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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빈민연합 김흥현 상임의장

우리의 요구는 ‘죽음의 행렬’을 멈추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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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릇파릇한 생명이 움트고 꽃들이 화려하게 거리를 장식하는 봄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는 더 짙다고 했던가? 이 봄빛이 장애우에게는 죽음의 색으로 물들었다.
경기도 화성시에서 불법노점행위로 부과된 벌금 70만원과 월세 30만원을 마련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청각장애우 김모(43)씨, 같은 날 병원치료비 문제로 고민하다 잠실대교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한 뇌병변장애우 최모(46)씨, 그리고 지난 2월 강서구청 현관에 목을 메단 주모(53)씨 등 장애우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살한 사건이 잇따랐다.
그리고 이러한 슬픈 기억이 채 잊혀지기도 전에 할머니가 간질을 앓고 있는 정신지체장애우 손녀에게 청산염을 먹여 살해한 사건과 청각장애우 형의 일가를 흉기로 살해해 사회적으로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역시 장애를 가진 가족원의 부양문제로 생활고에 시달리다 저질러진 사건들이었다.
장애우의 죽음. 그것은 ‘사회적 살인’이다.
장애가 곧 빈곤으로 이어지는 사회구조적 문제에는 눈을 감은 채, 장애를 단지 장애당사자와 그들 가족의 책임으로 떠넘기고 ‘무관심’으로 일관한 사회. 그 ‘무관심’이 만들어낸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지난 4월 27일 ‘빈곤으로 인한 죽음의 행렬’을 멈추기 위해 「빈곤해결을 위한 2005 빈민대회」가 열렸다. 매년 전국빈민연합 주최로 열렸던 이 행사는 예년과 달리 많은 단위가 참여하여 삶의 다양한 지점에서 빈곤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냈고 거기에는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과 ‘장애인소득보장정책 마련’이라는 장애우의 목소리도 담겨있었다.
이번 달 함께걸음이 소개할 인물이 바로 이 전국빈민연합(이하 전빈련)의 상임의장 김흥현 씨다


▲김흥현 의장
김흥현 의장을 처음 만난 건 4.20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마포대교 위에서였다.
시위대가 전경들에 의해 겹겹이 둘러싸인 상황. 사방에서 전경과 장애우 간에 몸싸움이 일어나고, 순식간에 치고 들어온 전경들에 의해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끌려가던 때, 전빈련 의장인 그가 우리 측 방송차량에 올라와 마이크를 잡았다. 사실 그가 그 순간에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연대의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데 그때 그가 꺼낸 말은 왜 우리가 연대해야 하는가를 더더욱 분명히 해주고 있었다.
“노점상인의 35%가 장애우 혹은 장애우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빈민열사 중 대부분이 장애우 열사입니다.”
노점상인의 35%가 장애우 혹은 장애우의 가족
노점상 철거민들이 함께 만든 전빈련 사무실에서 다시 만났을 때 김 의장은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다.
“노점상인 2천여 명을 표본조사 했는데, 조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 노점상 운영자 중 35%가 장애우 혹은 장애우의 가족이었고 운영자 본인이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경우만도 15%에 달했습니다. 이러한 분석결과는 저에게 장애문제와 노점상의 문제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했어요.”
사실 조사 전에도 그는 노점상인의 절반이상이 위장병이나 관절염 등을 앓고 있기 때문에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장애우가족원을 부양하고 있는 노점상인이 그렇게 많을 것이라고는 그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분석결과는 그에게 빈곤문제 해결을 위해 장애계와 연대해야 할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4.20 투쟁 때도 말했지만 노점을 운영하던 빈민열사 10명 중 8명이 장애우입니다. 최근 돌아가신 두 분을 제외하고는 이재식 열사, 최정환 열사, 이덕인 열사, 윤창녕 열사, 최옥란 열사 등등 모두가 장애우였죠.”
최정환, 이덕인, 최옥란 열사는 장애계에서도 열사로 추대되고 있는 만큼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 밖에도 장애계 외부에서 열사로 추대되고 있는 장애우가 더 있다는 것은 기자에게는 새로운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 유독 노점상을 운영하던 빈민열사 중에 장애우 열사가 많았던 것일까?
“아무래도 노점을 운영하는 장애우 중에서 열사가 많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피해를 많이 입기 때문일 겁니다. 단속이 나오면 장애우는 피하기 어렵잖아요. 그러니 단속반에게 물건을 빼앗기고 짓밟히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거죠. 빼앗긴 물건을 찾으러 가면 ‘병신’이라는 모욕을 당하기 일쑤고….”

