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만화가 이해경씨 > 세상, 한 걸음


[사람사는 이야기] 만화가 이해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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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불과 물을, 바람을 품고 사는 여자

 

이해경 씨를 만나기 전날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강당에서는 시각장애우 황세경 씨가 자신의 편입학 원서접수를 거부한 청주서원대의 처사와 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각 언론사 기자들에게 알리는 기자간담회가 진행됐었다.
시각장애우인 황씨가 최고 학부인 대학과정을 마치고 교사자격을 따기 위해 또 다른 대학의 문을 두드리기까지 기울여야했던 절절한 노력과 수고는 간담회 도중 기자들의 놀라움 섞인 질문과 탄식 사이로 조금은 담담히 묻어나왔다. 그러나 황씨가 무사히 편입을 해서 원하던 음악교사 자격증을 딴 후 그의 꿈대로 같은 처지의 장애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안착하기까지는 또 다른 산을 하나 넘어서는 것만큼의 어려움이 놓여있을지 모른다.

 

‘초등학교 삼일’이 학력의 전부
  

그에 비하면 단 삼 일간 초등학교를 다닌 것이 이력서에 기재할 수 있는 학력의 전부인, 거기다 심한 지체장애를 갖고 있는 이해경(49) 씨가 현재 점하고 있는 사회적 위치는 어찌 보면 화려해 보이기까지 하다. 한국만화선교회 부회장을 거쳐 구십칠년부터 삼년간은 명지대 사회교육원에서 만화를 가르치는 강사로 출강하기도 한 그이다.
물론 장애우고, 그것도 열 사람 가운데 서너 사람이라도 이름을 들으면 알 정도로 유명한 만화가는 되지 못해 명지대측이 그를 강사로 채용하기로 결정하기까지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그 때가 사회에서 처음으로 받은 ‘장애차별’이었다는 사실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한 장애우가 가정 이후에 처음 타인들의 무리에 본격적으로 속하게 되는 학교 사회는 또 다른 의미에서 차별이 시작되는 첫 관문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그 때까지는 차별받아본 적이 없었어요. 물론 저를 놀리는 동네친구들도 있었죠. 그러면 저는 기다렸다가 사흘 후에라도 그 아일 만나서 이로 악 물어버렸어요. 그렇게 두 명한테 했더니 그 다음부터 절대 놀리는 아이들이 없던데요.(웃음)”
그의 가족들이나 동네 사람들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에게 익숙해졌다면 그가 이후 속하게 된 만화가 그룹의 동료들도 오랜 동안 그이를 봐왔기 때문인지 그를 장애우가 아닌 그저 동료로서만 대할 따름이다. “그래서 날 좀 도와줘야 할 상황에서도 그걸 잊어버려 골치아플 정도”라는 것이다.
어찌됐든 휠체어를 탄 최초의 직업만화가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그는 적지 않게 매스컴을 타기도 했다. 그것도 학벌이 전무한 여성만화가가 대학 부설기관의 강단에 섰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모 신문에서 시리즈로 기획한, 학벌을 파괴하고 성공한 네 사람을 다룬 기획기사에 서태지와 함께 꼽혀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기실 정식 학부교육과정도 아니지만 대학 강단의 턱은 생각보다 높았다. 그곳의 선배 만화가가 그를 강사로 추천했을 때 “제가 장애가 있는데...”하면서 미적거리던 그에게 “장애가 무슨 대수냐”고 했던 사람은 그 선배였다.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그 선배도 곧 “칠판쓰기도 어렵지 않겠느냐”는 등의 이유로 거부하는 학교측의 입장을 낙담스러운 표정으로 전하며 미안해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더욱이 다른 사회영역보다 열려 있다고 하는 대학사회에서조차 장애우라는 이유 하나로 자신을 내친다는 것은 묵과할 수 없어 자신뿐 아니라 앞으로 다른 장애우들을 위해서도 뿌리뽑아야 하는 일이라 생각됐다. 그래서 그는 당시 명지대 총장이던 고건 씨에게 직접 편지를 썼고 나중에서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고건 씨가 담당자들에게 불호령을 내려 그 다음 해에는 무난히 강의를 할 수 있었다.
  
