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둘란, 박성희, 민서의 가족 이야기 > 세상, 한 걸음


추둘란, 박성희, 민서의 가족 이야기

"천천히 자라는 아이" 민서를 키우면서

본문

 

  
"민서는 정신지체 2급이지만 그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무리 보아도 자랑스러운 아이입니다. 팔다리의 길이가 짧아 몸의 균형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하더라도, 손가락과 발가락의 길이가 짧다고 하더라도, 눈자위가 늘 부어 있다 하더라도, 콧대가 낮다 하더라도, 입을 잘 다물지 못한다 하더라도, 검지 발가락이 휘어져 있다 하더라도 저에게는 민서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이입니다.-<꽁깍지 사랑> 중에서"

 

이 글을 읽고 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이 두 가지 있다.
"자기 자식 안 예쁜 부모가 어디 있어?"
"정말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끼었군"
맞는 말이다. 이 글을 쓴 추둘란씨도 자신의 사랑을 "콩깍지 사랑"이라고 불렀다. 시골에 사는 남편 박성희씨와 결혼해서, 다운장애아인 민서를 낳아 기르면서 느낀 시골생활을 담은 수필집의 이름이 바로 <콩깍지 사랑>이다. 왜 콩깍지 사랑일까. 그녀의 사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멋없지만 소설같은 만남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 중에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관계를 말하는데, 추둘란·박성희 부부도 서로 강한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둘란씨가 학습지 교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여름 휴가가 시작되는 첫날 <작은 것이 아름답다>로부터 취재를 부탁하는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서산에 사는 한 화가를 만나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가 급해 보이기도 했고, 서산이라는 말에 혹해서 승낙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터뷰를 갔는데...
문제는 화가였다. 사람 좋아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인터뷰에 협조를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부인이 이야기하려고 하면 막기까지 하면서 인터뷰보다는 바닷가로 놀러가자는 말만할 뿐이었다. 일단 인터뷰를 접고 바닷가를 향했다. 어차피 둘란씨에게는 휴가를 시작하는 첫날이니까.
그렇게 놀다보니 밤이 되고, 화가부부와 마련한 술자리에 박성희씨가 불려나왔다. 둘란씨에게 어떤 사람을 좋아하냐고 묻길래 "말 통하고 평생 함께 이야기하면서 지낼 수 있는 사람이면 된다"고 했더니, 성희씨를 부른 것이다. 당시에 성희씨는 친구와 동업으로 민속주점을 운영하면서 주방장을 하고 있었는데 화가와는 형님, 아우 하면서 지내는 막역한 사이였다. 하지만 둘이 만나자 마자 불꽃이 이는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둘란씨의 경우 인터뷰를 하면서 화가와 그 부인의 삶이 너무 좋아, 당시만 해도 성희씨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하루 이틀... 결국 둘란씨는 휴가기간 내내 화가의 집에 머물면서 휴가를 다 보내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휴가기간동안 멋있는 로맨스가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잠깐씩 성희씨가 불려나오기는 했지만 별다른 말이 있거나 관계를 만든 건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화가 부부에 대한 좋은 인상만을 가지고 둘란씨는 서울로 향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 정도로 두 사람이 결혼까지 가는 인연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니까.
서울로 돌아온 둘란씨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간혹 화가로부터 전화가 왔다고 한다. 다시 한번 놀러오라고. 집요할 정도로 반복되는 요구에, 둘란씨가 서산을 다시 찾은 건 몇 달 후였다. 인사치례 한다는 생각이 없지도 않았다. 하지만 화가의 생각은 달랐다. 둘란씨를 보자마자 "성희 어떻게 할꺼냐"고 다그치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둘란씨는 "그게 저 혼자 마음으로 되는 건가요"하는 말을 건냈더니, 그 말 한마디에 당장 성희씨가 불려왔다. 혼자 힘으로 안 되는 거라면 같이 만나서 이야기하라고.
결국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신장로 바닥에서 가로등 불빛을 조명삼아 데이트를 하면서 둘은 결혼을 약속했다고 한다. 마치 소설같은 이야기다. 2번째 만남에서 결혼을 약속했으니 말이다.  
"사실 그 때는 남편에 대한 믿음보다는 화가부부같은 사람들 옆에서 같이 살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도 있었어요."
둘란씨의 말에 성희씨가 여유있는 웃음을 웃어넘긴다.

