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영, 김정일 부부 이야기 > 세상, 한 걸음


김소영, 김정일 부부 이야기

파산은 우리에게 절망이 아닌 희망이랍니다

본문

파산이라… 신용불량자 400만 명 .
이중 개인파산을 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누구나 피하고 싶은 일이다. 경제적으로 무능력자임 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니 좋을 까닭이 없다. 하지만 파산선고를 기다리는 장애우가 있다.
 그녀는 파산선고를 희망으로 알고 기다린다.
시각장애우 김소영씨.
그녀가 기다리는 파산선고는 어떤 의미인지 왜 그녀는  파산을 기다리는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소영 씨는 지난 5월에 법원에  정식으로 개인파산을 신청했다. 카드빚에 힘들어하며 울기만 하는 김소영 씨를 보고 친구가 ‘파산제도’가 있다는 귀띔을 해줬다. 처음 들었을 때만해도 그냥 그런 게 있나보다 했지만 자꾸 힘들어지는 생활에 남편을 졸라 인터넷을 뒤졌다

 
 
“3천 원짜리 옷 하나 제대로 못 사봤어요”
 
 
 
우선 김소영씨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부터 이야기해야겠다.  그녀는 많이 아프다. 당뇨가 심해서 인슐린 주사를 맞고 있고, 시각장애까지 생겼다. 신장은  25%만 살아 움직이고 있어서 협심증이  걱정이다. 그런데 인생살이 걱정이  많아 신경이라도 좀 쓸라치면 눈에  안압이 올라간다. 보통사람의 안압은 15㎜Hg이라는데 요즘 파산문제에 신경쓰느라 김소영씨의 안압은 24㎜Hg을 넘어섰다. 21㎜Hg이상 이면 고안압이고 여기에 시각기능 장애가 더해지면 녹내장이라는데,  김소영씨가 그렇다.
이것만으로도 김소영씨의 형편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못지 않게 심각한  문제가 하나 더 있다. 그녀가 가난하다는 것이다. 가난해서 몇 년 동안 치료받는 동안 병원비를 대기가 쉽지 않았고 생활비 마련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시집와서 3천 원짜리 옷 한 장 제 대로 못 샀어요. 텔레비전은 남편이  결혼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고  오디오는 친척집에서 얻어왔어요.  반반한 물건이라고는 얼마전 엄마가 사준 옷장뿐이에요. 그런데 그 많은 빚이 어디서 생겼는지…”
김소영씨의 한숨이 이어졌다.  한 푼 두 푼 쌓인 카드빚이 3천만원  가까이 된다는데, 그건 김소영씨의  빚만 계산했을 때다. 남편 역시  월세방 얻으라 전세자금 융자받은 천만 원까지 해서 몇 천만 원이  있다. 그럼 두 사람이 내는 한달  이자와 월세, 생활비를 따지면… 감당이 안된다. 남편 김정일씨도 같이 파산신청을 하지 그러냐고 물었다 .
“제 이름으로 된 빚은 은행융자라 이자가 싼 편이고, 제 파산이 받아들여져도 보증인이 있을 때는 보증 서준 사람들한테 그 빚이 넘어가요. 주위사람들한테 폐를 끼칠 수야 없죠”
김정일씨의 설명이다. 그럼 그 빚이 어디서 왔을까? 이제 차분하게 김소영 부부의 사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병원에 가던 날로 입원을 했어요. 그것도 중환자실에”
‘병원에 가서 병을 얻어온다’는  말이 있다. 김소영씨도 진찰받고  약 며칠 먹으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병원에 갔다가 큰병에 걸려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경우다.
2000년도에 처음 병원에 갈 때만 해도  별다른 증상은 없었다. 생리 때가 되면 심하게 구토를 하고 생리가 끝나면  괜찮아져서 생리통이겠거니 하고 병원에 갔었다. 병원에서도 별다른 증상이 없다며 링거주사만 놔주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다. 한방병원에도 가봤지만 별다른 병이 없다는데 아픈 건 더  심해져서 이제는 생리를 안해도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구토가 심해지면서 토할 때 눈에 힘이 들어가 눈이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 눈이 아파 찾아간 병원에서 결국 당뇨라는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 가던  날로 김소영씨는 중환자실에 입원을 해야 했다.
“눈 아픈거야 내 머릿속 이야기고, 멀쩡한데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으려니까 너무 힘들더라구요.  병원에서는 신장에서 무슨 성분이 빠진다고 입원해 있어야 한다고 하고,  왼쪽 눈에는 자꾸 눈곱이 끼고…”
처음 눈에 눈곱이 낀다고 했을 때만  해도 병원에서는 염증이라고 했었다. 입원한지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안과진료를 받고 녹내장 치료를 받았다 . 당뇨가 심하면 시력을 잃는 수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레이저를 눈에 쐈는데 한꺼번에 700~800방을 쏘니까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 였어요. ‘띠~!’하는 소리가 몇 백 방 씩 계속 들린다고 생각해보세요. 치료를 받고 퇴원해서도 전자제품에서  나는 ‘띠’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어요”
녹내장에 걸리면 눈에 핏줄이 서기 때문에 핏줄을 없애기 위해 레이저로  쏴서 없애야 한다는 것이 의사의 설명 이었다. 김소영씨는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의 끔찍한 소리도 참아냈건만 치료결과는 실망이었다.

