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시인 최종진씨 > 세상, 한 걸음


[사람사는 이야기] 시인 최종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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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돌돌 말아 피는 이슬꽃이고 싶어라”

바람도 없는데 괜히 / 나뭇잎이 저리 흔들리는 것은
지구 끝에서 누군가 /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기 때문
- 사랑(1)전문

평소 알고 지내던 심성이 착한 선배 한 분이 하루는 이 시를 들려주며 어느 잡지에서 이 시를 본 후 자신과 같은 감수성을 갖고 있는 듯해 ‘최종진’이라는 시인과 연락을 하게 됐고 이후 소중한 인연을 갖게 됐다고 흐뭇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장애우라고 가끔씩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는데 얼마 전 만난 다른 잡지사의 기자도 존경어린 말투로 소개한 적이 있었던 터라 부쩍 관심이 생겨 그의 시·글묶음을 얻어 읽어 보았다.
그 원고 가운데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매일 스물 네 시간 자유가 주어진다면 어떻겠습니까? 너무 좋을 거라구요? 그렇겠지요.
쫓기듯 살아가는 바쁜 생활과 쳇바퀴 돌아가는 따분한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껏 여유를 누릴 수 있을테니까요. 제겐 매일 그런 자유가 주어진답니다. 마냥 좋기만 하고 전부 활용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소중한 시간이 많이 주어진 셈입니다.”
그러나 최종진(44) 씨가 그 시간의 자유를 얻은 대신 잃은 것도 많았다. 교통사고로 두 다리와 한 쪽 손의 자유를 잃음과 동시에 자연히 일자리도 잃었고 몇 년 후 부인과도 헤어지게 됐다. 목 이하의 신체기능이 거의 마비된 상태인 그와 같은 전신마비장애우, 아니 하반신마비 장애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몸을 잃은 대신 얻게 된 그 스물네 시간의 자유라는 것이 너무도 보잘 것 없이 느껴져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모든 치료를 거부하며 자포자기상태에 빠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는 이처럼 평온하게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서울에서 먼 길을 돌아 경남 양산으로 최종진 씨를 찾아가는 동안 내내 그 점이 궁금했다.
 
