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장애우 편의시설 탐방기(3) / 강원래, 그를 만나다 > 세상, 한 걸음


미국 뉴욕 장애우 편의시설 탐방기(3) / 강원래, 그를 만나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영원한 춤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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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걸음〉은 이번 KBS ‘사랑의 가족’ 동행취재 중에 프로그램 진행자인 강원래 씨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강원래 씨는 뉴욕 대중교통과 박물관, 공원 등의 편의시설을 직접 체험한 소감과 휠체어 댄스를 선보여 큰 호응을 받았던 5집 활동 뒷이야기 등을 들려줬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줄기세포와 관련된 속내도 털어놨다. 강원래 씨와의 인터뷰 전문을 싣는다.

 

 

 

“그래서 관리인이랑 대판 했지 뭐예요. 당신 같으면 집에서 가만히 있겠냐고 말이에요. ”
함께 : 장애인 주간 특집 방송을 위해 뉴욕 거리와 박물관 등을 다니면서 편의시설을 체험했는데, 한국과 비교해 어떤 느낌이었나요?
강원래(이하 강) : 글쎄요. 크게 다른 점은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장애우를 보는 시선은 좀 다르다 싶어요. 낯설어하거나 경계하는 눈빛이 아니고, 아무렇지 않은 눈빛이라고 할까. 왜 있잖아요, 특별한 사람을 보는 눈빛이 아니라 데면데면한 시선. 그래서 편하게 느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래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불편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좋기도 하고 그래요. 예를 들면 비 맞고 택시 기다리고 있으면, 기사 분들이 알아서 휠체어까지 실어주곤 해요.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휠체어 타고 있으면 택시 잡기 쉽지 않거든요.
함께 : 강원래 씨는 외국 공연 경험도 많을 텐데, 혹시 장애와 관련해 기억에 남는 나라가 있나요?
강 : 베트남에 공연 차 갔던 적이 있죠. 그런데 호텔인데도 경사로가 없어요. 휠체어 타는 사람을 처음 보는지, 쩔쩔매기만 하더군요. 휠체어를 들다가 제가 떨어졌는데 일으켜주지도 않고. 호텔하면 서비스인데, 베트남에서는 좋지 않았어요. 그리고 베트남은 비포장 도로가 많아서 다니기가 무척 힘들었죠. 특히 휠체어 장애우들에게 최악이 자갈길인데, 결정적으로 베트남은 자갈길이 많아요. 호텔에도 경사로가 없는 형편이니, 화장실이나 다른 편의시설은 거의 없어요. 베트남은 우리나라에 비하면 정말 낙후된 것 같아요. 베트남 한번 갔다오니까, 그래도 우리나라가 좋구나싶더라고요.
함께 : 편의시설은 설치하면 되는데, 장애인식이 더 문제인 것 같아요. 사회가 장애우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니까요.
강 : 게다가 사람들의 장애인식은 한순간에 바뀌는 것이 아니잖아요. 제가 비슷한 상황에 서 한국과 미국 사람들의 장애우 대한 배려가 얼마나 다른지 경험한 적이 있어요. 얼마 전에 동대문 밀리오레에 쇼핑하러 휠체어 타는 친구와 같이 갔어요. 사람들이 알아볼까봐 마스크를 하고, 친구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렸죠. 하지만 열 몇 대가 가도록 탈 수가 없는 거예요. 엘리베이터는 계속 만원인데, 휠체어 탄 우리를 보고도 아무도 양보하질 않아서 말이죠. 다짜고짜 내리라고 할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탔죠. 화물용 엘리베이터가 답답해서 마스크를 벗으니까, 같이 탔던 그쪽 관리자가 저를 알아보고 한 마디 했는데, 나원참 기가 막히더군요. 그 사람이 뭐라고 했냐면 “강원래 씨, 불편한데 뭐 하러 나왔어요? 집에 가만히 있으면 송이 씨가 다 사다줄 텐데.”라는 거예요. 우와, 정말 뚜껑이 확 열리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래서 관리인이랑 대판 했지 뭐예요. 당신 같으면 집에서 가만히 있겠냐고 말이에요. 정말 욕지기가 나올 정도로 화가 나더라고요.
미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었죠. LA에 공연 갔을 때인데요.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보니 사람들이 꽉 찼더라고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저를 보고 차례로 다 내리는 거예요. 저에게 먼저 타라고 양보하는 상황이었는데, 첨엔 뭔 일인가 싶어서 깜짝 놀랐죠. 어쨌든 제가 탄 후에 사람들이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죠. 물론 몇 사람은 저 때문에 못 탔어요. 정말 다르죠? 그래서 저는 사람들의 장애인식을 고치는 것부터 해야겠구나 싶더라고요. 제 생각에는 어릴 때부터 받는 교육이 중요할 것 같아요. 미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보다 이해심이 더 많거나, 심성이 더 고와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어릴 때부터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생활하고, 배우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어려서부터 비장애우와 장애우가 같이 부딪히면서 살면 서로 낯설지 않겠죠. 저는 그런 것들이 장애인식을 변화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요.
함께 : 강원래 씨는 비장애우와 장애우 두 가지의 삶을 다 경험했는데, 장애가 생기기 전과 후, 장애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강 : 그렇죠. 사고가 나기 전에는 장애우하면 저랑은 친할 수 없는 사람들, 불쌍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죠. 지금은 장애 당사자이니까 생각이 좀 다르죠. 그동안의 생각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장애가 있건 없건 다 같은 인간이구나 하는 거예요. 다만 상황이 서로 다르다는 겁니다. 저는 장애우기 때문에 못하겠다, 포기해야겠다하는 생각 접었어요. 능력을 갖춰야죠. 장애우니까 봐준다, 이런 거는 정말 못 참겠더라고요.

