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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 옥란 누나의 뜻을 이어서..."

"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 김태현 사무국장

본문

  지난해, 우리사회에 가슴 아픈 충격을 주었던 장애우를 꼽으라면 고 최옥란씨를 빼놓을 수 없다.
37살 한창 나이에 과산화수소 한 통과 수면제 20알을 먹고 자살해 우리사회에 경종을 울렸던 고 최옥란열사.
그녀가 떠나간 자리, 남아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번호 "사람 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를 이끌고 있는 김태현 사무국장의 이야기다.

 김태현(뇌성변지체1급)씨를 만나러 간 곳은 지하철 5호선 신정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주택가였다. 알려준 대로, 몇 개의 가게를 찾고 건물을 지나자, 추모회가 있다는 건물이 나타났다. "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이하 추모회)"가 있는지는 알 수 없고, 건물 입구에 "장애인실업자종합지원센터(이하 지원센터)"의 현판이 있기에 여기겠거니 하고 들어갔다. 지하라고는 하지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깔끔하고 넓은 사무공간이 나타났다.
반갑게 맞아주는 태현씨에게 "사무실이 참 좋다"는 말을 건넸다. 태현씨는 쑥스럽게 웃으며 "지원센터에서 더부살이한다"고 했다. 그러나 얹혀 사는 것이 이골이 났는지, 아님 흔히 말하는 "얼굴이 두꺼운지", 더부살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은 여유로워 보였다.

〈물건보다 못한 장애우들의 이동권〉
인터뷰를 하기 위해 자리에 앉자마자 "재정 형편이 괜찮냐"는 말부터 물었다. 최옥란씨의 죽음이 우리 사회에 던졌던 충격과 그로 인한 장애우들의 저항이 거셌지만, 올해 1주기를 맞으며 드는 느낌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구나"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추모회는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을 테고, 단체는 힘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더부살이만이 아니라 빚도 늘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같이 일하는 윤성근씨의 실업급여 기간이 끝나, 이번 달부터 다만 얼마라도 상근비를 줘야 할 형편이었다. 대뜸 물었다. "사람들은 잊어 가는데 왜 추모회를 하냐"고. 태현씨의 대답은 명쾌했다.
"여기 말고 갈 데가 없어요"
자기가 말해놓고도 너무 했다 싶었는지, 다음 말은 좀 진지하게 이어졌다.
"변명 같은 이유를 말하자면 사회과학을 좀 공부했는데, 장애운동판에 들어오면서 "뭐가 문제인가"를 고민하다가, "이것이 사회구조적 모순과 별개의 문제가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대형 할인매장에는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이 잘 돼있는 거 같지만, 사실은 물건을 산 사람들이 카드를 가지고 다니기 편하라고 해놓은 시설이거든요. 비장애인들이 물건 들고 다니는 걸 불편해 하니까 편의시설을 설치하는 걸 보면서, 결국 돈을 따라서 움직이는구나 싶었어요.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건데... 물건 산 사람들의 불편함은 장애로 여기면서, 장애인들이 이동이 불편해서 생활이 안되는 건 장애로 보이지도 않는다는 거잖아요"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나자, 태현씨의 표정이 달라졌다.
"신경질 나는 건, 방송에서 보여주는 장애인의 모습이에요. 방송에 나오는 장애인들이 자가용을 끌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장애인도 살만하네"하고 생각할 거 아니에요. 그러니 못사는 장애인은 능력 없어서 못사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 잘 살고 누군 못 살면, 결국 능력문제라고 여겨지지 않겠어요?"
이야기를 돌려 잠시 태현씨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물어봤다.
 
