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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

“사회적 약자, 소수자와의 연대 진보운동의 핵심이죠”

본문

 
맑고 온화한 미소를 지녔다.
그래서인지 도무지 머리띠 질끈 매고 노동운동 현장의 맨 앞에서 힘차게 팔뚝질 하고 있을 그이의 모습은, 실제 확인하기 전까지는 상상조차 힘들다. 하지만 그런 그이의 모습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곳엘 가면 언제나, 항상, 늘, 변함없이 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들이 무시와 차별을 거부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현장. 특히 장애차별을 반대하는 집회현장에서 그이의 모습은 이제 익숙하기까지 하다. 그는 그곳에서 낮지만 힘찬 목소리로 연대를 실천하고 때로는 묵묵히 서 있는 것으로 대신한다.
함께 하는 사람들도 그에게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저 그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장애차별이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임을 증명하는 ‘보증 수표’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변화를 갈망하는 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의 ‘존재의 이유’를 들어보았다.

 

인연, 스승과 제자 관계에서 동지적 관계로
함께걸음(이하 함): 장애계의 현안을 촉구하는 집회가 있을 때마다 이수호위원장님의 모

 
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냥 함께 서 주시는 모습만으로도 든든하다는 이야기가 많은데요, 특별히 장애우 문제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 연유가 있으신가요?
이수호 위원장(이하 이): 네, 맞아요. 직접적인 이유라면 한국뇌성마비연합회 류홍주 회장이 제가 신일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때 제자라는 관계 때문이죠. 우연히 활동을 하면서 이 친구와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 학교 다닐 당시 저와 한 약속을 꾸준히 지키려고 애쓰는 것 같아 참 고마웠어요. 신학을 공부해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싶다고 했는데. 담임은 아니었고 상담실에서 진로상담 등을 했는데, 그 때 장애를 가진 학생들과 편안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었죠.
함: 위원장님이 계셨던 신일 고등학교에 장애학생이 특히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이: 60년대 중반에 지어진 건물인데, 특이하게도 계단이 전혀 없는 학교였어요. 모든 층에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어서 휠체어를 탄 학생들이 층별 이동할 때 별 어려움이 없었죠. 당시에 그런 건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평준화가 되고 난 후부터는 다른 지역에 사는 장애학생들이 일부러 이사를 오고 전학을 하는 경우가 많았죠. 한 학급에 장애학생이 몇 명쯤 되었던 거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특이하지 않았어요. 수적으로 많아서이기도 하겠지만 모두 활발하고 적극적이었거든요.
함: 하지만 단지 제자가 장애운동을 한다고 해서 적극 연대하시는 건 아니실텐데요, 위원장님이 실천하시는 노동운동과 장애운동의 연대의 지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우선 조직적 연대보다 위원장님 개인이 갖고 계신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이: 류홍주 회장이 장애운동을 새로운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고 봤습니다. 그동안 장애우 문제하면, 의존적, 시혜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지요. 그러나 뇌성마비장애인연합의 무기여 연금투쟁과 박경석 대표를 중심으로 한 이동권연대의 활동에서도 볼 수 있지만 ‘제대로 된 주체적 장애운동이 진행되고 있구나’하고 느꼈습니다. 교육운동, 노동운동을 하면서 절실하게 느낀 것 중 하나가 ‘가장 약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게 절실히 필요하다’는 거예요. 어느 쪽이든 소외되어서는 안되고 힘이 필요한 영역의 동지들에게 힘을 보태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그 중 제 개인적 관심사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활동과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 그리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모임인 유가협 등인데요, 모든 운동이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은 이렇게 함께 연대하고 애쓰는 모습 속에서라고 생각합니다.
함: 연대가 말이 쉽지, 실제 몸으로 실천하는 것으로 이어지기까지 다른 무엇이 있을 것 같은데요?
이: 제가 89년 참교육 운동을 처음 시작하면서 해직되었다가 민주노총 사무총장도 하고, 10년만인 98년도에 복직했어요. 교사로서 복도 많아 2002년까지는 전교조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죠. 임기를 마치고 나서는 곧바로 선린인터넷고등학교에 복직했습니다. 이제 정년 퇴직할 때까지는 아이들과 함께 지내겠다는 생각이었거든요.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단절되지 않고 계속한 활동이 있습니다. 바로 장애우 운동에 힘을 보태는 활동이었는데, 제가 뇌성마비연합회의 고문으로 있거든요. 매번 자료를 보내주고 행사가 있으면 일정을 알려주니까, 감사히 생각하고 참여했죠. 장애우 운동은 비장애우가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장애라는 게 내가 원해서 생긴 게 아니쟎아요, 선택의 문제가 아닌데 ‘장애’ 때문에 차별 받는 건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일종의 부채의식이라고 해야 하나요? 저에게는 항상 부담감이 있었던 것 같고, 그래서 집회나 토론회장 등 장애운동의 현장에 자연스럽게 이끌렸던 것 같습니다.

