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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걸음이 만난 사람] “가난한 사람들 최저생활 보장돼야죠”

서울 나눔의 집 대표 송경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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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지금 서울 관악구에서는 사회복지으 새로운 시도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관악사회복지회와 관악주민연대로 대표되는 복지운동은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 중심의 복지, 그리고 주민 속에 뿌리내린 복지를 추구하고 있고, 그 새로운 복지운동의 중심에는 관악구 봉천동 빈민가에 자리잡은 나눔의 집 대표 송경용 성공회 신부가 있다.
  20년 전부터 빈민운동을 시작해 봉천동에 뿌리를 내리고  주민 복지에 매진하고 있는 송 신부는 현재 나눔의 집 산하 기관으로 장애우직업자활센터(함께걸음 99년 3월호 소개)와 청소년쉼터, 노인의 집과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한복 제조업체 ‘나눔물산’, 그리고 청소 용역업체 ‘푸른환경’과 노숙자 쉼터 등을 두고 다양한 형태의 주민 복지 사업을 활발하게 펼쳐가고 있다. 노숙자와 실업자 문제 대책위원으로도 활약하고 있는 그를 만나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그 뿐만 아니라 경제위기로 인해 더 힘든 상황에 놓여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송경용 신부를 만나러 봉천9동을 찾았을 때 우선 눈에 들어온 것은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다. 포크레인이 산을 밀어내고 있었고 산 끝에 남루한 집 몇 채가 매달려 있었다. 나눔의 집이 있는 봉천동은 지금 한창 재개발 중이다. 빈민들의 집단 주거지를 밀어내고 고층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당연히 대담은 재개발 문제를 거론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는데 세입자들을 위한 대책은 마련되어 있습니까.
“고층아파트가 들어서고 나면 세입자들을 위한 공공입대 아파트도 들어설 겁니다. 모두 2천6백50가구의 임대아파트 건립이 예정돼 있습니다.”

 

- 재개발 지역의 예를 볼 때 세입자를 위한 임대아파트 건립을 관철시키기가 상당히 힘들었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렇죠, 임대아파트 건립이 보장되기까지 엄청난 싸움이 있었고 수십 명이 죽어야 했습니다. 재개발 지역의 공통적인 구호가 뭐냐면 ‘무대책 강제철거 금지하라’입니다. 그 정도로 아무 대책없이 세입자는 쫒겨나야 했죠. 이 지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재작년에도 철거민 가이주단지를 따내기 위해서 주민 한명이 희생됐습니다. 지금은 평온하지만 임대아파트 건설을 관철시키기 위한 철거싸움이 한창 진행될 때는 이 지역에 아시아에서 제일 높은 철탑이 있었어요. 화염병 수천개가 날아 다녔고, 완전히 전쟁터였죠.”

 

- 신부님도 열심히 싸웠겠군요.
“철거싸움이 진행될 때 새벽 세 시에 용역회사에 고용돼 있는 철거 깡패들한테 맞아서 머리가 깨진적도 있습니다. 날 쫒아 내기 위해 깡패들이 우리 집에 불을 지르고,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세 번에 걸쳐서 불을 질렀지요. 그렇지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 임대아파트가 건립되면 모든 세입자가 다 들어갈 수 잇게 되는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재개발 결정고시가 나기 3개월 전에 살고 있었던 주민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독신세대도 안되고 사실혼 관계도 인정이 안돼죠. 그래서 노인들이 혼자 살고 있다거나 장애우 독신 세대들, 이런 주민들을 미해당자라고 그러는데 미해당자에게는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사실은 빈민가에는 미해당자가 더 많이 살고 있는데 대책이 없어요. 우리 관악구는 다행히 3년을 싸워서 관악구청과 협약을 맺어 일단은 가이주단지는 보장을 받았죠, 해당이 안 되는 사람들도 구제될 수 있도록 재개발 역사상 처음으로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가이주단지가 뭐냐면 재개발 지역에서 철거를 하고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보통 4~5년이 걸려요, 그런데 그 기간동안 주민들이 어디가서 살 데가 없는 거예요. 그 동안 저금이라도 해놓은 주민이라면 옆동네에 가서 지하방이라도 얻어 사는데 이리 지역에는 5백만원 미만의 전세를 살았던 주민들이 대다수거든요. 이런 주미들은 갈 데가 없잖아요. 그래서 공사중에 임시로 살 수 있는 가이주단지를 지어달라고 요구한 건데 미해당자는 이것도 해당이 안돼요. 그런데 재개발이라는 것이 세입자가 지역의 80%가 넘어도 세입자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거든요. 지역에 집과 토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 한 사람이 투기해서 집을 스무 채 이상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생존권 차원에서 재개발 문제에 접근할 수밖에 없는 거죠. 원론적으로 얘기하면 빈민지역 조성이 국가의 정책에 의해서 유도된 측면이 강하잖아요. 개발시대에 저임금의 노동력이 필요했고, 저임의 노동력이 우리나라 산업의 발판이었기 때문에 가난한사람들이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노동력을 제공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가난한 사람들을 하루 아침에 내팽개치는 것은 큰 문제가 있는거죠.“