오토바이출근길 덤프트럭과 부딪힌 후

그는 원래 초등학교 교사였다고 했다. 중학교 교사가 되겠다는 오랜 꿈은 영어교육학과에 입학하면서 절반은 실현된 듯이 보였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더 때묻지 않은 시기의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에게 더 맞고 의미도 있겠다 싶어 다시 교육대학에 입학했다고 했다.
졸업 후 울산에서 사 년여 교사로 일하는 동안 그는 행복했다. 순진무구한 아이들하고 보내는 하루하루가 즐거워 교직이 자신의 천직임을 느꼈다고 했다. 그 시기 남들처럼 평범하게 결혼도 했다. 그런데 다른 교사들은 쉽게 쉽게 해내는 것같은 수업준비가 그로서는 갈수록 부담이 됐다. 주로 오륙학년을 맡았으니 대여섯시간의 수업을 해야 하는데 매시간의 수업을 준비하고 여러 사무적인 일을 처리하다 보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데 자신은 그렇게 잘 해내지 못하는 것 같아 조금씩 자신감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교사란 직업은 자신이 더 많은 사회경험을 한 다음에 다시 돌아와서 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마침 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되면서 의료보험조합 직원을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시험을 쳐서 5급 지소장으로 취업을 했다. 의료보험에 대해 농어촌에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성을 홍보하고 보험비를 내도록 독려하는 것이 일이었다.
고향인 김해로 돌아와 오토바이를 타고 자유롭게 마을 곳곳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그에겐 적성에 맞는 듯했다. 그가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닌 덕에 그가 맡은 마을은 단위지역 내에서 가장 높은 보험료 징수실적을 올렸고 그는 그 공로로 상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일년 여 신나게 일을 하던 팔십구년 일월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한적한 국도길을 따라 출근을 하던 길이었다. 거기까지 기억을 하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한 달 반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탄 오토바이는 덤프트럭에 치였던 것이었다. 사고 당시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도 덤프트럭을 본 기억이 없는데, 목격자는 없고 그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모든 것은 그의 과오로 돼 있었다. 그런데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그런 사실도 또 몸을 꼼짝할 수 없는 전신마비장애우가 됐다는 사실도 그는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일년 육개월 동안 재활의학과에서 물리치료도 받고 퇴원했는데 제가 좀 멍청해서요, 제 몸이 그렇게 됐다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느낌이나 감정변화도 없이 그냥 이래도 사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생각하는데는 지장이 없으니까, 이렇게도 살고 저렇게도 살고 그냥 비슷비슷하게 사는 거지, 하고 생각했어요.”
당시에는 산재보험이 널리 활성화되지 않아 그 혜택은 못받고 병원비와 이천여만원의 보상비만을 받은채 구십년 유월 퇴원했다. 살림은 갈수록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왼손은 불완전하게나마 움직일 수가 있어 부인이 휠체어에 앉혀 주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인양 열심히 책을 읽었고, 그 시간만큼은 더할 수 없이 평안했다. 지금도 작은 소식지까지 합해 그가 한 달에 정기구독하는 잡지만도 사십종류에 달한다고 한다. 책은 교보북클럽을 통해 전화로 주문해 배달받아 읽고 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읽고 또 읽은 것을 머리로 또 가슴으로 되새기는 사이 자신에게는 조금 거리가 있는 듯 느껴졌던 시(詩)가 그의 삶에 들어왔다. 물론 대학에 다닐 때 문학동아리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시를 쓰게 될 줄은, 그것도 남들에게 발표까지 하는 시인이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 한 사년이 되네요. 그 전까지는 문학에 관심은 있었지만 시를 써서 남에게 보이는 것 보다 그냥 내 삶이 한 편의 시가 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시를 쓰기 시작해 지난 삼년 동안에는 구십편을 썼으니 많이 썼지요. 조금씩 끄적거린 시들을 녹색평론이나 솟대문학 같은 잡지에 보내서 활자화된 걸 보니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그래서 내친 김에 일년 반 정도 걸려서 솟대문학에서 삼회 추천완료도 받았어요.”
그와 동시에 주위 선배문인들에게 수소문해 문학이론서도 소개받아 열심히 공부를 했다.
간결하게 몇 마디의 시어로 압축해 표현하는 특성상 글자 하나라도 정확하게 쓰여져야 한다는 걸 깨닫고 맞춤법과 띄어쓰기 공부도 열심히 했다.
왼손이 완전하게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게 운동기능이 남아있을 뿐이어서 처음엔 시를 손으로 옮겨 적는 데에도 시간이 좀 걸렸다. ‘그리듯’ 글씨를 써야했던 것이다. 이제는 별다른 불편없이 글씨를 ‘쓰고’ 그림도 제법 ‘그릴’ 정도가 됐다. 그가 ‘그림시’로 이름붙인 시화 형태의 작품도 육개월 사이 벌써 오십편에 다다른다.

 

