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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전천후 문화게릴라”

팝칼럼니스트 성우진 씨

본문

최근에 만난 어떤 사람은 자신이 아는 시각장애우가 계속 클래식 음악만 듣더라면서 다른 비장애우에 비해 육체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기 어려운 ‘정적인’ 장애우들은 음악도 그렇게 정적인 것만 선호하는지 물어왔다. 장애에 대한 선입견이 그렇게 한 개인의 기호를 전체 장애우에게 일반화시켜 받아들이게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이해는 했지만 솔직히 잠시 아연해지긴 했다. 
그러면 이 성우진이라는 사람을 그는 어떻게 이해할지 궁금해진다. 우리나라 락음악의 대부라고 일컬어지는 성우진 씨가 뇌성마비 후유증을 가진 지체장애우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 설명이 모자랐다. 국내 유수의 팝음악잡지 편집장을 섭렵한 후 현재 여섯 개 방송프로그램을 넘나들며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팝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고, 음악전문 방송작가, 문화공연기획자, 매니저, 거기다 홍대앞에 ‘피드백(Feedback)’이라는 클럽을 운영하면서 최근에는 영화음악감독 일까지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성우진 씨다. 그가 운영하는 피드백에서는 귀를 찢는 듯한 락음악에 몰입해 온몸에서 터져나오는 듯한 열기를 어쩌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헤드뱅잉’(머리흔들기)을 하고 무대 위에 뛰어올라가는 장면이 곧잘 연출되곤 한다. 그런 모습에 함께 흥겨워하며 카운터를 지키는 그는, 눈치챘겠지만 전혀 정적이지 않은 사람이다.
성우진 씨와 같이 넓은 직업적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을 찾아본다고 했을 때 과연 열 손가락을 다 꼽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매우 특이한 케이스인 것이 사실이다. 살아온 과정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거꾸로 돌려 그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모습을 거칠게나마 다시 들여다보면서 획기적 전환점이 됐던 순간에서 멈춘다면 어느 지점일까, 사뭇 궁금해진다. 그중 대표적인 그의 직업으로 꼽히는 ‘팝칼럼니스트’와 관련해서 상상을 해보자면 자유롭게 외출하지 못해 팝관련 라디오방송을 열심히 듣고 있는 한 소년의 모습이 가장 쉽게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건 사실과는 조금 많이 달랐다.
일찍이 맏이로서 나이 어린 동생들을 거의 어머니같이 키웠던 성우진 씨의 어머니에게는 이민을 간 여동생들이 있었고, 아직 젊은 남동생도 있었다. 이민간 여동생들은 언니에게 또 남동생에게 오디오와 미국의 최신 팝송판들을 부지런히 보내줬고, 그것들을 열심히 듣는 외삼촌 옆에서 성우진 씨도 자연스럽게 흔히 ‘스탠다드 올디스’라고 하는 오륙십년대 주옥같은 팝음악들을 함께 들으며 자랐던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비옥한 음악적 토양이자 향후 직업을 선택하게 된 ‘배경’이 됐지만 그에게 음악을 직업으로 삼게 된 것은 그의 장애가 어찌됐든 결정적인 ‘코드’로 작용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체육, 교련이 날 열받게 했죠”
 