 

- 신부님이 봉천동에 들어온지 몇 년 됐습니까.
“이제 9년 됐습니다. 여기 오기전에는 상계동에서빈민운동을 했죠 지금 제 나이가 마흔 한 살인데 빈민운동을 시작한 지 올해로 정확하게 20년 됐습니다.”

 

- 빈민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을텐데요.
“내가 가난했던 게 직접적인 이유가 됐죠. 그리고 대학다니면서 사회현실에 눈을 뜨게 된 게 계기가 됐습니다. 79년에 상계동에 처음 들어가서 그 후 몇 년 동안 적십자회관 마룻바닥에서 자면서 라면 끓여 먹고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야학을 하다가 80년대에 사건에 연루돼 감옥에 갔다 왔습니다. 86년에 나눔의 집을 만들었는데 강제 징집 당해서 군대에 끌려갔죠. 여기는 90년에 왔습니다. 당시 봉천동은 전형적인 빈민촌이였죠. 바로 윗동네가 가마니골이라고 전세 20만원짜리 집이 모여있었는데 집이 손으로 잡아 뜯으면 뜯어질 정도였어요. 실제로 부부싸움을 하다가 남편이 ‘너 뭐야’ 하면서 벽을 쳤는데 벽이 뻥뚫어졌어요, 그 정도로 척박한 동네였습니다.”

 

- 그래도 이 지역이 재개발되는 것처럼 전체적인 측면에서는 서울의 경우 빈민집단 거주지역들이 많이 없어진 것 같은데요.
“대규모 밀집지역은 많이 없어졌죠. 그러나 빈민들은 더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IMF 관리 체제하에서 빈민들은 더 많이 늘었습니다. 세계은행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나라 절대 빈곤층이 전체 국민의 20%라고 그러는데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제가 볼 때는 13%는 된다고 봅니다.”

 

- 신부님은 올해로 20년째 빈민 운동을 하셨다고 했는데, 처음 운동을 시작할 때와 비교해서 변화가 있다면 어떤 변화를 꼽을 수 있겠습니까.
“산동네가 많아 없어졌다는 걸 변화로 꼽을 수 있겠죠. 하지만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은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요즘 제일 슬픈 게 뭐냐면 제가 20년 전 이 일을 시작할 때 주민들과 줄을 서서 적십자 구호라면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랬는데 20년이 지난 지금 저는 노숙자사업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줄을 세워서 밥을 먹이고 있습니다. 즉 이것만 봐도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은 변한 게 아무 것도 없는 거죠.”

 

- 신부님은 빈민운동을 하면서 가난의 문제를 피부로 느끼셨을텐데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 중 가장 큰 고통을 꼽는다면 무엇을 꼽으시겠습니까.
“가난이 주는 제일 큰 고통은 한마디로 소외입니다. 중요한건 모든 사람이 다 부를 누리면서 살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난을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가정이 제대로 서있으면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도 밝게 자라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가난한 집 아이들이 탈선하는 이유 중에는 경제적 가난이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가난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즉 가난을 못 이겨서 가정이 해체되고, 가난 때문에 부부가 싸우고 그런 과정에서 아이들이 정신적인 상처를 받아 탈선하는 것이지 경제적 가난 그 자체가 사람을 소외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한 번도 의미 있는 존재로 대접받아본 적이 없다는 거에요. 즉 가난한 사람들을 사회가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거죠. 사회 뿐 만 아니라 교육 문화 정치 등등 모든 제도가 다 가난한 사람들이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핫빠리’ 인생이라는 자조적인 말도 나오고, 저는 가난의 문제도 한 인간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자주적인 인간으로서 자기가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문제가 안된다고 봅니다. 경제적으로 고기 안먹어도 되고, 좋은 아파트 몇 십평에서 살아야 되는 건 아니죠. 결국 문제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회에서 얼마나 의미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앞으로 개선될 여지가 있느냐 하는 건데, 그 가능성이 없다는 거죠. 이게 가난이 주는 본질적이고 심각한 문제라고 봅니다.”