주체의 치열함이 곧 운동의 힘
함: 위원장님 개인적 차원의 관심과 애정이외에 민주노총 차원의 적극적 연대가 절실한 것도 현실인데요, 장애 가진 사람들은 노동시장 진입전의 차별이 많고, 그래서 장애우 노동자로서 활동이 미비하다보니,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연대의 모습은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 고용장려금 축소 문제도 사회적으로 불거졌지만, 국가의 장애우 노동정책이라는 것이 무책임과 무계획으로 일관되고 있는데, 이럴 때 사회적 연대 차원에서 민주노총의 적극 결합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그렇죠. 당연히 해야죠. 지금은 제가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으니까 무기여 연금과 이동권 투쟁은 연대사업의 일환으로 참여하고 있는데, 총연맹의 활동이라는 게 워낙 사안이 많고 시기를 다투는 활동도 많아 만족스럽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언제든 먼저 느끼고 깨닫는 쪽에서 제안하고 주장해야 합니다. 총연맹이 먼저 알아서 할 수 있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수도 있어요. 일정조정을 할 때 항상 최우선에 배치하겠습니다. 언제든 정책실에 강하게 요구하고 총연맹의 입장을 물어봐 주십시오. 그러면서 하나하나 배우며 더 구체적으로 연대할 수 있을 겁니다. 가끔 부끄러울 때가 있어요. 내가 이것밖에 못하고 그저 와서 서 있기만 한 게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하지만 몸이라도 가서 함께 있는 것. 그게 연대가 아닐까요? 자꾸 애정이 가요. 그러니까 몸이 가는 거겠죠.
함: 하지만 여전히 사회 운동 진영 일부에서 장애우 노동자를 여전히 도와줘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닌가 섭섭한 면이 있습니다.
이: 노동운동, 민주화운동, 아니 진보운동의 핵심은 사회적 약자 혹은 소수자들과 어떻게 함께 평등을 실현해 가는가 하는 점입니다. 나만 잘살고 자유롭기 위해 정치권력과 사회 기득권 세력과 싸우는 것이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집착해 구호만 외치는 측면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운동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그런 지향점은 있다고 봅니다. 간혹 여유가 없어 매몰되는 측면이 있지만 시혜나 동정이 아니라 주체로 인식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봅니다. 시장주의자들처럼 효율의 잣대로만 보면, 장애우들은 무능력하고 쓸모 없는 존재로 비추어질 수 있죠. 그 수준을 뛰어넘는 인식과 구체적 연대가 있을 때 진보 운동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노-노 갈등 부추기는 보수언론 책동
함: 말씀하신 대로 어쩌면 해결할 현안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그래서 구체적 사업으로 받아 안고 가지 못하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또 변화하고 있다는 것도 말씀드리고 싶어요. 과거의 이슈는 재벌해체, 독재타도 등이었죠. 그러다가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이제야 비로소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이주노동자 문제, 중소영세업체 노동자 문제, 장애우 노동자 문제 등에 서서히 시선을 돌리고 연대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노동운동이 자칫 조합이기주의로 비추어질 수도 있을텐데, 이런 비판과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구체적으로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는 운동으로 거듭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함: 일각에서는 이주노동자 문제보다 장애우 노동자의 차별과 권리침해가 더 심각한데, 사회적 관심이 이주노동자 쪽에만 쏠려있다고 서운해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이 문제는 제대로 직시해야 합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노-노 갈등으로 조장하면서 분열로 보는 건 다름 아닌 보수집단과 보수언론의 주장입니다. 자본가들은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풀면서 “정규직 너희가 동의하고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왜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까? 매우 비본질적 차원의 접근방식입니다. 통계에서도 밝혀졌지만 정규직 노동자의 지위 상승도에 따라 비정규직의 지위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함: 무거운 주제에서 좀 가벼운 주제, 그러니까 이수호위원장님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도 듣고 싶은데요, 혹시 가족 중에 장애를 갖고 있는 분은 안계신가요?
이: 있었지요. 큰 형님 딸, 그러니까 저에게는 조카인데, 근이양증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주 이쁘고 제가 삼촌이니까 정말 좋아했죠. 초등학교 때까지는 괜챦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점점 움직이지를 못하더니 결국 25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굉장히 가슴 아팠죠.
함: 전교조 위원장으로 계실 때, 전교조 내부에 특수교육위원회도 생기고 전임자도 생기지 않았나요? 그 때문에 지금 장애학생 교육권 운동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것 같습니다. 알게 모르게 전교조 특수교육위원회가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요, 그런데 이번에 전교조가 약간의 구조를 변화시키면서 모든 위원회를 국으로 편입할 예정이라는 소리도 들리던데요.
이: 맞아요. 위원회 설립 이후 1년 지난 후에 전임자가 생겼지요. 도경만 선생이 아주 열심히 하시죠. 최근에 전교조가 국, 실, 위원회 등을 조정하는 것 같던데, 틀도 중요하겠지만 문제는 주체입니다. 모두가 자기영역에서 필사적으로 활동하면 역량은 인정받을 수 있을 겁니다.