그가 자신의 장애와 맞부딪친 것은 안타깝게도 태어나는 순간부터였다. 엄청난 고통 때문에 어머니는 출산도중에 정신을 놓아버렸고 그런 난산 끝에 기계의 힘으로 세상에 나와야 했던 그는 그 때부터 다른 친구들과는 다른 걸음걸이를 떼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서야 ‘뇌성마비 후유증’으로 판명이 됐지만 고등학교 무렵까지 중추신경마비로 알고 있었던 것이 그의 장애는 소아마비도 아닌데 하반신에만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릴 때 그는 자신이 어떤 상황인줄 몰랐단다. 아이들과 어울려 온갖 운동을 다했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미술이나 공부에 있어서도 뒤짐없이 언제나 앞서 갔을 뿐만 아니라 반장이든, 회장이든 학급 임원을 도맡아 하기도 했다.
제법 공부도 잘했던 그에게 부모님은 너는 특히 의대나 법대를 가야 몸이 어렵지 않게 살 수 있다고 자주 말씀하시곤 했다. 다행히 양할아버지가 운영하시는 병원에 자주 드나들면서 주사와 청진기 같은 것들을 가지고 놀 수 있는 환경 속에 있었는데, 피만 보면 거의 기절할 듯이 울어대는 모습을 보고 부모님은 다시 ‘법대’로 그의 진로를 좁혀 말씀하시기도 했다.
“그런데 중학교에 올라갔더니 체육이 있잖아요. 그 과목 때문에 같은 점수를 받아도 석차가 뒤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다른 과목 성적이 뛰어나니까 선생님들도 ‘양’이나 ‘가’는 안 주셨지만  그렇다고 ‘미’이상은 어려웠죠. 그래서 나름대로 체육점수를 만회하려고 사격도 시작하고 별짓 다했어요. 그러다 고등학교에 왔더니 또 교련이 있네요. 당연히 저는 다른 아이들처럼 운동장수업에 참여를 못하니까 석차가 더 벌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열받기 시작했죠.”
그러던 차에 신문이나 텔레비전방송에서 의대를 지원했으나 접수를 거부당했다거나 법대를 졸업했지만 장애 때문에 법관임용을 거부당한 장애우들에 대한 보도를 연거퍼 접하게 됐다. 기사를 보니 그 사람만 재수없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사법고시를 쳐서 법관으로 임용된다는 것은 장애우에게는 원천적으로 봉쇄된, 정말이지 ‘좁은 문’임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가 그때 느꼈던 절망감이 어땠을지 쉽게 헤아릴 수는 없을 것 같다. 누구보다도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세상과의 승부에서 이미 패배가 자명한 길을 앞에 놓고 있을때의 막막함을. 그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일차적으로 부모님께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거 보세요, 공부를 아무리 해봤자 소용없잖아요”하는 말에 그의 부모님도 “그래도 너는 할 수 있을 게다”라고 그를 자신있게 설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공부해야할 목적이 아니, 삶의 목표가 사라진 듯했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어렵게 대학을 졸업해도 장애 때문에 바로 눈앞에서 자신이 꿈꿔왔던 일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건 지금 이렇게 노력을 해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방황이 시작됐다. 자연히 상위권이던 성적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는 친구네 놀러갔다가 우연히  친구의 형이 일본에서 찍어온 한 비디오테이프를 보게 됐다. 한 그룹(초기의 Quiet Riot)의 공연 모습이었는데 순간 그는 눈을 의심했다. 그 중 한 기타리스트가 자신처럼 다리를 확연히 저는 것이 아닌가. 그 사람이 바로 락음악 역사에 있어서는 전설같은 존재였던 소아마비 기타리스트 랜디 로즈(Randy Rhoads)였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밴드 ‘오지 오스본’ 그룹에 그가 드라마틱하게 채용(?!)되면서 이후 자세히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비디오에서 보니 그 사람의 인기가 대단한 듯 팬들은 그에게 열광했고, 그룹의 리더인 오지 오스본은 그 기타리스트가 싫어하는 사진이나 비디오를 찍는 사람에게서 카메라를  빼앗거나 부수어 버리거나 그를 늘 안고 들어올리는 포즈를 자주 연출하는 등 특별히  아끼고 존중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와, 저런 사람도 있구나.’
그 순간이 그에게 음악이라는 새로운 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음악은 늘 익숙하게 그의 주위에 있었지만 그 때 또 다른 경이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그에게는 이제 새로운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 ‘언젠가 저 사람과 함께 한 무대에 서보리라’, 그때부터 그는 기타 연습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달라진 그에 대해서 부모님도 차츰 포기를 하시는 듯했다.
성적은 그런대로 중위권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음악’만이 들어찼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그룹을 만들어 엉성하게 마련된 지하연습실에서 기타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 때만큼 기타에 열심히 매달렸던 때도 없다. 그 시절 같이 유명 연습실에 만날 수 있었고 귀로나마 실력을 확인할 수 있던 사람들이 신대철, 김종서, 김도균, 김태원, 이승철, 이승환 씨 같이 현재 락음악을 이끄는 유명 뮤지션들이 되었다고 하니 그가 그 길을 계속 가게 됐다면 무대 아래가 아닌 무대 위의 그를 어쩌면 만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상이 사라진 후
 
