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증권투자 하며 사는 최영수 > 세상, 한 걸음


[사람사는 이야기]증권투자 하며 사는 최영수

본문

                   

 

지난해 가을,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거리에 찬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하던 십일월초 어느 날, 한 낯선 사내가 사무실로 찾아왔다. 서른두서너 살쯤 됐을까. 사내는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는 뇌성마비장애우였다. 때마침 사내를 맞은 건 기자였다. 용건을 묻자 사내는 어눌한 목소리로 "상담을 하고 싶어 찾아 왔다"고 말했다. 장애우들이 주로 법률상담을 하기 위해 사무실을 찾는 건 늘상 있는 일이었으므로 기자 또한 늘 그렇듯 사무적인 입장으로 사내를 상담실로 안내했다. 그 날 사내가 털어놓은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사연의 내막은 뜻밖에도 증권거래에 관련된 것이었다. 사내의 말인즉슨 수년째 영등포에 있는 아무개 증권회사 지점에서 증권거래를 해오고 있는데 직원들이 자신이 장애우라고 깔보고 그동안 엄청난 손해를 입혔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거래 도장을 위조하고, 예탁금을 횡령했으며, 나중에는 증권을 사고 파는 거래 자체를 막아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 사내의 주장이었다. 사내는 말 끝에 흥분해서 "직원들을 고소하고 손해 배상을 받아야 한다"며 침을 튀겼다. 당시 기자가 받은 느낌은 사내의 하소연이 일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확신감이었다. 어쨌든 장애우이기에 당해야 했던 불이익 사례를 너무나 많이 보아왔으므로 장애우의 입장에서 사고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기자는 사내에게 법적인 대응책을 알아보겠다고 약속했고, 그럴려면 근거 확보가 필요하니 가서 그동안의 거래명세서를 떼오라고 일러준 후 사내를 돌려 보냈다. 그, 최영수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며칠 후 그는 다시 찾아왔다. 그때부터 헤프닝이라고 해야할까.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는데 기자는 우선 그가 이끄는 대로 사무실 주변의 아무개 증권회사 지점을 찾았다. 
 