이해경이 강단에 섰었다는 선례를 남기고파
  
물론 학벌이 없는 그의 임용을 놓고 다른 강사들이 끝까지 심술을 부려 토요일 오전에 두시간 강의를 맡을 수 있었을 뿐이다.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은 밤샘작업이 예사이기 때문에 아침에 일찍 강의를 들으러 올 것으로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강의실에 두세명을 앉혀놓고 강의를 진행하기가 예사였다.
그런 모멸도 자신과 같은 무학벌의 장애를 가진 여성 만화가가 강단에 섰었다는 선례를 남기기 위해 그는 참아냈다고 한다. 그리고 계속되던 인터뷰 제의도 그런 사실을 알리고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받아들이게 됐다.
그렇게 처음 언론에 사연이 보도되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잡지와 방송인터뷰제의가 이어져 그도 어느새 조금은 유명인사가 돼갔다. 덩달아 명지대 사회교육원도 매스컴에 오르내리면서 그는 알게 모르게 학교이름을 알리는 홍보우먼의 역할을 하게 됐고, 사회교육원내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기도 했다. 삼 년쯤 계속하던 강의를 지금은 하고 있지 않지만 노동부 부설 인력관리공단이 마련한 직업훈련과정에 만화강사로 나서기도 했다.
요즈음 교육계에는 대안교육이다, 학교에 보내지 않는 대신 부모가 전담교사가 되어 가르치는 가정학교다 하는 새로운 시도가 드물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고, 서태지로 대변되듯 학교를 그만 두더라도 하고 싶은 일에 매진하는 젊은이들이 예전만큼 그렇게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긴 하다. 그렇게 달라진 시대 분위기 속에서 무학벌의 그도 예전보다는 당당한 마음일까.
“제가 학교를 다니지 못한 것, 그래서 학벌이 없다는 것이 절대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요. 아래에 네 명의 동생이 있고, 철도공무원이었다가 지병으로 다리를 절단한 다음부터 생활을 놓으신 아버지를 돌보느라 어머니가 저한테만 매달려 통학을 시킬 수가 없어서 학교는 삼 일만에 포기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당시 어머니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뿐이죠. 저는 학교교육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학교에서, 또 거기서 만나는 또래집단에서 배우는 것이 많잖아요. 대다수의 사람을 위한 사횐데 저처럼 몇몇 특별한 예가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겠죠.”
장애 때문에 정식교육을 받지 못한 장애우들이 도전하는 그 흔한 검정고시도 그는 시도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런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다 자랄 때까지 그걸 몰라 못 봤다. 거기에는 전쟁 중에 태어나 장애를 입은 그인지라 다들 당장 먹고 살기에만 급급했던 시대탓을 해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대화를 해보면 금방 알 듯이 영어나 문학, 철학, 음악 부문에까지 박학다식한 그가 그러면 어떻게 스스로 공부내용을 잡아서 지식체계를 세워왔는지 궁금해졌다.  물론 해경 씨도 그 시작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였다. 그의 부모님은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도 한 달 동안 동네의 배움많은 분께 과외를 받도록 했다. 그 교사도 놀랄 정도였던 그의 불타는 향학열은 누구도 막지 못해 스폰지에 물이 빨리듯 한 달새 국어 수학 3년치를 해치웠고, 그렇게 눈을 빛내는 해경씨를 선생님은 많이도 예뻐했다.
  
