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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정보기술 전문가 김종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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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밸리를 누비는 힘찬 휠체어

서울 지하철 이호선 강남역부터 삼성역까지 고층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거리는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인터넷관련 벤쳐사업 사무실들이 빽빽히 들어서면서 한국의 테헤란밸리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바로 그 거리의 인파 속을 휠체어를 타고 누비는 사람이 있다. 그 주인공은 김종환(34)씨.
그가 건네는 명함에는 팍스넷(www.paxnet.co.kr)의 기술담당이사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다. 팍스넷은 최근 국내 인터넷업계의 기린아로 떠오르고 있는 업체다. 주식투자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국내에서 팍스넷을 모르는 사람이 아마 없을 거라는 그의 자신 있는 부연설명이 아니더라도 팍스넷은 하루 조회수가 야후코리아에 이어 국내에서 삼위를 기록하고 있다고 하니 그 인기에 부합할 신뢰도는 일단 믿어도 좋을 듯했다. 그것도 하루 조회수만 백만, 올해 방문횟수가 천만을 넘어선 이래, 두 달만에 그 두 배인 이천만회를 훌쩍 뛰어넘어 조만간 야후코리아를 앞지를 것으로 점쳐지고 있어 팍스넷 관계자들은 크게 고무되어 있는 듯했다.
여기서 김종환 씨는 그렇게 엄청난 접속량에도 끄덕없는 안정적인 기술운영체계를 책임져왔다. 바로 그 점이 팍스넷을 다른 후발 벤쳐업체들에 비해 도드라지게 한 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기술책임자로서 그러한 그의 공로가 인정돼 지난 삼월십육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이사로 승진했다. 올해 그의 나이 서른 넷. 상무이사를 포함한 다섯명의 이사 가운데 최연소다.
마침 인터뷰를 위해 그를 찾아간 날 오전에 열린 주주총회에서 그의 이사승진이 결정났기에 주위 동료나 후배들의 축사가 그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에 즐겁게 응대하고 있는 그의 여유로운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데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는 ‘중증’장애우인 그가 걸어왔을 성공의 가도에는 과연 ‘장애’가 없었는지 들여다 보고 싶은 충동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마음을 잡아끈 유전공학에 대한 꿈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기억은 그냥 엄마 등에 업혀서 계속 어딘가를 다니는 거예요. 지압받으러 다니고, 침맞으러 다니고, 무슨 병원에 가서 검사하고 다니고 하는... “
태어난 후 한 살 무렵 그에게 찾아온 소아마비는 김종환 씨에게 그같은 어린 시절의 기억부터 심어줬다. “가산이 많이 탕진되셨겠군요?”하는 농담섞인 질문에 그는 치료비를 대기 위해 안정된 직장에 다니고 있던 아버지는 더 많은 수입을 보장받기 위해 미국으로 근무처를 옮기기도 했다는 사실을 담담히 알려주었다. 그렇게 자식의 장애를 고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어했던 그의 어머니는 소문난 병원과 의원을 찾아다니며 각종 치료법에만 매달렸다.
그러나 종환 씨의 장애가 의술로는 되돌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게 된 후에 부모님은 자연스럽게 교육에 열을 올렸다. 서울 삼육재활학교에 들어갔을 때 그의 집은 그 근처로 이사를 갔고, 일반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도 또 다시 그의 가족은 그 학교 근처로 이사를 갔다.
삼육학교에서 중등부를 마치고 인문계 고등학교를 찾았을 때 같은 학군 내에서는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고도 다닐만한 여건의 학교가 없었지만 다른 학군의 서울고등학교에는 마침 학교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건물에 경사로 시설을 마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직접 둘러보니 다른 사람 등에 업히지 않고 다닐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들면서 김 씨의 마음도 들뜨기 시작다. 당시에 벌써 그의 덩치가 커져서 부모님도 종환 씨를 업기는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서울시 교육위원회 담당 장학사분이 학군을 옮겨서 고등학교 진학을 하는 건 규정에 없어서 계속 어렵다고 그러는 거예요. 정말 그게 안되는 일인가 낙담하고 있을 때쯤 연합고사 성적이 나왔는데 다행히 제 성적이 좋게 나와서 결국 그 장학사분이 많은 배려를 해주셨죠.”
그렇게 들어간 고등학교는 특수학교였던 이전 학교와는 참 많이 달랐다. 삼육학교는 당시 전체 사십여명에 불과한 학교였던지라 석차를 매긴다고 한들 도토리 키재기같이 느껴지기도 했고 다들 석차에 대해서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서울고등학교는 경쟁이 심하다는 강남 팔학군의 고등학교였던지라 반아이들은 석차 일이등 차이에도 매우 민감해하고 친한 친구면서도 상대를 성적으로 눌렀다고 좋아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처음 보면서 그는 ‘세상이란 이런 덴가 보구나’ 했단다.
그래도 중학교때 삼 년 내내 반장을 해왔고 다른 장애친구들과 함께 청소부터 선생님의 심부름까지 모두 척척 해냈기에 그렇게 달라진 환경 속에서도 그는 조금도 심리적으로 위축되거나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다행히 그는 고등학교에서 좋은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부모님이 등교할 때 데려다 주시면 학교를 마치고는 친구들이 데려다주었다. 찾아오면 반갑게 맞아주시는 그의 부모님 덕분에 친구들은 집으로도 자주 찾아오기도 했다.
그렇게 별다른 문제없이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면서 그는 차근차근 자신의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다. ‘유전공학’, 그것이 그가 하고 싶은 공부였다.
“중학교 때 어떤 선생님이 유전공학에 관한 책을 빌려주셨는데 인간의 인체가 전부 디엔에이라는 염색체구조로 돼있고 거기에 어떤 논리적인 법칙이 있다는 게 재미있더라구요. 그래서 대학에 가서도 그쪽으로 공부를 해보고 싶었죠.”
물론 장애우는 공대 진학이 어렵다더라, 하는 얘기를 전해 듣기도 했다. 그래도 자신은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별다른 고민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난관이 그에게도 닥쳤다. 충분한 성적을 갖추었지만 그가 원하는 생물공학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는 대학이 없었다. 세칭 일류대학으로 꼽히는 모 대학측은 생물공학과는 장애우라 안되고 수학과나 신학과에 진학하면 받아주겠다는 대안아닌 대안을 내놓기도 했다.