그의 속셈은 자신이 증권투자 전문가임을 기자에게 인지시켜 자신의 주장에 설득력을 실으려는 눈치였고, 적어도 그점만 놓고 본다면 기자는 충분히 수긍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확실히 그가 쏟아놓는 증권에 관련된 지식은 문외한인 기자의 입장에서 볼 때 전문가를 뺨치는 해박함 그 자체였다. 삼선전환도, 투자심리선, 종가, 복수종목‥‥‥ 전혀 뜻을 알 수 없는 단어들이 그의 입에서 그럴듯하게 포장이 돼 전달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단말기 앞에 서서 코드를 두드리자 하릴없이 객장에 죽치고 앉아 있던 몇몇 부인네들이 다가와 "아무개 회사 주식을 샀는데 뜰까. 떨어질까" "어떤 종목을 매수 해야지 뜨지?" 등등을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일일이 코드를 두드리며 그 질문에 답을 내줬고, 부인네들은 그때마다 동감을 표시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은 기자를 감탄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며칠후 기자는 하루만 시간을 내달라는 그의 간청에 못이겨 그와 함께 문제의 영등포 아무개 증권회사 지점을 찾아갔다. 기자는 말이 어눌한 그를 대신해 그가 지목한 어느 남자 직원에게 다가갔고 그의 일로 찾아왔노라고 운을 떼었다. 그런데 직원이 보인 반응은 한마디로 기가막힌 것이었다. 그 직원은 푸대접을 넘어 무시하는 듯한 어조로 "할 말이 없다"고 잘라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별수 없이 겨우 지점장을 찾았다. 그러자 겨우 차장이라는 사람과 마주앉을 수 있었다. 여기서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날 방문은 기대에 어긋난 황당한 결과만을 초래했을 뿐이었다. 차장은 그의 일로 이미 여러차례 시달림을 받았다며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고 막판에는 "그가 장애우라서 봐주었는데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무고와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았다. 그의 잇따른 진정으로 증권감독원의 특별감사까지 받는 수모를 겪었다는 것이었다. 의외로 그는 차장의 반박에 이렇다할 대꾸를 하지 못했다. 결국 기자는 얼굴이 핫핫 달아오르는 무안감을느끼며 쫓기듯 그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만약 그쯤에서 일이 끝났으며 기자는 찜찜한 구석이 없진 않지만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애써 자위하며 그날 일을 없었던 일로 치부해 버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이 꼬이느라 그랬는지 헤프닝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거리에 서서 난감해 있는 기자에게 불쑥 집안얘기를 꺼냈다. 형이 아버지가 물려준 자신의 몫을 가로챘으며 그 액수가 수억원에 달한다는 것었다. 기자는 속직히 말해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다른, 조금은 충격적인 얘기를 꺼냈다. "재산포기 각서를 받아내기 위해 형수가 나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 시켰다. 형수는 생활비를 주기로 해놓고 제대로 주지도 않는다. 명절 때 집에 오지도 못하게 해서 부모님 제사도 못지내고 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명백한 인권침해였다. 그가 기자를 이끌었다. 개봉동에 있는 그의 형 집에 같이 찾아가 보자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기자는 그를 따라 나섰다. 영등포에서 버스를 타고 개봉역 부근에서 내려 한참을 골목길을 걸어 들어갔다. 어느 번듯한 이층 양옥집 앞에 이르자 그가 초인종을 눌렀다. 몇 번을 거푸 눌렀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의 형수는 없었던 것이다. 기자는 "다음 기회에 오자"고 말한 후 발걸음을 돌렸다. 기자가 앞서고 그가 쫓아왔다. 골목길을 벗어나 도로가에서 택시를 잡기 위해 섰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완강한 힘으로 기자의 팔목을 붙들었다. 이번에는 부턴에 있는 그의 형 회사를 찾아가 보자는 것이었다. 거기 틀림없이 형수가 있을 것이라는게 그가 고집을 부리는 이유였다. 기자는 "일 때문에 사무실에 들어가야 하며 남의 집 사생활에 관여하고 싶지않다"고 얘기한 후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였다. "한번만 봐달라"고 사정하고 여의치 않자 나중에는 완력으로 기자를 버스정류장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거의 끌려가다시피 기자는 부천행 시외버스에 몸을 실을 수 밖에 없었는데 기자는 그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의 언질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형수를 만나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해달라는 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이런 과정을 거쳐 기자는 그의 형수가 아닌 형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형은 부천시 소사동에서 제법 번듯한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사장님이었다. 그런 그의 형 눈에는 그를 쫄래쫄래 따라온 기자가 몹시 건방져 보였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뭔가 찔리는 게 있었는지도. 그의 형은 기자를 보자마자 대뜸 고함부터 질러댔다. "당신은 누구야? 누구 허락받고 여기 들어왔오! 뭘믿고 무단침입하는 거야. 경찰을 부르기 전에 빨리 나가지 못해! 어이 김과장 경비원 불러! 빨리 부르지 않고 뭐하는 거야!‥‥‥" 그것은 확실히 봉변이었다. 기자는 뭐라고 말 한마디 꺼내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쫓겨나야 했다. 순식간에 당한 일이라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자는 기가 막혀 회사 문밖에서 사장실이 있는 건물 삼층을 멍하니 쳐다보며 서 있었다. 잠시후 그도 쫓겨났는지 헐레벌떡 뛰어왔다. 기자는 불현듯 짜증이 일어 그를 향해 소리쳤다. "도대체 이게 뭐야! 누굴 망신주기로 작정한 거야!" 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미안해 이기자. 우리형이 원래 그래." 기자는 허허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 후로도 그는 줄기차게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가 와서 하는 말은 매냥 똑같았다. "증권회사놈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어.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을 찾아야 돼. 영등포 문래동 건물을 찾으면 세를 놔서 그돈으로 시골에 농장을 살거야. 그래서 부모 없는 애들을 데려다 살게 할 거야. 형수가 생활비를 주지 않아. 오히려 나를 정신병원에 집어 넣겠대‥‥‥" 말끝에 그는 또 시간을 내달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보다 못해 기자는 어느날 그를 붙잡고 물었다. "최형, 혹시 피해의식울 가지고 있는 거 아냐?" "그럴지도 몰라" 그가 순순히 대답했다. "아니 형수가 나를 어떻게 취급하는데, 내가 장애를 가졌다고 깔보고 정신병원에 집어넣고 또 지금도 집어넣겠다고 그러는데, 어떻게 내가 피해의식을 안 가져." 딱히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기자는 직감으로 아직도 그가 악몽을 꾸고 있고, 그 악몽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어떤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길래 이렇듯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원망과 분노로 점철된 하루하루를 살고 있을까?
 