글을 읽지 못한다고 만화가게에서 받았던 설움
  
해경 씨가 배움에 대한 절실한 필요를 맨처음 느끼게 한 것도 바로 ‘만화’였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 무료해하는 그이를 동생들은 만화가게에 업어 데려가곤 했는데 만화책을 오래 붙들고 그림만 보고 있다가 글을 못 읽는다는 것을 주인에게 들킨 후 비웃음을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더욱 단기간에 한글을 다 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후 신문 사설을 읽을 때 천자문책을 갖다 놓고 한자를 익혔고 시사적인 것은 대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집앞을 지나가는 고등학교, 대학교 오빠들에게 물어보면서 하나씩 알아나갔다. 그 오빠들도 모른다면 “에이, 그것도 모르느냐”고 오히려 구박을 줘가면서. 그런 그때를 “몸은 방안에 있어도 귀와 눈은 항상 대문 밖으로 향해 있었다”고 그이는 회상한다.
그렇게 해서 글을 읽고 그래서 만화그림에 담겨진 이야기를 오롯이 이해하면서부터 만화는 그에게 구원이었다. 보는 것 뿐만 아니라 무한한 상상으로 재미있게 이야기를 엮어나가면 황홀했고 그 만화 속 주인공을 사랑해서 자신의 분신처럼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만화가가 되는 것은 그의 삶에 전부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해마다 오월이 되면 만화는 범법자가 되어 종로 바닥에서 화형을 당하던 시대였다.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은 천박하고 무식하고 사회를 유해하게 하는 속된 인간들로 취급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만화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는 아무도 달가워하지 않고 그저 편물을 해봐라, 금세공을 해봐라, 그림에 재간이 있으면 초상화 그리는 걸 배워봐라, 하는 권유만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일어서지도 못하고 계속 엎드려 지내야 할 것 같은, 거기다 배움없는 맏딸이 만화로 먹고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그의 부모는 해경씨가 만화가로 자리를 잡기까지 적극 지원해준 편이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언젠가 역술을 하면 돈을 잘 벌게 된다는 소리를 듣고 역술책을 주면서 연구해 보라고 해 그를 통곡하게 하기도 했다.
당시 만화는 어느 예술 장르에도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미지의 세계였기에 그는 열심히 매달렸다. 오래 살지도 못할텐데 뭘 그리 열심히 하느냐는 얘기를 대놓고 서슴치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가슴 속에서 넘치는 희망과 배움에 대한 열망이 너무 뜨거웠기에” 그 말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그리고 또 그렸단다.
이런 그의 눈에 지병으로 다리를 절단한 후 완전히 달라진 아버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머니와 자신을 비롯한 오남매를 남겨두고 아버지는 자살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의 눈에도 자신보다 더 심한 장애를 가진 큰 딸 해경 씨가 삶에 굴하지 않고 이것 저것을 시도하며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는 모습이 어쩌면 신기해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딸 해경씨에게 죽고 싶지 않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아니예. 전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너무 많아서 오래오래 살면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텐데예. 와예? 아버진 빨리 죽고 싶습니꺼?”
해경 씨의 이 말에 아버지도 자극을 좀 받았을까. 아버지의 정신적 방황은 이후에도 계속 됐지만 해경 씨에게 아버지는 대체로 적극적인 조력자였다.
그 때까지는 이해경 씨 자신의 일대기 구분(?)에 따르면 사람들이 진력을 느낄 정도의 향학열에 불타던, 무척이나 외향적이었던 ‘소녀기’였다고 할까. 그런데 묘하게 이십대에 들어서는 자신의 내면으로만 파고들어 침묵을 하던 시기였다고 회상한다. 그에게 유일한 출구는 음악과 시와 함께 늘 자신을 찾아주는 디제이를 만날 수 있는 라디오였다. 칠 년 동안 그의 손에 라디오 두 대가 다 망가져 버려질 정도로 라디오 듣는 일에만 매달렸다.
또 삼십대부터는 ‘경험의 시대’라고 스스로 명명할만큼 많은 경험을 위해 세상을 돌아다녔다. 물론 목적은 더 좋은 만화작가가 되기 위한 것이었고 순간 순간 보고 듣는 것을 어떻게 그림과 스토리로 옮길 것이냐가 늘 화두였다. 그때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태도도 그에겐 세상을 읽는 코드를 일러주기도 한다.
  