〈시를 좋아하는 낭만적인 문학소년 〉
태현씨가 장애를 갖게 된 것은 순전히 "돈"이 없어서다. 8개월 미숙아로 태어났는데, 그냥 퇴원을 했단다. 당시에도 인큐베이터가 있기는 했지만, 감히 엄두도 못 낼 가격이었고, 결국 퇴원 후 6개월 후에 사고가 나고 말았다. 어린 태현씨가 갑자기 경기를 하더니 그 뒤에 장애를 갖게 됐다고 한다.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태현씨의 어머니는 1년이나 고민을 하셨다고 한다. 장애가 있는 태현씨를 특수학교에 보내야 할지, 그냥 일반학교에 보내야할지. 덕분에 태현씨는 남들보다 한 살 더 많은 나이에 초등학교 입학 할 수 있었다. 태현씨보다 한 살 어린 동네 친구와 함께.
그는 학교에서 그렇게 모나지 않게 잘 지냈다. 태현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이 사교성이 좋아서인지 친구들과 별 무리 없이 잘 어울렸다고 하는데, 그런 말을 농담 삼아 하는 걸 보면 사교성과 넉살이 좋다는 건 사실인 것 같다.
고등학교 때는 흔히 말하는 성인영화를 보러 친구들과 영화관에 몰려다니기도 했다. 몸 좋은 친구들이 어른인 척하고 표를 사오면, 시험 끝난 기념으로 "가리봉 극장"에 영화를 보러가곤 했다고 한다. 지금도 기억나는 영화는 "산딸기2"라나.
태현씨씨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의 학생시절은 여느 고등학생들과 다를 것이 없는 평범했던 것 같다. 공부도 적당히 못하는....
그렇다고 태현씨가 멋없는 학생만은 아니었다. 시를 쓰는 남자였으니까. 대학교에서는 문학동아리 "아카펠라"에 가입해서 시를 쓸 정도였다. 마음에 안 드는 시들은 찢어버려서 지금은 몇 편 없지만, 아직까지도 시에 대한 미련은 못 버린 듯했다. 국문과에 입학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이 재밌다.
"성적이 안됐거든요(웃음).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폐인이 될까봐서요. 왠지 시에 미치면 폐인이 될 것 같았어요. 또 하나는 국문과는 천재들만 가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마도 태현씨는 대단한 문학도였을 것이다. 무척이나 낭만적인. 세상을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봐서 낭만적이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태현씨가 느끼는 문학은 비장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천재시인 이상의 모습처럼, 그에게 문학은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다만 문학을 현실로 느끼고 자신의 활동에 활용하기보다는, 몰두해서 다 팽개치고 그것만해야 할 것처럼 비장한 것이 그가 생각하는 문학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렵게 느껴졌을 테고.

〈장애우의 이동권, 노동권은 내인생의 숙제〉
대학교는 방송통신대학에 들어갔다. 그것도 농학과에. 성적이 안 좋았으니 일반대학에 갈 수 없었고, 공부를 못했으니 방송통신대학도 농학과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98년에 영문과로 전공과를 옮겨서, 아직까지 영문과에 적을 두고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졸업계획을 묻자, 태현씨는 웃어버리고 만다. 아마도 졸업은 해야 하나보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가 활동하는 곳은 다른 어느 곳보다 치열한 장애우들의 운동단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기저기 많은 직장을 옮겨다녔어요. 배달 일도 하고, 카페운영도 하고, 그렇게 지냈어요. 그러다 2000년 12월부터 지원센터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소위 말하는 스카웃을 당한 거에요(웃음). 선배가 "너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시작한 일이니까요"
그렇게 해서 시작한 일이 장애인실업자종합지원센터의 홍보팀장이었다. 지원센터의 소식지를 만드는 일을 했는데, 4개월 정도 일할 동안, 태현씨 개인한테 있어서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고 한다.
"그때가 IMF 이후 실업문제가 심각할 때였거든요. 그래서 장애인들의 노동권에 대한 문제나, 외국의 사례들을 연구할 수 있었어요. 지원센터에서 일하는 동안. 내부문제로 관둘 때까지 공부는 많이 했어요"
그 뒤에 태현씨가 다시 일을 시작한 곳은 한국뇌성마비장애인 연합 " 롬"이었다. 대외협력간사직을 맡았는데, 오이도역 추락사건이 터진 후 "4·20 이동권연대 준비모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태연씨와 장애우의 이동권, 노동권 문제와의 떼려 해도 뗄 수 없는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일하고 싶은 장애우들의 일할 권리!〉
태현씨가 본격적으로 장애우 노동권 운동을 시작한 계기는 본인의 경험 때문이다. 카페를 관두고 일을 찾아봤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그냥 저냥 1년 넘게 놀았다. 그러다 공공근로로 동사무소에 취직을 해 "편의시설 증진조사"작업을 했는데, 그 곳에서도 정말 어이없는 일을 당했다.
"동사무소에서 일을 안 시켜요. 장애인들의 편의시설을 조사하는데. 비장애인 직원들을 따라 다니라고만 하더라구요. 메뉴얼이 있으니까, 거기에 따라 편의시설 정도를 조사하고 체크하면 되는데, 달라고 해도 안줘요. 그래서 동사무소 직원들한테 항의하면, 옆에 계시던 나이 드신 장애인들이 말려요, 참으라고. 같은 장애인들이 말리니 더 이상 해볼 수도 없고, 정말 답답했어요. 일을 달라고 해도 무시당하고, 장애인으로서 의견을 내도 무시당하고..."
태현씨가 공공근로로 편의시설증진조사사업을 하면서 장애우들의 이동권 문제와 노동문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장애우들이 움직이는데 어떤 불편함이 있고, 어떤 시설이 필요한지를 알아보기 위해 조사를 하는데, 단지 공공근로 실적만을 위해서 장애우를 뽑고, 장애우는 장식으로 데리고 다녔던 것이다. 장애우 본인만큼 그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도 말이다.
"한번은 평창동 복지과를 조사한 적이 있었어요. 복지과가 2층에 있어서, 장애인들은 어떻게 오라고 2층에 있냐고 했더니, 1층에 있었는데 물난리가 나서 2층으로 옮겼다고 하면서 그 외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에요. 아예 생각이 없는 거죠"
현씨가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 사업 중에 하나가 장애우 이동권 싸움이다. "철학이 바뀌어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지하철 엘리베이터는 돈 문제거든요. 돈만 있으면 되는데, 더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거죠"