그에게서 들은 그가 살아온 내력은 이렇다. 그는 일천구백오십팔년 서울 영등포동에서 아버지 최정식(작고) 어머니 연기훈(작고)씨의 삼남 이녀중 막내로 세상에 나왔다. 그가 태어날 당시 그의 집은 영등포역 옆에서 여인숙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한 살 때 결핵성 뇌막염을 앓았고 이 때문에 뇌성마비라는 장애를 가지고 평생을 살게 됐다. 그의 나이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여인숙을 지금의 영등포 로터리 부근으로 옮겼다. 그래서 그는 그곳청주 여인숙에서 영남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기억하는 국민학교 시절은 아픈 상처로 가득하다. 그는 장애 때문에 아이들한테 병신, 바보, 쪼다라고 놀림을 많이 받았다. 그때문인지 그는 학교다니는 것이 싫어 일찍부터 밖으로만 떠돌았다. 수업을 빼먹고 영등포에서 남산까지 걸어 올라가 멍하니 앉아 서울시내를 내려다 보다가 집으로 돌아오는게 하루 일과였다. 집에는 저녁 일곱시쯤 들어갔다. 그가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부모님한테 야단도 많이 맞았지만 그의 방황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서울시내 이곳저곳을 무작정 쏘다녔다. 그의 나이 열일곱살 때 하루는 그의 형이 그를 불렀다. 형은 그를 두들겨 패면서 "너는 왜 맨날 집에서 부모님 속만 썩이느냐. 그렇게 놀지 말고 하다못해 신문팔이나 아니면 구두딱이 찍새라도 해라"고 윽박질렀다. 그래서 그는 다음날부터 신문을 팔러 다녔다. 다방, 버스터미널, 기차역 등으로 다니며 그는 딴에는 열심히 신문을 팔았지만 신문판매는 허구헌날 적자를 면할 수 없었다. 많이 팔아야 하루에 오백원을 벌고 칠백원 정도를 벌었을 뿐이었다. 그는 강압에 못이겨 스물두 살 때까지 신문을 팔았다. 그러다가 지겨워 그 일을 그만두고 다시 무작정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소일했다. 그 무렵 아버지가 청주 여인숙을 팔았다. 여인숙을 판 돈으로 아버지는 시흥에 밭을 사자고 했고, 어머니는 문래동에 있는 오래된 집을 사서 수리해 다시 여인숙을 하자고 우기며 맞섰다. 결국 어머니가 이겨 그의 집은 다시 문래동에서 여인숙을 하게 됐다.