 유학 준비중 빠져든 컴퓨터정보기술의 세계
  
그러나 그런 대학의 시설들이란 것이 자신이 들어가게 돼도 또 다시 누군가의 상시적인 도움을 받으며 다녀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고민에 빠뜨렸다. 고등학교 때까지 장애우 체전에 나가 메달도 딸 정도로 좋은 체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경사로만 있다면 넓은 대학캠퍼스라고 해도 혼자 힘으로 얼마든지 학교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였지만 온통 계단 투성이인 학교 건물과 시설들은 그로서도 역부족을 느껴야 했다.
‘또 다시 부모님의 도움에 의존해야 하나, 그건 부모님의 체력으로도 벌써 불가능한 일인데...’, 이렇게 고민을 하던 중 대구대학교를 알게 되어 학교 시설을 둘러보니 자신이 놀랄 정도로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다. 이 정도면 자신의 힘으로도 충분히 학교를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자신의 성적에 맞는 학교에 대한 미련은 깨끗이 버리고 전체 수석으로 대구대 생물공학과에 입학했다고 한다.
“계속 서울에서 지냈다면 어쨌든 부모님의 지원을 계속 받아야 했을지 모르지만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면서 저 혼자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습관을 들여가는 것이 앞으로의 사회생활이나 결혼생활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예 전기대에는 원서도 넣지 않고 기다렸다가 후기대인 대구대에 진학을 했죠.”
다행히 교수님들은 종환 씨와 같은 귀한 인재를 제자로 두게 된 사실을 반가워하며 늘 도와주지 못해 안쓰러워했다. 그렇게 교수님들의 각별한 기대 속에 대학 공부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관련 공부를 더 하고 싶어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러나 선진이론을 알려면 외국유학을 갔다 오는 것이 좋다고 교수님들이 적극적으로 권하기도 했고 대학 사년간의 객지 생활로 얼마간 몸이 축나기도 해서 잠시 학업을 접고 그는 부모님이 계신 서울로 올라왔다. 이런 저런 유학관련 정보를 구하러 다니면서 언젠가는 필요할 것 같아 그는 쌍용정보통신 부설 교육기관에서 사무자동화프로그램부터 하나씩 배워나가기로 한 것이다.
  