그런데 어느 날, 비행기 추락사고로 그 기타리스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주위 사람들에게 법석을 떨며 에이에프케이엔 뉴스까지 다시 찾아 들어봤지만 명백하게 그의 죽음을 다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그는 기타를 부수고 벽에 손을 짓찧으며 절망감에 몸을 떨었다. 인기 절정의 순간에 있던, 아직 젊은 나이였던 랜디 로즈로서도 불운한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에게는 또 다시 삶의 목표가 사라져버렸다.
“살아서 뭐 하나, 이런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때 죽을 것 같이 절망스러워서 손을 벽에 계속 쳐댔더니 아직도 그 때 상처가 여기 남아 있네요. 암튼 그 순간부터 내가 기타를 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느껴져서 내가 다시 기타를 치면 개자식이다, 이런 생각까지 했으니까. 그 사람이랑 같은 무대에 한 번 서보겠다는 게 기타치는 목표였는데 나 혼자 쳐서 뭐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아직까지도 기타는 손에 안대요. 가끔 후배들이 공연하다가 흥에 겨워서 기타 한 번 쳐보라고 무대에 등떠밀어 올려보내기도 하는데 사양하죠.”
그래도 음악 자체를 포기하지는 못했다. 음악이 주는 폭넓은 자유로움은 이미 그에게 깊이 입력됐고, 접하면 접할수록 음악은 계속 그에게 다른 세계를 열어줬다.
그러다 보니 팝뮤지션들에 대해 하나둘 아는 것이 늘어났고, 그 수준은 반에서 소문이 날 정도가 됐다. 물론 그 과정에는 또 그 특유의 승부심도 작용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도 사실은 경쟁적으로 시작했어요. 같은 반 학습부장 애가 ‘너 이 그룹들 알아?’하는데 두 그룹을 모르겠는 거예요. 그게 발단이 됐는데, 열심히 듣는 게 발전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레코드판에 대한 욕심도 생기잖아요. 암튼 고등학교 때부터 저의 모든 경제환산가치는 레코드판이었어요. 아이스바가 몇 개면 백판이 하나고 빵이 몇 개면 라이센스판이 하나다, 하는 생각에 절대 매점에도 안 가고 심지어 걷는 게 불편하지만 버스도 안 타고 돈을 모아서 레코드판을 하나씩 샀어요. 애들이 너같은 애 처음 본다면서 아이스바같은 건 사주기도 했죠. 그러다 원하던 것 하나씩 사서는 옛날 남자 고등학생 가방 있잖아요. 거기 가운데에 넣어 가지고 다니기도 했어요.(웃음)” 그 때 드나들었던 레코드가게 주인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그의 해박한 음악지식에 탄복해서 같이 일해보자고 했다. 레코드판 때문에라도 늘 용돈이 아쉬웠던 그는 학교 끝나면 거기 가서 살다시피 했다.
그 가게가 악기상이 많이 밀집해 있는 낙원상가 옆에 위치하고 있어서 음악인들이나 업소에 나가는 디제이들이 주로 드나들었는데 ‘그 가게 가면 앉아서 보지도 않고 뒤에 꽂혀 있는 판들을 빼주는 애가 있다’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거침없이 줄줄 흘러나오는 뮤지션들에 대한 이야기나 정보를 나누는 재미로 가게를 찾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얼마 후에 그는 직접 그 가게를 인수해 운영하기도 했다.
그때 음반을 물건을 떼어오던 신나라뮤직의 직원들이나 고위  임원들에게도 그의 소문이 전해졌다. 좁은 가게 안에만 있는 것이 조금 심심하던 차에 신나라측의 제안을 받아 음악관련 서적의 편집장을 맡아서 한 것이 대중음악평론을 하게 된 시초가 된다.
아참, 그 사이에 그는 대학에 입학하기도 했었다. 의외로 그가 스스로 택한 전공은 불교철학. 고등학교 시절 그의 영혼을 잠시 지배한 듯한 한 역사선생님이 ‘한국의 역사는 불교의 역사’라는 말을 듣고 친구 한 명과 한국철학과와 불교철학과를 나누어 갔다는 것이다. 그의 원래 성적에 한참이나 뒤지는 학과를 선택한다고 담임 교사에게 뺨까지 맞았던 그였지만 당시는 전두환 대통령시대여서 앞뒤로 최루탄이 터지곤 하던 날이 태반이었고, 원래 졸업이니 하는 것에 그닥 큰 미련도 없었기에 그는 곧 학교를 그만 뒀다.
“어차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제가 학비 벌면서 다녀야 하는데 거기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이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었던 하나의 밑받침이 된 것 같아요. 전혀 후회 없어요. 남들 대학 사년하고 군대가는 기간을 더한 육칠년을 저는 번 거잖아요. 그 시간에 저는 음악공부를 더 했기 때문에 이 계통에서는 사람들과 더 친할 수가 있었고, 젊은 나이에 더 빨리 더 성장할 수 있었죠. 저로서는 제가 갖고 있는 환경이 저한테 더 도움이 됐을 수도 있어요.”
 