소녀기, 폐쇄기, 경험의 시대를 지나
  
동생이 휠체어를 밀어주어 같이 재래시장을 구경갔을 때였다. 좁은 길을 헤치고 가다가 그만 나물장사를 하시는 할머니의 바구니를 엎었다. 할머니는 “뭣땜시 나와 가지고 남의 장사를 망치냐”며 소리소리 질러 그를 무참하게 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 할머니는 시장통에서 남보다 더 많이 팔아야 한다는 생존의식으로 악에 받쳐 있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바구니를 엎었으니 충분히 화를 낼만 하다고 생각하니 이해되는 것이다.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저를 쳐다볼 때 ‘안됐다’하는 표정으로 보죠. 그건 나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착해서 그런 것이라고 지금은 생각하게 됐어요. 다른 사람에 무관심하고 못된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저같은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쳐다보지도 않겠죠. 저를 불쌍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이 늘 내 옆에 따라붙는 것도 아니고 보다 가고 보다 가고 그러니까 이제는 상관도 안해요. 오히려 내가 사람들을 보죠. 그래서 처음 대중목욕탕에 갔을 때도 안경을 끼고 들어가서 몸매가 예쁜 여성들의 고운 선이나 몸집 좋은 아주머니가 앉아있는 모습이나 물을 끼얹는 동작 하나하나를 그리고 싶다는 생각에 머리 속에 담으면서 뻔뻔하게 계속 쳐다보고 그랬어요.”
서른 무렵 받은 수술이 그렇게 더 왕성한 바깥외출을 가능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수술비 걱정을 하는 어머니의 걱정스런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그는 두려워하면서도 수술대 위에 누웠다. 계속 엎드려 지내느라 완전히 에스자로 휘어버린 허리와 다리를 바로잡는 수술을 받은 후 소원대로 그는 한 동안 일어나 걷기도 했다. 지금은 휠체어에 안착하게 됐지만.
만화를 하면서 갑자기 만화의 개념에 대한 혼란에 빠졌을 때는 순수미술을 해보면서 만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려고도 애썼다. 그의 작업실에 크게 걸려있는 멋진 동양화 한 폭이 말해주듯 경남도립미술대전과 경남예술제 동양화부에 입상한 이력도 갖고있다. 그래서 그의 막내동생이 서양화를 전공하며 함께 예술의 길을 걷는다는 사실을 알고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이 있다.
그의 나이 스물한 살에 소년잡지 새소년에 만화를 연재하고 이듬해 한국만화가협회에 정식으로 입회도 한 후 만화, 그 한 길을 달려온 그는 두란노출판사의 〈예수님이 좋아요〉 등 선교만화작업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지금도 원고가 몰릴 때면 한 명 있는 문하생과 해가 뜨는지 달이 뜨는지 모르게 작업에 몰두하다가도 원고를 넘기고 난 후 “한동안 짐승으로 살았지만 이제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자”고 외치며 정서적인 양식을 보충하기도 한단다.
  