의사는 버럭 화를 냈다 "양수검사 왜 안했어요?"
둘은 쉽게(?) 결혼을 결정했지만 막상 결혼이 쉬웠던 것은 아니다. 시댁에서는 둘란씨를 환영해 주었지만, 친정집에서는 사위가 퇴짜를 맞은 것이다. 결혼시켜 달라고 온 사윗감한테 어머니가 "친구집에 놀러 왔다 가는 걸로 생각해 달라"는 말을 하더란다. 당시만 해도 농사를 짓느라고 까맣게 탄 얼굴을 하고 양복도 아닌 잠바를 입고 나타난 산적같이 생긴 성희씨를 어머니가 내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허락을 받지 못하고, 2000년에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서산에 정착했다.
같은 해 민서를 갖고 교대를 나온 성희씨는 임용고시 준비를 시작했다. 건물이 경매로 넘어가면서 민속주점도 문을 닫았고 손해를 많이 봤던 것이다. 입에 풀칠은 해야겠기에 교사생각은 꿈에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용고시를 준비한 것이다.
반면 둘란씨는 민서를 갖고 좋아한 것도 잠시, 병원에서 혹시 모르니 양수검사를 해보라는 말을 했다. 겁이 덜컥 났다. 만약 장애아가 태어나면 어쩌나 싶었다. 하지만 시댁쪽으로 아는 친척 한 분도 39살이 넘어서 첫아이를 낳았는데, 그때도 수치가 높게 나왔으니 검사를 해보라고 했지만 의사의 걱정과는 달리 건강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둘란씨는 별로 걱정하진 않았다. 그냥 조심하라는 거겠지 싶었다. 하지만 성희씨의 생각은 달랐다.
"그 때 이미 각오를 했어요. 설사 장애를 갖은 아이를 낳을지라도 기르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의 준비를 했지요"
막상 민서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상했다. 보통은 태어나자 마자 아니가 자지러지게 우는데, 민서는 아주 가는 소리로 "응애" 한번 하더니 끝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둘란씨는 아이가 자는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성희씨는 또 달랐다.
"간호사가 아이를 보여준다고 데리고 왔는데, 딱 알겠더라구요. 얼굴도 빨갛고 느낌으로 "애가 장애아구나"하구나 했어요. 그리고 바로 마음을 다잡았죠"
다음날 회복실에 누워있는 둘란씨에게 벼락같은 의사의 말이 떨어졌다. 아이가 염색체 이상인지 백혈병인지 정밀 검사를 받아보라는 것이었다.
"의사가 제일 먼저 하는 말이 "검사 왜 안받았어요"였어요. 수치가 높게 나왔으니 양수검사를 했으면 됐을 거 아니냐는 거죠. 그래서 "검사를 하면 어떻게 달라지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의사가 말을 못하더군요. 결국 검사했으면 장애아인 줄 알았을 거고 그럼 수술 받았으면  문제 없었을 거 아니냐는 거죠"
성희씨는 의사에게 화를 내고 나왔다고 한다. "그 많은 돈 들여 의사공부를 했지만 당신은 헛했다"고 "장애아인 줄 알면 뭐가 달라지는데 검사를 안했다고 난리냐"거 말이다. 

