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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피아노 교습소 운영하는 전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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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에게 장애는 고통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삶을 악착같이 살도록 자극하는 촉매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어쨌든 극복의 과정 자체는 매우 아름답다고 아니 할 수 없는데, 그래서 이런 경우 배경에 깔린 유형무형의 열등감쯤은 간단하게 무시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이제 막 삼십대 초반을 살고 있는 이 땅의 장애우들은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서로가 매우 흡사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나 생각되어 진다.
 한때 장애 발생의 으뜸 원인이었던 소아마비 장애우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들은 육이오 동족상잔의 비극이 아물지 않아 가난과 피폐함만이 넘쳐났던 고단한 시기에 생을 시작해야 했고 먹고사는 것이 절대 명제였던 그때는 "장애 예방"은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먼 나라의 일에 다름아니었다.
 
운이 나빴다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지 몰라도 외적으로 한번 나타난 장애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굳어졌고 그때부터 가족들은 버거운 짐을 떠안고 쩔쩔매야 했다. 심한 경우 가산을 탕진한 경우도 있거니와 부모들은 장애우 자식의 장래를 생각하면 암담함 그자체를 느껴야 했다.
 그렇다면 장애우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사회적 차별이 기승을 부리던 그 시기 육십, 칠십년대를 지내면서 과연 부모들은 장애우 자식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있었을까.
 물론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더 배워야 한다는 비장한 교육열로 자식을 학업에 매진케한 부모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퍼센트지는 극히 소수이고 나머지 집안 형편이 그리 넉넉지 못했던 대다수 부모들은 자식의 장래를 기술자, 아니면 자영업으로 연결시키려 했고 그 가능성에 집착했다. 그 애달팠던 소망을 누구라 탓할 것인가.
 그나마 여성 장애우는 이런 소박한 가능성에서조차도 철저하게 소외되어야 했다. 자의로 진로를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애당초 막혀 있었던 상황에서 부모들마저 외면했던 여성 장애우들의 삶이 그 후 어떻게 풀렸을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올해 서른세살인 소아마비 장애우 전귀복 씨도 마찬가지로 가당찮은 편견에 시달려야 했고 그래서 경쟁을 통한 길이 심하게 방해받았던 불운한 시기를 살아와야 했다.
 그이는 지금 대통령을 배출해 유명해진 동네 상도동에서 피아노 일곱 대를 가지고 아이들을 상대로 교습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여기에 이르기까지 그이의 삶은 자신과 세계와의 지난한 싸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이는 육십이년 전남 나주 새내에서 십분 정도 외곽으로 걸어가면 이르는 동네인 용산동에서 아버지 전인국, 어머니 김동심 씨의 삼남 일녀 중 막내로 세상에 나왔다. 그리 넉넉지 못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재산 축적과는 거리가 먼, 무엇보다 학문을 중시했던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였기 때문이다.
 그이는 세살때 심하게 열병을 앓았다. 자지러지는 아이의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 수 없었던 부모는 뒤늦게 아이를 업고 용하다는 의사를 찾아 다녔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궁여지책으로 어머니는 친척을 통해 일본에서 주사약을 구해다가 그이에게 맞혔다. 그러자 상태가 약간 호전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그이의 장애는 더 이상 나아지지 않고 굳어졌던 것이다.
 
그이가 다섯 살이 됐을 때 부모님이 채석장 사업을 시작했다. 집 근처 영산포에 있는 큼직한 돌산을 어려운 시절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던 친구 한 분이 "한 번 해보라"며 넘겨줘 어머니는 현장 감독을 하고 아버지는 경리를 보며 인부들을 동원해 화강암을 캐내는 일에 매달렸다.
 때마침 새마을 운동의 열기가 불어닥치면서 도로 포장용 자갈로, 축대를 쌓는데 필요한 돌로 수요가 급증했던 채석장 사업은 하루가 다르게 번창했고 사업이 잘되자 그이의 집안 형편도 눈부시게 풀렸다. 말 그대로 고래등같은 기와집을 두 채나 짓고 수십리나 되는 길에다 손수 전봇대를 세워 동네에서 처음 전화를 가설했을 정도였다. 부모님을 그이를 돌보기 위해 따로 가정부를 채용하기도 했다.
 이런 부유한 환경은 그이의 유년에 곧바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이는 국민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전혀 자신의 장애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그 이유는 또래 아이들의 보모 거의가 그이 집에서 하는 채석장과 연관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이는 동네에서는 아이들을 불러모으고 호령하는 골목 대장으로, 학교에서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실세로 위치를 굳건히 했다. 그 흔한 놀림 한 번 받아보지 않은 채로 말이다.
 그이는 국민학교 육학년에 오르면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특별한 동기는 없었다. 텔레비전에 비치는 연주자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고 예술에 관심이 조금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다는 우월의식 정도가 동기라면 동기일 터였다.
 
