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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원석 변호사

“장애우 인권운동이요? 날 위한 삶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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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한번쯤은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을 만한 ‘우연’을 만난다.
그런 우연은 흔한 것이 아니어서 우연의 순간에 느껴지기도 하고, 또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우연이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꿔 놓았구나” 하고 깨닫는 경우도 있다.
이번호 ‘사람사는 이야기’에서 만난 곽원석 변호사는 후자의 경우다. 장애우 인권운동과 인연을 맺게 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저 사법연수원생인데요, 그곳에서 자원활동을 할 수 있을까요?”

 
곽원석 변호사가 장애우 인권운동에 동참하게 된 이야기는 이렇다. 사법고시에 합격한 곽변호사는 사법 연수원의 연수 프로그램을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 양복도 맞추고 이런저런 것들을 장만하다 구두를 사러 ㅅ구두에  갔었다. ㅅ구두는 장애우들의 신발만 전문적으로 만드는 곳으로, 주인 아저씨와 곽변호사의 아버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어떻게 아들자랑이 빠질 수 있으랴. 사법고시에 합격했고 오늘 구두를 맞추러 온 건 연수받을 때 신을 거라는 자랑이 이어졌다. 장하다며 맞장구를 치던 아저씨가 곽변호사에게 한마디 건넸다. 장애우로서 이만큼 성공했으니 나중에 좋은 일 많이 하라며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이하 연구소)를 알려주었다. 이것이 곽변호사의 첫 번째 인연이었다 .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연수원 1년 차에 개설된 지 얼마 안 된 사회 봉사과목을 듣게 됐다. 마음  내키는 곳에서 자원활동을 하는 것이다. 다른 연수원생들도 여기저기 시민사회단체를 찾아갔지만, 곽변호사는 그 때 연구소를 떠올렸다. 구두 아저씨로부터 좋은 일 많이 하라며 들은 연구소를 생각해냈고, 그곳에서 자원활동을 해보면 어떨까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이왕이면’이란 생각이 강했다. 말 그대로 “이왕이면 장애우 단체에서…”하는 정도였다. 하여간 그렇게 해서  연구소에 전화를 걸었다.
“저 사법연수원생인데요, 그곳에서 자원활동을 할 수 있을까요?”

우연이 두 번이면 필연이다?
연구소 사람들의 반응은 반신반의였다. 비장애우들 가운데 가끔 장애우와 함께 할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싶다는 전화가 오기도 하지만, 사법연수원생이 전화를 걸어온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
하여간 그렇게 해서 연구소에 자원 활동을 하게 됐고 일주일에 두번씩 두달간을 다녔다.
“<함께걸음>이 나오면 발송하기 위해 봉투에 넣는 작업도 하고, 사람들이랑 수다도 떨고 참 재밌었어요.  가끔 법률적인 문제가 알고 싶어 전화를 걸어오는 장애우들도 있었지만 , 그렇게 많지 않아서, 실제로는 연구소의 이런저런 활동들을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물론 곽변호사에게 그때가 ‘재밌었다’ 정도의 느낌만으로 남은  것은 아니다. 적어도 운명적 인연이  되려면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자원활동을 하면서 ‘내가 할 일이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랬다. 곽변호사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보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지만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일을 해나간 스타일은 아니였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하지만 연구소에서 활동하던 두달 동안 막연할 지라도 “할일이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렇게 해서 장애계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이정도면 구둣가게 아저씨의 한마디가 나중에 깨달은 ‘운명적 인연’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고열에 시달리다 장애 얻게 돼
곽원석 변호사가 장애를 갖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어느날 갑자기 열이 나고 아팠다. 심한 감기려니 했는데, 도무지 열이 내리지를 않았다. 동네병원에 다니는 것만으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결국 큰 병원으로 옮겨 얻은 병명은 ‘불명 열’이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고열 이라는 것이다.
나중에서야 안 일이지만 곽변호사의 병은 ‘소아성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당시에는 희귀한 병이었다. 그러니 동네 의사들은 물론이고 쉽게 진단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한달 정도를 앓고 나니 열이 내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또 열이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결국 류마티스열이라는 판명을 받았고, 관절이 붓고 열이 재발하는 일이 반복됐다.
초등학교 5학년에 시작된 열은 거의 일년 동안이 가장 심했고, 초등학생이었던 곽변호사에게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결국 류마티스열은 지체장애 2급이라는 장애우로써의 삶을 곽변호사에게 남겨놓았다. 류마티스열은 대학교 때까지도 계속됐다.