모든 폭력은 비교육적입니다.
함: 상담에도 관심과 조회가 깊으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는데,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단순히 학교에서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이 아니더라구요. 지식전달 못지 않게 좋은 인성, 품성을 갖게 도와주는 역할도 학교와 교사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처음에, 아주 젊었을 때에는 매를 들기도 했어요. 성적 올리라고 체벌을 하면서까지 닦달 했었죠. 그런데, 제가 4년제 사범대학을 나오지 않아 교육학을 전공하지 않았기도 했지만, ‘이게 교육적으로 맞는 건가?’ 의문이 들기 시작했어요. 이건 아니다 싶었는데, 딱히 그 이유의 근거를 정리하는 게 쉽지 않았죠. 그래서 스스로 공부를 시작한 겁니다. 상담교사 자격 연수를 실시하는데, 국·공립은 가산점을 주니까  승진을 위해 연수를 받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사립에서는 방학 내내 시간을 할애해야 하니까 안가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죠. 그런데 참 좋더라구요, 사람의 심리, 성격을 이해하게 되면서 인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생겨나기 시작한 겁니다. 특히 ‘대화’라는 것, 그러니까 말을 통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에 매우 놀랐습니다. 교육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언어폭력, 비아냥거림, 벌 등 모든 체벌과 폭력이 비교육적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죠. 모든 폭력은 비교육적입니다. 그 때의 상담교육을 통해 ‘교육’이란 상호작용을 통해 올바르게 변화되어 가는 것이고, 교육적 삶이란 ‘함께 사는 것’이라는 걸 몸으로 체화하게 되었습니다.