 
뭐든지 재밌고 좋은 장난꾸러기 민서
퇴원 후 시어머니와 함께 아이를 데리고 소아과를 찾았다. 예상외로 의사는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하는 말만을 했다.
"의사라고 해도 교과서에서 다운증후군을 배우고 실제로 볼일이 없었던 것같아요. 그래서 괜찮다고 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둘란씨의 설명이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왔다. 산후 조리원에 있는데 민서에게 황달이 온 것이다. 몇 군데를 거쳐 민서는 순청향 병원에 입원을 했다. 결국 산모는 산후조리원에, 민서는 순천향 병원에 각각 입원을 한 것이다. 
"몸조리 해줄 사람이 없어서, 산후조리원에 입원을 했는데 아이까지 없잖아요. 다른 산모들은 아이랑 함께 있는데, 밤이면 몰래 다른 아이들을 보러 가기도 했어요."
민서랑 함께 있을 수는 없었지만 애를 향한 정성은 그 때부터였다. 혼자 있는 동안 젖이 나오면 짜서 냉동실에 얼렸다, 남편이 오면 민서에게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병원과 조리원을 왔다갔다하면서도 성희씨는 민서가 황달이 심하다는 사실을 숨겼다고 한다. 둘란씨가 충격을 받을까봐 너무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결국 둘란씨가 몇 칠을 조르고 나서야 민서가 황달이 심하고 장애가 있다는 말을 했다. 보름동안을 산후조리원에서 혼자 지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민서의 황달기는 백일이 넘어서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었다.
"제가 젖을 잘못 물려서 그런지 민서가 젖을 못 빠는 거여요. 그래서 짜서 먹이고 그렇게 45일 동안을 했어요. 이렇게도 물려보고 저렇게 물려봐도 좀체 빨지를 못하는데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요"민서는 엄마 젖을 빨 힘도 없었던 것이다.
"친정이랑 시댁에는 한동안 이야기를 안 했었어요. 아이 엄마인 저도 충격이 컸는데 부모님들은 오죽하겠냐 싶어서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친정에 이야기한 건 민서가 돌 때, 겨우 몸이라도 추스르고 앉아 있을 수 있을 때였어요"
45일이 지나서 겨우 엄마젖을 빨기 시작할 정도로 민서는 약한 아이였다. 백일이 넘도록 황달기를 가지고 있었고, 안으면 종이를 안은 것처럼 몸이 축 늘어져 버리던 아이였다. 사진관에서 백일사진을 찍을 때도 민서가 앉아 있을 힘이 없어서 사진사가 엄청 고생을 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도 "사람구실 못할까" 걱정해 주던 그런 민서가 지금은 팔 힘도 세고 장난도 잘치는 말 그대로 심한"장난꾸러기"가 됐다.

"요즘 민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장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가 걸레로 방을 닦을 때면, 어떻게 해서든 제 등에 기어올라 말을 탑니다. 파리채로 저를 때려놓고선 콧날과 입술에 잔뜩 힘을 준 채 의기양양한 얼굴을 합니다. 차를 타면 유리창을 내려 바람을 만지려 합니다. 숟가락질을 제법 하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밥알을 흩어 손으로 조무락조무락 만지고 있습니다. 설거지를 할 때면 개수대에 다가와 걸레를 던져 넣기도 합니다. 제가 누워 있을 때는 맨살의 엉덩이로 제 얼굴을 깔아뭉개기 일쑤고 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기어이 일으켜 앉힙니다. <콩깍지 사랑> 중에서"

