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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우 박유선 씨

“이 아이들이 내 삶의 근거입니다”

본문

그녀를 만난 건 지난 8월이었다. 모 방송의 시사프로그램에 장애여성으로서 아이를 기르는 사연이 잠깐 공개되었는데, 함께걸음 편집팀은 나에게 그 여성의 삶을 더 구체적으로 알아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장애여성이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늘상 봐왔던 나로서는 별반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육아와 양육에 대해 소소하지만 세심한 일상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소중한 기회였다. "제가 무슨 얘깃거리가 있겠어요?"하며 쑥스러워했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소설 책 몇 권 분량의 내용을 끄집어 낼만한 인생살이의 역정이 있는 법. 박유선 씨(39세, 시각장애1급), 그녀가 그랬다.

▲시각장애우 박유선 씨(39세, 시각장애1급)


살림꾼, 그녀
한 낮의 아파트 단지 풍경은 참으로 조용하다. 나무 그늘아래에는 나이든 어르신들이 조용조용 담소를 나누고 있고 좀 더 젊어 보이는 아주머니들은 아파트 안 복지관 마당에 널어놓은 붉은 고추를 말리고 손질하느라 여념이 없다. 요즘은 보기 드문 5층짜리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있을 리 만무하다. ‘시영아파트라 장애 가진 분들도 많을 텐데, 휠체어 탄 분들은 어떻게 이동하지?’ 얼굴과 등에 범벅이 된 땀 때문에 그런지,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은 괜한 계단 탓만 하게 된다.
그런데 문이 활짝 열려진 그녀의 집에 들어서자 양 방향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금세 집과 사람에게 집중하게 만들었다. 6명의 식구가 살기에는 작을 수밖에 없는 방 2칸짜리에 거실과 부엌이 겸해있는 공간이지만 깔끔히 정리정돈 된 살림살이는 바람을 전혀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5명의 식구를 먹여 살리는(?) ‘살림꾼’ 박유선 씨의 인생살이를 들여다보자.

상처는 서로를 보듬는다
“중도장애에요. 93년이었는데 차를 타고 가다가 중앙선을 침범한 택시와 정면 추돌했죠.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얼굴만 다쳤어요. 130번을 꿰맸다면 상상이 가요?”
당시 그녀 나이 29살. 다소곳하고 얼굴도 예뻐 시쳇말로 인기 짱이던 그녀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었다. 얼굴은 수술에 수술을 거듭해 어느 정도 나아졌다고 하지만 유리파편이 망막을 손상시켜 그 후 더 이상은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사고는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고 한다. 
“한 3년 정도는 방황한 것 같아요. 뺑소니는 아니었지만 그 사람도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 보상은커녕 치료비도 제대로 받지 못했죠. 악착같이 모아둔 돈을 다 털어 병원비로 날렸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고민하고 있을 때 지금의 남편이 저에게 다가왔죠.”
지금의 남편은 사고 나기 전부터 알던 사이였지만 말 한번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사이였다고 한다. “그 사람이 저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지만 내색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때 그는 결혼한 유부남이었거든요.” 남편도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서인지 그녀에게 말 한마디 걸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녀가 사고가 난 후, 그는 이혼을 했다. 남편의 구애가 시작되었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어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내가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찾아오는 게 이상했죠. 그 사람 말로는 전부터 날 좋아했던 것뿐이라는데, 자칫하다간 소문만 나쁘게 날 것 같아 몇 번 만나다가 안되겠다 싶어 제가 직설적으로 물었어요. 나에 대한 감정이 동정심이냐 진짜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 거냐?, 라구요.” 그랬더니 그에게서 의외로 솔직한 답변이 왔다고 한다. 반반이라고.
당시 이혼 직후 아이들을 보육원에 보내고 외로워하던 남편의 모습에서 ‘내가 잡아주지 않으면 안되겠구나’하는 생각은, 결혼하지 않고 우아한 싱글로 살아가겠다던 평생의 다짐을 가만히 놓아버리게 만들었다.
장애를 갖게 되었지만 ‘난 얼마든지 강하게 살 수 있어’라고 자기암시를 끊임없이 해오던 그녀였지만, 그 주문도 상처를 보듬어주고 싶은 인간의 본성 앞에서는 접을 수밖에 없는 무엇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마음에는 ‘부족한 사람들끼리 그래 한번 해보자’하는 마음이 강하게 들어섰고, ‘서로 상처가 있으니 배려해가면서 살면 되겠지’하는 연민이 막연한 자신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독하게 해서라도 바르게 키우고 싶다
그러나 주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녀의 형제자매들은 뭐 하나 가진 것 없는 남편의 경제 형편과 아이가 둘이나 있는 이혼남이란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다. 왜 고생을 사서하냐는 당연한 근심이었으리라. 그래도 그녀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가난에서 피어날 수 있는 인간적 애틋함과 사랑이었다. 
“전 우리가 가진 것 없다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했어요. 돈 몇 푼 있으면 장애가 있는 절 얼마나 괄시했겠어요? 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서로 노력하면서 만들어가는 것이었으니까 그 사람이나 저나 참고,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지낸 거죠. 대단한 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단지 서로 보듬고 격려하면서 아이들에게는 따뜻한 밥을 먹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생면부지의 아이들을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면서 살기란 녹록치 않은 법.
“처음에는 보이지 않는 눈을 갖고 그 큰 두 아이를 어떻게 키우나 싶었어요. 게다가 보육원에서 데리고 와 보니 아이들이 거기서 눈칫밥을 먹고 살아서 그런지 마음의 문도 열지 않고 정리정돈, 공부 또 사람에 대한 예의 같은 것도 하나 없이 천방지축인 거 에요.”
지금은 그 아이들이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 이제 별 문제없이 각자의 생활을 찾아가고 있지만, 부모의 이혼과 가난, 보육원 생활 등이 아이들의 정서에도 영향을 미쳐 ‘엄마’로서의 자리를 찾는데 힘겨움이 있었나 보다.
“중학교 때 양친을 여의고 언니 오빠들 틈에서 자라나 일찍부터 철이 들었죠. 그래서인지 웬만해서는 별로 어렵다고 생각지도 않고 겁나지도 않아요. 하는데 까지 해보는 거죠. 새엄마라고 뭐라 할 지 모르지만 전 그런 거 신경 안쓰고 독하게 굴었어요. 야단도 치고 잔소리도 많이 하고. 애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바르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많았던 거죠.”
학교 갔다 돌아와 인사를 하고는 조용히 자기 방에서 뭔가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제법 의젓해 보이기도 했다. 엄마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정확하고 무서운(?) 엄마인 듯 했다.