 
“레이저 치료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그나마 보였어요. 의사말이 치료를 받으면 볼 수 있다고 했는데 레이저 치료를 받고 나오자마자 왼쪽 눈이 안보이는 거에요. 뿐만 아니라 레이저를 쏜 쪽 눈이 얼마나 아프던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녀가  왼쪽 눈으로 세상을 본 것은. 왼쪽 눈을 완전히 실명한 것이다.  어떤  때는 실명한 눈이 너무 아파 김소영 씨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벽에다 찧어대야만 했다. ‘팍! 팍!’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날수록 아픈 것이  덜한 것처럼 느껴져서 그랬는데, 딴  사람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 이다.
남은 건 갚지 못할 빚과 나빠만지는 병 뿐 다시 병원에 찾아갔을 때 의사들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의사들이 수군거리는 거에요. ‘이제 와서 뭘 고치겠다는 거야’는 말도 하고 병원에 같이 간 엄마한테 ‘지금 고쳐보겠다는 거냐’고 묻기도 하더라고요. 병원 의사들이 ‘쉬~쉬 ~’하면서 장애 1급 진단을 내려 줄테니 그냥 가라고 하더군요”
그 뒤에도 병원을 전전하면 진찰받고. 입원하고, 퇴원하기를 반복했다. 강남 ㅅ병원에도 갔었는데  레이저를 쏴야한다고 해서 그냥 돌아 왔다. 왼쪽눈에 쐈던 레이저를 생각하면 끔찍해서 다시 레이저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집에 와서  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김소영씨가 안됐는지 다니던 병원의 간호사가 ㅇ병원을 소개해 줬다. 그곳을 지금까지의 병원과는 좀  달랐다. 레이저를 쏘는 방법밖에 없다는 말을 해서 결국 오른쪽에도 레이저로 시술을 받았다. 다행히 이번  시술이 별로 아프지 않았고 치료를 받은  후에도 오른쪽 눈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른쪽 녹내장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 뒤로 점점 눈이 나빠져서 지금은 막연히 빛을 느끼는 정도라고 한다. 인터뷰 동안 연신 플래시를 터뜨렸지만 그녀는 모르는 듯했다 .
“화장실에 불을 켜 놓으면 그쪽에 빛이 있다는 걸 느낌으로 아는 정도에요. 망막전문 의
 
 
사선생님이 그 빛마저도 안보이게 되면 수술을 하자고 하세요. 두 눈 다 시력을 잃었으니 더  이상 손해볼 것도 없으니 시도나 해보자는 거죠”
2000년도부터 다니기 시작한 병원생활로 그녀에게 남은 것은 빚과 병 뿐이다 . 시력은
 
점점 약해져서 두 눈을 완전 히 잃어버렸고 아프기 시작하면서 빠졌던 살은 다시 쪄서 건강을 위해서라도 다이어트를 해야 할 판이다.
“얼마 전에 병원에서 빈혈이 있다고 하더군요. 뚱뚱한데 무슨 빈혈이냐고 생각했는데, 신장이 안좋으면 그럴 수도 있다고 하시더라구요”
당뇨, 신장, 안과 등 두세 달에  한번씩 가는 병원도 아픈 곳이 많다니 한 달에 한 번 꼴로 가서 약을 타와야 한다. 그때마다 남편은 직장에 사정 이야기를 하고 김소영씨랑 동행을 했는데, 그나마도 소영씨의 몸이 나빠지면서 관둔 지 3달이 넘었다. 병원에 한번 갔다 오면 약값도 만만치 가 않았다. 지난달부터 늘어난 약 때문에 약값만 꼬박 30만원씩이 든다. 월세 30만원에 생활비와 융자금, 카드빚의 이자까지. 그녀가 3천 원 짜리 옷 한 벌 안 샀어도 늘어나는 빚이  이해가 될 것이다. 