황금알을 낳게 하고 싶으면 그에 맞는 사료를 줘라
  
인터뷰 내내 화통하게 말하고 거의 삼십초마다 한 번씩 시원스레 웃어대는 그에게서 삶에 걸림이 없어 보인다고 말하자, 그는 조금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왜요, 겉으로 드러내놓고 표현을 안해서 그렇지 경제적인 문제도 늘 안고 있죠. IMF 이후에 한동안은 여기 저기 기고하던 잡지가 폐간되기도 하고 원고료가 밀리기도 해서 정말 한 달에 십만원 갖고도 살았어요. 그 땐 장애가 없으면 파출부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니까요. 장애를 입은 사람은 돈이 있어야 하는데 장애를 입었기 때문에 돈이 없게 되더군요.”
혼자 살면서 그것도 홀로 되신 어머니를 모시고, 특히 장애가 있는 그에게 돈은 중요한 화두이기도 하다. 돈과 그 돈이 삶에 조금 더 주게 되는 여유와 세상에 도전하게 하는 작은 용기를 그는 주시한다. “그것들을 만들어 내는 필요충분 조건이 직업인 것 같아요. 당장의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에게는 성취욕이 있어야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잖아요. 기동력이 비장애우들보다 떨어지는 장애우들에게 게다가 주머니에 돈마저 없으면 더욱 팔다리가 묶이게 돼죠. 그래서 외출을 잘 못하게 된다거나 하면 더 움츠려들게 마련이에요.”
특히 섬세한 순정만화풍의 그림을 그리는 그에게 새로운 문화현상등에 대해 경험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그로서는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더욱 주위에서 누가 어딜 같이 가자고 하면 냉큼 따라나선다고 한다. 몇 번 거절하면 나중에는 권하지도 않을까봐서다.
“자료조사라도 나가려고 하면 저를 도와줄 사람이 있어야죠, 차있어야죠, 장애우라는 사실이 이만 저만 아쉽고 불편하지 않아요. 대중교통으로 갈래도 자원활동자의 소요비용은 또 대부분 제가 내야하니까 영화 한 편을 볼래도 그 비용이 만만치 않죠. 여기 포천만 돼도 지방이라 자원활동 차량이랑 연결되기가 하늘의 별따기더군요. 그러면서 어느 소도시, 어느 시골에서 정말 재능있는 장애우가 꿈을 펼치지 못하고 집안에만 있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해봤더니 정말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가슴이 참 아프대요.”
청각이나 지체장애우의 경우 앉아서 할 수 있는 만화관련 직업이 최근 부각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이 분야의 직업적 전망에 대해서 그에게 묻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지금은 작가들만 만화를 예술이라고 우기지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의 돈벌이로 보는 것 같아요. 어쨌든 예전보다는 인식이 좋아졌다는 의미도 되겠죠. 그런데 만화산업을 황금알을 낳는 산업으로만 보는데 낳아진 황금알만 볼 것이 아니라 닭에게 황금알을 낳게 하려면 황금알을 낳을 수 있는 가치있는 사료를 줘야죠. 어떻게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고 어떻게 잘 만들어서 세계시장을 공략할 것인지 그 기초부터 따져봐야 하는데 먹는 건 빈약하게 해놓고는 황금알만 기다리는 건 문제예요. 장애우들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자라면서 다른 장애우들을 별로 만나질 못해선지 장애우들은 그래도 남들보다 더 노력할테니까 뭐든 잘하겠지, 하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나봐요. 제가 한동안 장애아이들한테 미술을 좀 가르쳤는데요. 재능이 없는데 노력도 안하는 아이들을 몇 번 만나고는 조금 놀랐어요. 장애우든 비장애우든 만화가가 되려면 일단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해요. 또 재능만 타고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많이 읽고 생각하고 쓰고 그리고 경험해야 해요. 장애우들같은 경우 많이 경험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가만히 있는다고 되는 일은 아니죠. 그건 비장애우들도 마찬가지예요. 게으르면 되는 것이 하나도 없죠.”
예술가의 경우 예술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면서 자신의 많은 것을 던져 매진하게 되는 과정이 흡사 중독과 같다고 그는 말한다. 당장 배가 주려도 매료되는 일.
예전의 자신과 같은 눈빛으로 그에게 배움을 청해오는 사람들을 그래서 그는 외면할 수가 없다. 그림과 만화를 가르치는 일은 그에게도 큰 기쁨이다.

 

"이제까지 만화를 사랑하고 만화에 매달려 온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죠. 그런데 다른 공인들의 살을 볼 때도 지식이나 재능이 처음엔 그 사람들 각자의 것이었는지 몰라도 이제는 더 이상 자기것이 아니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전 가르치는 일이 기쁘고 좋아요"

한동안 그의 연인이었다는 마이클 볼튼, 그는 그렇게 만화주인공이든, 가수든, 영화배우든 주위의 남자든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구십칠년에 나온 그이의 자전에세이 "잠들지못하는 여자"를 보면 매순간 그가 어떻게 가슴의 불꽃을 쓰다듬으며 살아왔는지 보인다.

그런 그가 이제는 나무가, 풀이 너무 좋단다. 때로는 휠체어에서 땅에 내려와 풀에 몸을 부비기도 한다.

그가 살고 있는 포천 어느 산자락의 작은 집은 공동묘지를 지나서 있어 밤이면 조금 무섭기도 하겠지만 창문을 통해 그가 좋아하는 나무가 눈에 가득히 들어온다. 나무에 이는 바람소리. 이제 그는 그 소리도 아프지 않게 담을 수 있을까.

 

글 한혜영 기자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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