장애여성의 모성권,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
요즘 그녀의 고민은 얼마 전 7개월 만에 세상에 나온 아들 성현이(9개월)의 건강이다. 마흔 가까운 나이이기도 했지만 형편상 양육에 대한 부담도 커서 아이를 갖지 않으려고 했다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아이가 들어섰다고 한다. “전혀 몰랐어요, 현기증이 좀 심하고 몸이 힘들어지는 게 이상하다 싶어 임신이란 생각은 들었지만 소변 테스트에서도 나오지 않았어요. 당뇨 때문에 간 병원에서도 소변검사, 피검사 다 했지만 전혀 임신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죠.” 3개월이 훨씬 지나 임신 사실을 알았는데 심리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아이가 7달 만에 저체중아로 나와 인큐베이터 안에 있다가 나왔고, 탈장에다 배꼽에 물도 차있고 기도도 안좋아 고생을 많이 했죠. 지금은 나아진 거에요.”
병원비도 병원비지만 그 어린 아이가 고생했을 걸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단다. 성현이는 지금도 1분에 2번 정도는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목에 호수를 넣어 침을 빼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녀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제가 할 수 없는 일이죠. 정말 다행인 것이 자활후견기관에서 사람을 파견해주어서 주말만 빼고 일주일에 5번 아주머니 두 분이 번갈아가며 오셔서 성현이를 봐주고 있어요. 이런 제도가 없었다면 아픈 성현이를 어떻게 돌 볼 수 있을까 싶지요.”
기초생활수급권자인 박유선 씨는 장애여성이 가진 육아에 대한 부담을 이런 식으로 정부가 지원해주어야 하지만, 수급자가 아니면 안되는 현실도 꼬집었다. 모든 게 가정의 책임이 된다면 장애가 있는 여성은 아이를 낳아 기를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고, 낳는다 할지라도 남편이 경제활동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아침 9시에 오셔서 5시 30분에 가시는데, 모두 이웃 주민들이라 편하고 안심이 되죠. 전 그냥 옆에 있어요. 다 알아서 해주시거든요. 물론 전에 민경이를 키울 때는 처음이고 젊었기 때문에 힘든 줄 몰랐지만, 이렇게 아이가 아플 때는 경우가 다르죠. 꼭 필요한 지원이에요.”
차와 과일까지 내주시던 아주머니께서 드디어 한 마디 하신다.
“그래도 성현이가 순해서 참 다행이야. 이렇게 아픈데도 울지도 않고 생긋생긋 웃기만 하잖아.” 내내 잠을 자던 성현이가 어느새 깨었는지 눈을 마주치며 까르르 웃는다. 아주머니가 얼른 성현이를 안아 올리고 마치 할머니처럼 같이 코를 비비며 까꿍까꿍을 연발하신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그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성현이의 표정을 소리로 상상하는 듯 했다.