지역공동체를 통한 대안학교마련도 생각하고 있어
민서가 장애아라는 걸 받아들이고 나서 둘의 인생은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우선 성희씨가 준비하던 임용고시를 포기했다. 둘째로는 도심에서 살 생각을 포기하고 민서를 기르기에 환경좋은 곳을 찾아 나선 것이다. 홍성에서 특수교사를 하던 후배가 알려줘서 환경농업교육관이라는 곳에 사무국장으로 취직을 한 것이다. 어떤 곳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보다는 "그곳 환경이 좋다"는 것에 더 욕심을 냈다고 한다.
"처음 면접을 보러 갔는데, 제 교사 자격증은 탐나지만 제 인상이나 상처를 보고 좀 꺼려하는 것같더라구요. 교통사고가 있은지 얼마 안돼서 상처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성희씨는 부인을 데리고 다시 한번 찾아갔다고 한다. 그 때만 해도 교육관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민서를 좋은 환경에서 키우고 싶다는 욕심에 꼭 취직해야겠다는 욕심밖에 없었다고 한다. 면접관도 둘란씨와 민서를 보고 나더니 좋아했고 결국 그곳에 취직을 했다.
홍성으로 이사를 하고 성희씨는 뭐든 욕심을 내며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무슨 일을 할지 몰라하면서도 막연히나마 처음부터 같이 하고 싶은 마음에 교육관 건물을 세울 때부터 붙어서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민서로 인해 달라진 것은 삶의 구체적인 모습만이 아니었다.
"원래는 노인복지 쪽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당시에 적금도 들었거든요" 성희씨의 설명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노인복지관보다는 장애아동을 위한 학교를 구상하고 있다.
"지역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다운아이들을 위한 일종의 대안학교를 만들 생각이에요. 홍성 근처에는 병원도 좀 있구요, 대학교에는 특수교육학과들이 다 있어요. 의료, 교육, 연구소 이런 것들을 한곳에 다 넣어놓고 하려면 힘들지만, 지역에 있는 자원들을 활용하고 엮어내기만 하면 많은 부분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해요. 단순한 학교가 아니라, 공동체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다운증후군은 초등학교까지는 통합교육이 가능하다고 한다. 인지능력이나 언어생활에서 좀 떨어지기는 하지만 별다른 어려움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학교 과정부터는 사실상 통합교육이 힘들거라는 생각에, 다운 아이들만을 중심으로 교육하는 생활공동체를 꿈꾸게 됐다고 한다. 
셋째는 세상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저 역시 장애우에 대해 무관심했어요. 그러니 민서를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죠. 마치 내가 꿈꾸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나만 별개의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요. 백일이 지나고 나니까 마음이 안정되긴 했지만 걱정은 있었어요. "애를 어떻게 키워야 하나"하는 걱정이 생기더라고요"
그런 추둘란씨가 민서를 받아들이면서 세상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민서만 바라보고 살면 걱정이 없었어요. 하지만 눈을 떼서 다른 곳을 보면 걱정이 생기는 거여요. 친구들과 통화할 때 힘들고, 소아과 가서 다른 아이들 보면 힘들고, 걱정도 되고. 그러다 민서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인 건 돌 때쯤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고, 사는 동안의 인생목표가 달라졌어요. 해야 할 일이 있고 그걸 찾은 느낌이 들어요"
두 사람에게 민서는 "천사"그대로다.

"민서를 통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길 바래요"
추둘란씨가 민서를 데리고 가끔 가는 곳이 있다. 홍성 근처에 있는 온천에 가는 것이다. 그것도 대중탕으로. 그럼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고 한다. 아마 목욕탕에서 만나는 장애우는 길거리에서 만나는 장애우보다 더 드문 일일테니까.
"민서와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장애아인지 알고 보는 눈빛과 모르고 보는 눈빛입니다. 장애아인지 알고 보는 눈빛도 여러 가지인데, 좀 다르게 생긴 것에 대해 단순하게 놀라서 보기도 하고, 불쌍하기 그지없다는 듯 보기도 하고, 엄마는 이상하지 않은가 하고 벌갈아 보기도 하고, 한참이나 쳐다보고서는 함께 온 옆 사람에게 귀엣말로 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드물긴 해도 장애아인줄 알면서도 더 없이 사람스럽게 바라보는 눈빛도 있습니다-<꽁깍지 사랑> 중에서"
이런 시선들과 만남은 여러 곳에 있다. 민서를 데리고 장애등급을 받으러 갔을 때였다고 한다. 담당 의사가 "뭐 얻어지는 게 있다고 장애아 판정을 받으려 하나"하는 식으로 쳐다보더라는 것이다.
민서는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 아빠차를 타고 순천향 병원으로 언어치료를 받으러 간다. 그런데 병원에 새로 인턴이라도 오면 민서에게 우르르 몰려든다는 것이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장애를 실제로 보려니 그들에겐 공부인 셈이다.
민서가 아파서 병원에 가도 그런 경우들이 있다. 다운증후군이 실제로 어떤지 궁금해서 요리조리 뜯어보느라 민서의 병을 진찰하는 건 뒷전이라는 것이다.
"처음엔 그런 것들이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뭐 궁금한 거 없냐"고 물어볼 정도로 저 자신도 여유가 생겼어요. 생활 여기저기서 장애우들을 보고 함께 할 기회가 있다면 장애우에 대한 편견도 사라지지 않겠어요" 둘란씨의 말이다.

