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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장애인연맹 위문숙 회장

인간에 대한 존중, 장애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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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경험은 그의 인생관을 낳는다. 어떤 경험을 했느냐가 그 사람의 가치관을 만드는 것이다. 굶어 본 사람은 음식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월급쟁이에서부터 시작한 사장은 그래도 노동자들의 입장을 조금은 더 이해 할 수 있지 않을까.
장애인들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자는 목소리가 있다. 장애인 당사자가 장애인의 입장에서 사회에 참여할 방법을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그 흐름을 만들어 가는 곳 중에 하나가 바로 한국장애인연맹(DPI 디피아이)이다.
서울 장애인연맹의 위문숙회장을 만나봤다.

위문숙(지체장애 2급)씨와의 인터뷰를 위해 분당에 있는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이하 공단)을 찾았다 . 인터뷰 약속장소를 잡은 다음날, 위문숙씨는 ‘장애인고용장려금축소반대 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대 책위)’가 주축이 된 점거농성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녀를 찾은 날은 점거농성에 들어 간지 5일째 되는 날이었다. 작년, 장애인들을 고용한 업체를 보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애인고용촉진장려금이 축소됐고 대책위는 여기에 대한 대책마련을 요구하며 점거농성에 들어간 것이다.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바보인가요? 계산기 두들겨 보면 뻔하게 나오는데, 장려금마저 없다면 생산성 떨어지는 장애인들을 왜 쓰겠어요?”
위문숙씨의 말대로 장애인고용촉진장려금 축소는 곧바로 장애인들의 구직난으로 이어졌다. 여기저기서 어려움을 토로하는 소리들이 나오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싸우고 있는 것이다.

“미싱공을 하면 돈을 더 많이 벌텐데…”
장애인 고용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는 무척이나 강한 여성처럼 보였다. 자신감과 확신에 찬 말투가 그랬다. 하기야 보통 사람이라면 점거농성에 들어갔다는 말만으로 도 ‘와우~’ 소리를 할 것이다. 뭔가 투철한 투사의 말이 나옴직도 했다 . 그러나…
장애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물었을 때 위문숙씨의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남들은 계기가 있었다지만 전 자연스럽게 받아 들였어요”
말 그대로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밀알’이라는 동아리 활동이 시작이었다. 정립회관을 이용하던 학생들의 모임이었는데 여느 동아리처럼 독서토론을 하고 발표회를 했다. 선배 중에 ‘울림터’라고, 장애인 문제연구회 활동을 하던 선배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장애인들이 처한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 그때까지만 해도 장애인이 처한 현실에 대한 막연한 공부 정도였다. 장애인의 현실을 몸으로 느낀 건 다니던 대학교를 관두면서부터였다. 축산업과를 다녔지만 지체장애인인 여성이 학교를 졸업하고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한 학기를 마치 고 대학을 관뒀다. 집에서 탄 다음 학기 등록금은 의상학원에 등록하기 위한 학원비로 썼다.
“장애운동은 평생 한다고 생각했지만 먹고살기 위해서는 직업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관심이 있던 의상디자인을 배워보려고 학원을 1년 반인가를 다녔죠 아마”
간혹 학원비를 활동비로 쓰곤 해서 배우는 기간이 길었다. 하지만 여차여차해서 졸업은 했고 아는 사람 의 소개로 ‘ㄴ’이라는 여성의류회사에 시험을 봤다. 당시만 해도 여성 의류로는 단연 최고봉을 달리던 브랜드여서 기대도 컸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아는 사람 덕분에 면접까지 봤지만 면접이후 의상디자인에 대한 미련을 싹 지워버렸다.
“면접을 보는데 첫마디가 ‘미싱공을 하면 돈을 더 많이 벌텐데…’였어요. 그 일을 계기로 장애인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게 됐죠”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배운 디자이너 수업을 하나도 못 써먹은 건 아니다. 비록 니트 디자이너로 3개월간 일한 게 전부지만, 대기업의 하청을 받아서 제품을 만들어 내는 업체에 취직을 했다. 말이 디자이너지 대기업에서 가져온 샘플대로 기계에 입력하는 것이 다였다. ‘여기는 빨간색 겉뜨기, 다시 안뜨기, 파랑색으로 안뜨기하고 다시 안뜨기…’
기계가 알 수 있는 언어로 색깔과 뜨게 방법을 입력하는 것이다. 월급은 고작 30만원이 다였다. 그럭저럭 배워서 익숙해지면 월급도 괜찮고 나름대로 전문가 소리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새로 온 차장이 ‘단순 무식형’이어서 위문숙씨에게 어떻게 하는 건지 설명하질 못했던 것이다. 무식하게 시키는 게 다였다. 5시가 넘어서야 야근이 결정되고 그럼 약속이고 뭐고 꼬박 밤작업을 해야만 했다. 자정이 넘어서야 작업이 끝나면 회의도 자정 이후로 미뤄졌다.
“나만 아니면 낮에 회의를 해도 되는데, 나 때문에 회의를 새벽에 잡아야 하는 거에요. 일에 대한 회의도 들고 해서 3개월 만에 관뒀어요.”
그때부터 위문숙씨의 짧고 굵은 경력들이 시작됐다.
“처음은 성남에서 떡볶이 장사를 시작한 거예요. 같이 활동하던 친구들이 맘 편하게 놀러올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게 제일 좋았죠”  
분식점 이름도 특이했다. ‘새콤달콤’ 새콤달콤은 여러 번 방송에 나가기도 해서 그런대로 수입이 괜찮았다. 여자 둘이 하는 분식점이야기도 나가고, 일주일에 하루 명동성당에서 심장병어린이 돕기를 위해 노래 부르던 모습도 나갔다. 1년 반 정도 분식점을 하면서 처음 투자자본으로 넣었던 5백만 원도 다 벌어서 갚았다고 하니 장사에는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뒤로 안 해본 일이 없다. 분식점과 포장마차, 횟집, 노래방, 탕수육 체인점, 새우요리 전문점, 호프집,  PC방(피시방)… 하나하나 마다 사연도 많지만, 다 1년을 넘기 힘들었다. 장사에 재미가 붙으면 열심히 했다가도 한번 마음이 떠버리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녀에게 끊이지 않는 유일한 관심사는 장애운동뿐이었던 것 같다.