그이는 방과 후 학교 근처에 있는 학원으로 달려가 위대한 연주자의 꿈을 키우면서 피아노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이의 꿈은 영산포 국민학교를 거쳐 영산포 여중에 진학해서도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이 무렵 그이는 아버지의 권유로 처음 보조기를 착용했다.
 아버지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그이의 아버지는 누구도 알 수 있게끔 그이를 과잉보호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어머니는 그이에게 빨래를 시켰고 "네가 먹은 그릇은 네가 설거지를 해라"며 매정하게 그이를 대했다. 그래서 그이는 어머니를 미워했다. 나중에 그런 어머니의 태도가 그이의 독립심을 키워주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취한 조치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어느새 그이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그이가 중학교 삼학년에 오를 무렵 갑자기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다. 채석장 사업에 잇따라 문제가 생긴 것이다. 사태의 발단은 돌산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업자가 나타나면서 시작됐다. 업자는 돌산의 임자가 자기라며 소송을 걸어왔고 나중에는 돌을 캐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린 게 위법이라며 그이 아버지를 고소했다. 그런 중에 갓 제대한 오빠가 업자와 부닥쳐 억울하게 덜컥 구속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야말로 사면초가로 내몰린 상황이었는데 그이 아버지는 어미와 동네 사람들이 "합의를 봐라" 종용하는 것을 "정도가 아니면 가지 않겠다."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래서 이년을 끌던 재판은 결국 그이 집안의 패소로 끝이 나 파산 상태에 다다랐는데 그 책임 여부를 놓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거의 매일을 지독한 말다툼을 벌였다. 고혈압 때문에 술을 입에 못대시던 아버지가 폭음을 시작한 때도 바로 이 시기였다.
 
그이는 생활의 곤란보다 부모님 불화를 지켜보아야 하는 게 더 가슴이 아팠다. 그 영향인지 그이는 어린 마음에 "반드시 돈을 많이 벌어서 우리집을 망하게 한 사람들한테 원수를 갚아야지" 처음으로 증오심을 키우게 됐다.
 그이는 험악한 집안 분위기로 인해 일찍 귀가할 수 없게 되자 학교에서 밤늦게까지 피아노에 매달렸다. 이 무렵 그이는 어쩔 수 없어 자신의 장애를 인식했고 "내가 살길은 이것 밖에 없다." 피아노를 삶의 수단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이때 그이는 영산포 여고 일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그이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는 전라남도작곡협회가 주최한 콩쿨에 이년 연속 입상하는 것으로 나타나 그이를 기쁘게 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삼학년이 되면서 그이는 체르니 사십번 까지 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됐다. 생각 같아서는 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은 도저히 그이의 꿈을 충족시켜 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이는 진학을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집에서 독립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무렵 그이의 소망은 훌륭한 피아노 교사가 되는 것으로 현실성을 띤 채 바뀌어 있었다.
 
일단 마음의 결정이 서자 그이는 부모님에게 "피아노 한 대만 사달라." 졸랐다. 아버지는 그이의 독립을 극구 반대했다. 그이는 당돌하게 "내가 돈을 벌어서 우리집 생활비를 대겠다." 아버지를 설득했다. 어머니는 그이의 독립을 반대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남아있는 재산 하나를 처분해 사십칠만원을 주고 피아노 한 대를 사줘 그이는 나이 스무살에 나주시 의창동에 보증금 없는 월세 오만원짜리 방을 한 칸 얻고 독립했다.
 그이가 교습소를 시작한 방은 수돗물도 나오지 않고 햇볕도 스며들지 않는 컴컴한 굴 속 같은 방이었다. 이곳에서 그이는 처음 아이 열명을 모아 가르쳤다. 우려와는 달리 아이들을 모으는 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요즘과는 달리 피아노가 귀해서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로 하여금 피아노를 배우게 했기 때문이다.
 교습소 운영이 잘되자 그이는 육개월 후 근처 백오십만원짜리 전세방으로 옮겼다. 옮기면서 피아노 한 대를 더 구입해 그이는 피아노 두 대를 가지고 교습소를 운영했다. 다시 육개월 후 그이는 이번에는 근처 이십오평짜리 백조 아파트를 이백오십만원에 전세 얻어 이사했다. 어느새 그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사십여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 무렵 그러니까 그이의 백조 아파트 시절 생활이 점차 안정되어 가자 그이는 잊었던 음대 진학의 꿈을 다시 키우게 됐다. 그이가 다시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 이유는 이러하다.
 