그런데 여인숙을 시작한지 이년여만에 때마침 개발붐이 일면서 여인숙 앞으로 큰 도로가 뚫리게 돼 그의 집은 앉아서 때아닌 횡재를 하게됐다. 당연히 땅값이 치솟았고, 그러자 아버지는 여인숙을 헐고 큰 공장건물을 지어 세를 놓았다. 그 건물 한켠에서 형이 금형공장을 시작한것도 이무렵이었다. 아버지는 세를 받은 돈과 가지고 있던 돈을 합쳐 가리봉동에 있는, 방이 서른두개인 벌집을 사서 이사했다. "이 집은 막내에게 줄 몫이다"라고 못박은 후 자금추적이 염려돼 그의 고모부 이름으로 샀다. 그가 지금 "형이 내 재산을 가로챘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바로 이 집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한동안 가리봉동에서 살았다. 그러나 형이 운영하는 공장이 계속 적자를 면치 못하자 널마후 가리봉동 집을 팔고 집을 줄여 광명시로 이사해 살게 됐다. 그 무렵 형이 부천으로 이사가자고 끈질기게 아버지를 졸라댔다. 아버지는 "나는 네 엄마와 영수를 데리고 나가서 살테니 너는 너대로 살아라!"고함치며 형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래서 그는 형과 따로 살게 됐다. 형은 문래동 건물을 팔아 부천에서 제법 큰 금형 공장을 운영했다. 몇 년 후 형의 사업이 비로소 기반이 잡히자 형은 개봉동에 집을 샀다. 그러면서 형이 합치자고 해 그때부터 그는 부모님과 함께 개봉동 형 집에서 살게 됐다. 한편 그는 스물여덟살 때인 일천구백팔십육년 봄 처음 증권투자를 시작했다. 당시 그의 큰 매형이 한국투자신탁 대리로 근무하고 있어서 그는 매형을 통해 자연스럽게 증권투자 요령을 접하게 되었다. 그가 증권회사 매장에 앉아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 시기는 이보다 훨씬전의 일이었는데 따로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서울시내 증권회사 지점들을 자주 들락날락거렸다. 그가 이때 처음 산 주식 부산은행 주식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주는 하루 이천원 가량의 용돈을 쓰지 않고 오년동안 모아 삼백만원을 만들었다. 그 돈으로 그 주식을 백 주 샀다. 산지 열흘만에 그는 한 주당 시세 차익 오백원을 남기고 그 주식을 팔았다. 그런 다음 다시 경기은행 주식을샀다. 은행주는 무엇보다 부도 날 염려가 없어 안정성이 돋보여서였다. 그는 주식투자를 주로 단말기에 나오는 투자심리선을 보고 결정했다. 투자심리선이 높고 거래량과 일치하면 그 주식은 유망한 주식이었다. 그는 이 요령을 독학으로 배웠다. 그가 한창 주식투자에 열을 낼무렵인 구십년 이월 갑자기 아버지 최정식씨가 돌아가셨다.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는 멀쩡하셨는데 내가 형수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식사도 안 하시고 누워만 계셨다. 그러다가 목욕을 안 하시겠다는 것을 파출부와 병간호하는 여자가 강제로 목욕탕으로 끌고가 발버둥치는 아버지 팔과 다를 묶어 물 속에 집어 넣었다. 이 일로 우리 아버지가 병이나서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도 모르게 점차 포악해지기 시작했다. 늘상 있는 일이었는데, 중학교 일학년에 다시는 조카가 반말을 하며 욕을 하자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빗자루를 들어 조카를 두들겨 팼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루는 밥을 먹으러 부엌에 들어갔는데 파출부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는 부아가 치밀어 "야 이년아, 네년이 사람을 죽여놓고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는 거냐!" 달려들어 머리채를 움켜쥐고 흔들었다. 파출부 머리카락이 한웅큼 빠졌다. 그길로 파출부가 경찰에 신고해 그는 파출소로 끌려갔다. 조사를 받고 있는데 형수가 전화를 해줘 그는 별이 없이 파출소를 나왔다. 그 지경까지 이르자 그는 살고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영등포 시장에서 수면제 이십알과 맥주 두병을 구입해 집에 돌아와서 그걸 먹었다. 당연히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약을 먹은지 정확하게 삼일만에 그는 깨어났다. 죽기는커녕 삼일동안 잠만 푹 잔 것이다. 그는 깨어나자마자 재산문제로 또 형수와 지독하게 싸웠다. 그는 "아버지도 돌아가셨으니 내 몫으로 오억원을 내놓아라"고 대들었다. 형수는 "네가 벌은거냐? 네 재산이냐?" 고함을 쳤다. 그는 속이 상해 거의 매일 술만 퍼마셨다.

그럴즈음 하루는 형수가 밤중에 일이 있으니 주민등록증을 좀 달라며 자고 있는 그를 깨웠다. 그는 아무의심 없이 주민등록증을 건내줬다. 다음날 그러니까 구십년 이월 십구일, 형수가 그를 불렀다. "삼촌, 친구왔으니 나와보라"는 것이었다. 그는 츄리닝 차림으로 순천향병원차가 대기해 있었고, 그는 직원인 듯한 사내들에 의해 "잠깐 가자"며 강제로 그 차에 태워졌다. 차가 출발하자 그는 짚히는 게 있어 직원에게 물었다. 이 차 순천향 병원으로 가지 않고 정신병원으로 가는 거죠? 직원은 "순천향병원으로 간다"며 잡아뗐다. 그러나 결국 그의 예측대로 차가 도착한 곳은 음성정신병원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꼬박 팔개월을 갇혀 있어야 했다. 처음 들어가서는 매도 많이 맞았다. 직원들에게 보다는  같이 수용된 환자들에게서 "건방지다"는 죄목으로 더 많이 두들겨 맞았다. 그는 특별히 하는 일없이 지내는 병원생활이 갑갑했다. 그래서 두달에 한벙 정도 면회오는 형수에게 "내보내 달라"고 간청했다. 형수는 "나가서 뭐하느냐, 그냥 여기 있어라"며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퇴원이 여의치 않자 그는 한방에 있는 동료에게 부탁해서 청와대에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 편지가 들통나 그는 직원들에게 몽둥이 찜질을 당하기도 했다. 구십년 시월 말 뜻밖에도 작은 누나가 면회를 왔다. 누나느 대뜸 "나가자"고 했다. 그래서 그는 퇴원이 아닌 하루 외출증을 끊어가지고 정신병원을 나올 수 있었다. 그는 누나와 함께 서울로 상경했다. 당산역 부근 여인숙에서 하루밤을 자고 나서 누나는 그를 오산리기도원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서 기도만 열심히 하고 있어라" 누나가 말했다. 그는 기도원에서 한달여를 지냈다. 기도원 생활은 정신병원보다 더 따분한 것이었다. 매일 기도회를 한다고 잠도 못자게 하고 담배도 못피우게 해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그는 참다못해 누나에게 연락도 하지 않고 몰래 기도원을 빠져나왔다. 그길로 그가 간 곳은 부곡이었다. 기도원에서 알게 된 형뻘되는 사람이 그곳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어서 그는 거기서 세달여 신세를 졌다. 생각같아서는 그곳에 오래 있고 싶었는데 그 형이 "더 이상 돌봐줄 수 없으니 공장에 취직해라"고 해 그는 부곡을 떠나 군포에 있는 플라스틱 제품을 만들어내는 사출 공장에 들어갔다.