 

“아, 이런 게 정말 기쁨의 눈물이구나, 싶었죠.”
함께 : 방송국 안에는 휠체어 장애우가 거의 없잖아요. 편의시설이 어떨지 궁금한데, 불편한 점은 없나요?
강 : 우선 턱이 많아서 불편해요. 그래서 아무래도 같은 동선으로만 움직이죠. 화장실도 가던 곳만 가요. 만약 낯선 화장실이나 주차장을 사용하게 되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나 상당히 부담돼요. LA에 있을 때 거리에서 한 장애우 화장실에 갔는데, 샤워시설이 있더군요. 우리 같은 척수 장애우들에게는 정말 소중한 시설이죠. 거기까지 가려면 아직도 멀었겠죠?
제가 2003년에 결혼을 하고, 그 해 10월부터 방송 시작했거든요. 따져보니 한 3년 방송을 해온 셈인데, 화장실 문제 때문에 곤란한 적이 몇 번 있어요. 사실 척수 장애우들이 사회생활 할 때 가장 힘든 것이 배변처리 문제죠. 그런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소변은 괜찮아요. 대변이 제일 걱정이죠 뭐. 음식 조절을 하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먹어보지 않은 음식이나 한 번이라도 탈이 났던 음식은 안 먹죠.
함께 : 작년 여름 5집을 내면서 휠체어 댄스를 선보이셨죠. 강원래 씨 뿐만 아니라, 구준엽 씨를 포함해 댄서들도 휠체어 타고 춤 출 정도가 되기까지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 때 기억나는 얘기 좀 해주시죠.
강 : 저희가 여름에 음반을 냈기 때문에 비랑 땀 때문에 고생했죠. 게다가 야외무대가 많아서 더 힘들었어요. 미끄러지거나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무지 노력했죠. 어디에 물이 묻으면 미끄러지는지, 어떻게 앉으면 잘 떨어지지 않는지, 무대가 기울어 있으면 어떻게 중심을 잡을지, 턱은 어떻게 넘는지 등을  알려줬죠. 특히 준엽이가 5집 준비하면서 휠체어를 한 1년 탔죠. 어느 날 문득 준엽이가 “휠체어에 앉으면, 높이 있는 물건은 어떻게 꺼내?”라고 묻더군요. “송이를 부르거나 웬만한 거는 다 밑에 두지.”하고 대답했죠. 준엽이가 “휠체어 타보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어려움들이 생기네”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화장실 어떻게 가는지, 턱은 어떻게 넘는지를 묻더라고요. 휠체어 댄스 덕분에 준엽이랑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어요.
저희가 어느 정도로 연습했냐면요, 한번은 소파에 앉아 있는 준엽이를 오라고 불렀는데, 순간 준엽이가 허리를 숙이고 바퀴 굴리는 동작을 하는 거예요. 큭큭. 휠체어에 앉아있는 줄 알고 말이죠. 댄서들도 손에 굳은살 박히도록 연습했죠. 아마 50번 이상은 휠체어에서 털썩털썩 떨어졌을 거예요.
함께 : 와, 대단하네요. 그런 노력 때문에 대중들이 환호하고 인정했던 거겠죠. 저도 작년 여름 방송에서 휠체어 댄스를 보고 놀라워했던 기억이 나요.
강 : 작년 7월에  ‘윤도현 러브레터’라는 프로그램에서 첫 방송을 했죠. 그 때 방청석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기립박수를 쳤어요. 사람들이 소감이 어떠냐고 묻는데, 눈물이 쏟아지려는 거예요. 흠흠, 하면서 무대 저쪽으로 가서 다시 맘을 가다듬고 인터뷰 하려고 나왔는데, 또 눈물이 나오고. 안 울려고 애 먹었던 생각이 나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제가 자존심 때문에 꾹꾹 눌러왔던 것이 그 날 터졌던 것 같아요. 살면서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어요. 아, 이런 게 정말 기쁨의 눈물이구나, 싶었죠. 휠체어 댄스 때문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첫 방송 날이에요.
함께 : 그렇게 연습을 혹독하게 하면, 몸이 성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강 : 솔직히 힘들어요. 장애우가 괜히 장애우가 아니거든요. 장애 때문에 피로감도 더 많이 느낄 수 밖에 없고. 어쩌겠어요. 알아서 몸 관리 잘해야죠. 사고난지 5년이 지났지만, 아직 욕창 한군데 없을 정도로 열심히 운동하면서 조절하고 있어요.