교육과정을 수석으로 수료했지만
  
그렇게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컴퓨터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강사가 어려운 과제에도 곧잘 따라하는 그를 유심히 보더니 그에게 그 분야에 재능이 있어 보인다고 전문적으로 한 번 배워보라고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개월 기초과정을 마치고 그는 다시 프로그램을 짜는 사개월 실습과정에 들어갔다. 워낙 논리적으로 무언가를 풀어가는 일에 흥미를 느껴왔던지라 철저히 논리에 의해 작동이 되는 컴퓨터프로그램 짜는 일이 적성에 맞았는지 모르겠다. 
“고민하고 궁리를 해서 하나씩 짜보면 완성된 프로그램이 작동돼 돌아가는데 그런 하나 하나의 결실을 보는게 정말 기쁨이고 희열이더라구요. 가끔 강사들이 조금 어려운 과제를 내주기도 했는데 풀리지 않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면 집에 가서 누워도 계속 그 생각만 나고 그랬어요.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스터디그룹을 짜서 다른 수강생들이랑 더 공부해 나가기도 했죠”
그런 노력 탓인지 그는 일등으로 그 교육기관을 수료했다. 우수한 대학성적에 수석 수료성적까지 기록한 그를 관련 업체들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할 판이었다. 특히 모체가 되는 쌍용컴퓨터에서 수석수료생을 특채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장애우인 그는 늘 예외였다. 유학은 포기하고 전산쪽으로 진로의 가닥을 잡은 그로서는 화도 나고 몹시 아쉬웠지만 무리해서 그 회사에 들어가 불편하게 생활하느니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그러나 여전히 ‘장애’라는 요건은 취업을 성사시키는데 확실히 ‘장애’가 됐다. 뛰어난 실력을 갖췄지만 그가 장애우라는 사실을 알고는 고개를 젓는 곳이 많았다.
그러다 우연히 정립회관에 갔다가 황연대 전 관장을 만난 종환 씨는 자신이 이렇게 저렇게 지냈다는 얘길 하면서 취업처를 알아보고 있다는 얘기를 하게 됐다. 그를 매우 아끼던 황 전 관장은 당시 장애인복지체육회 회장이던 쌍용그룹의 김석원 회장과 잘 아는 사이인지라 “김 회장이 장애우 채용한다고 그랬는데...”하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는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쌍용 교육센터 담당이사가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만나자고 해서 회사에 찾아가 보니 제일 먼저 김석원 회장과 어떤 사이냐고 물어오는 것이었다. 그의 대답을 듣더니 묘한 표정으로 실은 채용이 어렵다며 이해해달라는 얘기만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 얘길 듣고 돌아와 마음을 정리하려고 하는데 다시 연락이 와서 채용을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구십일년 시월 일일자로 드디어 입사를 하게 됐다. 그런데 정식으로 발령을 내리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뽑긴 뽑았는데 장애우인 그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었는지 그를 원하는 부서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냥 무슨 연구소에 소속만 되어 있고 집에서 기다리라고 하면서 가끔씩 회사에 불러 컴퓨터프로그램을 짜보라고 한다거나 관련 공부를 계속하라는 주문만 했다.
그러더니 결국 다음 해인 구십이년 사월 일일자로 발령이 났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들어갔지만 회사에서 그는 곧 두각을 나타냈다. 그가 업무 파악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금방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그가 맡은 일은 프로그램 제작주문을 낸 회사를 방문해 과연 어떤 환경이고 어떠한 부분을 해결해줄 프로그램을 요구하는지를 더 정확히 알아낸 후 프로그램 짜는 일에 몰두하다가 완성 후 납품을 하면 그것이 그 프로그램이 안정적으로 활용할 때까지 지원해줘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많이 상대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프로그램 짜는 일은 가만히 앉아서 하는 일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외부 출장도 많았는데 상사나 동료들이 처음엔 그의 기동력을 걱정했겠지만 차가 있어 별다른 문제가 안됐고 웬만한 빌딩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출장이나 파견근무도 그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운이 좋은 것이었는지 다행히 장애에 대해서 그리 선입견이 없는 선배들을 만나 그런 기회에도 차별없이 동참할 수 있었던 그는 회사 내에서 윈도같은 첨단의 시스템운용을 제일 먼저 다루는 시범적인 프로그램개발에 투입될 기회가 많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그가 남다르게 보여준 업무파악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차근차근 실력을 인정받아 과장의 직위에 오르게 됐고 회사 내에서도 보배같은 존재가 돼갔다. 