그는 공장에서 기계를 만졌다. 한달에 삼십만원을 받기로 하고 야근까지 했다. 그러다가 일이 서툴러 기계 한 대를 고장내게 되면서 사장한테 꾸지람을 받게 되자 미련 없이 공장을 그만뒀다. 그는 공장에서 나와 귤 한봉지를 사들고 구로동에 있는 당숙집을 찾아갔다. 당숙이 받아줘서 그는 그곳에서 한달여를 지냈다. 그런데 하루는 당숙이 전화로 그의 문제를 놓고 형과 심한 말다툼을 벌였다. 그 불똥은 곧바로 그에게 튀겼다. 당숙이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소리쳤다. "너같은 병신 자식이 왜 세상에 태어나가지고 속을 썩이느냐, 당장 우리집에서 나가라" 그는 말은 하지 못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버지만 살아계셨어도 내가 떵떵거리며 살 텐데, 여기서 신세도 안지고 말야. 할 수 없지. 여기서 며칠동안만 더 있다가 정 못참겠으면 나가야겠다." 그럼 마음을 먹고 있는데 며칠후 형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가 기거할 방을 얻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방만 얻어주면 뭐 해. 생활비도 대줘야지." 그러자 형수는 별도로 매달 생활비로 삼십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형수가 얻어준 부천시 소사동 육백오십만원짜리 전세방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이때가 구십일년 이월 초였다. 그는 그방에서 영등포 증권회사를 오가며 구십이년 사월 이십팔일까지 살았다. 그런 중에 그는 서울시경 민원실을 찾아간 적이 있는데 형수가 생활비를 제때 주지 않자 화가 나서였다. 그는 민원 담당자에게 "형수가 생활비를 주지 않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돌아가시게 했다"며 도와달라고 얘기했다. 민원담당자가 곧바로 형수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 후로 형수는 서너달 생활비를 꼬박꼬박 줬다. 그러다가 한번은 형수가 생활비를 주면 "형이 하는 공장이 적자를 면치 못해 어렵다"며 울상을 지었다. 그는 그길로 부천세무서를 찾아가 공장 영업실적을 신청해서 발부받았다. 그런다음 원본은 자신이 갖고 복사본을 형수에게 디밀었다. "이것보시오. 어디가 적자입니까?" 형수는 길길이 날뛰었다. "이 쌍놈의 새끼 너 죽을래! 너 안되겠다. 다시 병원에 가자. 너같은 놈은 병원에 가야 돼!" 그가 아무말을 않자 형수가 덧붙였다. "너 그따위 정신 가지고 내앞에서 시동생 노릇을 하려고 하다니, 당장없어져!" 그도 지지않고 형수 앞을 물러나오면서 소리쳤다. "야, 이 개같은 년아, 네가 뭐야? 형수면 형수답게 놀아야지‥‥‥" 그는 작년 오월 서울 신길동으로 자취방을 옮겼다. 영등포 증권회사에서 사귄 투자자들이 정보를 가르쳐 주면 켜미션을 주겠다고 제의해서 그는 그 말을 믿고 지리상 가까운 서울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그는 한때 투자자들 사이에서 "닥터최"로 불렸다. 그만큼 그가 진단하는 주식 전만은 정확성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주식투자가 그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과는 달리 형수와의 관계는 계속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그는 나아가 형하고도 부닥쳤다. 작년 초 그는 형집에 전화를 건 적이 있다. 그가 "생활비 때문에 전화를 했다"고 하자 형이 말했다. "너는 직접 생활비를 벌어서 쓰지 왜 자꾸 생활비를 달라고 해." 그가 말했다. "형 이러지 맙시다. 나도 형한테 할 말이 많습니다." "뭐라고, 이 자식이 그건 그렇고 너새꺄 왜 시경에 찾아가서 허튼 짓을 하는 거야!" "형수가 자꾸 정신병원에 집어넣는다고 겁을 주니까 그렇지요." "네가 처신을 똑바로 해 봐 형수가 그러나. 아무튼 너 스스로 밥벌이를 해야지 내가 도와주지, 밥벌이도 못하는데 어떻게 도와줘. 아무말 말고 구두닦는데 가서 구두라도 찍어주고 밥벌이해 알겠지." 그는 아무 말 안 했다. 이런 일이 있은지 얼마후 그는 다시 시경민원실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민원 실장을 붙잡고 "먹고 살 수가 없어 형한테 도와달라고 했는데 형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호소했다. 민원 실장이 그 자리에서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원실장은 형하고 무슨 말인가를 하다가 그에게 "전화를 받아보라"며 수화기를 넘겨줬다. 형이 말했다. "너 왜 쓸데없이 그런데 찾아가서 얘기하는 거야?" 그가 반박했다. "아니 형이 툭하면 정신병원에 집어넣는다니까 화가 나잖아요." 민원실장이 수화기를 뺐었다. 그런다음 형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생활비를 빼먹지 말고 주도록 하시오. 안 그러면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민원 실장이 전화를 끊더니 그에게 말했다. "이제 됐으니 형 집엘 가봐요." 그는 시경을 나왔다. 그런데 형집에 찾아갈 용기는 도저히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취방으로 갔다. 자취방에 누워있자니 불현 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그는 다음날 평상시처럼 오전에 증권회사에 들렀다가 오후에 농약 한 병을 사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막상 마실려니까 "내가 꼭 이런 일을 해야 하나?"회의가 생겼다. 그래서 그는 다음 기회로 자살을 미뤘다. 