돌을 놓아 사람사이 징검다리를 만들듯

그는 한 달 동안 세상에 내놓은 시와 산문, 시그림들 가운데 언론지면에 발표됐거나 잘된 작품을 추려 모아 ‘징검다리’라는 이름으로 묶어 자신의 개인 후원자나 지인들에게 우편으로 보내주고 있다. 구십삼년부터 시작한 징검다리의 독자수는 현재 백삼십명를 헤아리고 있다.
징검다리의 첫 장은 그간 느꼈던 것들 가운데 후원자인 독자(고운님이라고 그는 부른다)들과 대화하고 싶은 내용을 산문으로 정리해 담고 이어 후원자 이름과 보내준 금액, 물품을 빼곡히 적는다. 그가 나온 김해대동중학교나 진주교대의 지역동문회나 동창들 뿐만 아니라 그의 시를 읽고 감명을 받은 독자들도 후원자들의 대열에 서 있다. 그들은 가끔씩 먼 양산까지 직접 찾아오기도 해 최종진 씨에게 남다른 기쁨을 안겨준다.
놀라운 것은 그 후원금 액수가 꾸준히 백만원을 훌쩍 넘은 수준이라는 것이다. 최종진 씨가 자신이 받은 것을 고지곧대로 적어 알려주는 것을 보고 ‘이 정도의 후원이면 나는 안해도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기자는 공연히 걱정도 됐지만 충분한 인간적 유대감과 신뢰 아래 지속되는 일이라 아이엠에프에도 별다른 액수의 변화가 없었다며 그는 감사해했다.
“후원금을 제가 많이 받는 거라는 걸 알죠. 아마 저같은 예도 아주 드물텐데 제 사명을 다하라고 다들 도와주시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 사명은 시를 잘 쓰는 거겠죠. 독자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좋은 시를 말예요. 저같이 불리한 신체적 여건에 있지만 그래서 더 열심히 잘 살아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간혹 삶에 지치고 힘들어질 때 저를 보며 이 사람도 저렇게 열심히 사는데, 나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하고 다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제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야죠. 그래서 후원하는 분들께 제가 감사하다고 전화를 하면 그 분들이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오히려 자신이 고맙다고 하시는 경우도 많아요. 도운다기 보다 나눌 수 있는 뿌듯한 행복을 줘서 고맙다고요.”
여하튼 그 후원금은 그에게 남다른 의미가 된다. 일단 늘 깨어있을 수 있게 생각의 소재를 스스로 공급하기 위해 읽는 모든 잡지와 책값의 부담에서 조금 자유로울 수 있는 것도 고마운 일이지만 현재 여든셋인 아버지와 일흔여덟이신 어머니에 의존해 살아가는 처지라 부모님 사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서 그래도 그가 그 나름의 앞날을 준비할 수 있는 자산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한 삼 년 동안 제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준비를 해가야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기거할 수 있는 조그만 아파트랑 유료봉사의 형태로 저를 돌볼 수 있는 분을 찾아야겠죠. 사랑이나 결혼은 기대하지 않고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일본에서는 저같은 장애우들에게도 제도적으로 그런 생활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기대할 수도 없고, 제가 구상하고 있는 형태의 생활도 아직까지 국내에 그런 예가 없으니 힘들 거라는 생각은 합니다. 지금 제 손발이 되어주시는 어머니가 삼 년은 버텨주셔야 하는데 아버님도 노환이 있으시고 어머니가 편찮아서 걱정이에요.”
어머니는 징검다리 발송에 필요한 모든 일을 다 도맡아 하신다. 매월 일일 은행에 가서 통장을 확인하고 이일에 복사하고 풀칠하고 삼일에 발송을 하는 체계가 몇 달째 계속되고 있다. 거기에 글을 쓰는 것 외에 모든 일은 어머니 담당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매월 해야할 일이 있고, 그 이전에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알기에 그는 나날이 더 큰 희망을 가슴에 품을 수 있게 됐다. “사실 제 몸은 퇴원할 때하고 똑같지만 그때보다 제 자신이 지금은 훨씬 적극적이고 당당하고 희망적이에요. 할 수 있는 일도 더 많아졌구요.”
 