내 생애 최초의 이층집
지금부터는 인터뷰 도중 들었던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해야겠다.  김소영씨가 살고 있는 집은 2층이다. 특별히 좋을 것도 없는 조금은 낡은 평범한 다세대 주택이고 동네도 마찬가지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은 은행에서 융자로 받은 천만 원을 보증금으로 넣고 월세를 30만원씩 내고 있다.  처음 이곳으로 이사할 계획을 세웠을 때만해도 김소영 씨가 일을 했을  때였다. 그러니 둘이 열심히 벌어 30 만원 월세 내는 건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낮에도 불을 켜 지 않아도 되는’ 이층집을 얻은 것이다 .
며칠 전 찾아온 카드사 직원은 김소영 씨가 단지 2층에 산다는 이유  때문에 찾아왔다고 말했다. 대부분  반지하나 지하에서 살고 있는데 김소영 씨가 사는 곳은 2층이니까 사는 게 괜찮은 게 아닌가 싶어서 왔다는 것이다. 물론 가지고 갈 것은 하나도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햇볕이 잘 드는  2층에 사는 거에요. 직장으로 다니던 사우나도 지하 2층에 있는 곳이었고, 결혼 전에 살던 곳도 마찬가지구요.”
지하방에 안 살아 본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대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어둡고 침침한 방안과 습하고 차가운 공기, 한 여름에도 배어있는 곰팡이 냄새…
“엄마가 저 아프고 나니까 그러시더라구요. ‘네가 평생 지하에서만 살아서 햇볕이 안맞는데 햇볕을 보고 사니까 병이 난 거 아닌가 모르겠다’ 고. 말도 안되지만 그러셨어요”
그 말을 하는 김소영씨의 표정이 씁쓸해 보였다. 평생 지하에서만  살다가 지상으로 올라왔는데 이제 그  빛을 볼 수도 없으니. 인생이란…  누군가의 말처럼 정말이지 ‘사는 게  쉽지가 않다’는 말처럼 그녀의 삶이 쉽지가 않다.

결국은 개인파산 신청까지
그래서 김소영씨는 개인파산을 신청하기로 했다. 약값과 생활비 , 카드 돌려막기, 이자, 병원비. 이런 고민들 속에서 점점 몸은 나빠져만 가고 아픈 몸으로 밖에 나간다거나 돈을 버는 건 엄두도 나질 않으니 돈을 벌어 빚을 갚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누구나 ‘나 경제능력 없어요’라는  말을 하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
“집사람 빚은 대부분 카드빚이라  이자가 너무 많아서요. 카드를 막기 위해 또 카드를 만들거나 사용하게  되고 거기에 이자가 붙어서 늘어가는 데, 정말 감당이 안되니까요. 카드  빚만 없어도 어떻게든 해보겠어요”
남편 김정일씨의 하소연이다. 이제 김소영 씨의 개인파산 신청이  받아들여서 짐을 좀 가볍게 가지고 갈  수만 있다면 바라는 것이 없다. 두 사람에게 개인파산이 희망이 된 것이다 .
김정일씨는 98년 아이엠에프(IMF) 가 닥쳤을 당시 운전직으로 일했다. 아이엠에프로 직장을 잃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배워 일을 배웠고 한 동안은 경기가 좋았다.
소영씨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정일씨의 직업이 프로그래머라는 점이 도움이 됐다. 집에서건 어디서건  일만 완료해 놓으면 그나마 시간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몇 년 전부터 그가 일하는 쪽도 시들해 졌다. 홈페이지를 만드는 곳들도 없어졌고 자연스럽게 업체들도 많이 없어졌다. 여기저기 알아보고는 있지만 재취업이 쉽지 않아 걱정이다.

시댁에서는 ‘이혼하라’고 요구 해
그런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걱정 됐는지 시댁에서 ‘이혼이야기’가  나왔다. 김소영씨는 아프기 시작하면서부터 시댁에 가질 못했는데 작년에 시댁에 다녀온 남편이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집에 돌아와 남편한테 물었다.
“시댁에서 무슨 일 있었냐고 물었더니 말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넘겨짚었죠. ‘뭐라고 그러셔?’ 이혼이라도 하라고 하시더냐구요. 남편은 아니라고 하는데 느낌이 맞는 것같더라구요”
옆에서 듣고 있던 김정일씨가 아무  말이 없다. 정말 그랬나 보다. 소영 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가슴이  아팠다. 그날 소영 씨는 남편에게 매달렸다고 말했다.
“‘애정의 조건’이라고 채시라가 나오는 드라마가 있는데, 이혼하자는  남편한테 매달려요. 다른 사람들은  비굴하게 매달리는 여자를 이해 못하겠지만, 전 이해가 되더라구요.  저도 말로야 ‘그래 이혼해’하고 싶지만, 막상 닥치니까 매달리게 되더라구요”
그날 김소영씨는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으며 매달렸다고 했다.  남편은 ‘열심히 살자’며 김소영 씨를 다독거렸고, 그 뒤로 시댁과의 인연을 끊었다. 간혹 소영씨가  시댁에 문안전화라도 하면 남편이 알고 화를 낸다. 좋은 소리도 못 듣는데  왜 전화해서 기분만 상하냐고. 그래도 시골에서 보내주는 쌀은 끊기지 않았다.
한번은 김정일씨가 술을 마시고 들어와 건넛방에서 잔 적이 있었다. 이상해서 깨우러 갔더니 방바닥 물기가 느껴지더란다. 술먹고 들어와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건넌방으로 들어간 것이다.
“남편이 날 붙잡고 울더라구요. ‘힘좀 내라’고 ‘네가 쓰러지면 나도 쓰러진다’고. 눈물 흘리며 그런 말하는 남편을 보고 나서야 내가 장애를 갖게 됐고 아프다는 걸 받아들이게 됐어요”