그래서 여기 저기 쌍용을 소개하는 홍보물이나 각종 잡지에는 그에 대한 소개글이 실리곤 했다.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그런 매체들은 그가 현재의 배필과 인연을 맺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다름이 아니라 교회에서 알게 돼 교제를 시작한 현재의 부인이 결혼 전 자신의 부모님께 그에 대한 기사들을 슬쩍 슬쩍 보여주며 “자신을 잘 도와주는 교회 오빠”라고 소개한 것이었다.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인데 이렇게 회사 내에서 인정받는 능력있는 사람이구나”하면서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된 덕분인지 나중에 딸이 바로 그 ‘장애우’와의 교제사실을 알렸을 때도 그렇게 큰 거부감없이 장인장모님이 그를 사위로 받아들이게 된 역할을 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십구년 일을 통해 알게 된 팍스넷의 박창기 대표이사가 현재의 팍스넷의 설립에 대한 밑그림을 제시하며 도와달라고 해 그는 쌍용에서 일을 하는 짬짬이 그를 도왔다고 한다. 그러다 결국 팍스넷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결심하고 오월에는 사표를 제출했다. 쌍용에서는 한 달간 사표수리를 미루며 사장까지 직접 그에게 다시 생각해보라고 설득을 하기도 했다.
결국 현재의 팍스넷으로 옮긴 것이 지난 해 칠월의 일이다. 당시에는 프로그램개발자가 세 명밖에 없었고 그것도 사무실 공간도 변변히 없어 각자 집에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 어려움도 많았다.
“집에 있다가 사무실에서 뭐가 잘 안된다고 전화가 걸려오는 게 노이로제가 됐을 정도로 당시에는 어려움이 많았죠. 집사람이랑 외출이라도 하려고 했다가도 전화가 오면 다시 들어가 컴퓨터를 붙잡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씨름해야 했으니까요.”
그래도 다행히 팍스넷이 계속해서 성장세를 기록했고, 그 결과 작년까지 서른다섯명이던 직원이 현재는 일백명이 넘어선 상태다. 그리고도 계속 일손이 부족해 수시로 직원을 채용해야 할 정도여서 이제 관리직급으로 올라선 그는 업무의 적지 않은 시간을 신입 직원의 이력서를 검토하고 면접을 보거나 점찍어둔 경력직원들을 만나 함께 일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타진하는 데 쏟고 있다.    
이같은 팍스넷의 성장은 업계에서 팍스넷에 대한 벤치마킹으로 유사 금융정보 사이트의 연속적인 등장을 이끌어내고 있다. 팍스넷이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는 원인은 서비스 개시 당시 불모지나 다름없던 증권정보 분야에 진입, 주식투자 열풍과 함께 전문 정보에 목말라했던 네티즌의 갈증을 해소시키며 시장을 선점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 결과 지난 해 삼월 문을 연 이래 팍스넷은 십일월부터 가파른 성장세를 보여 하루 평균 방문객수가 십일월 삼백삼십만명에서 한 달새 그 배인 육백육십만, 올해 일월에는 천만을 돌파한 데 이어 삼월십삼일에는 기록적인 이천만을 넘었다. 이렇게 기하급수적으로 엄청나게 늘어나는 조회량을 시스템이 과부하되지 않고 소화가능하도록 부지런히 머리와 손을 놀려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가 맡은 기술부서쪽이다. 현재 팍스넷은 서버만도 삼십개가 운영되고 있는데 그 서버들을 안정적으로 관리, 운영해야 하는 것이다. 분당 조회수도 엄청나기 때문에 단 몇 분만 시스템이 정지돼도 당장 전화가 빗발치는 상황이라고 한다. 그리고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 그 화면에 적혀있는 팍스넷 기술담당자들의 연락처로 전화를 하면 최장 십분을 넘기지 않고 그 즉시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한다.
특히 팍스넷은 일방적인 정보제공만이 아니라 게시판을 통해 이용자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나 문의사항을 올릴 수 있도록 하고 있어 그것이 팍스넷을 이용하는 사람들끼리 하나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게 있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그가 들려주는 웃지못할 에피소드 하나. 지난 번 증권이 폭락했던 어떤 시기에 어떤 사람이 자신은 죽으러 간다고 글을 남기고 사라지자 다른 이용자가 자신도 같은 심정을 겪어봐서 안다며 저 사람을 막아야 한다고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부랴부랴 그 글을 올린 컴퓨터의 소재지를 추적해보니 충남 보은의 한 피씨방이었다. 그곳 전화번호를 알기 위해 한국통신과 데이콤측에 전화를 오십통도 더 해서 결국 그 글을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그 시각에 나갔다는 사실까지를 알아내 그곳 주인을 통해 다음 날 그 사람과 직접 연락해서 다음 날 스스로 사과글을 게시한 것으로 끝난 해프닝도 있었다.
관련 부문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게 됐지만 그는 팍스넷을매일 조회하는 사람들도 지루해하지 않고 그때 그 즉시 필요한 정보를 얻어갈 수 있도록 다양한 메뉴와 볼거리를 제공하도록하는 기술지원을 위해 늘 고심을 하고 있다. 새로운 선진기술과 시스템을 둘러보기 위해 외국출장도 자주 가곤 한다.
  