오랜 화두, 자연 그리고 죽음

그의 시들은 자연시가 주조를 이룬다. 워낙 대학시절부터 그런 부분에 관심이 있었는데 사고후에도 관심이 자연스럽게 계속 이어지더라는 것이다. 그가 존경해마지 않는다는 김종철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진정한 시인은 본질적으로 가장 심오한 생태론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고. 그래서 인지 최종진 시인도 육십억 인구가 살아가고 있는 지구의 안녕이 걱정스럽다. 그같은 내용이 주조를 이루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와 〈녹색평론〉 등과 같은 잡지에는 최종진 씨의 고민의 결정체가 시어들로 담겨지곤 한다.
‘마냥 고맙고 감격스러운 일만 있는 것이 아닌 세상사, 부딪치고 고민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요.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지구별에 60억 인구가 살게 되었다는 어쩌지 못할 사실입니다. 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거기 따라 일어날 일들이 심각하겠지요. 쉽게 잡히는 문제는 분배와 인권에 관한 일인 것 같습니다. 빈부의 격차를 줄이고 인권을 드높이는데 많은 인구수는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지구 생명의 지속적인 보존일텐데, 여기 이르러선 신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당대뿐 아니라 후손들에게 살만한 지구별을 물려주기 위해 60억 지구인이 지혜를 짜내어야겠구나 하는 착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징검다리 제62신 중에서)’
그는 장기수 문제나 대인지뢰와 관련된 사회문제도 고민해 시로 나타내고 있다. 그가 예전에 한 목사님과의 인연으로 접하게 된 민중신학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사고의 지평이 그렇게 더 넓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과 같은 장애우들의 복지예산이 왜 그렇게 적은지, 국방비 예산은 왜 그렇게 많아야 하는지 알기에 때로는 분노도 인다.
‘죽음’도 그가 오랜 동안 붙들고 있는 화두다.
“언젠가부터 죽음에 대해서 연구를 해봐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밝은 측면으로 보면 죽음이란 게 변화이고, 한 단계 높아지는 거지요. 뱀이 허물을 벗듯이, 누에가 나비가 되는 것처럼 인간의 육체에서 영혼이 떨어져나가는 것이지만 영혼은 죽지 않지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를 얻는 것이고 또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렇게 죽음을 연구하다 보니 영혼이 성숙하고 커진다는 느낌이 들어요. 영혼에 대해서도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고… 바로 그것이 제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해답을 아직 찾지는 못했지만요.”
한동안 봇물처럼 터져 나오더니 최근에는 시상이 잘 떠오르지 않아 그는 요즈음 조금 고심하고 있다. ‘좋은 시 한 편 써 놓고 스스로 만족하며 활짝 웃어보는 일’, 이것이 그가 첫손 꼽는 그의 새해 소망이다. “그러기 위해 많은 준비가 필요하겠지만 서두르진 않을 것입니다.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글에 생명이 깃들 것이라 생각하면서.” 징검다리 통신에 밝힌 대로 그는 조금 느긋하게 생각하자고 다잡고 있는 중이다.
산문쓰기도 그가 도전해 보고픈 영역이다. 시는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그대로 써왔기 때문에 쉬웠지만 여러 번 퇴고도 하면서 제대로 된 산문도 써보고 싶다. 일단 체력적으로 여러 페이지 가득히 글을 채워가는 일은 힘이 빠져 오래 하기가 어렵지만 그래서 물리적으로 힘든 일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컴퓨터를 배워 긴 막대로 자판을 눌러가며 친 적이 있지만 그는 손으로 쓰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자꾸 손으로 쓰다 보니 필체 좋아졌다는 소리도 많이 듣는단다.
침대에 누워있다 어머니의 도움으로 앉게 되면 자그마한 상을 펴고 두 시간 정도 등받이 없이 앉아서 글을 쓸 수 있다고 한다. 더 이상은 무리여서 누웠다 다시 일어나기를 하루 종일 계속 반복한다. 휠체어에 앉혀만 주면 하루 종일 앉아 있을 수 있지만 어머니가 그럴 힘이 없어 늘 침대생활이다.
 