“힘들어도 계획은 있어요”
김소영씨의 이야기를 쓰다보니  그녀의 삶이 너무 힘들게만 보인다.  겉으로만 본다면 그

 
렇다. 몸은 병에 시달리느라 힘들기만 하고 하루에도  한 움큼씩의 약을 먹고 늘어나는 빚 때문에 안압이 올라가서 걱정이다. 시댁에서는 이혼하라는 이야기까지 나왔으니 소영씨가 예쁠 이유가 없고,  친정어머니는 희귀병으로 일년에 두차례 외국의사의 진찰받고 수술을 하셔야 살수 있다.
두 사람 생활비는 생활보조비로  나오는 10만원이 다다. 개인파산이 받아들여지려면 서울로 호적을 옮겨 놓는 게 좋다고 했지만 그것도 망설이다 그냥 인천에다 신청을 했다. 병자인 김소영씨가 움직인다는 게 영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래도 두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다 . 아니 계획을 세우고 있다.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미래를 위한  계획을.
우선 김소영씨가 신청한 파산이 받아들여지고 나면 빚에 대한 부담을  덜고 계획을 세워서 살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장애우한테 주는 10평 이하 임대아파트에 대한 우선 분양권 이야기도 덧붙였다. 한 지역에서 3년 이상 머물면 장애우들에게 먼저 임대 아파트를 빌려주는데, 그걸 신청해서 임대아파트가 나오면 지금 있는  보증금을 빼서 조금이나마 빚을 갚을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남편도 어떻게든 취직을 할거고 하니,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고.

비록 울보 김소영이지만…
김소영씨는 자신을 울보라고 했다. 울면 눈에 안좋지만 막내로 자라 눈물이 많다며 증명이라도 하듯이 인터뷰 중에도 몇 번을 울었다. 단순히 눈물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녀의 삶이 힘들어서 일 것이다. 하지만 김소영씨는 우는 만큼 웃을 줄도 아는 장애우였다.
“시작장애우가 되고나서 엄마가 집에만 있지 말고 점자도 배우고 걷는 법도 배우라고 하셨는데, 처음에는 화가 나서 전화를 끊곤 했어요. 글자도 모르는 초등학생이라고 하니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엄마 말이 맞더라구요”
소영씨가 처음 어머니로부터 점자를 배우라고 했을 때만 해도 소영씨는 방바닥에 안보이는 글씨는 쓰곤 했다. 쓰는 법을 잊어버리지 위해서, 글자도 모른다고 하는 어머니한테 보여주기 위해서. 그러다 자신이 시각장애우임을 받아들이게 됐다.
“안보이는데 글자를 쓸 줄 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엄마한테 전화해서 사과하고 날이 좋아지면 점자를 배우겠다고 약속했어요. 지팡이 하나로 길을 다니는 시각장애우들처럼 저도 걷는 법도 배우고 글자도 배워야죠”
장애를 갖기 전 소영씨는 길거리에서 장애우들을 보면 왠지 꺼려졌다고 말했다. 그런 그녀가 장애우에 대한 생각이 변했다. 라디오 일일 진행자로 뽑혀 남편이야기를 할 때도 자신이 시작장애우임을 떳떳이 밝혔다.
“가끔 사람들이 속도 좋다고 해요. 앞도 못보고 몸도 안좋은데 잘 웃는다구요”
소영씨는 웃는 모습이 참 예쁘다. 집에 혼자 있는 날은 좋아하는 음악 틀어놓고, 음악을 위로 삼아 몸을 추스른다. 집안일은 시력을 잃기 전 솜씨를 발휘해 혼자서 도맡아서 하고 있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날씨 좋은 여름날! 집근처의 공원에서 김소영씨는 남편의 도움을 받아 걷기 연습을 하고 있다. 그녀의 손에는 시각장애우들이 들고 다니는 흰 지팡이가 들려있다. 여기저기 톡!톡! 두드리며 걷기 연습을 하는 김소영씨. 애써 걷다가 어디 나무에라도 살짝 부딪히면 남편이 달려오고, 놀란 남편에게 김소영 씨가 활짝 웃어 보인다. 깔깔깔 웃으면서… 

글 서현주 객원기자 / 사진 정선아 객원사진기자


 

작성자서현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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