등 돌려 버린 사람들
93년도의 일이었다. 재정담당으로 일하던 위문숙씨는 뭔가 대책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변변한 사무실 하나 없이 운동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사무실 하나 장만했으면 싶었고, 경제적인 문제로 활동가들이 하나 둘 떠나는 현실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혹했던 것이 바로 다단계 판매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93년도에는 다단계 판매에 대한 인식이 훨씬 안 좋을 때였다. 시사프로그램에서는 툭하면 다단계에 잡혀 있다가 돈 잃고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다뤘다. 사람들의 인식이 안 좋으니까 친구에게 다단계를 소개할 때도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다’라든가 ‘일을 좀 도와 달라’고 말하게 되는데, 그것마저도 흠이 됐다. 떳떳한데 왜 거짓말로 데리고 가냐는 거다. 위문숙씨 역시 같은 방법으로 다단계를 접하게 됐다.
분식집을 하던 문숙씨에게 ‘3일만 도와 달라’는 부탁을 해온 것이다.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이라 흔쾌히 ‘좋다’고 했고  첫날 교육을 받고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눈치 챌 수 있었다.
“전 지금도 다단계가 문제 있는 판매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법적으로도 문제가 되지 않구요”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장애인 신문’에 그녀와 다단계에 대한 기사가 나가고 나서 사람들은 위문숙이라는 사람에게서 등을 돌려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숙청’당했던 거죠. 한두 명 와서 개인적으로 물어 본 사람들은 있었지만, 조직에서 물어본 건 아니었거든요. 그게 좀 아쉬워요. 와서 물어보면 좋으련만 내가 세뇌 당했다고 믿었고 물 들을까봐 겁나했던 것 같아요”
섭섭해 할만도 하련만 그녀는 괜찮아 보였다. 오래 전 일이라서 그런지, 아님 초월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만 믿어주지 않고 이해받지 못한 것만을 아쉬워했다.
“서로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겠거니 해야되는데…”
오히려 그녀는 자신을 믿고 3일이라는 시간을 내준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됐다고 한다.
“내가 데리고 갔지만 그 일을 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나를 믿고 3일이라는 시간을 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어요”
이 사건이 바로 흔히들 말하는 위문숙의 ‘외도’였다.
 