올해 네 번 외출하기를 소망

늘 누워 지내는 그가 넓은 창이 있고, 전망 좋은 방에 있으면 좋으련만 그의 방에 있는 창은 침대 위에 조금 높게 조그맣게 나있을 뿐이었다. 누운 상태에서 보면 다른 아파트건물 사이로 아주 자그만 하늘과 나뭇가지의 일부분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다행히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 오전에 그는 바깥바람을 쐰단다. 멀리는 아니고 부모님이 방청소를 할 동안 아파트 현관 바로 앞에 나가 있는 수준이지만 그는 그 동안 일주일 동안 되새길 바깥 풍경을 눈에 가슴에 꼭꼭 담아놓고 온다고 했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물었지만 그것은 오래 전에 마음에서 접은 듯했다. 아니, 이미 징검다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만나는 터라 더 이상의 욕심은 부리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는 시작(詩作)을 위해 바깥외출의 기회를 더 갖게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작년에는 봄하고 가을에 부산지역 장애우단체에서 차량이랑 자원활동자를 배치해줘서 야유회에 갔었거든요. 나가니 참 좋대요. 한 번은 양산 통도사에 갔는데 선물가게에서 풍경을 봤어요. 그걸 보고 제가 시 〈풍경 1, 2〉를 썼잖아요. 아무래도 눈으로 직접 보는게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겨서 시상을 떠올리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올해는 계절마다 한 번씩은 조금 멀리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에게 마지막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당신과 같이 누워만 지내는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어떤 말을 해주겠느냐고 물었다.
“여러 모로 달라진 상황이지만 그 나름의 길 가운데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해주고 싶네요. 절망하고 자포자기하기 보다 자신에게 적합한 또 다른 삶의 방법을 연구해야지요. 변화된 모습으로도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과 삶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 그를 만나고 오면서 들었던 생각 한 가지가 있다. 영혼을 살찌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흔히 말하는 물질은 어느 날 닥친 불의의 사고로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어떠한 모습으로 어떤 위치에 놓일지라도 자신 스스로를 놓지 않기 위해 영혼을 살찌우는 일도 정말 게을리 말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자꾸만 하늘 높은 곳을 향하여
사람사는 집들이 올라가는데

그리운 사람하나 낮게 엎드려
지구의 숨소리에 귀 기울인다
- (움집) 전문

그 그리운 사람 하나, 최종진 시인은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를 보고 지구 저편에서 흐느껴 우는 사람의 거친 호흡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기에 좁은 방안에 늘 갇히듯 지내야 할지라도 그렇게 이미 지구와 늘 대화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한 대화를 반복하다보면 인간의 참된 영혼의 길을 찾는, 구도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이 구도의 길을 가고 있다고 담담히 말하곤 했다. 기자는 자원활동자가 필요하지 않느냐, 사람이 그립지 않느냐고 재차 물었지만 존재적 고독 외에 그에게 조금 무게가 더 가있는 듯한 외로움이란 것에도 그는 의연했다.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는 영혼의 그 무엇, 그것을 그는 벌써 알아가고 있는 것일까. 다음 글에서처럼 말이다.
“(제 올해 소원의) 둘째는 고운님과 내가 하나이고 나와 우주가 하나이며, 삶과 죽음이 신과 내가 나아가서 삼라만상 우리 모두가 하나임을 가슴깊이 느껴보는 일입니다. 그러면 삶에 드리워진 많은 그늘들이 환한 빛으로 밝아지기도 하리라 믿으면서 고운님의 응원을 기다리며 두 가지 소망을 이루리라 다짐해 봅니다.  (징검다리 64신 중에서)
그렇게 환한 빛이 비추는 때가 바로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아침" 일까 멀리서 방문한 기자에게 주기 위해 미리 준비해 두었다는 글묶음집의 맨 앞장에서는 "어둠을 지나 아침이 오면 그리움 돌돌 말아 피는 이슬꽃이고 싶다." 고 써 있었다.

 

글, 사진 한혜영 기자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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