 최영수, 그는 암울한 가운데서 이렇게 최근 삼년여를 살았다. 그에게서 증권을 빼면 아무 낙이 없었다. 그는 지금 모두 합해서 사백주 가령의 주식을 가지고 있다. 형수가 주는 생활비를 절약해서 사 모은 것이다. 증권을 사 모으기 위해 그는 요즘도 하루에 한끼만 밥을 사먹는데 아침에 일어나 컵 라면을 먹고 점심은 별일이 없는 한 영등포 시장에서 일천원짜리 싸구려 백반을 사먹는다. 그리고 저녁에는 또 컵라면을 먹는다. 그가 이렇듯 고단하게 살면서도 증권투자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증권투자의 매력은 신경이 많이 쓰이는 대신 육신은 편하다는 것이다. 운만 좋으며 고수익을 올릴 수 있다. 그렇다고 노름은 절대 아니다. 우리가 주식을 사고 팔면 그만큼 국가 경제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증권투자로 재미를 본 적이 없다. 한참 주식값이 비쌀 때 투자를 시작했기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봤다. 그럼에도 그는 낙관한다. "주식은 반드시 뜨게(오른다) 돼 있다. 나는 언젠가는 증권투자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최근 음성에 있는 부모님 묘소엘 다녀왔다. 막걸리 한 병, 새우깡 한 봉지를 사가지고 가서 산소에 술을 뿌리며 서러워서 많이 울었다고 했다. 형수는 명절 때도 집에 못오게 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혼자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형수만 허락하면 "형 닙에 들어가 살고 싶다"고 소망을 말했다. 하지만 "집에 오기만 하면 정신병원에 집어넣겠다"고 형수가 엄포를 놔서 도저히 그럴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그의 말이다. 그는 요즘도 한달에 한두번은 꼭 생활비 문제로 형수와 심한 말다툼을 벌인다. 어느새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싸움에서 당연하게도 그는 매번 진다. 어쨌거나 칼자루는 그의 형수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한 손 밖에 쓸 수 없어서 증권투자에 매달린다"는 그, 그는 오늘도 악몽 속에서도 단 한번이나마 돼지꿈을 꾸기 위해 부지런히 증권회사를 찾아다닌다. 그의 말대로 언젠가는 증권투자가 부유하며 떠도는 그의 삶에 마침표를 찍어줄 것을 기대하면.
 
글/이태곤

 

작성자이태곤 기자  a352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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