 

- 사제로서 빈민운동을 하다 보면 부담을 많이 가지게 될 것 같은데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빈민운동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한 현실을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내 스스로도 가난해져야 한다는 걸 늘 명심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내가 필요하고 그곳에 내가 있어야 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비쳐서 내 양심이 허락한다면 가는 거죠. 어떤 사람은 사제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정말 친구로서 같이 어려움을 겪어 내는 존재로 나를 필요로 합니다. 그랬기 때문에 빈민운동을 하면서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저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빈민운동을 못한다고 봅니다. 일이 아니고 내 삶이고 생활이다. 그래서 실무자들한테도 일이라고 생각하면 이일을 절대 못한다고 늘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나서 대담은 잠시 끊겼다. 송 신부는 낙성대 ‘만남의 집’에 계시는 장기수 선생님들과 약속이 잡혀있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대담이 끝난게 아니어서 기자는 어쩔 수 없이 송 신부를 따라 나섰다. 송신부는 빈민운동 외에도 만남의 집 장기수 선생님들의 법적 보증인으로서 분단의 상처인 장기수 선생님들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송 신부가 만남의 집을 찾은 건 마지막 빨치산으로 유명한 정순덕 선생님이 얼마 전 뇌졸중으로 쓰러지셨기 때문이였다. 정 선생님의 병세도 문제지만 그 동안 만남의 집 안살림을 정순덕 선생님이 혼자 해오셨는데 정 선생님이 없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의논하러 만남의 집을 찾은 것이었다.
  송 신부는 장기수 선생님들에게 “정순덕 선생님은 깨어나실거예요, 수술은 잘 됐다고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위로하고 밥해 줄 사람을 구하는 게 쉽지 않지만 어쨌든 방법을 찾아 보겠다고 약속했다. 송 시누는 “해동 됐으니까 조만간 우리 바람 쐬러 갑시다”라고 말하고 만남의 집을 나왔다.

  대담은 자연스럽게 장기수 선생님들 얘기로 이어졌다.

 

- 장기수 선생님들 문제에는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습니까.
“7년 전부터인데 다 하나님이 때를 정해 주신 거죠. 그때 지금 성공회대 교수로 게시는 신영복 선생님이 제게 장기수 할아버지들이 석방이 되는데 보호자가 있어야 된다고 했어요. 정부에서 보호자가 없으면 장기수 선생님들을 시골 양로원이나 시설로 보냈는데 거기 가면 감옥이나 다를 바 없죠. 그 때 두 명의 선생님이 시골 양로원에 있었어요. 두 분 다 30년 이상 복역하고 나오신 분인데 그 분들을 서울로 좀 모시고 와야 하는데 보증인이 없다고 신영복 선생님이 제게 의논해 오신 거죠. 그래서 무작정 만나러 내려갔죠. 내려가서 아산요양원에 계신 것을 제가 보증인이 돼서 모셔왔어요. 일단 봉천동 산동네에 모시게 됐는데 그게 계기가 돼서 해마다 나오신 선생님들을 모시게 됐습니다.”

 

- 신부님이 진심으로 주되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부분은 어떤 것 입니까.
“제 관심은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내가 어떻게 예수님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내가 가난해져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가난의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을까. 이 두 가지이죠. 예수와 가난 이 두 가지가 내 궁극적인 관심 사항입니다.”

 

- 말이 나온 김에 신부님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얘기해주시죠.
“제가 꿈꾸는 세상은 요즘 기초 생활보장법 제정운동을하면서 자주하는 얘긴데 내가 직장을 잃었어도 자식들 밥 굶길 염려를 안하고, 내가 돈이 없어서 병원에 못가서 사람을 애처롭게 죽이지 않고, 그리고 자식들 학교를 못보내서 슬퍼하는 사람이 없는 그런 세상이죠. 여기다 집이 없어서 쫒겨다니고 내몰리지 않는 그런 세상이 제가 꿈꾸는 세상입니다.”