팍스넷, 장애우인권센터에 이천만원 기증 약속
  
사실 전산관련 일은 많은 장애우들이 선망하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소아마비, 뇌성마비 같은 지체장애우들은 다른 비장애우들과 실력으로 경쟁할 수 있는 유능한 프로그래머가 되기 위해 오늘도 컴퓨터와 많은 씨름을 하고 있다. 비교적 움직임이 없는 업무특성에다 다른 신체부분 보다 정직하게 두뇌로 승부하는 부분이 매력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사람을 많이 접하지 않고 앉아서 프로그램만 짜는 일이라고 저도 예전에는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렇지는 않더군요. 결국 일을 잘한다는 것은 프로그램을 잘 짜는 것도 있지만 상대인 고객들을 얼마나 잘 대하고 그 사람들로부터 잘 평가받느냐도 중요하거든요. 고객과의 관계를 잘 풀지 못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도 큰 문제로 터지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리고 사실 전산관련 일은 전산만 전공했다고 잘 하는 게 아니라 종합적인 업무 파악 능력이 있어야 하니까 다른 전공을 한 것이 오히려 더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공부를 하신 분이라도 도전해 볼만한 분야죠.”
접근성이나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다양한 정보교육기회를 제공받지 못하는 장애우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부분은 기존 교육기관의 편의시설을 개선하는 한편 편의시설이 갖춰진 이용시설내의 동아리와 같은 형태로 집중적이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그는 조언한다. 그런 지원 속에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첨단 프로그램개발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꿈나무 장애학생들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신은 장애로 인해 여러 곳에서 ‘거부’를 당했지만, 그것이 뿌리깊은 장애우에 대한 차별의식 때문이라는 걸 알기에 그것을 조금이나마 바꿔나가고자 하는 일에도 내심 적지 않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가 다니고 있는 팍스넷은 올해 초 활동을 시작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센터에 이천만원의 기금 기증을 약속했다.
인권에 대해서는 자주 출장을 가는 미국의 사회 분위기를 보면서도 여러 가지를 느껴왔다고 한다. “일단 미국에 가면 제가 편안해지니까요. 일반 버스에도 리프트가 다 장착돼 있어 저같은 휠체어 장애우도 버스 쉽게 탈 수 있구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편안하고 여유있는 그 사회가 참 좋아보여요.
지금 그의 바람은 미국에서 빠르게 도입되고 있는 선진기술을 팍스넷에 곧바로 적용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직접 더 많이 배우고 싶다는 것이다. 회사 차원에서도 관련계획을 세우고 있기 떄문에 그의 바람은 머지않아 이뤄 질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데 예전에 한번 본 새로운 디자인의 휠체어 장애우 마크가 생각났다. 늘 보듯 정지돼 앉아 잇는 모습이 아니라 힘차게 달리고 잇는 모습을 그린 듯 상체를 약간 구부리고 두손은 힘차게 휠체어바퀴를 돌리고 있는, 휠체어 옆으로 힘차게 갈라진 바람까지 그려진 바로 그 마크, 그의 휠체어가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 그렇게 힘차게 달리게 될 날도 멀지 않았는지 모른다.

 

글/ 함께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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