자예우법은 말그대로 상이군경과 전몰군경 그리고 유족이 대상인데 일반 사병에까지 확대해 버린거죠.
그런데 국가유공자예우법을 보면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을 엄격하게 국가유공자로 한정해 놨어요. 거기에 제대군인 가산점이 어떻게 들어갔냐면, 법률 조항 끝트머리에 제대군인은 국가유공자에 준용한다는 단어를 한 줄 집어넣은 거예요. 그리고 이어서 다른 조항에다가 제대군인에 대해서 취업보호와 생계지원를 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넣으면서 군복무를 마친 자가 공개경쟁 임용시험에 응시할 경우 대통령령으로 국가유공자에 준용해서 5% 내외의 가산점을 부여할 수 있다고 해놓고, 규칙과 시행령에 이 조항에 근거해서 5% 가산점을 준다고 정한거죠. 그래놓고 정작 국가유공자예우법은 제대군인은 국가유공자가 아닌 자를 말한다고 모순되게 규정해 놓았어요. 공무원임용관련법에는 군가산점에 대한 어떤 근거와 규정도 없어요. 굳이 헌법에서 근거를 찾는다면 병역의무 이행으로 인한 불이익한 처분을 받지 아니한다. 라는 조항이 있는데 불이익한 처분을 받지 않도록 하면 되지 왜 가산점을 주고 특혜를 줘서 소수 약자의 권리를 박탈하느냐는 게 제 주장이었죠.”
헌재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가 제기한 군가산점 위헌 판결에서 다음과 같이 군가산점 문제를 언급했다.
첫째 군제대자에 대해서 가산점을 주는 근거가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면서, 헌법에 보면 병역의무 이행으로 인한 불이익한 처분을 받지 않는다는 조항과 국가유공자와 상이군경 유족은 우선적으로 근로의 기회를 부여 받는다는 조항이 있다. 그렇지만 제대군인은 군경 유자녀거나 국가유공자가 아니다. 따라서 군제대자에게 국가유공자에 준해서 가산점을 줄 수 있는 헌법적 근거가 없다.
두번째 그러면 병역의무 이행으로 인한 불이익한 처분을 막아주기 위해서 가산점을 주고 있는지에 검토 한다면서 결론은 그것도 아니다. 왜냐면 말그대로 불이익한 처분을 안 주면 그만이지 이익을 주라는 근거는 헌법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라고 판결했다. 오히려 군제대자에게 가산점으로 이익을 주고 있는 게 헌법에 위배 된다는 게 헌재 판결이다. 군가산점으로 인해 장애우와 여성 등 우리 사회의 헌법 질서가 보호하고 있는 소수 약자의 권리가 잠식 당하고 박탈당하고 있다고 헌재는 판단한 것이다.
이런 헌재 판결은 법률상으로는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다는 것이 다수 의견이다. 왜냐하면 헌법외에 국가공무원 임용 관련 법에도 공무원 임용은 시험성적과 경력, 그리고 능력의 실증에 의한다고 분명히 명시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차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방법 제시

정강용 그는 지금 휴직상태에 있다. 작년 6월 다니던 가축위생시험소에 휴직계를 냈다. 그가 휴직계를 낸 것은 이제 최종적으로 마무리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재판에만 매달린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손 털고 이제 갈 길을 찾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그는 토로했다. 그런 생각으로 헌재와 대법원에 낼 보충서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헌재의 위헌 판결이 나왔다.
그는 헌재의 군가산점 위헌 판결에 대해 “헌재로서는 최선의 판결이었어요. 만약 헌재가 위헌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면 헌재 자체가 큰 문제가 됐을 거예요. 헌재가 법대로 하지 않고 군가산점이 위헌이 아니라고 판결하면 국민들은 법에 대해 불신할 수밖에 없죠. 그뿐아니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나라 전체가 전부다 썩었다고 비난했을 거예요.” 그 연장에서 “이번 판결은 그동안 차별해 왔던 부분이 위법하고 법적인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헌재가 확인해준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군가산점 문제의 본질은 수차례 언급했지만 차별금지와 평등권의 제자리 찾기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군가산점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논쟁은 본질과는 거리가 먼채 여성과 남성으로 편이 갈려 감정적이고 세력싸움으로까지 비화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군가산점 제도 폐지에 반대하는 일부 남성들은 지금까지 남의 떡을 뺏어먹고 있던 사람들이예요. 그런데 지금 네 떡이 아니라니까 반발하는 거죠. 어쨌든 대안은 군가산점 폐지는 당연시 하고 다른 방안을 찾아야 해요. 그러지 않고 소모적인 논쟁만 되풀이 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게 사실이죠.”
어쨌든 이 시점에서 한가지 분명한 것은 헌재의 군가산점 위헌 판결로 가산점 때문에 잇따라 공무원 공채 시험에서 탈락했던 그는 구제가 유력시 되고 있다는 것이다. 별 일이 없으면 그는 조만간 충청남도 7급 행정직에 임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그가 7년여 동안 혼자 고독하게 벌여온 싸움은 과연 끝난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장애우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한 제 이 제 삼의 정강용은 계속 이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차별은 분명히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정강용씨, 지금 그가 돋보이는 건 장애우 차별 문제에 대해 장애우들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명쾌한 다을 제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태곤 기자/ 사진 김학리 기자