 

- 심각한 얘기를 해보죠. 과연 체제 변화없이 신부님이 꿈꾸는 그런 세상이 가능하겠냐는 의문을 품어 보지는 않으셨습니까.
“저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한 때 강경했던 사람입니다. 물론 거대 담론도 필요하죠. 역사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입장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구체성을 띠지 않는 이야기. 구체적인 인간의 이야기로 출발하지 않는 이야기는 의미가 없어요. 그런 애기는 자칫 인간을 관념화시킬 수 있습니다. 모든 이야기들은 구체적인 인간의 현실에서 출발해서 입으로만 얘기 하는게 아니라 발로 이야기해야 되는 거죠.”

 

- 신부님은 늘 가난한 사람들과 살아 왔는데 가령 가난의 문제를 내 무제가 아니라 객관화하는 위험에 빠져본 적은 없었습니까.
“구체적인 현실을 바라본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정확하게 보이는 겁니다. 저는 가난이라는 것을 두 가지로 봅니다. 하나는 강요된 가난이 있죠. 인간을 억압하고 추하게 만드는 가난이 있는가 하면 자발적인 선택으로서의 가난이 있어요. 성서에도 나오잖아요.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이 가난한 현실을 정당화시키는 애기는 절대 아니에요. 이 말은 가난 속에서 인간이 보다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거예요. 문명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고 성찰의 애기죠. 생각해 보세요. 우리 문명이 수세기 수천년 동안 보다 편하게 보다 잘 살게 발전했는데 그렇게 해서 빚어낸 결과가 뭐예요. 우리가 하루 종일 다니지만 땅 한평 못 밟고 맑은 공기 못 마시고 거기다가 이간은 자꾸 분열되고, 그렇듯 쌓아올린 부가 궁극적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느냐. 그건 아니다 라는 게 분명하잖아요. 물론 가난이 거기까지 승화되기까지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죠. 하지만 역설적으로 가난의 풍요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사회적으로 논의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 궁금하게 하나 더 있는데, 어떻습니까. 빈민지역에 장애우들도 많이 살고 있죠.
“많이 살죠. 그리고 비참하게 삽니다. 얼마 전에 서른일곱 먹은 한 정신지체장애우가 죽었어요. 나눔의 집 근처에서 10년 넘게 살던 분인데 어머니와 단 둘이서 살았죠. 그 분이 돌아가셔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현재 빈민지역의 장애우들은 빈곤과 장애가 겹쳐 있어 더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산동네라는 자체가 지형적으로도 장애우들이 살기에 불편하죠. 편의시설을 설치할 수도 없고...”

 

- 나눔의 집에서 장애인직업자활센터를 운영하고 있는데요. 그 외에 계획은 하고 계신 것은 없습니까.
“사실 저는 장애우 문제에 대해서 잘 몰랐었습니다. 많이 만나고 가까이에 같이 생활도 해봤지만 큰 관심을 갖지 않았죠. 그런데 같이 일하는 실무자 중에 한 분이 장애우쪽 일을 하자고 했을 때 선뜻 응낙했습니다. 그걸 계기로 들여다 보니까 우리 관악구에 등록장애우가 4천3백명이 있는데 장애우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나 복지대책이 전무했어요. 깜짝 놀랐지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장애우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을 하는 중이고, 지금 추진하는 게 장애우 시설을 만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용시설과 수용시설이 결합된 시설 건립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정부의 사회복지 정책에 대해 할 말이 있다면 해주시죠.
“우선 정부는 국민들의 최저 생활을 보장하는 기초생활보장법을 빨리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국민들이 세금을 내고, 이 나라에 살면서 최소한 굶어죽지는 않는다, 그리고 내 자식은 그래도 고등학교까지는 보낸다, 또 아플 때 병원에 맘놓고 간다, 그렇게 살게 해야죠, 즉 국민들이 기본적인 성실성만 있으면 그런 것들이 보장돼야 하는 겁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이 있어서 우리 사회가 압축 성장을 했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최저생활이 보장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는 정부가 가난한 사람들의 최저생활을 보장해야만 합니다.

 

대담.정리 이태곤 사진 김학리 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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