〈저상버스 타고 출근하고 싶어요 〉
김태현씨가 작년 이동권연대를 통해 활동했던 내용은 상당히 과격하고 결의에 찬 모습이었다. 그만큼 장애우의 이동권은 절박한 문제라는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인터뷰를 통해 만난 태현씨의 모습은 그와는 반대였다. 조용히 이야기하고 농담도 잘하는 여유로운 사람처럼 보였다.
태현씨는 자신이 장애우 운동에 뛰어든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노동하고 싶을 때, 받아주는 곳이 없다는 느낌"에서 시작했다고. 태현씨만이 아니라, 장애우들 모두의 느낌일 것이다.
"제 인생을 점수로 치면 100점 만점에 18점이나 줄 수 있을까요. 욕먹을 짓만 골라서 한 것 같고, 게으르고 맘도 약하고, 결정을 해야 할 때는 우유부단했어요. 특히 어머니한테 잘하지 못했구요"
그러나 어디 김태현씨만의 문제이겠는가. 장애우들은 장애우로 태어난 순간, 모든 사람들한테 미안해한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사회적인 문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우라는 이유 때문에 부모, 형제, 주위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는 생각을 누구나 한번쯤은 하게 된다. 태현씨처럼 장애우들의 문제를 사회구조적 문제로 보고 싸우는 사람들마저도 자신의 과격함(?)에 미안해야 한다.
"옥란 누나도 이동권 싸움에는 뜻이 있었어요. 추모회가 그 사업을 하는 건, 옥란 누나의 뜻을 잇는다는 의미도 있죠. 이동권 싸움이 과격하다고 하는데, 사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누가 알아주기나 하나요. 과격하지 않고 쇼킹하면 좋은데, 그런 게 있나 싶어요"
인터뷰를 끝내면서 물었다. 소원이 뭐냐고. 준비나 한 것처럼 태현씨가 쉽게 대답한다.
"아침에 출근할 때 저상버스 타고 출근하고 싶어요"
하루 빨리 그런 날이 오길 기대해 보지만, 태현씨가 싸워야 할 시간이 길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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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현씨가 기억하는 최옥란씨는 어때요?

 한국뇌성마비장애인연합 " 롬"에 표를 팔러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알게 됐어요.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같은 동네에 살았더라구요. 92년에 처음 만났을 때, 임신중독으로 손이며 몸이 부어있었어요. 사람들이 물으면, 그 모습이 제일 먼저 생각나요.
옥란이 누나 성격요? 고집이 무지무지하게 세요. 과격한 성격이기도 하구요. 근데 또 정에는 약해서... 옥란이 누나 때문에 힘든 것도 많았어요. 그때는 참 힘든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고, 그래서 늘 "죽겠다"는 말을 했었구나 싶어요.

-1주기도 지났는데, 사람들한테 최옥란이라는 장애우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최옥란이라는 여성자체의 의미보다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라고 해야겠죠.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 노동운동에 끼치는 영향처럼, 옥란이 누나의 죽음이 가난한 장애인들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자리잡으면 좋겠어요. 둘간에 분명히 연결지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방향은 알겠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이제 만들어 가야겠죠.

 -최옥란씨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개인적인 문제로는 누나가 이혼을 하면서 아이 양육권이 애아빠한테 갔거든요. 근데 아이랑 같이 살고 싶어했어요. 노력도 많이 했구요.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사람들한테 돈도 빌려다 통장에 채워놨는데 잘 안됐죠, 하다하다 안되니까 그런 길을 택한 것 같아요
 하지만 옥란 누나의 죽음은 누나 개인적인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장애인들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으로 나오는 돈 가지고는 살수가 없어요. 옥란 누나만 해도 약값만 20만원이 넘게 들었으니까요. 약값만 드나요. 병원에 가려면 장애인들은 택시를 타고 다녀야하고, 그렇다고 일을 하면 생계비보조를 포기해야 하구요. 장애인들의 생활보조비를 실질적인 지원이 될 수 있도록 고쳐야하는 문제가 있어요.

-앞으로 추모회의 사업계획은 어떤가요?
 작년에 회원사업을 했어야 했는데 못했어요. 빚도 늘어가고 해서 재정안정을 위한 후원회원사업을 해야해요.
하반기에는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세미나 팀을 조직하려구요. 장애인운동사나 인권, 여성이나 이동권, 기초법까지 다양한 주제들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내부 역량을 좀 강화한 다음에, 그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려구요. 12월 첫째주가 옥란 누나가 농성시작한 날이라서 그때 맞춰서 뭔가 행사를 준비하고 있어요.

 

글 서현주 객원기자/ 사진 윤정은 사진기자
※김태현씨의 요청에 따라 본인의 말은 "장애인"으로 표기합니다.

작성자서현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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