분신후, 병원복도에 짐승처럼 버려졌던 윤창녕 장애우 열사와의 만남
소위 노동운동 출신인 김 의장이 빈민운동을 하면서 장애 쪽과 인연을 맺게 된 데에는 동생이 산재로 시력을 잃고 장애우가 되었다는 사실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보다는 그가 윤창녕 열사(당시 46세, 언어 및 지체장애 2급)의 죽음을 목격했던 것이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윤창녕 열사의 죽음은 그에게 장애문제에 대한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 이전에도 노점상 장애우 분신사례가 많아서 그때그때 장애계와 연대해서 싸웠어요. 하지만 윤창녕 열사의 죽음은 좀 달랐습니다. 제가 전국노점상연합(이하 전노련)에서 11기 수석부의장을 하고 있었을 때였으니 99년인가요? 여름 현장투쟁을 하러 대전에 내려가 수련회를 하다 노점상을 하던 장애우가 대전동구청에서 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우린 수련회를 중단하고 그가 실려 갔다는 병원으로 찾아갔습니다. 근데 응급실이고 어디고 병원을 죄다 뒤져도 화상환자가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한참을 찾다가 병원복도 간이 침상에 무언가가 짐승처럼 웅크리고 버려져 있는 걸 보게 된 거죠. 병원 관계자에게 ‘저게 뭐냐?’고 물으니 그제야 무연고 장애우인데 분신을 해서 실려 왔다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당시 윤 열사의 분신은 무자비한 단속과 단속반으로부터 받은 인간적 모멸감 때문이었다.
“주변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단속으로 물건을 빼앗기기 전까지 단속반원들에게 계속 상납을 해왔다고 하더라고요. 뭐 돈이 없으니까 돈으로 상납을 했던 건 아니었고, 단속반원들이 와서 ‘병신이 뭐~’ 이러면서 오면 자신이 팔던 벨트 등의 물품을 내줬던 거죠. 근데 사건이 있던 때는 물건의 절반을 빼앗아간 거예요.”
그날 윤 열사는 대전 동구청으로 물건을 찾으러 갔다. 그러나 단속반원은 빼앗은 물건을 내주지 않았고 결국 빈손으로 돌아와 나머지 물건이라도 팔아보겠다고 자리를 폈다가 그마저도 빼앗기고 만 것이다. 노점상을 시작한 94년부터 그때까지 그는 한번 단속에 5만원씩 모두 3백여만원의 벌금을 빼앗긴 상태였기에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다. 다시 동료 노점상 황모씨 등과 함께 동구청을 찾아가 물건을 돌려 줄 것을 요구했으나 “병신, 지랄 육갑한다.”는 등의 장애우 비하적인 발언과 욕설에 인간적인 모멸감까지 맛봐야 했다.
결국 분노를 이기지 못한 윤 열사는 휘발유와 라이터를 들고 다시 동구청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은 채 분신했다.
분신 직후 윤 열사는 119구급차량으로 충남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동구청측이 치료비 지급보증을 서주지 않아 병원 복도 간이침대에 진통제 한대 맞지 못한 채 버려져 있었던 것이다.
“초기에 응급처치를 했더라면 살릴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고, 설사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경찰을 불러 윤 열사를 화상전문병원인 한강성심병원으로 이송했지만 그곳에서도 동구청은 치료비 6백만원에 대한 지급보증을 서주지 않았고 결국 윤 열사는 치료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채 이틀 만에 숨을 거뒀다.
“그해 여름은 굉장히 무더웠어요. 그 무더위가 절정에 오른 7월에 장례가 치러졌으니 사람을 동원하는 게 쉽지는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드는 거예요. 평소 윤 열사에서 밥을 얻어먹었던 노숙인 분들이었어요. 벨트 같은 잡화를 팔아서 얻는 수입이 뻔한데 그 돈으로 대전역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던 거죠.”
그들과 동구청에 찾아갔을 때는 이미 페인트칠까지 새로 해서 윤 열사 분신의 흔적을 깨끗이 지운 후였다.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동구청을 ‘뒤집어’ 놨다. 그리고 그 안에 윤 열사의 빈소를 차렸다. 열사의 빈소가 행정관청 안에 차려진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곧 노점상들이 결집했을 뿐 아니라, 광주와 부산에서 출발, 대전에서 만나 서울로 가기로 되어있는 통일대행진단이 때마침 대전에 도착하여 이 투쟁에 결합했다.
“당시엔 굉장했어요. 대전시가 생긴 이래로 가장 큰 투쟁이었습니다. 대전동구청과 대전시청 간판을 떼어내는 등의 강력한 투쟁이 전개됐어요. 윤 열사 사건을 계기로 대전노련, 충청노련이 생겼으니, 노점상 투쟁에서는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습니다.”