“포장마차가 가장 적성에 맞는 것 같아요”
위문숙씨가 다단계에서 손을 떼고 인천으로 간 것은 95년도였다. 달랑 50만원을 가지고

 
월세방을 얻었다. 포장마차를 하겠다는 생각에, 알고 지내던 양아치 선배의 도움을 받았다. 우선 소개받은 포장마차에서 일을 배웠다. 말이 일을 배우는 거였지, 시작한지 3일 만에 주인은 문열어주고 그냥 가버리곤 했다. 그럼 혼자서 손님 받고 음식 만들고… 그러면서 일을 배웠다.
“지금까지 많은 일을 해봤지만 포장마차가 가장 적성에 맞는 것 같아요. 음식이야 분식점할 때보다 다양했지만 한국음식이 그렇잖아요. 비슷비슷한 게. 제일 고민은 역시 자금을 마련하는 거였죠”
아무리 없어도 2백만 원은 들 것 같은데, 월세 보증금 50만원이 전 재산인 사람이 엄두가 안 나는 금액이었다. 그래서 한판 승부(?)를 벌였다. 양아치 선배의 선배를 만나 다짜고짜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차용증이든 뭐든 다 쓰겠다는 말까지 했다.
생각해보겠다고 하던 그 선배는 다음날 백만원짜리 수표를 들고 나타났다. 차용증도 필요 없고 ‘너 믿고 준다’는 말만 한마디 했다. 나머지 자금은 정말 우연치 않게 만들어졌다. 다단계 판매 때 알고 지내던 실장이 친구를 동반하고 온 것이다.
“사람들은 안 좋게 생각했지만 MLM(엠엘엠)을 같이 하던 사람들과의 관계는 좋았어요. 실장이 관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찾아다닌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 올 줄은 몰랐어요.  제 계획을 듣고 나서는 선뜻 백만 원을 내놓더군요. 꿔 준 것도 아니고 그냥 준거죠”
그렇게 해서 포장마차를 시작했지만 그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술 취한 손님과 놀러 온 친구들이 싸우는 바람에 영업정지를 받은 것이다.
장애계로부터 ‘명예회복(?)을 받은 것은 포장마차를 관둔 바로 직후였다.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에서 장애인 자활 프로그램의 하나로 아암도에 포장마차를 내자는 제안을 해온 것이다. 위문숙씨가 포장마차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 온 것이다. 하지만 인천시가 반가워하지 않았다.
“아암도에 포장마차를 만드는 건 일반 공원에 만드는 것과는 달랐어요. 물에 쓸려가지 않도록 굵음 파이프를 설치했는데, 시에서 보낸 철거반원들이 그냥은 해체가 안 되니까 포크레인으로 찍어서 철거해 버렸으니까요”
 
그 뒤에도 위문숙씨의 직업역정은 계속됐다. 공부라도 해볼 마음으로 시작했던 노래방은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운영했고, 탕수육 체인점은 인근에 13개의 유사업종이 들어설 때까지 했다. 업종을 전환해서 새우요리전문점도 하고 나중에는 호프집으로 전환해서 장사도 하고,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에서 추진하는 포장마차 사업을 영등포 지역에서 시도하기도 했다.
농담 삼아 건넨 말이지만 그녀의 직업이야기는 정말이지 ‘창업백과서전’을 만들기에 손색이 없었다.