  우리 아이, 상처 하나 없어요
결혼 후 그녀는 아이를 낳았는데, 7살 예쁜 딸이다. 그 아이를 키울 때는 전혀 힘든 것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신기함도 한 몫을 했거니와 아이가 워낙 순해서 별 말썽도 피우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를 생각해 천기저귀를 직접 빨아 썼다. “남편이 출근 전에 분유병에 6개를 쭉 타놓고 나갔어요. 제가 볼 수가 없으니까요. 근데 며칠 해보니까 우유가 차가워지고 또 쉬기도 하더라구요. 안되겠다 싶어 제가 직접 타기 시작했는데, 감각적으로 분유와 물의 무게를 인식하기도 했지만 아이가 싱거우면 먹지 않아 제대로 탈 수 있었어요. 똥 싸면 물티슈도 쓰지 않았죠. 즉시 직접 따뜻한 물로 욕실에서 목욕도 제가 다 시켰고요.”
다칠까봐 4살까지 직접 업고 다녔다는 그녀는 흰지팡이가 있어도 ‘할머니 같다’는 느낌 때문에 쓰지 않는다고 하는데, 대충 다니는 길은 머리에 입력을 해두었다가 다니기 때문에 별로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나처럼 다치면 안되겠다 싶어 정말 애지중지 제가 다쳐가면서 업고 다녔어요. 전철이 제일 힘든데, 허벅지, 무릎은 멍이 가시질 않았지요.”
가끔 언니들의 도움도 받아 놀이공원이나 동물원에 가기도 했다는데, 그녀의 살림살이와 양육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상처 하나 안내고 이렇게 잘 키웠냐며, 오히려 대견해하는 마음에 좋은 곳에 여행을 가면 조카를 꼭 챙긴다고 한다.
“말이 좀 늦는다 싶었는데 유치원에 보내자 책도 술술 읽고 노래도 잘하고 아이의 성격이 많이 밝아졌어요. 집에서는 나이 차 나는 언니 오빠들이 있어서 그런지 조용한 편이었는데, 이제는 재잘재잘 하죠. 기초가 중요하다 싶어 돈만 생기면 아이 책을 사줘요. 남편이 두손두발 다 들었다고 해요.” 7살 민경이는 가끔 “엄마는 왜 앞이 안보여?”라고 묻기도 하지만  그래서인지 배려심도 깊다고 한다. 떼쓰고 고집 센 미운 7살이라고 하지만 그들에게 민경이는 맑고 순수한 영특한 7살 소녀였다.

우아한 싱글에서 억척스런 엄마로
그녀의 꿈은 작은 까페를 운영하며 사는 우아한 싱글이었다. 사고 후 모든 게 달라져 앞을 볼 수 없게 되었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상상했던 자신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삶에 대한 질긴 애착이다.
“장애 등록 후에도 수당 같은 건 받고 싶지 않았어요. 난 일이 필요했지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었어요. 집안에서도 청소, 설거지, 제가 다 했어요. 깰까봐 언니 오빠들은 일 시키지 않고 강요도 안했는데, 제가 그랬죠. 주어지면 다 하는데, 왜 안시켜? 내가 뭘 못해? 나 데리고 살거야? 아니잖아. 그렇게 못하잖아. 난 늙어 죽을 때까지 내 힘으로 혼자 살거야! 라고요.”
자기도 돈 벌 수 있다고 큰 소리 쳤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훈련받지도 못했고 돈 벌이가 뭐가 있는지 알 수도 없었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었다. 결국 생각해 낸 것이 여관 등에서 이불빨래를 가져와 하루에 4개 이상을 빠는 것이었는데, 32kg이었던 가냘픈 몸이 28kg까지 빠져 그것도 잠시였다고 한다. 그녀의 억척스러움이 상상이 간다.
여하튼 젊은 여성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집에 있는 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용납되지 않는 현실이었다. 비록 장애와 관련된 정보를 어디서 얻어야 하는지도 몰랐고 누가 찾아와서 장애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도움 주는 이도 하나 없었지만. 마침내 그녀는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싶어 무작정 서울에 올라왔고, 나갈 수가 없으니 양말 뒤집는 부업을 해서 한 달에 5-10만원을 벌기도 했다. 안보이는 상황에서 처음으로 번 돈이라 그것도 크다고 생각했단다. 자신감은 그 후로 계속 강해졌고, 언니 오빠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다.