국내 음악잡지 역사의 산 증인
 
대학 졸업과 평범한 직장에 대한 아무런 미련이 없었던 그로서는 당시 제일 영향력있는 음악잡지인 ‘월간팝송’ 편집장이나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팝칼럼니스트가 되겠다는 나름의 꿈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열악한 재정 때문에 위태롭게 명맥을 유지하던 음악잡지도 한 이년 동안은 국내에 자취를 감춰 버렸다.
몹시 아쉬워하던 참이었는데 ‘뮤직랜드’라는 잡지를 인수한 아는 분이 그에게 편집장 자리를 제안했다. 이후 그의 이력은 우리 나라 음악잡지 역사의 궤적을 따라간다. 인기가 높았던 ‘핫뮤직’을 창간시키고, 이후 ‘월드팝스’, ‘락킷’, ‘서브’ 등 우리 나라 음악잡지의 대부분을 창간시키거나 참여하면서 그 잡지들의 편집장만 한 십여년을 했단다.
그 사이 대그룹이나 외국 직배사의 음반관련 부서 등에서도 함께 일하자고 그에게 제안을 했다가도 그의 학력부분을 걸고 넘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누구도 뒤따를 수 없는 실력으로 그는 남들보다 더 빠르게 자신이 택한 길을 성큼성큼 걸어갔다. 물론 직업상 기본 자산이 되는 ‘영어’는 따로 꾸준히 공부하는 등 나름의 노력을 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한 가지 일만 하면 좀이 쑤시는 스타일이라  팔십구년부터는 방송작가일도 시작했다. 그 외에 이벤트사 기획실장, 공연기획 등 음악의 모든 계통의 장르와 장르 사이의 틈이 있으면 비집고 들어가서 독특한 실험정신으로 그 사이의 틈들을 변화시키고 있다.
그래도 그중 그의 주된 직업은 대중음악평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해박한 지식에다 듣는 사람이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그의 평론 스타일은 청취자들로부터 꽤 인기다.
“저는 글쓰는 스타일도 친근하게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글을 써요. 현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혹은 한자성어 써가면서 평하는 건 싫더라구요. 물론 한자성어를 넣을 땐 넣는데 한 번에 딱 봐도 이해할 수 있게 말하듯이 글을 쓰려고 하죠, 흘러가듯이. 음반 해설이나 기사 쓸 때도 어려운 거나 딱딱한 스타일은 제가 싫더라구요. 주눅들잖아요. 조금 우회해 가더-라도 좀 더 쉽게, 좀 더 가깝고 재밌게 쓰려고 하죠.”
물론 그 바탕에는 팝음악과 팝뮤지션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배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재담. 언변 좋기로 유명한 신해철, 유희열, 김장훈 씨와 같은 인기 엠씨들에게도 지지 않고 말펀치를 날리곤 해서 그는 게스트 인기투표에서 일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공개방송이나 관련 뮤지션들의 콘서트 때 관중석이나 입구에 잠시 있다보면 사인 해달라는 인파가  모여 나중에 주위 사람들이 빼주지 않으면 제 힘으로 헤쳐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이 몰리기도 한단다.
그의 인기는 현재 여섯 개의 방송프로그램에 고정 게스트로 나간다는 사실로도 입증이 되고도 남는다. 한 때는 여덟 개나 되어서 각종 종교방송에도 모두 나갔다고 하는데, 방송국 피디나 작가들도 대본도 없이 판만 들고 와서는 정해진 시간에 정확하게 마무리 지으면서도 꽉찬 방송을 해내는 그가 편해 이리 저리 불려 다니게 된 것이다. 이제는 인터넷방송도 생겨 그는  그곳에도 합류를 했는데, 현재 그 혼자 ‘성우진의 소닉 아지트’라는 프로그램 (www.imstation.com)을 진행하고 있다.
그의 주무대는 라디오이긴 하지만 한 동안 텔레비전 연예정보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가기도 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또 한 번 과연 그의 ‘외모코드’가  어떻게 텔레비전 방송에서 소화됐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워낙 그의 명성이 자자했던 터라 방송작가들은 자신 때문에 방송진행이 불편해질 수  있다며, “나는 못 나간다. 텔레비전은 안 한다”고 고집부리던 그에게 모든 상황을 맞춰주겠다고 약속했고, 앉아 있거나 그냥 서있는 모습만 나오는 터라 당연히 그의 장애도 ‘무사통과’였다. 게다가 첫방송 나갔을 때 국내에서 공개 안된 마이클 잭슨의 비디오자료를 보여줬더니 방송국 본부장이 내려오고 전화문의가 빗발치는 히트를 치기도 했단다.
잠시 동안 한 텔레비전 방송이었지만 그는 덕분에 유명세를 더욱 톡톡히 치르고 있다. “저녁 다섯시 정도 시간대였는데 그때가 주부들이 저녁식사 준비하면서 볼 때였는지 아주머님들도 많이 알아봐 주시구요, 동네세탁소 주인도 방송에  잘 입고 나가라고 옷도 잘 다려주고,  식당가면 잘 먹고 가라고 밥 한 공기 더 주고, 택시요금 안 받는 기사분, 카페 가면 사인해 달라면서 찻값도 빼주고 그러대요.”