재활이 아닌 사회참여의 기회로
위문숙씨의 경험 때문인지 장애인들이 직업을 통해 사회 참여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장애인을 위한다는 제도가 ‘재활’에 맞춰져 있는 게 문제에요. 재활은 장애인들을 대상화할 뿐이거든요.  재활이라고 하면 의료재활만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그녀의 생각은 장애인고용촉진법의 개정과 맞물려 간다. 14년 전에 만들어진 법을 다시 재검토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좋은 직장은 아닐지라도 이제 경증장애인들은 일반 노동시작에 어느 정도 유입할 조건이 만들어졌다고 봐요. 남은 건 중증 장애인들의 문제죠. 그런데 지금의 법은 경증장애인에 맞춰져 있거든요. 그러니 다시 써야하지 않겠어요. 이건 다들 공감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위문숙씨는 법이 개정돼 장애인의 취업을 촉진시킬  뿐만 아니라, 장려하고 유지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공단 점거농성을 설명했다.
“기업들은 의무적으로 2%의 장애인을 고용해야 하는데, 이거 안하고 돈으로 때우거든요. 그럼 공단은 그 돈을 받아서 재활사업만 해요. 재활이라는 게 ‘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서  예산은 고갈되고, 지금처럼 해서는 장애인들의 직업문제는 해결이 되질 않아요. 그러니 일반예산을 확보하라는 거죠”
점거 농성은 6일째로 끝을 맺었다. 노동부 차관과의 면담 이후 구두로지만 이런저런 약속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쩜 몇 달 후 그녀가 또다시 점거농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당사자의 눈으로
처음 장애운동을 시작했을 때와 비교해 장애인들의 삶이 많이 좋아지지 않았냐고 물었다. 위문숙씨의 대답은 간단했다.
“장애인들의 삶의 질이 높아지긴 했지만 비장애인들의 삶은 훨씬 더 좋아졌죠.”
그녀가 싸움의 증폭제는 노동문제라고 한다.
“집회현장에서 상대의 모습을 보면 느껴져요. 같은 언어와 정서,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장애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거든요,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존중감이 없어서죠”
ㄱ녀는 장애인의 당사자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줬다. 장애인연맹에서 공단의 지원을 받아 차량을 개조할 때였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도 탈 수 있는 차량을 만들려면 천장을 터서 다시 만들어야 하는데, 정작 만들어 놓고 보니 탈수가 없었다. 천장을 너무 낮게 만들어서 운행 중의 진동에 머리가 부딪히는 것이다.
“휠체어 장애인한테 허리가 얼마나 중요한데,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 장애인이 만들면 그렇게야 만들었겠어요. 다시 고쳐달라고 했더니 공단의 대답이 ‘유례가 없다’는 거에요. 말이나 돼요?”

자연스러운 사람, 위문숙!
현재 그녀는 서울장애인연맹의 회장을 맡고 있다. ‘여성’회장으로써의 느낌을 물었지만,

 
대답을 듣고 나니 민망해졌다. 여성이 중요직책을 맡는 일이 흔하지 않다보니, 사람들은 여성지도자로써의 그녀의 느낌을 묻는다고 한다. 강하고 뭔가 각오에 찬 대답을 해줄 거라는 기대를 갖고.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선출직이라 그냥 자연스러웠어요”
그네에겐 뭐든 자연스러운 것 같다. 자신의 장애도, 운동도, 직업도… ‘여성’회장으로써의 각오는 아니지만 서울 장애인연맹의 회장으로써의 각오는 있었다.
“올해 서울 DPI(디피아이)의 목표는 기반강화에 있어요. 양천센터를 독립시켜서 내보내고 나니 인력도 그렇고 재정도 안정이 안돼 있거든요. 올해는 안정화가 우선 과제고 다음에 차근차근 사업들을 구체화시켜야죠. ‘청년학교’같은 일상사업도 진행해야 하구요”
살아온 인생을 후회하지 않냐는 질문에  그녀는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커다란 가방에 몇백 장은 됨직한 명함집을 가지고 다니고, 두 번째 만남에도 명함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뭐라고 하던 그녀는, 이틀에 걸친 인터뷰를 끝내고 헤어지면서 위문숙씨는 ‘언제 술 한 잔 하자’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녀에게 운동은 사람간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자연스러움일지도 모르겠다. 포장마차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좋아하듯이, 운동을 하며 사람들을 만나길 좋아하는지도… 사람에 대한 고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것.
다음 그녀와의 술자리에서는 인간에 대한 좀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맛있는 술자리가 기대된다.

*위문숙씨의 요청에 따라 ‘장애인’으로 표기합니다.

글 서현주 객원기자 / 사진 정선아 객원사진기자


 

작성자서현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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