힘들기만 했던 대학생활
“대학교 생활이 제게는 참 힘들었어요. 고등학교 때는 대학에 가야한다는 목적 때문에 장

 
애를 잊고 살았죠. 대학에 대한 환상과 기대가 있었으니까요. 막연하게 ‘대학에 가면 좋아질거다’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같아요. 그런데 막상 대학에 가보니 그렇진 않더군요. 몸도 좋아지지 않았고요.”
고등학교 시절, 고3 수험생에게는 나름대로의 환상이 있다. 공부하느라고 먹고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서 찐 살이 쏙~ 빠질 거라는 환상, 텔레비전에서 봤던 것처럼 멋진 캠퍼스의 낭만을 즐길거라는 기대, 고등학교 때의 외우는 공부와는 달리 학문다운 공부를 하게 될거라는 기대 등,  다들 이런저런 환상을 가지게 된다.  곽변호사 역시 마찬가지여서 ‘대학에 가면 몸이 좋아질거다’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곽변호사가 제일 힘들었던 점은 친구가 없다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야 한 교실에서 오십명의 학생이 부딪히며 생활하기 때문에 비록 장애가 있을지라도 친구가 되고 같이 웃고 떠들었는데, 대학은 달랐던 것이다. 수업이 끝나면 ‘우르르’ 몰려 나가고, 같은 학과라도 듣는 수업도 달라서 서로 부딪힐 기회가 많지 않았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만해도 편의시설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어요. 엘리베이터도 없어서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모든 것이 너무 힘들었죠”
재수까지 해서 간 대학이지만 곽 변호사는 학교에도 안나가고 집에만 있었다. 그 스트레스로 인해 열이  나고 몸도 안 좋아졌다. 결국 휴학계를 내야 했다.

산재병원에서 만난 장애우들
학교를 1년 휴학하고 들어간 곳은 산재병원이었다. 몸이 너무 안좋아져서 아버지가 여기저기 알아보고 물리치료를 잘한다고 휴학하고 병원에 입원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하신 것이다. 지금이니까 말이지만, 솔직히 곽변호사는 산재병원에 입원할 수 있는 경우는 아니었다. 산재병원은 산업재해로 다친 노동자들을 위한 곳이기 때문이다. 몸이 안좋은 곽변호사를 위해 아버지가 여기저기 손을 써서 물리치료를 잘한다는 산재병원에 입원을 시킨 것이다.
곽변호사의 이야기를 하려면 아버지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곽변호사 스스로 말하듯이 본인은 ‘운좋은 장애우’였기 때문이다. 공직에 근무하던 아버지 덕분에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자랐고 장애를 갖게 된 후에도 물심양면으로 부모님의 보조를 받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까지는 출근하는 아버지가 학교까지 태워다 주시고 올 때는 어머니가 데리러 오고, 부모님이 곽변호사를 따라 365일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뿐만아니라 법대에 가서 변호사가 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한 사람도 아버지였다.
지금도 장애우들의 삶이 어려운데 곽변호사가 대학에 입학했던 90년대에는 장애우에 대한 인식과 차별이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사회에서 ‘장애우가 그래도 남한테 손가락질 안받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전문적인 직업을 갖는 것뿐이다’라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산재병원에서 있던 1년 동안 곽변호사는 많은 것을 얻었다. 건강도 좋아졌지만 무엇보다 장애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몸이 아플뿐이지 나 자신을 장애우라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그러니 ‘병이 나을테니 건강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어요.”
곽변호사에게 물었다. 몸이 비장애우들과는 달리 불편한데, 외관상으로도 티가 나는데도 자신이 장애우라는 걸 받아들이지 않았냐고. 그의 말은 이렇다. ‘나도 장애우다’라는 사실을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건 다르다고. 아마 곽변호사는 산재병원에서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이 장애우라는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곽변호사가 산재를 받아들인 건 그곳에서 만난 환자들 덕분이었다. 다들 노동자로 일하다가 다쳐서 입원한 사람들이라 그 사건으로 장애우가 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들을 보면서 곽변호사는 자신도 그들과 같은 장애우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아프다는 생각은 나만의 생각일 뿐이고 병원에서 본 다른 사람들처럼 나 역시 장애우였을 뿐이죠”