정부가 인정하는 극빈층만 8백만 명

▲2005빈민대회 모습들
그에게 노점상 장애우의 죽음은 끝나지 않은 일이다. 그는 얼마 전 화성에서 목숨을 끊은 청각장애우 노점상 김 씨의 문제에도 결합했다.
“김 씨에게 부과된 70만원은 노점상에게는 평균적인 벌금이에요. 그러나 30만원 월세내기도 바빴던 당사자에겐 과중한 벌금이었던 거죠.”
그는 김씨가 죽은 뒤에도 문제가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식품위생법은 법제도상 벌금이 배로 불어나는데 김 씨의 장례 후 또다시 부인이 장사를 하러 나갔다가 벌금을 받은 것이다. 그러니 아직 70만원의 벌금을 내지 못한 상황에서 이번엔 140만원의 벌금을 더 내야하는 상황이 된 것. 이렇게 살아보려 발버둥을 칠수록 극한으로만 내몰리는 상황이 계속되는 한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자살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요즘 한참 일하는 3~40대 가장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국가의 복지정책 등 여러 정책 문제와 연결되어있다고 봅니다. 빈곤문제는 어느 한영역의 문제가 아니에요.”
도시빈민연구소나 빈곤문제연구소, 빈곤사회연대에서 추정하고 있는 빈곤인구는 천만 명을 넘어섰고, 정부가 인정하는 극빈층도 8백만 명을 넘어섰다. 또 경제활동인구 중 4백만이 카드빚 등으로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가계빚이 한 가구당 3천만원이 넘어간다.
“도대체 감당이 되지 않으니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거 아닙니까. 어린이까지 온 가족이 동반 자살하는 상황입니다. 지금의 빈곤은 어느 한 분야나 단위가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전 국민이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결국 일자리가 없어서 거리로 나오는 것인데 대책 없이 단속만
그러나 정부는 빈곤문제에 관심이 없다. 올해 국방예산은 10%가 늘어난 2조2천억인데 반해 빈곤대책을 위한 정부예산은 오히려 3천6백억 정도가 감소가 됐다는 것이 김 의장의 주장이었다.
“정부는 빈곤대책을 위한 정부예산을 늘렸다고 발표했어요. 하지만 지방으로 이양된 사회복지예산을 모두 더해보니 실제로는 3천6백억이 줄었더군요. 게다가 감소된 예산마저도 그것이 실제 장애우, 독거노인 등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는지 감시할 수 있는 장치가 없습니다.”
그는 현재 어느 지방자치 구의회, 시의회도 시장하고 대립하려고 하지 않는다며 예산이 줄어든 것도 문제이지만 이를 감시할 수 있는 장치가 없고 선심성 예산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이러한 빈곤의 문제가 아예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 더욱 문제라고 지적했다.
“제대로 집행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지방정부로 넘긴다면 모르겠지만, 아직 그런 체계도 제대로 잡혀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지방정부로 이양한 것은 결국 중앙정부의 책임회피라고 밖에 할 수 없어요. 중앙정부에서 실제 관장해서 지방이 제대로 복지예산을 집행하도록 조정하고 그것을 감시할 시민단체 등의 단위를 만들어야 실질적인 복지정책이 가능합니다.”
대책 없이 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은 노점단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올해 들어 4월까지 정부가 노점상을 단속하기 위해서 용역을 고용하는데 70억원의 예산을 썼다고 합니다. 노점상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점상을 해서 번 돈으로 절대빈곤에서 겨우 벗어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노점상을 단속해버리면 그나마 그것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절대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그 속에 15%의 장애노점상인, 35%의 장애가족을 부양하는 노점상인들은 어떻게 할 겁니까? 아무 대책도 없는 것 아닙니까.”
그는 노점상인 대다수가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먹고 살려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런 그들에게 ‘불법’이라며 단속만 하는 것은 앉아서 방에 들어앉아서 굶어죽으라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70억원이라는 돈이면 결식아동 20만 명에게 2천5백원짜리 도시락을 4개월간 먹일 수 있는 돈이라니 그가 분개하는 것이 당연해보였다.