 

▲강원래씨가 "사랑의 가족" 촬영중에 틈틈히 찍은 사진을 보내주었다.
부인 김송씨와 다정한 포즈 한컷                                                  

 

“황 박사 때문에 제가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다음 세대들이라도 혜택을 봤으면 좋겠어요.”
함께 : 강원래 씨하면 또 하나의 이슈로 줄기세포가 떠오르는데요. 예전에 한 기사에서 강원래 씨가 황우석 박사를 아빠로 부른다는 것을 본 것 같아요. 서로 친분이 있으신가요?
강 : 그것에 대해서 저는 좀 어이가 없어요. 기자들이 정말 자기 맘대로 쓰는 거에 기가 막혀요. 당시 한참 황우석 박사에 대한 사회적인 기대가 컸을 때죠. 콘서트 후에 인터뷰를 하는데, 황 박사에 관한 여러 가지 질문을 하더라고요. 무슨 얘기 끝에 제가 안규리 교수에게, “누님 힘내세요라는 문자를 보냈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기자들이 “안 교수를 누나라고 부를 정도로 친하냐”고 묻길래, “그게 아니라,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는 동요를 떠올려서 비슷하게 보낸 것이다. 황 박사에게도 그런 문자를 보냈다”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다음날 ‘강원래가 황우석 박사를 아빠로 부른다’는 기사가 났더군요. 더 놀랬던 것은 황 박사가 그 다음에 “강원래가 나를 아빠로 부른다”라고 쇼맨쉽을 보였다는 점이에요. 아무튼 그 얘기는 좀 그래요.
함께 : 줄기세포에 대해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들이 많죠. 특히 척수 장애우나 난치병이 있는 사람들은 더욱 그랬고요. 줄기세포만 성공하면 비장애우처럼 금방 일어설 수 있을 거라는 장밋빛 환상이 사회를 흔들어댔으니까요. 강원래 씨는 이에 대해 지금 어떤 심정인가요?
강 : 줄기세포에 관한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말은 못하죠.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런가요. 100% 믿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저처럼 0.001%만 믿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쨌든 일말의 희망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에요. 언론에서 이미 보셨겠지만, 저는 ‘황우석 박사를 만나기 전에는 걸을 확률이 0%였지만, 황 박사를 만나고 나서는 0.001%가 됐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그렇게 장애우들이 황 박사를 믿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사자의 절실함도 있었지만, 과학자들까지도 그를 믿었기 때문이에요. 언론에서 황우석 박사를 치켜세우더니, 죽이기 시작하니까 언론에서 또 죽이더군요. 거기에 동조한 언론사, 기자들, 책임지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렇게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켜놓고도 말이죠. 어쨌든 지금 저는 기다려보자하는 입장이에요. 황우석이라는 사람에게는 실망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 연구는 계속됐으면 좋겠어요. 연구라는 것이 하다가 실패할 수도 있는 거고, 실패하다가도 잘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저는 그런 과정이라고 봐요. 그렇지만 황 박사 때문에 제가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다음 세대들은 혜택을 봤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은 재활치료에 대해서 잘 몰라요. 줄기세포만 되면 강원래가 그냥 벌떡 일어설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일 년만 안 걸어도 뼈가 연해지고 근육이 없어져요. 그러니 몇 년 혹은 몇 십 년 동안 걷지 못한 사람들은 줄기세포가 된다고 해도 상당한 재활 치료를 해야 합니다. 하루종일 누워만 있다가 일어나도 어지러운데, 몇 십 년을 앉아만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선다? 그것은 드라마에서나 나올 수 있는 얘기죠.