풋풋한 삶의 모습들이 담긴 <꽁깍지 사랑>
최둘란씨와 박성희씨의 삶이 넉넉한 것은 아니다. 유기농으로 농사를 지어봤지만 남는 것이 없었다. 단위 면적당 수확량은 제일 많았지만,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신세니 빌린 땅값이며 이런저런 경비를 계산하고 나니까, 마을에서 제일 잘 진 농사가 제일 이익 없는 집으로 바뀌더라는 것이다. 결국 농사로 생업을 하긴 틀린 셈이다.
그래서 둘은 이런저런 부업을 한다. 성희씨는 산에 나무를 베어주는 일을 해서 일당을 벌고 있다. 하지만 일주일에 하루는 민서 데라고 병원 가느라고 일을 빠질 수밖에 없고, 이런 저런 마을일과 집안 일이 있어서 빠지고 하니까, 결국 남들 받는 급여의 3분의 2정도가 다라고 한다.
둘란씨 역시 이런저런 부업과 글쓰기를 하고 있다. 이번에 출판한 <꽁깍지 사랑>역시 그동안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 기고했던 글을 모아 책을 엮은 것이다.
책 속에는 아주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민서를 낳아 기르면서 겪은 이런저런 맘고생과 행복한 이야기들, 장난꾸러기 민서에 대한 말 그대로 "꽁깍지 사랑", 시골 할머니들의 이야기, 장이 서는 날 변비끼가 있는 민서를 위해 요쿠르트를 산다는 이야기, 마을잔치 이야기 등등.
두 사람이 시골생활을 하면 겪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담겨있다. 물론 그 안에는 따뜻한 이야기들이 많다.  
특히 둘란씨의 글을 읽다보면 그녀는 "마음좋고 인심 좋게 늙어 가는 시골할머니들"을 참 좋아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아마 그녀의 모습이 그러길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장애아인 민서를 아무런 편견 없이 대해주는 할머니들의 모습, 민서 때문에 걱정하는 둘란씨를 보면 어느새 그 마음을 알아채고는 " 애들은 다 그러면서 크는거야"하고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주는 할머니들, 민서가 좋아하고 따르는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유독 그 안에 많이 담겨있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 들려 <콩깍지 사랑>을 한 권  샀다. 원고를 쓰는데 자료로 삼을 생각이었는데, 읽다보니 이번 원고는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녀의 책에 나와 있는 글 중에 <함께걸음>에 독자들에게 꼭 읽어주고 싶은 맞는 부분만 골라서 넣는 것이 내가 글을 쓰는 것보다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사실 내가 더 잘 써줄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원고를 안 쓰고 미뤄놓고 있다가, 마음이 바뀐 다음에 마감에 닥쳐서야 컴퓨터를 켰다. 인터뷰를 끝내면서 둘란씨가 내게 부탁한 말 때문이다. 꼭 "이말"만은 실어달라고.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 나니, 나 역시 "이말"은 꼭 써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번 "사람사는 이야기"는 그녀의 "이말"로 끝내려 한다.
"민서로 인해 변한 건 삶을 바라보는 것이 달라졌다는 거에요. 저 역시 멋진 자동차와 집과 좋은 옷,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았으니까요. 민서를 낳기 전에는 그런 게 제 인생 목표 중에 있었어요. 그런데 민서 낳고 기르면서 세상에 태어나 해야할 일이 있다는 걸 알았고 그걸 찾았어요."

글 서현주 객원기자, 사진 윤정은 객원사진기자

작성자서현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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