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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과 햇살] "원진병원이 빨리 건립됐으면 좋겠어요"

투병중인 원진레이온 산재장애우 박수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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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과 햇살]

 

"원진병원이 빨리 건립됐으면 좋겠어요"


투병중인 원진레이온 산재장애우 박수일씨

 


  1988년 21명의 직업병환자가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원지레이온 사태.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공장은 강제폐쇄당하고 4년이 지났지만, 현대의학으로는 완치가 어려운 직업병 환자는 계속 늘어만 가고 있다. 그 중 한 사람, 직업병으로 인한 산재장애로 하루하루 천장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박수일씨를 만나보았다.

 

 

  충북 제천이 고향인 박수일(57세)씨가 구리시에 있는 원진레이온에 입사한 것은 1975년이다. 박수일씨는 직업병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16년 동안 회사생활을 하면서 결근은 물론 조퇴 한 번 하지 않은 성실한 노동자였다.

  평탄하게 직장생활을 하던 박 씨는 어느날 부터인가 눈이 아프고 머리와 팔다리가 쑤시고 저리다며 아내 신홍자(57세)씨에게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나 아내 신 씨는 직업병 때문에 남편의 건강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피곤해서 그런 거겠지"라며 약국에서 몸살약을 지어 박 씨 손에 쥐어주곤 했을 뿐이다.

  그렇게 박수일씨가 원인도 모를 증세로 힘들어하던 어느 날, 그러니까 1988년부터 그의 직장이었던 레이온 사업장의 "직업병" 문제가 TV나 신문지상에 간간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비로소 박수일씨의 고통의 원인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부와 회사측에서는 쉽게 직업병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오히려 거동을 못할 지경까지 이른 원진노동자들을 해고시켰다. 회사의 방침을 가만히 당할 수만은 없었던 원진노동자들과 가족들은 "원진노동자 직업병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 국가를 상대로 펼친 시위는 효과가 있었다. 전 국민의 관심이 서울올림픽으로 집중돼 있었던 1988년 개막을 앞두고 성화봉송 주자가 망우리고개를 넘어갈 즈음이었다. 원진의 직업병 환자들이 성화봉송을 막고서 "직업병을 인정하라"고 외치면서 과격한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서야 정부와 원진회사측은 직업병이 생길 수 것을 일부 인정하고 직원들에게 검진을 받게 했다. 그러나 회사는 이미 퇴직한 노동자들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남편은 현장에서, 아내는 농성장에서


  당시 검진을 받은 원지레이온 직원 중 35명이 직업병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박 씨는 직업병 환자 명단에서 제외됐다. 직업병 증세가 너무 심해 도저히 은폐할 수 없는 직원들만 겨우 직업병 판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어느날 원진직업병 환자 중 한 명이 급기야 병이 악화돼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직업병으로 사망까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세상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했고, 직업병 환자들과 가족들은 언제 자신도 사망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더욱 더 긴박해졌다.

  동료의 사망을 계기로 회사 앞에는 직업병환자들의 철야농성이 시작됐다. 당시 현장주임이었던 남편이 노조 조합원도 아니고, 직업병환자로 판정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농성에 참여하지 않고 현장에서 근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 신 씨만 농성 대열에 있었다. 마침 신 씨는 그때 농성 현장에 있던 사당병원 김록호 원장에게 남편의 진단서를 보이고 자문을 구했다. 김원장은 "이 정도면 충분히 직업병으로 판정받을 수 있다."며 진단서를 판정위원회를 거쳐 회사측에 보내도록 조치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며칠 후, 회사에서는 박 씨에게 한 달간의 요양판정을 내렸다.
 

 

실어증 걸린 남편, 딸 이름만 되뇌어


  그렇게 한 달을 집에서 쉰 박 씨가 어느 날 쓰러졌다. 우려했던 사태가 닥친 것이다. 놀란 신홍자씨는 박 씨를 곧바로 고려대병원에 입원시켰다.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조금씩 차도를 보이기 시작하는 박 씨를 보며 겨우 한숨을 돌리는가 싶었는데, 가족에게 회사는 "보상금을 줄테니 사표를 제출하라"고 일방적으로 해고통고를 했다. 그 소식을 접한 그 날 밤 박 씨는 한 숨도 자지 못했다고 한다. 16년을 몸 바쳐 일해 온 직장이 병만 안겨주고 자신을 쫓아내려 한다는 것에 대한 분노와 남아있는 나날들에 대한 불안으로 밤새 뒤척여야 했던 박 씨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결국 해고통고로 인해 받은 충격으로 박씨는 편마비 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왼쪽 다리와 팔을 움직이지 못하고 소변도 가리지 못하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박 씨는 91년부터 말까지 잃었다.

  현재 박 씨는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만 중얼거린다. 그래도 신 씨만은 남편인 박 씨의 말을 알아듣는다. ""현주야"라고 말하는 거예요. 저희 딸 이름이예요." 그들 부부 사이에는 딸 현주씨와 회사에 다니는 아들이 있다. 이틀에 한 번씩은 퇴근 후에 병원에 들른다고 한다.

  "청력은 정상이어서 사람들이 얘기하는 걸 다 알아들어요. 말만 잘 못할 뿐이죠. 또 과거에 있었던 일들도 전부 기억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연결을 못시키죠. 어느 날은 사위를 보고도 "조 총각 밥 줘"라고 하는데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어요."

  그 이후로 박 씨는 지금까지 회복이 되지 않고 있다. 병은 서서히 악화되고 있고, 환경을 바꿔 볼 필요가 있다는 의사의 권유로 퇴원했다. 입원하기를 7년 동안 열 번을 했다. 지금 입원해 있는 것은 위마저 헐어 음식을 못먹고 설사만 하는 등 증세가 악화됐기 때문이다.

현재 박 씨는 코에 튜브를 넣어서 겨우 음식물을 섭취하고 있는 상태다.
  지난 4월 원진 직업병 장애우를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원진병원 설립을 요구하며 원진 관계자들이 근 한 달간 농성을 벌여 사회의 이목을 끌었던 원진 사태는 한국산업은행과의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돼 해결의 실마리를 풀게 됐지만 신 씨는 원진문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직업병 환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는데 입원을 못하고 있는 중증환자가 많아요. 통원치료 중인 사람 중에는 집 근처에 병원이 없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몇 시간씩 걸리는 타 지역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사람들도 있구요. 원진병원이 하루 빨리 완공돼서 아무 때라도 마음 편하게 치료받으러 갈 수 있게 되면 좋겠어요. 그때가 원진문제가 끝나는 날이예요."

그리고 신 씨는 원진 환자 가족들에게도 다음과 같은 당부를 잊지 않았다. "포기할 생각을 한 번도 안했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러나 아이들이 있고 칠백 명이나 되는 원진 동료들이 지켜보고, 도와주고 있는데 포기하면 안돼요. 그들은 여러분 가족들만의 남편이 아니라, 원진가족들 모두의 동료니까요."

  남편의 손을 꼭 쥔 채 남편을 바라보는 신 씨의 모습이 비장해 보였다.

 

 글/ 노윤미 기자

작성자노윤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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