빈곤문제 전반에 전선을 치고 다른 빈곤주체들과 연대해 싸울 것이다
“현재의 빈민은 예전과 다릅니다. 예전에는 산업화에 따른 이농 빈민층이었지만, 이제는 도시 내에서 빈민들이 재생산되고 있고, 젊은 빈곤인구, 고학력 빈곤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죠. 이제는 청년조차 일자리가 없고, 뼈가 부서져라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는 빈곤문제 해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장애우, 노숙인, 빈민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빈곤을 바라보는 국민의 기본적인 시각을 바꾸는 것과 제대로 된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월급의 1/3밖에 못 받고 탈의실이라든지, 식당, 목욕탕 사용 등에서 철저하게 차별받으면서 일하는 상황입니다. 현대자동차가 작년 1조 8천억의 이익을 남겼는데, 현재 비정규직 문제는 1천3백억이면 해결이 된다고 해요. 전체 이득의 1/10만 사용하면 되는데 그걸 안하는 거예요. 현대자동차가 1조8천억을 남겼으면 무엇을 할 것이고, 삼성이 작년에 10조원을 남겼으면 무엇을 할 것입니까. 그것으로 기술개발하고 재투자해서 일자리를 늘리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하는 등으로 기업도 노력해야 빈곤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이지, 기업만 살찌우면 어떡하라는 말입니까.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는 한 빈곤은 더욱더 확산되고 고착화되고 대물림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 의장은 이제까지 전빈련이 노점단속, 강제철거 문제를 해결하는데 급급했다며 앞으로는 장애우, 노숙인, 비정규직, 신용불량인 등의 서로 다른 영역의 빈곤주체들과 연대해서 빈곤문제 전반에 대해 전선을 치고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맥락에서 전빈련 주최로 해마다 열렸던 빈민대회를 올해는 예년과 다르게 보다 많은 단위가 참여할 수 있도록 ‘빈민대회조직위원회’를 구성했던 것이다. 이제 김 의장의 꿈은 모든 빈곤주체들이 연합적 질서 안에 들어와서 함께 싸우는 것이다. 아직은 각 주체들이 그럴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지만 김 의장은 그 꿈을 위해 노숙인, 장애우 등으로 연대의 폭을 넓혀가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재생이 거부된 죽음.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직 이 땅은 황무지이다. 그 황무지를 개간하는 일은 김흥현 의장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글·사진 조은영 기자

 

작성자조은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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