함: 인상이 굉장히 온화하시고 부드러우신데, 노동현장은 정말 살벌한 분위기 아닌가요? 위원장님이 빨간 머리띠를 묶고 투쟁의 선두에 계시는 모습이…, 하하
이: 사람들이 사는 모습, 다 거기서 거기겠죠. 절 잘 모르시는 분들이 가끔 놀라긴 하죠. ‘저 사람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 거야?’라구요. 때로는 적대감을 갖고 싸우기도 하지만 그것도 저의 일부분이고, 평상시의 모습도 저겠지요. 역할에 따라 달라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농부의 꿈을 안고 노동운동을 하다
함: 위원장님의 옛날 꿈은 무엇이었나요?
이: 제가 원래 이과였어요. 만약 대학엘 가면 원예학과 같은 곳을 가서 농사짓겠다는 것이 꿈이라면 꿈이었지요. 꽃, 식물, 나무 같은 걸 무척 좋아하거든요.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경외스럽죠. 자연스럽게 겸손함을 배우게 됩니다. 뭐 물론 그런 꿈을 갖고 살다가도 운명은 이렇게 왔지만요.
함: 지금 위원장님의 모습은 생각하신 던 소박한 삶과는 많이 다르지 않은가요?
이: 하하. 때로는 강함과 치열함, 격렬함이 필요할 때도 있겠죠. 하지만 이런 선동, 연설 같은 건 훈련으로 가능해요. 쑥스럽고 힘들다고 해도 몇 번 해보면 익숙해지지요. 하지만 내면의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깁니다. 위원장이라는 지위는 고독한 자리예요. 매 순간 어떤 선택과 결정을 요구받는데, 그게 무엇이냐에 따라 사회적 대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지 않습니까? 때로 냉정한 판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노동운동계 내부에서 정파간의 이념투쟁이 얼마나 강합니까? 예를 들어, 회의를 주재해야 하는데, 정말 치열하게 각자의 논리를 주장합니다. 의장으로서 때로는 화도 내고 적절히 조절하면서 결정을 내려야 하죠.
함: 그래도 위원장님께서 화를 내시는 모습은 상상이 안가는데요? 올 초 위원장으로 선출되셨고, 앞으로 임기가 3년이니까 이제 시작이네요. 혹시 임기 내에 이것만은 꼭 하겠다는 것이 있으신가요?
이: 임기내에 뭘 해놓겠다 하는 계획은 없습니다. 목적도 없어요.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하면 족하다고 생각해요. 전교조 위원장 임기를 마치고 ‘이제 학교현장에 가서 아이들과 편안하고 조용하게 생활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민주노총 선거 때가 되니까 후배들이 찾아와서 출마를 권하고, 그 이야기를 들어보니, 진짜 그런가? 내가 출마해야 하는 상황인가? 뭐 그런 고민을 하다가 결국엔 끌려나가고(웃음), 그런 걸 보면, 전 투철한 뭔가는 없는 것 같아요. 그저 상황에 부딪치면 고민하고, 그래서 OK 혹은 아니면 ‘아니오’라고 결정하죠. 하지만 상대적으로 소외된 약자, 주변부에 있는 노동자와 함께 하는 실천은 계속 할 것입니다. 위원장으로서의 개인적 소망은 힘을 나누며 함께 잘사는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수호의 사랑론
함: 혹시 종교를 갖고 계신가요?
이: 아, 어쩌면 내가 갖고 있는 사상의 근거는 기독교에서 온 것일 수도 있겠네요. 저 예수쟁이예요
함: 워낙 강력한 운동세력의 지도자시라 유물론자인 줄 알았습니다, 하하
이: 하하, 그래요, 성경도 불경도 모두 현실에 충실하고 올바르게 사는 것, 그게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거니까 유물론과도 같은 맥락이 없지 않겠네요. 성경을 보면 ‘길 잃은 양 한 마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쟎아요? 예수가 제자들에게 길을 가다가 100마리의 양 중 1마리의 양이 없어진 것을 알게되었을 때 목자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죠. 예수는 제자들에게 목자는 길을 잃은 한 마리를 찾으러 되돌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그럼 99마리의 양은 어떻게 하냐!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효율의 논리로 접근했을 때 나오는 말입니다. 99마리는 강자예요. 강한 사람들은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죠. 하지만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은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는 약자예요. 그래서 목자가 필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목자의 역할은 약하고 소외된 양을 보살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지요. 공부 잘하고 건강한 아이들은 교사인 저의 돌봄이 그리 필요치 않아요. 하지만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약한 학생들은 누군가의 관심과 돌봄이 필요합니다. 교사의 역할은 모든 아이들을 아우르기 보다 주변부에 있는 한 학생에게라도 따뜻한 시선을 보내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 따뜻함은 누구에게나 전해지기 마련이죠.
대담: 이태곤 편집국장
정리 홍여준민기자 / 사진 정선아 객원사진기자

그는 소외된 사람들과의 연대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터득한 재미난 이야기 하나 들어 보실래요? 많은 학자들이 형평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똑같이 사랑한다는 건 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인간의 기본적 심리이기도 하지만, 특히 감수성이 민감한 아이들의 경우에는 자신이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을 금새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모두에게 골고루 그 느낌을 전달해주기는 아주 힘들어요. 하지만 교사가 가장 약하고 소외받는 아이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풀면 다른 아이들 또한 자연스럽게 그 사랑을 전해 받습니다. 그 사랑이 어떤 건지도 알게  되구요. 그게 진짜 사랑하는 것 아닌가요?”
사랑이란 “야단스럽게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다른 것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기 위해 애쓰는 것, 그러한 마음을 갖고 작지만 실천에 옮기는 것, 그 진정성은 아무리 작아도 누구나 느끼고 알기 마련이란 것이 그의 ‘사랑론’이었다. 사람은 동정이나 시혜가 아닌 ‘주체’로 인정할 때 비로소 그 힘으로 당당해 질 수 있는데, 그러한 관계가 진정 ‘사람사랑’의 참길이란 뜻.

작성자홍여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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