빈병 모으기 창피하지 않다
남편이 버는 수입만으로 아이들 학교 보내고 양육을 한다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그녀는 틈만 나면 아이들을 앞세우고 아파트를 돌며 빈병을 구해 팔았다고 한다.
“종이는 할머니들이 다 수집을 해가시니까 전 병을 구하러 다닌 거죠. 몇 푼 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걸로 아이들 간식 정도는 사 줄 수 있어요. 그게 얼마에요? 그 정도는 제 힘으로 해줄 수 있는 거죠.”
하지만 머리가 큰 아이들은 그걸 창피해 할 수 도 있는 것 아닌가. 어느 날 아이가 “엄마 창피하지 않아요?”라고 물었다는데, 그녀의 답은 훌륭했다.
“구걸하는 게 창피한 거지,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게 뭐가 창피하니?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여기고 아끼고 알뜰하게 모아서 사는 게 중요한 거야. 빈병을 모아 파는 건 전혀 창피한 일이 아니야.” 그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아이들은 학교나 길에서도 병을 보면 가방에 담아 올 정도로 알뜰해졌다고 한다. “청소나 쓰레기 줍는 일이라도 따라다니며 하고 싶어요. 어떤 일을 하든 보람 있게 쓰면 되지요. 몸을 아끼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어요. 내가 장애우다, 라는 생각도 안해요, 사고 후 3년간은 좌절과 절망의 시간이었지만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까 벗어던진 거죠.”
삶에 대한 애착은 삶에 대한 진지함과 성실함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녀에게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가족이 장애를 잊게 한다
장애를 갖게 된 지 1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점자는 익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거 배우다간 흰머리 생겨요. 시간이 아깝기도 하구요. 하지만 남편도 등 돌리면 남인데 싶어 능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죠. 라디오를 잘 듣고 정보를 구하지만 아직 밖에 직접 나가는 건 좀 무리에요. 아이들도 키워야 하니까요.”
아직 아이들 학교를 한 번도 안갔다는 그녀는 주로 전화로 담임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아이들 상담을 구한다고 한다. “좀 미안하긴 해도 지금으로선 저에게 최선의 방법이에요.” 장애가 부끄러워 일부러 안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상황 자체에서 오는 한계였다. 그녀는 오전에는 거의 집안에 혼자 있다. 지금은 아주머니들과 함께 지내지만 거의 나가지 않는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오면 산책도 하고 물건을 사러 가기도 하죠. 혼자 나갔더니 거짓으로 나쁜 과일 주는 곳도 있었어요. 집에 와서 가족들이 확인하고는, 안보인다고 물건을 이렇게 줬어? 라고 따지죠. 그 후론 그곳에 가지도 않구요.”
지금은 다 단골이 있어 오히려 양심적으로 더 좋은 물건을 많이 주려고도 한단다. 그렇게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아무 것도 아니고, 오히려 더 입가가 슬며시 올라가는 맛도 즐길 수 있다. 자연스런 인간관계에서 ‘장애’가 끼어들 틈은 없지 않은가.

양육에 있어서 프로가 되기 위해
박유선 씨가 가장 힘들어 하는 일은 아이들이 아플 때다. 앞이 보인다면 업고 뛸 수 있지만, 자신은 어딘가로 전화를 하거나 이웃에게 부탁을 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그저 막막하기만 하고 눈물만 난다고 한다. 그때가 평소에는 잊고 살던 자신의 ‘장애’가 몸서리쳐지게 인식되는 순간이다. 요즘 부쩍 민경이가 “엄마 언제 볼 수 있는데?”라는 말을 자주 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난감하기도 하지만 답은 하나란다. 그저 “교통사고로 다친 거니까, 민경이도 정말 조심해야 해.”라는 말 밖에는.
그래도 아이들이 커가는 걸 보는 게 가장 보람되고 흐뭇하단다. 다른 일은 몰라도 아이를 잘 키우는 것 하나는 자신 있다고 한다. 이야기를 하며 거의 웃음을 보이지 않는 그녀였지만 아이들 이야기만 나오면 어느 새 눈꼬리가 올라가면서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보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자하니, 연일 뉴스에 보도되는 정부의 저출산 대책이 왜 장애여성의 모성권을 적극적으로 보장하는 차원에서는 접근되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지금의 도우미 파견은 로또기금으로 실시되는 한시적 정책이라 불안하기 짝이 없는 무책임한 제도 중 하나다. 어서 빨리 장애를 가진 이 땅의 모든 엄마들이 언제라도 마음 놓고 사랑스런 아이들의 당당한 엄마가 될 수 있도록 확실한 지원 정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글·사진 홍여준민 객원기자

작성자홍여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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