 

“저는 춤꾼입니다. 제가 잘 할 수 있는 음악과 춤으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어요.”
함께 : 강릉에 댄스학원 차리셨잖아요. 그런데 듣기로는 정신지체 장애우들에게 춤을 가르치신다고 하던데요.
강 : 방송을 하면서 정신지체 장애가 있는 친구들을 많이 만났어요. 제 경험으로는 정신지체 장애가 있어도 그들 나름대로 하고 싶은 욕구가 있고, 쾌감이 있고, 정신세계가 있어요. 누구나 제 나름대로 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예전부터 정신지체 장애우들에게 춤을 가르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관련 단체에서 찾아왔어요. 그래서 인연이 됐죠. 제가 운영하는 학원의 강사들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댄서들인데, 처음 만나는 정신지체 장애우들에게 춤을 가르치려니 난감해 하더군요. 한 동작 배우는데 며칠씩 걸리거나, 애써 가르친 동작인데 처음이라는 듯 잊어버리는 건 다반사죠. 5명이 집중하면 10명이 다른 행동하고 있고. 하하. 아무튼 이렇게 좌우충돌하면서 서로 배우고 있어요. 지금은 강사들이 요령이 생겨서 이럴 때는 요렇게, 가르치는 방법을 좀 터득한 것 같아요.
함께 : 방송, 가수활동, 학원운영까지 정말 바쁘실 텐데, 강원래 씨의 활동을 기대하고 있는 팬들을 생각하면, 건강에 특히 유의하셔야 할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떤 계획 있으신가요?
강 : 제가 장애계를 알게 것은 5년 밖에 안됐어요. 더 많이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요구를 안고 저에게 다가옵니다. 장애우가 되면서 새로 사귄 친구도 있고, 소중한 사람들도 만났지만, 저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죠. 하지만 어쨌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부딪히면서 아직은 살만하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들은 제가 겉으로는 화려해보이니까, 장애가 있어도 힘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장애우들과는 다를 거라는 오해 많이 받습니다. 물론 연예인이여서 다른 점도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휠체어를 이용하는 척수 장애우가 겪어야 하는 어려움에는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장애가 생기면서 우선은 어떻게 맘을 다잡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저는 배운 게 춤이에요. 잘 할 수 있는 것도 춤이고. 앞으로도 예전의 강원래처럼 음악으로, 춤꾼으로써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어요.
함께 : 장시간 촬영에 힘드셨을 텐데,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원래 씨와의 인터뷰는 동행취재 마지막 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강원래 씨는 맥주 한 잔으로 그동안 누적된 피로를 풀면서 과감하게 속내를 털어줬다. 공인인 강원래 씨를 헤아려, 좀 걸러서 기사를 쓴 것이 아쉬울 정도로 재밌고 솔직한 입담이었다.
 “제가 쿨한 성격은 아니지만, 뒤끝은 없어요”라고 웃던 강원래 씨. 춤꾼으로써의 멋진 모습, 기대해본다.

 

인터뷰 정리 최희정 기자
사진 제공 강원래

작성자최희정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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