 

락의 대부, 긴머리의 대부
 
여러 대중음악 장르 가운데 그가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것은 락음악이다. 원래 음악평론계에 처음 입문했을 때 그나마 나이가 젊고 락음악을 해봤다고 그에게 맡겨진 파트가 ‘락’이었고, 그렇게 락과의 인연은 시작됐다. 이후 초창기 락의 태동과 명맥을 이어가던 가수들도 모두 떠나고, 그 주위에서 그것을 지켜봐주던 사람들도 대부분 어디론가 가버린 지금까지 그는 국내 락음악의 현재를 지켜가고 있다.
“서태지가 머리 기르고 이태원 드나들던 시절, 이승환이 긴 머리로 정통 락에 심취했던 모습, 김경호가 짧은 머리에 안경을 끼고 무대에 오르던 모습, 그리고 지금의 인디밴드까지의 역사를 제가 쭉 지켜봐 왔는데 나마저 떠나버리면 그 역사를 말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요. 대중적인 취향도 안 맞고 그래서 생계도 안 되고 이런 저런 이유로 그때 같이 있던 사람들은 다들 떠났지만 저는 어차피 뚝심이니까(웃음), 제가 뭐 부귀영화를 바라고 이 세계에 남았던 것도 아니구요. 그냥 음악하나만 좋아서 열심히 애쓰는 후배들이 좋았어요.”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매니지먼트일도 하게 됐는데, 다행히 락이라는 장르는 흔한 말로 홍보를 위해 방송국 피디들 주머니에 찔러주는 ‘블랙머니’가 필요없는 장르이기도 해서 ‘가난한’ 그도 매니지먼트를 할 수 있었고, 나름대로 스타를 배출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이어진 음반기획일 또한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그를 잘 아는지라 방송국 피디들도 그가 기획해 들고 간 음반들은 믿고 알아서 배려해주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는 실력을 인정받는 대중음악평론가가 되는 것, 그리고 국내 유력 음악잡지의 편집장이 되는 것, 이 두 가지 소원을 모두 이룬 셈이다.
“전 이루고 싶은 소원을 꽤 일찍 이뤄서 한동안 소원이 없었는데요, 이제 하나 생겼어요. 후배들을 위해서 복합공간 같은 건물을 짓고 싶어서 연습실, 스튜디오, 공연장, 이렇게 종합적으로 모든 설비가 돼 있는 오륙층짜리 건물이 있으면 정말 좋겠다 싶어요. 힘들게 음악하는 후배들이 한 자리에 여러 가지가 다 있어서 편하고 싸게 쓸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정말 필요하거든요. 그럴려면 돈이 좀 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워낙 돈하고 별로 안 친해서 아직 전셋집에 아버님이랑 둘이 살지만 이젠 돈하고도 좀 친해져야죠.”
지금도 조금씩 제안이 들어오고 있지만 그는 강단에 서는 일보다 지금은 음악하는 후배들과  좀 더 부대끼고 싶어한다. “아직은 제 얼굴이 다른 사람 표현에 의하면 좀 가증스럽게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고 하니까 후배들이랑 더 놀다가 좀 더 나이들어서 애들이 안 놀아줄 때, 서러워지면 그때 음악후배들 가르쳐야죠.”
처음 그를 알게 됐을 때 지체장애우로서 그의 이력이 조금은 특이해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돌려 생각해 보면 아직 기자에게 남아있던 장애에 대한 선입견만을 발견하고 부끄러워질 뿐이다.
지금 혹시 자신의 장애로 인해 스스로의 앞날에 조금은 절망하고 있는 예전의 성우진과 같은 장애 청소년이 있다면 그에게 그의 모습을 조금 더 가깝게 보여주고 싶다.  예전 랜디 로즈라는 지체 장애를 가진 기타리스트가 그에게 주었던 의미처럼 그 소년(소녀)의 가슴에 "성우진" 이라는 이름 하나 깊이 박힐지도 모르니까..


 글/ 함께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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