 

 

<박스기사>

 

대립이 아닌 합리적인 대안을 찾아야 한다

군필자에 대한 가산점 부여에 대해 헌법소원을 낸 사람은 정강용 씨 뿐만이 아니다.
지난 98년 10월 19일 여성단체인 한국여성단체연합과 한국여성단체협의회, 그리고 장애우단체인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98년 9급 공무원 시험에서 가산점제도로 낙방한 김정원 씨를 포함해 7급, 9급 공무원 시험 응시를 준비하고 있던 5인, 그중 1인은 장애우(조경옥, 이유진, 박은주, 김은정, 김형수)를 청구인으로 하여 ‘제대군인지원에관한법률’과 동법 시행령에 대한 위헌청구신청을 헌법재판소에 냈다.
헌법소원을 낸 김정원 씨는 당시 이화여자대학교 4학년에 재학중인 여성으로 98년 9급 국가 공무원 공개 경쟁 채용시험에 응시해 평균 점수보다 높은 93점을 받았으나 합격기준점수가 군가산점인 5점을 포함해 95점까지 올라가 탈락했다. 또 당시 연세대학교에 재학중인 뇌성마비 장애우 김형수 씨는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중이었다.
이때 헌법소원을 신청한 단체들은 “제대군인에 대하여 채용시험단계에서 시험만점의 5% 내지 3%의 가산점을 주도록 하는 규정은 제대군인의 지위에 설 수 없는 여성 및 장애우들에 대한 합리적 근거가 없는 차별, 즉 성별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한 차별을 주고 있다”며 군가산점제도의 폐지를 주장했다.
위 세 단체가 헌법소원을 낸지 1년 2개월만인 지난 12월 23일 헌법재판소는 군필자 가산점 제도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번 헌법재판소 판결에 대해 헌법소원을 낸 당사자인 장애우 김형수 씨는 “군가산점이 차별조항이어서 헌법소원을 내긴 했지만,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기각될 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위헌 판결이 나더라도 만장일치로 위헌 판결이 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는데 이번에 판사들의 전원일치로 위헌판결이 난 것을 보고 우리 사회가 합리적으로 가고 있음을 느꼈다”고 소감을 밝혔다.
여성계와 장애우 단체들도 일제히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당시 장애우단체중에서 유일하게 헌법소원을 낸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김정열 소장은 “헌법재판소 판결은 새로운 법 해석이 아니다. 기회의 평등이란 차원에서 장애우와 여성에게 위헌적 요소가 있는 군가산점을 폐지하는 것은 이미 벌써 이뤄졌어야할 당연한 일”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현재 상당수 군필 남성들은 헌법재판소의 이번 판결이 앞으로 공무원 취업 판도에 미칠 영향을 거론하며 헌재의 결정을 납득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그중 대표적인 의견을 보면 올 여름 현역으로 제대했다는 한 예비역은 한 여성단체의 게시판에 올린 글에 "공무원 시험에서의 가산점 5%는 그 시험에 응시하는 수험생이건 아니건간에,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그걸 보면서 이땅의 어둠의 자식들은 그래도 조국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를 해주는구나, 청춘을 바친 보람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헌법 재판소의 판결을 보면서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하고,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입장을 밝혔다.
 군필 남성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자 정부·여당은 대안으로 “어떤 식으로든 제대군인에 대한 사회적인 보상이 필요하다”며, 국가봉사 경력을 가점제 형태로 바꿔 가산점제를 유지하기로 한다는 방침을 내놓아 가산점 존치 논쟁에 더욱 불을 지핀 상태이다.
 정부 여당의 대안에 대해 연구소 김정열 소장은 “젊은 남성 네티즌들이 보인 반응에 대해 정부 여당에서 정확한 파악도 하지 않고, 얼마 남지 않은 총선만을 고려해서 여성들도 군복무기간 2년 6개월에 버금가는 3년여 기간동안 사회봉사를 하면 가산점을 주겠다고 발표한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라며 너무 성급한 대응이라고 평했다.
 한 장애우는 “군대문제와 여성문제, 장애우문제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건드리기 어렵고, 차별이 심한 부분이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한 사회의 합의를 도출해내는 과정에 진통이 따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여성과 남성의 문제도, 장애우와 비장애우의 문제도 아니다.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이나 여성, 장애우 모두 피해자란 점을 인정하고, 적대적인 분위기가 아닌 같이 살 수 있는 합리적인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갈수록 군가산점 문제가 여성과 남성의 성대결로 문제가 호도되고 있는 이때 차별금지와 평등권 구현이라는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 대안을 마련하자는 것이 장애우들의 대체적인 의견이었다.
그러나 장애계의 이런 입장과는 달리, 군가산점 폐지를 반대하는 일부 남성들은 현재 여성단체에 대적할 단체를 만들고 남성만 국방의 의무를 지는 것 역시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내기에 이르고 있다.

 

노윤미 기자

작성자이태곤, 노윤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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