운전하고 싶은 장애우에 맞는 맞춤서비스가 필요해
작년 10월 곽원석 변호사는 사회를 깜짝 놀라게 할만한 일을 벌였다. 장애우들이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서 비장애우들이 받는 신체검사 외에 추가로 받아야 하는 ‘장애인운동능력측정검사(이하 운동능력검사)’가 부당하다는 헌법소원을 낸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운동능력검사를 받을 때 4.8kg의 자동차 핸들을 한바퀴 반 정도 돌려서 어느 정도의 시간을 고정시키고 있어야 하는데, 이 기준은 현실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기준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파워핸들이 나와 있어서 왠만한 차량에는 다 달려있고 굳이 장애우들이 4.8kg의 핸들을 조작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곽변호사도 현재 운전을 하지만, 아무 사고 없이 잘 몰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역시 운동능력검사에서 세번이나 떨어졌다. 다행히 옆에 있던 시험관이 여러번 더 기회를 줘서 합격하고 운전면허증을 받기는 했지만.
청각장애우들의 운전면허 시험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기준은 너무 협소하게 인정하고 있

 
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장애우들의 장애특성이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기계적인 적용기준이 문제고, 두 번째는 사람들의 인식이 문제다. 경찰청에 장애우들의 운전능력검사에 대한 질의를 했을 때 답변은 한 가지 였다고 한다. ‘위험하다’는 것이 경찰청의 이유였다. 왠지 장애우들이 차를 몰고 나오면 어딘가 불안한다는 비장애우들의 편견이 발동한 것이다.
결국 경찰청에서 제시한 안은 현행 자동차에 맞춰서 완화하겠다는 정도였다. 그러나 완화가 아니라 이런저런 검사와 연구를 통해 제대로 된 규정을 만들고, 장애우들이 운전면허를 필요로 한다면 어떻게 하면 장애우들이 운전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곽변호사의 말이다.
“외국의 경우 운전재활전문가라는 직업이 있어요. 장애우들이 운전을 하고 싶어하면 그 장애우의 특성이나 필요에 맞춰서 운전을 가르쳐 주고, 운전면허 시험을 보게 하는거죠. 국가가 일방적인 기준을 정해놓고 ‘여기에 맞는 사람만 차를 몰아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우에게 맞는 운전법을 교육하는거죠”
맞춤서비스라고 하면 어떨까? 국가가 장애우의 장애에 맞는 맞춤운전법을 개발하고 교육하도록 인력을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 곽변호사의 생각이다.
사실 곽변호사의 기획소송은 이번이 두번째다. 처음 그가 진행하려고 했던 소송은 안면화상을 입은 사람을 장애우 범주에 넣어달라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안면화상이 장애우에 들어가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송까지 가진 못했다. 소송 당사자 그러니까 얼굴에 화상을 입은 장애우를 섭외하러 다녔지만, 쉽게 당사자를 찾을 수 없었다. 다행히 보건복지부가 이후에 안면화상까지 장애범주를 확대했다고 한다. 결국 그의 첫작품은 나름대로 성공(?)한 셈이다.
현재 곽변호사는 수원에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연수원을 마치고 고용변호사로 수원에 왔다가 그곳을 인수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것이다.
“아직도 의뢰인에게 ‘선임료가 얼마다’라고 말하려면 어색해요. 그래서 대충 얼버무리고 사무장님들이 이야기하도록 하죠. 사실 전 남들 앞에 나서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럭저럭 1년이 지났네요”
연수원을 마치고도 개업보다는 연구소에서 변호사로써 활동하고 싶었다는 게 곽변호사의 설명이다.
그는 이제 막 신참변호사 딱지를 뗐다.
그런만큼 이런저런 계획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 속에는 장애우들과 함께 한다는 계획도 있다.
변호사로써, 장애우로써, 장애우와 함께 활발한 운동을 펼쳐나갈 곽원석 변호사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

글 서현주 객원기자 / 사진 정선아 객원사진기자

 

 

작성자서현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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