돈을 벌게 되자 그이는 돈의 귀중함을 알게 되고 돈을 쓰는 재미도 체득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뿐 더 이상 낙이 없었다. 그이의 부모님만 보더라도 결코 돈이 없어 인생을 실패한건 아니었다. 세상에는 돈 보다 더 큰 힘을 갖는 지식이라는 게 있고 소위 빽이라는 게 있는데 부모님을 이를 간과해 하루아침에 부서졌던 것이다. 사람은 절대 돈으로만은 살 수 없다. 그래서 배움이 힘이다‥‥‥ 이런 생각이 그이의 내면에 잠재해 있던 성취욕을 자극했다.
 그이는 다시 음대 진학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매달렸다.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배움에의 열망을 불태웠다. 레슨을 받으러 그것도 빚을 얻어 광주까지 나가기도 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쏟았지만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재수에서 또 실패를 하자 그이는 세 번째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때 그이의 나이 스물여섯살 이었다.
 그런데 한차레 고비를 넘겼다고 안도할 즈음 그이에게 소리없이 새로운 시련이 닥쳐왔다. 그이가 사랑의 홍역을 혹독하게 치르게 된 것이다. 그이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친하게 지냈던 남자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늘 가까이서 지내다 보니 채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없었는데 이 해 그이는 나이가 나이이만큼 결혼 상대로서 그 친구를 바라보게 됐다. 하지만 남자 친구는 이미 장래를 약속한 다른 여자가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이의 사랑은 무참하게 깨졌다.
 남자 친구와 헤어진 후 그이는 한동안 심한 열병을 앓아야 했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그 친구를 사랑했음을 깨닫게 되자 그이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세월이 흘러 감정은 수습됐지만 이 일은 그이의 내면에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이가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 그이는 교회 전도사와 결혼한, 아는 언니를 우연히 만나게 됐다. 그이는 그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위로와 평안을 맛보게 됐고 그 만남을 계기로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신학을 하고 싶다는 꿈을 키운다.
 그이는 과감하게 다니던 대학을 그만뒀다. 교습소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가 팔십칠년이었다.
 그이는 봉천동에 있는 오빠집에 거처를 정하고 곧바로 신학교 시험을 봐 안양에 있는 대한신학대학에 다니게 되었다. 신학대에 다니면서 그이는 나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해야하고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적어도 삶의 본질에 대한 문제는 해결했다고 자위하고 있다.
 그이는 팔십팔년 지금 살고 있는 상도동에 피아노 교습소를 열었다. 처음에는 학교에 다녀야 했기에 유지만 할 정도로 아이들을 받아 가르쳤다. 그로부터 육년이 지난 지금 그이는 혼자 힘으로는 벅차 강수 두 명을 채용해 교습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만큼 가르치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그이의 운영 비결은 최선을 다해 가르치고 학부모들에게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이런 철학을 가지고 교습소를 운영해 왔기 때문인지 그이의 교습소는 성공한 케이스로 분류된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그이의 지식에 대한 욕구는 끝이 없다. 그이는 신학대를 졸업하고 다시 음악 공부에 매달려 작년 초 연세대학교 음악 교육대학원에 합격했다. 다리 수술 때문에 한학기를 다니고 휴학했지만 곧 다시 복학해 학업을 마칠 생각이다.
 이렇게 그이로 하여금 지칠줄 모르고 도전을 거듭하게 하는 동력은 무엇일까? 그이는 말한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실존주의에 심취했던 적이 있어요. 주어진 삶에 도전해서 삶을 개척해 나가고 승화시켜 나가는게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귀한 위대함이다. 이것이 저의 신조가 됐죠."
 그이에게 이제 남아 있는 숙제는 결혼 문제이다. 언제 결혼할 예정이냐고 묻자 그이는 "원하는 남자를 만나면 학업을 중단할 용의도 있는데 맥가이버 같은 남자가 나타나지 않아 걱정"이라며 웃는다.
 전귀복 그이의 표정은 밝다. 아직도 공부와 음악에 대한 욕심이 많이 남아 있어서 도무지 늙을 것 같지 않다고 말하는 그이. 그이의 새로운 도전이 어떤 결실을 맺게될지 자못 궁금한데, 한가지 분명한건 그이는 결코 중간에서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이의 장애는 그이에게 본능적인 끈기를 갖도록 충동질했다. 지금 그이는 그 장애를 너무너무 사랑하고 있다.      

글/이태곤


 

작성자이태곤 기자  a352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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